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은 지금…

1967년부터 버려진 사람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노원구 백사마을. 정겹던 마을 풍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주민들의 십수년 숙원인 재개발사업에 시동이 걸리면서다. 하지만 지금 허물어지고 있는 건 낡은 집들이 아니다. 주민들의 기대와 희망이다. <일요시사>는 백사마을의 마지막 모습을 살피고, 주민들의 하소연을 들으러 백사마을로 향했다.

백사마을이라는 이름은 ‘중계동 산 104번지’라는 옛 주소에서 따왔다. 그동안 서울시 성북구·도봉구·노원구로 속한 행정구역은 여러번 바뀌어왔지만, 매번 끝 주소는 같아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다.

강제 이주
개발 제한

백사마을은 서울 동북쪽 끝에 있다. 지하철 7호선 하계역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마을 입구가 나온다. 여느 달동네가 그렇듯,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려면 오르막길을 10분은 족히 걸어야 한다. 

서울 도심에서 찾아오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하다. 하지만 백사마을에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았다. ‘사진 명소’라는 입소문을 꾸준히 타면서다.

백사마을에는 서울에서 이제 찾아보기 힘든 정겨움이 남아 있다. 좁은 골목과 아기자기한 집들, 연탄과 빨랫줄까지. 지난 2017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에 젊은 사람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나이 든 사람은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5년이 지나 마을을 다시 찾았다. 예전의 그 어떤 풍경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주민 10명 중 9명이 마을을 빠져나갔다고 했다. 1200가구 중 100가구가 채 남지 않았다.

인적이 드물어진 마을에는 폐허로 변한 건물들만 아슬아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집마다 둘러진 테이프와 빨간 스프레이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이주가 끝나 철거 예정이라는 의미였다.

곳곳에는 일부가 무너진 채 뼈대만 남은 건물들도 보였다. 안쪽이 모두 타버린 채 남겨진 집도 있었다. 2010년대 들어 담벼락마다 그려진 벽화들도 곳곳이 벗겨지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다시 드러낸 담장을 보면서, 이 마을에 얽힌 불편한 진실을 다시 떠올렸다.

백사마을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도, 지금까지 모습을 간직해온 것도 어느 하나 주민들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간 봐왔던 백사마을의 정겨운 풍경은 한국 도시 개발사의 어두운 단면, 그 자체다.

백사마을은 1967년 만들어진 마을이다. 개발을 이유로 정부가 용산, 청계천, 안암동 등 서울 각지의 판자촌 사람들을 백사마을로 강제 이주시켰다. 판자촌을 나온 사람들 앞에는 천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는 30평짜리 천막을 치고 분필로 네 등분했다. 8평도 안 되는 공간에 한 가구씩 구겨 넣었다.

세월이 흐른 뒤 주민들은 이사 간 집을 합치고, 남는 땅에 집을 지으며 20평 남짓의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개발은 허락되지 않았다. 200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개발제한구역, 즉 ‘그린벨트’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이 ‘재개발’과 ‘아파트’를 꿈꾸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안전 문제로 주민 90% 조기 이주
폐허 된 마을…누전에 불탄 집도 


그간 주민들이 겪은 애환은 비로소 이들의 애정 어린 손길이 끊긴 후에야 바로 보이게 됐다.

마을을 두 바퀴나 돌고서야 아직 마을에 남은 주민 한 분과 마주칠 수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언덕을 오르시던 할머니와 잠시 함께 걸었다. 가방을 들어드리겠다고 하니 한사코 거절하셨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사신 지 올해로 53년째라고 했다. 

‘다들 어디로 갔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개발한다고 해서 다들 나가서 전세 살면서 기다리지. 나간 지 2~3년은 됐어”라고 답했다.

이어 “개발은 4번인가 한다 만다 하더니, 아직도 잘 안됐어. 그래도 이렇게 마을이 텅 빈 걸 보니 이제 뭐가 되긴 하나 봐”라고 덧붙였다.

‘오래 산 동네가 사라지는 게 아쉽지 않으냐’고 묻자 “아쉬워도 50년이 넘은 동네가 없어져야지. 젊은 사람들이 여기서 살 수가 없어”라며 “진작 없어졌을 동네인데, 이제까지 질질 끌린 거야”라고 말했다.

마을 입구로 내려오는 길에 백사마을 주민대표회의(이하 주민대표회의)와 연락이 닿았다. 마을 입구 상가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백사마을 재개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주민대표회의 측 설명에 따르면 백사마을은 1990년대 말부터 서울시와 여러 논의를 주고받았다. ‘개발제한구역 내 집단취락지’로 분류된 백사마을에게 서울시와의 논의는 필수였다.

그러던 중 서울시가 2008년 백사마을 구역 면적 80%가량의 개발제한구역을 해제했다. 대신 재개발사업으로 하되, 공공사업시행자로 건립 세대수의 50%를 건설하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대책 없는 
조치만 남발

이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시행자로 지정됐다. 2009년 구역을 반으로 나눠 각각 분양아파트 1461세대와 임대아파트 1297세대를 건설하는 정비계획이 수립됐고, 구역 지정도 고시됐다.

주민들은 “그때만 해도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될 줄 알았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2011년 하반기 들어 사업이 돌연 보류됐다. 서울시가 “서울에 마지막으로 남은 달동네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선회한 탓이다.


그러는 사이 서울시장은 오세훈 시장에서 고 박원순 전 시장으로 바뀌었고, 서울시는 2012년 6월 들어 새로운 정비계획을 내놨다. 직접 임대주택 부지를 매입해 주거지 보전사업을 자체 시행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정비계획에 임대주택 세부계획은 들어가지 않았다. 

바뀐 법에 따라 충족해야 하는 17%의 임대주택 비율은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해 확보하고, 나머지 세부계획은 서울시가 알아서 수립‧시행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서울시는 임대주택부지에 임대 아파트 대신 저층 주거지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서울시는 그 세부계획을 수년 동안 완성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업 안팎에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다시 사업 방향을 논의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멈췄던 개발 시계가 다시 움직인 때는 2017년 7월. 서울시 중재로 시행사가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서울주택도시공사(이하 SH)로 바뀐 게 신호탄이 됐다. 주민들은 비로소 사업이 제대로 추진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 역시 잠시뿐이었다.

서울시가 “임대주택부지에서 사업을 직접 시행하겠다”던 기존 입장을 뒤집으면서, 사업 추진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당시 서울시는 주민대표회의에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주거지 보전사업의 임대주택도 재개발구역이므로, 우리가 사업시행자가 될 수 없다”며 “(기존에 빼놨던)임대주택 세부계획을 정비계획에 반영해야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고 전했다.


주민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당초 약속받았던 ‘서울시 직접 시행’은 2011년 사업계획 변경 때 주민들이 부담 가중을 우려하자, 이를 달래기 위해 서울시가 내건 ‘협상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거센 반발이 뒤따른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서울시는 “사업 시행은 SH가 해도 당초 약속한 대로 주민 부담이 없도록 하겠다”며 다시 설득에 나섰다. 주민들은 빠른 사업 추진을 위해 서울시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이에 따라 서울시는 2017년 12월, 다시 변경 방침을 수립했다. 주민 부담을 없애기 위해 관련 조례를 개정한다는 내용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 방침은 도시계획위원회를 거쳐 2019년 10월 고시됐다. 변경된 정비계획에 따르면 주거지 보전사업 부지에는 총 698세대가 들어서게 됐다.

같은 시각 백사마을은 주민들의 거주가 어려울 정도로 주거환경이 악화됐다. 서울시는 안전사고 예방을 이유로 주민들에게 조기 이주를 권고했다. 주민들은 몇 년 안에 재개발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서울 도처로 전셋집을 구해 나갔다.

주민들의 바람대로, 최근까지도 사업은 차근차근 진행돼왔다. 지난해 3월 사업시행인가가 나왔고, 12월에는 GS건설로 시공자 선정을 마쳤다.

주민들은 분양신청·관리처분 등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시에 “임대주택 매입비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서울시는 “2017년 12월 방침이 잘못됐다”며 “주거지 보전사업의 임대주택 매입비를 추가로 줄 수 없다”고 또다시 말을 뒤집었다.

주민대표회의 측 주장에 따르면 서울시는 이들에게 “공사비가 너무 비싸다”며 “매입비를 결정하는 대신 주거지 보전사업을 재검토하자”고 제안했다.

주민대표회의 관계자는 “원래 임대주택을 짓기로 한 땅에 주거지 보전사업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 서울시”라며 “본인들이 제안한 것이고, 공사비가 더 많이 들어갈 것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주민들 설득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이어 “또다시 정비계획 변경안을 수립하고 결정하면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 게 뻔한데, 그때까지 폐허가 된 마을을 그냥 두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라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이 관계자의 주장에 따르면, 서울시는 지난달 주민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용을 이유로 주거지 보전사업 부지에 임대주택을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허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만약 해당 부지에 임대주택이 들어선다면, 이는 2009년에 추진하던 계획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시의 ‘10년 공염불’에 시간만 날린 셈이다.

10년 표류 사업 본궤도 올랐지만… 
시 ‘공염불’에 또다시 지연 위기

실제로 주민들 사이에서는 “서울시가 ‘딴지’만 걸지 않았어도 이미 그 자리에 임대 아파트가 들어서고 남았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시청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주민들의 주장 일부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서울시의 매입비 전액 부담 약속’을 두고 “2012년 관련 조례가 변경된 건 맞다”면서도 “다만 서면에는 ‘협의해서 한다’고 표현돼있을 뿐, ‘전부 부담한다’는 내용은 없다. 우리는 조례를 근거로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에는 구두상으로 어떤 합의가 오고 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일하고 있는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며 “그동안 ‘가급적 계획에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 부분은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전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서울시가 공사비 부담을 거부하고 있다’는 비판에는 “그와 관련해 최종 입장을 결정한 바 없고 아직 검토가 끝나지 않았다”며 “며칠 전에 SH가 자료를 넘겨줘서 현재 검토 중에 있다”고 해명했다.

‘공염불 논란’에 대해 묻자 “임대 아파트를 건설하는 방안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검토했을 뿐, 그렇게 하기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라며 “따라서 이에 연관된 지적들에는 아직 답변할 시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사가 늦어질수록 곤경에 처하는 것은 주민들이다. 주민대표회의 측은 “이미 사업 진행을 위해 돈을 미리 당겨 쓴 게 있다”며 사업이 지체될수록 주민들이 져야 할 이자 부담이 늘어난다”고 토로했다.

이어 “마을 밖으로 나가 있는 주민들의 전세 재계약 날짜가 돌아오고 있다”면서 “집값이 오르면서 전세금 부담도 점점 커져가는데, 사업이 지지부진해서 걱정이 많다”고 덧붙였다.

한편 시행사 SH는 내년에 착공을 시작해 오는 2026년 10월 사업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하지만 이대로 사업 진행이 늦춰지면 정해진 시간 안에 사업을 마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주민들은 “서울시 결정만 떨어지면 사업 진행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민 대다수가 빠른 재개발을 원하고 있고, 이주도 마무리 단계라 기존 건물 철거도 금방 끝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주 초 GS건설과 시공 계약도 끝냈다.

55년 흘러도
발만 ‘동동’

이들은 답답한 마음에 단체 행동도 준비하고 있다. 서울시로 인해 개발이 계속 늦어지면 서울시를 상대로 집회나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이다. 5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주민들은 먼 옛날 좁은 천막으로 내몰렸던 그때처럼, 대책 없는 조치만 남발하는 공권력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신세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서울 달동네 재개발 현주소

백사마을과 함께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성북구 정릉골·강남구 구룡마을·서초구 성뒤마을 역시 재개발사업이 추진 중이다. 

다만 진행 상황은 제각각이다. 정릉골 사업은 시공사 선정 절차를 밟으며 순항하고 있는 반면, 구룡마을과 성뒤마을 사업은 토지보상에 얽힌 갈등을 풀어내지 못하면서 표류하고 있다.

정릉골구역 재개발 조합은 시공사 선정을 위해 지난달 11일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설명회에는 GS건설·대우건설·포스코건설 등 대형 건설사 8곳이 참여했다. 조합은 오는 26일 입찰을 마감할 계획이다.

구룡마을은 2020년 실시계획을 인가받고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토지보상 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무허가 주택 원주민과 토지주 등 당사자들 사이의 이해충돌도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다. ‘올해 착공, 2025년 완공’이라는 기존 사업계획 이행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모양새다.

성뒤마을도 토지보상 절차가 걸림돌이다. 2019년까지 관련 절차를 마무리짓겠다던 계획이 3년째 미뤄지고 있다. 마을이 백사마을만큼 오래돼 매년 안전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철거‧착공 일정도 토지보상 절차와 맞물려 계속 미뤄지고 있는 형편이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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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표 계승?’ 이재명정부 태양광 로드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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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에너지 정책은 범국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최근 환경부 장관 후보자의 발언으로 이재명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이 윤곽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일각에서는 문재인정부의 태양광 사업이 어른거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3일 대통령실은 “국회 기후위기특위에서 활동하는 등 미래 환경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3선 국회의원”이라고 소개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성환 의원을 환경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김 후보자는 22대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위원장 한정애, 민주당) 위원으로 활동하며 탈원전·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노력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대선공약 대통령실은 그가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 위기’라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을 잘 이해하고 그동안의 입법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문제에 적극 대응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실제 김 후보자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안’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 등을 발의한 바 있다. 이번 김 후보자의 지명으로 이재명정부의 환경 정책이 구체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김 후보자는 지난 24일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기자들을 만나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모든 에너지 체계를 바꾸고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체계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원전은 보조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겠다는 뜻도 비쳤다. 그는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전기료가 오른다’는 우려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균등화발전비용(같은 양의 전력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싼 전원은 이미 풍력과 태양광”이라며 “다만 아직 한국에선 여러 기회 비용, 시간 비용, 금융 비용이 쌓여 상대적으로 비쌀 뿐이다. 실제 요금이 오를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식의 접근이 대한민국의 에너지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탈원전에 대해서는 “각 나라 특성에 따라 원전을 쓰는 나라가 있는데 한국도 탈원전을 바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주 에너지원으로 재생에너지를 쓰고 원전을 보조 에너지원으로 쓰는 것이 (이재명정부의) 탈탄소 정책 기조”라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으로 신설 예정인 기후에너지부 장관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기후에너지부는 분리돼있는 기후와 에너지 관련 부처 업무를 통합한 조직이다. 그는 “기후에너지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 빠른 시일 내로 큰 방향을 잡겠다”며 “국정기획위원회에서 조직개편안을 검토하고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신재생에너지로 전환 필요” “원전은 보조 에너지원으로”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에너지 ‘전환’을 예고하면서 일각에서는 문재인정부의 태양광 사업이 떠오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내세운 바 있다. 이를 세부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태양광 사업이 크게 대두돼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 문정부는 출범하면서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까지 높이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리기 위해 설비를 확충하기로 했다. 태양광, 풍력발전소 등이다. 당시 내용대로면 총 110조원에 이르는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부는 국가 예산과 공기업, 민간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정부 임기 내내 전국 단위로 태양광 사업을 위한 지원금이 뿌려졌다. 당시 문정부는 신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탈원전 로드맵을 동시에 진행했다. 일부 원전이 영구적으로 정지됐고 짓고 있던 원전 공사가 중단됐다. 단계적 원전 감축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나온 잡음이다. 특히 태양광 사업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은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문정부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국가 주력 사업이었던 만큼 정권이 바뀐 이후 새 정부의 표적이 된 상황에서 실제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천문학적 예산 투입 윤석열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지원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을 진행했다. 윤정부 국무조정실은 일부 표본만 조사했는데도 불구하고 2000억원이 넘는 돈이 불법으로 사용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부패예방추진단은 전국 12개 지자체와 한국전력, 한국에너지공단을 대상으로 ‘전력산업 기반기금 사업’ 운영 실태에 대한 합동 점검을 벌인 결과 총 2267건(2616억원)의 위법·부당 사례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해당 기금은 산업자원통상부(이하 산업부)가 전기 요금의 3.7%를 징수해 조성한 돈으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지원과 보급에 주로 사용됐다. 5년간 투입된 금액은 12조원에 이른다. 1차 조사에 따르면 신재생에너지 지원 사업에서 부적절한 대출과 보조금 부당 집행, 회계 부실 등이 적발됐다. 태양광 사업의 경우 점검 대상의 17%인 1129건에서 1847억원의 위법 대출 등이 확인됐다. 2차 점검에서는 적발 금액이 2배로 늘었다. 국무조정실은 2019~2021년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에 쓰인 금융지원사업(1조1325억원) 내역과 2017~2021년 보조금 지원 규모가 컸던 25개 지자체의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사업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금융지원 사업에서 4898억원,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 보조금 사업에서 574억원, 전력 분야 연구개발 지원사업에서 266억원, 기타 전력기금 사업에서 86억원의 부정 집행 사례가 나타났다. 당시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신재생에너지 지원금 대부분은 태양광 사업에 쓰였다”며 “가장 규모가 컸던 부정 금융지원 사업 사례 중 99%는 태양광 사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태양광 업자들은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불법 대출을 받았고 가짜 세금계산서로 공사비를 부풀려 지원금을 타냈다. 감사원 조사로 검찰 수사까지 대출을 받은 뒤 세금계산서를 취소, 축소하는 등 탈루가 의심되는 정황도 드러났다. 가짜로 버섯 재배 시설이나 곤충 사육 시설, 축사 등 농림축산업 시설을 만들어 놓고 신재생 시설을 짓겠다고 대출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농지에 신재생 시설을 지을 때는 용도변경 등 인허가 절차가 필요하지 않고 생산한 전력을 팔 때 받을 수 있는 보조금 한도도 커진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한 마을회는 마을 창고를 짓겠다며 전력기금에서 돈을 받아 부지를 사들였지만 실제 창고는 짓지 않았고 부지는 마을회장이 6촌에게 되팔았다. 지방자치단체의 문제도 드러났다. 한 군은 타낸 보조금을 다 쓰지 못하고 약 24억원이 남자 이를 다른 계좌로 빼돌렸다가 적발됐다. 한 시는 보조금을 빼돌려 관용차를 사기도 했다. 감사원 조사도 이뤄졌다. 감사원은 2023년 11월 ‘신재생에너지 사업 추진 실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목표와 이행, 인프라 구축, 관리 등 3개 분야로 나눠 추진 과정과 집행 전반을 들여다봤다. 감사원에 따르면 산업부는 2017년 신재생 발전 목표를 상향하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검토했지만 막상 후속 조치 이행에는 소홀했다. 감사원은 “톱다운(하향식) 방식으로 내려온 목표에 따라 무리한 계획이라도 수립해야 했다는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데도 면밀한 검토 없이 강행되고 짧은 기간 내 일관성 없이 변경됨으로써 정책 혼선과 신뢰성 저하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정부서 전반적 점검 8000억 넘는 예산 줄줄 샜다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만큼 정부 부처가 이를 맞추기 위해 과도하게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문정부가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야기될 수 있는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을 감췄다는 지적도 나왔다.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산업부는 문정부의 국정 과제대로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릴 경우 2030년까지 전기요금을 40% 가까이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시 청와대의 압박에 12년 동안 10.9%만 오를 것이라고 국민 부담을 축소했다. 태양광 사업의 여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새만금 태양광 발전사업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 1월 군산시청에 대한 추가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감사원 감사 결과 군산시 태양광 발전사업 수주 과정에서 뒷돈이 오간 정황이 포착됐고 이를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당시 군산시장은 군산시가 1000억원 규모의 태양광 사업을 추진할 때 자신의 고교 동문이 대표로 있는 업체에 특혜를 준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업체가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금융사가 제시한 연대보증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는데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해 계약 체결을 지시했다는 게 감사원의 판단이다. 앞서 검찰은 새만금 태양광 사업을 주도한 회사 대표를 알선수재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태양광 발전사업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에게 로비를 해주겠다며 뒷돈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의 진술로 비리 의혹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졌다. 핵심 수사 대상에 올랐던 건설사 대표가 실종됐다가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도 일어났다. 관련 시장은 반응 오는 중 이 대통령이 기후,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김 후보자가 재생에너지를 언급하면서 관련 시장이 다시 들썩이는 모양새다. 실제 태양광 관련 주가가 오르는 등 주식시장에는 벌써부터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윤정부는 문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통째로 부정하다시피 했다. 반대로 문정부의 정책을 다시 끄집어낸 이정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