<단독> ‘엿장수 맘대로?’ 방배5구역 감정평가의 비밀

‘34억→24억→33억’ 10억 어디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서울의 한 재건축 조합 집행부와 조합원이 쌍방 고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합원이 조합이나 집행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는 흔한 편이지만, 그 반대는 이례적으로 여겨진다. 특히 조합 측에서 먼저 불을 댕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내년 8~9월 서울 서초구 방배동 946-8번지 일대에 지하 3층부터 지상 최고 33층의 아파트 29개동이 들어선다. 3064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단지다. 4·7호선 환승이 가능한 이수역과 7호선 내방역 사이에 자리하며 2호선 방배역은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역세권이다. 도보와 버스로 통학 가능한 초·중·고등학교가 있는 학세권이기도 하다.

내년 입주
랜드마크

시행은 방배5구역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이하 방배5구역 조합), 시공은 현대건설이 맡았다. 방배5구역 조합은 2004년 12월 추진위원회 구성, 2010년 9월 정비구역 지정 후 2012년 5월 조합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후 2013년 7월 사업 시행, 2016년 7월 관리처분 계획 인가를 받고 2022년 7월 착공에 돌입했다.

최근 방배5구역 조합이 시끄럽다. 조합장과 총무이사 등 집행부가 조합원 3명을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형사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피소된 조합원들 역시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맞소송을 건 것이다.

사건의 시발점은 아파트와 함께 분양되는 상가의 ‘감정평가액’ 논란이다. 방배5구역 상가는 이수역과 내방역 방면으로 구분돼있는데 브리지로 연결해 양쪽을 오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상가는 총 142개로 모두 조합원이 분양받았다. 이 중 가장 목이 좋은 곳으로 알려진 지하 1층 한 호수의 감정평가액이 문제로 떠올랐다.


방배5구역 조합원에 따르면 해당 호수는 지하 1층으로 기재돼있지만 밖에서 볼 때는 지상 1층이나 다름없다. 조합원은 “지하철역서 가장 가깝고 그 앞으로 횡단보도가 설계돼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다. 다만 지형상 약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부분이 아쉽다”고 말했다.

논란이 불거진 대목은 해당 호수의 감정평가액이 3차례에 걸쳐 바뀌었다는 점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34억8000여만원 → 24억3000여만원 → 33억4000여만원 등으로 변동됐다. 변동액이 10억원 안팎을 오간 셈이다. 그사이 시세나 설계 등 해당 호수를 둘러싼 조건은 변하지 않았다.

같은 호수에 세 버전의 감정평가액이 등장한 것이다.

재개발·재건축 현장서 감정평가액은 사업 구역 내에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의 평가금액을 뜻한다. 조합의 의뢰를 받은 감정평가사가 법에 정해진 방법과 절차에 따라 아파트, 상가 등을 평가해 보고서를 작성해 납품한다. 공시지가보다 다양한 요소로 시세를 반영하기에 현실적인 금액에 가깝다.

역세권·학세권 대규모 단지
‘조합 VS 조합원’ 쌍방 소송

방배5구역 조합은 감정평가 법인 두 곳에 상가 감정평가를 의뢰했다. 각 법인의 감정평가사가 각각 평가 후 평균가로 감정평가액을 정했다. 지난해 12월~올해 1월경 조합을 통해 상가의 감정평가액이 알려졌다. 문제를 제기한 상가 조합원 A씨는 조합서 제공한 감정평가액을 바탕으로 142개 호수에 대한 자료를 만들었다.

자료에 따르면 논란의 호수는 34억5310만원(M 감정법인), 35억1670만원(S 감정법인) 등으로 감정평가액이 나왔고 평균은 34억8490만원으로 나타났다. 평당 단가가 가장 높진 않지만 면적이 넓어 가장 높은 감정평가액을 기록했다.


A씨는 “당시 해당 호수 바로 옆 호수의 평당 단가가 4000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문제가 된)호수는 지형상 살짝 안으로 들어가 있어 평당 단가가 3600만원으로 평가됐다. 이해할 만한 수준의 액수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5개월여 뒤인 지난해 6월 초 A씨가 확인한 방배5구역 ‘근생시설 배정 안내서’ 가제본 인쇄물에는 해당 호수의 감정평가액이 10억원 이상 깎인 상태로 기재돼있었다. 24억940만원(M사), 24억6950만원(S사) 등 평균 24억3945만원으로 10억4000여만원이 낮아졌다.

A씨는 “(그사이)이의 신청이나 총회 의결 등의 절차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가제본 인쇄물을 검토하는 과정서 해당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조합장에게 의문을 표했다. 감정평가 과정서 실수나 누락이 있을 수는 있지만 기존 평가액과 30%나 차이 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총액에는 변동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해당 호수의 감정평가액이 줄어든 대신 다른 호수의 감정평가액이 조금씩 더해져 약 1060억원에 이르는 전체 금액은 거의 그대로였다.

A씨의 항의가 계속되자 조합장과 총무이사 등 집행부는 감정평가사를 불렀고 첫 문제 제기 이후 사흘 만에 4자 대화가 진행됐다. 이 과정서 해당 호수의 감정평가액이 평균 33억4130만원으로 다시 변동됐다. 다른 호수도 그 차액만큼 다시 증액돼 상가의 최종 분양 금액이 이 시기에 산정됐다.

석연치 않은
변동 이유

이후 인쇄물도 수정을 거쳐 조합원에게 발송됐다.

잠잠해지나 했던 논란은 지난해 12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방배5구역 조합과 상가 조합 사이에 계약 업무를 두고 갈등이 빚어진 과정에서다. A씨는 “원래 계획보다 8개월가량 상가 계약 업무가 지체돼 조합원에게 피해가 발생했다. 또 조합장은 분양 시기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상가 조합원들은 회의를 거쳐 공문을 통해 조합에 문제를 제기했다. 감정평가액 논란에 대한 공개 사과와 상가 분양 계획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또 설명회 요청, 신속한 업무 처리 등을 요청하는 내용도 공문에 포함됐다. 조합에 발송된 공문은 상가 조합원 등이 모인 단체대화방에 공유된 것으로 알려졌다.

A씨에 따르면 조합은 한동안 답변을 하지 않다가 소송을 제기했다. A씨와 공문을 다른 단체대화방에 올린 조합원 2명 등 3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한 것이다. 조합원 3명에 대한 고소는 이사회에서는 안건이 부결됐지만 대의원회 직권 상정을 통해 진행됐다.

이 과정서 소송비를 조합이 부담하는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변호사 비용은 1500만원에 이른다.


A씨를 비롯한 피소된 조합원들은 조합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석연치 않은 감정평가액 변동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를 상가 조합원과 공유했을 뿐, 조합이 주장하는 대로 특정인을 음해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A씨는 감정평가액 논란에 대해 명백한 사실 확인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대의원회서도 최종 보고서가 납품되기 전 감정평가액이 일부 조합 관계자에게 먼저 공유되는 게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감정평가사가 의뢰인에게 미리 감정 내용을 주고 ‘이게 맞는지’를 협의한 듯한 모습이 의문스럽다는 취지다.

조합 돈으로
소송비를?

당시 조합장은 최소 분양 단위 등을 알기 위해 조합서 요청했다고 답했다.

방배5구역 감정평가를 맡은 감정평가사들은 “최종 보고서가 나가기 전에 조합 측과 논의를 진행해 예상 금액을 추정해 본 게 있다. 최종 보고서에 기재된 게 마지막 감정평가액”이라고 입을 모았다.

M사의 감정평가사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상가는 전면이냐 후면이냐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크다. 도면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설계 업체에 확인 후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납품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떤 의도로 한 건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S사의 감정평가사도 “해당 호수가 설계상의 특수성이 있어 감정평가액 변동이 있었다”며 M사 감정평가사와 같은 취지의 답변을 했다.

그러면서 “최종 보고서를 내기 전에 조합 측에서 두 차례 예상 평가액을 요구한 적이 있다. 업무상 필요한 자료 제공 차원서 드린 것”이라며 “(조합에) 드리면서도 이게 확정 금액이 아니기 때문에 외부로 유출되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 사안으로 조합과 조합원이 갈등을 빚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씀드릴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또 “최종적으로 납품한 게 최종 감정서고 예상 추정 금액은 감정평가 최종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합이나 서초구청에 답변서를 냈다”고 덧붙였다. 최종 납품 이후에 가격을 고칠 수 있는지에 “확실한 오타나 오기가 있다면 변동이 가능한데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잘 변경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감정평가 업무에 밝은 한 교수는 “감정평가액은 시기, 주변 상황 등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 그런데 감정평가사들은 오류를 잘 인정 안 한다. 그래서 (감정평가액을) 정정도 잘 안 한다”며 “그럼에도 변동이 있었다면 감정을 진행한 감정평가사에게 그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가 변동 등 외부 조건 변화 없이 2억~3억원도 아니고 10억원가량이 변동된 것은 좀 차이가 크긴 하다. 일반적이진 않다”고 말했다.

같은 조건인데 가격만 3번 바뀌어
최종 보고서 납품 날짜도 의문점

한국감정평가사협회 관계자는 “재건축이나 도시정비사업을 할 때는 조합의 사업성을 고려해야 하고 조합원의 배분 균형 때문에 절차나 진행 상황, 전체적인 가격 수준을 설명하고 협의하기도 한다. 총회 의결로 가격이 딱 정해져 (조합원들에게) 배포되기 전까지 대부분 협의 절차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종 보고서가 납품된 뒤에는 이의 신청, 총회 의결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초안 단계에서는 문제 제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고 그 내용이 타당하다면 감정평가에 반영되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대신 총회 의결이 진행된 이후에 가격을 수정하려면 다시 총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논란이 가라앉지 않는 부분은 감정평가가 이뤄진 시기가 언제냐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M사와 S사가 조합에 발송한 최종 보고서에는 지난해 5월31일자 도장이 찍혀 있다. 조합의 접수 도장은 지난해 6월14일자다. M사의 감정평가사는 납품 시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S사의 감정평가사는 지난해 5월31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A씨는 “내가 인쇄물에서 달라진 감정평가액을 발견한 게 지난해 6월7일이고 조합장, 총무이사, S사의 감정평가사까지 4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 게 6월10일이다. 조합의 접수 도장을 보면 감정평가사가 평가금액을 수정한 게 6월14일로 추정되는데, 어떻게 5월31일자로 발송한 최종 보고서에 33억4000만원으로 변동된 감정평가액이 쓰여있던 건지 모르겠다. 표지 갈이가 의심되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시간상으로 맞지 않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A씨는 “지난해 5월8~9일에 조합에서 나에게 상가 호수별 가격과 순위를 기재한 문서를 보냈다. 당시에는 내 컴퓨터에 설치된 문서 뷰어의 버전이 낮아 해당 문서를 보지 못했는데, 최근에 확인한 결과 가제본 인쇄물에 기재된 것과 같은 액수(24억원대)가 쓰여 있었다”고 말했다.

A씨는 해당 문서를 조합 관계자에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A씨의 주장에 따르면 2023년 12월~지난해 1월 이전에 한 차례, 지난해 5월8~9일 이전에 한 차례, 지난해 6월10일 이후 한 차례,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상가 감정평가액이 변동됐다. 그런데 최종 보고서의 납품 날짜는 지난해 5월31일로 기재돼있는 상황인 것이다.

A씨는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 위반 가능성도 의심된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는?

A씨 등 조합원에게 피소된 방배5구역 조합장과 총무이사는 회의, 외근 등의 이유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신 방배5구역 조합 사무장은 “서로 고소한 상황이니 수사 진행 과정을 보면 될 것 같다”며 조합비로 변호사 비용을 댔다는 점에 대해서도 “그것도 고소 내용에 포함돼있으니 수사 상황을 지켜보면 될 것 같다. 그 외에는 조합 차원서 드릴 말씀이 없다”고 전했다.

<jsjang@ilyosisa.co.kr>

 



배너

관련기사

28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