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용서 구하고 떠난 노태우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11.01 14:49:40
  • 호수 13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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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같은 길 전두환과 다른 길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한 노 전 대통령이 지병 악화로 숨을 거뒀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6·29선언, 북방외교, 남북대화 등 업적이 많다. 하지만 12·12쿠데타, 거액의 비자금 은닉 등 과오도 적지 않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 병원에서 사망했다. 서울대병원 측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서울대 재택의료팀의 돌봄 아래 자택에서 지냈다. 전날 저산소증과 저혈압 증세를 보였고 다음날 오후 12시45분 응급실로 이송돼 1시간가량 치료를 진행했다. 

오랜 기간
병상 생활

응급실로 이송됐을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통증에 대한 반응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오후 1시46분경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노 전 대통령은 희소병인 다계통위축증과 천식 등으로 오랜 기간 병상 생활을 해왔다. 병원 측은 허약한 전신 상태 등이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이라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김연수 서울대 병원장은 “반복적인 폐렴과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었다”며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 저혈압을 보였고 오늘 오후 12시45분경 응급실에 방문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됐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족은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을 공개했다.

그는 유언장을 통해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기술했다. 아울러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에 의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남겼다.

유족 측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긴 말씀을 전해드린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렀으며 국립묘지 안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국가장을 주관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한다. 다만 조문객의 식사 비용과 노제·삼우제·49재 비용과 국립묘지가 아닌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

다음 날인 27일, 노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정·관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사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재계 인사 가운데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다. 상주에도 이름을 올린 최 회장은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 이제는 아무쪼록 영면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명예회장도 오후에 빈소를 찾아 고인을 깊이 추모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은 “중국과의 외교 등 여러 업적을 남기셔서 존경하는 분”이라고 언급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빈소 좌우는 문재인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가 보낸 근조 화환이 자리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 및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보낸 화환도 함께 놓였다.

다른 조문객들도 “과오가 있었지만 선진국의 기반을 닦고 현대사의 이정표를 세웠다”며 노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88 서울올림픽 유치 깊이 관여 
남북평화 통일 정책 적극 행보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씨와 어머니 김태향씨 사이에 첫째로 태어났다. 밑으로는 동생 노재우씨가 있다.

김씨가 임신했을 때 구렁이가 몸을 휘감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할아버지 노영수씨는 구렁이를 용이라 여겨 태아 이름을 태룡(泰龍)으로 지으려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시선을 끌까 두려워 ‘어리석을 우(遇)’ 자를 넣어 ‘태우’라고 작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7세가 되던 해, 부친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산 노 전 대통령은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해 맨발로 등교하기도 했다.

그는 1946년 2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전씨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지만, 재학 당시엔 서로 모르고 지냈다. 나중에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제야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8년 경북중학교(현 경북고) 4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5학년 때 성적은 218명 중 68등으로 상위권에 속했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장래희망이던 의사가 되길 포기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돼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들어갔고 이등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헌병학교 9기를 우등으로 졸업해 교수부로 발령받았는데, 그곳에서 5세 위인 김용희 소령(교수부장)을 만나서 우정을 쌓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51년 10월 김 소령의 추천으로 육사에 입학한다. 생도 시절 럭비부를 창단해 연승을 거두는 등 운동능력에도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1951년 육군사관학교 정규과정 1기생으로 들어가 김복동, 박병하 등을 만났고 ‘오성(伍星) 그룹’을 결성했다.

1955년 육사 11기로 임관한 노 전 대통령은 이듬해 육군 5사단 소대장(소위) 발령을 받아 사단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그 시절 친구 김복동 중위의 대구 집에 자주 들락거리다 그의 누이 김옥숙을 보고 반해 청혼했고 1959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궁핍했던
유년시절

같은 해 노 전 대통령은 먼저 진급한 전씨와 미국 유학길에 올라 6개월간 함께 생활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귀국 후 군 최대 파벌 ‘하나회’의 시작점이 된 육사 11기생 친목 모임 북극성회를 조직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군 대위 신분으로 전씨와 함께 후배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지지하는 ‘카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그 이후 노 전 대통령은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중령으로 진급한 1967년 베트남전쟁에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했을 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4년 1월 마침내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고, 1976년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며 청와대에도 입성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1978년에는 사단장으로 전출된 전 전 대통령을 대신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1979년 10·26사태가 터지자 노 전 대통령·전씨를 주축으로 한 신(新)군부는 차근차근 군을 장악해갔다. 상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명령 없이 병력을 출동시켰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사반란 모의와 실행에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전씨에 이어 사실상 2인자였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중장, 대장으로 연거푸 진급했고 이듬해 7월 군복을 벗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노 전 대통령은 당(민주정의당)과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2년 체육부·내무부 장관을 잇달아 맡았다.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깊이 관여해 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는 등 스포츠 외교에 앞장섰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로 당선된 후 전씨에 의해 대표 최고위원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받으며 5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1987년 전씨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그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신군부 세력 ‘2인자’ 이미지를 벗고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씨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얻어낸 승리였다. 

취임 1년 차였던 1988년 7월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북방외교에 시동을 걸었다. 분단 후 남북 화해 무드가 싹튼 결정적 계기였다. 

제5공화국
2인자 군림

같은 해 9월 열린 서울올림픽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이 됐고, 1990년 10월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은 이후 민생 치안 확립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1988년 치러진 4·26총선에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했다. 

당시 전씨는 국회 청문회장에 출석해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 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 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텄고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유럽 국가와 수교를 넓혀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 같은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유럽의 몰락, 미국의 세계 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하는 비밀 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비자금 조성…뇌물수수 혐의
일관성 없는 경제 정책 펼쳐

노 전 대통령이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술회했던 그는 1990년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기여했다. 이는 김영삼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동시에 호남을 배제한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는 시위 등 온갖 불만이 표출됐던 시기로 ‘민주화’라는 타협이 불가피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용납하지는 않지만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십’으로 완충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3당 합당이 호남 차별주의로 이어지고 지역주의가 더욱 강화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3당 합당은 정치적으로는 승리지만 호남 등 지역 간 감정을 심화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제 분야의 점수도 높게 받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초기 국내 경제는 3저(저유가, 저금리, 저달러)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전두환정부로부터 무역흑자 기조를 이어받았지만,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으로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수서 택지 분양 사업, 율곡사업(차세대 전투기 및 무기도입 사업)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에까지 섰다. 이 같은 재벌과의 유착으로 정권 초기 시도했던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정의실천을 위한 개혁 추진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은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 지난 4월 노 전 대통령은 호흡곤란으로 위독해지자 119 구급대가 긴급출동한 바 있다. 당시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SNS에 부친의 상태를 언급하기도 했다.

노 관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인내심’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며 “(아버지의 병명이)소뇌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인데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 이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운을 뗐다. 

‘보통 사람’
빛과 그림자

그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지만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며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어 “어머니의 영혼과 몸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아버지를 섬기셨다”는 말로 노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 여사가 남편을 간호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렸다. 아울러 “지상에서 아버지께 허락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셨다. 인내심”이라고 글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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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르고 보는 정청래 두 번째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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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스스로 리더십 도마 위에 올라섰다. 1인1표제 재추진과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이라는 두 개의 승부수를 동시에 던지면서다. 양쪽에서 후폭풍이 몰아치는 형국이다. ‘자기 정치’ VS ‘당원의 뜻’이라는 명분과 명분이 거칠게 붙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의 합당 논의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지난달 22일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혁신당을 향해 “지방선거를 따로 치를 이유가 없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민주당의 반발과 ‘흡수 합당은 싫다’는 혁신당의 주장이 부딪히면서 합당 테이블조차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중구난방 가쁜 숨만 합당 논의 초반부터 혁신당 측의 반발이 이어졌다. 혁신당 서왕진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서 “본격적인 통합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오해가 형성되는 것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통합은 뻔한 몸집 불리기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가치 연합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앞서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이 합당과 관련해 “민주당이라는 큰 생명체 내에서 혁신당의 DNA도 잘 섞이게 될 것”이라고 밝히자 이를 ‘흡수 합당’이라고 받아들인 것에 대한 유감 표명으로 풀이된다. 혁신당이 합당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도 전했다. 서 원내대표는 MBC 라디오를 통해 “이미 민주당은 162명 거대 정당이고 (여기에) 혁신당 12명이 합쳐지는 것은 단순한 몸집 불리기”라며 “그 이상 의미는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합당 논의 자체를 본격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제안 방식이나 준비된 내용 자체가 없고, 오히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지방선거에 상당히 악영향이 있으니 당장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합당 논의라는 것 자체가 불가피한데 우리 원칙과 기준에 맞게, 질서 있게 논의는 진행할 필요는 있다는 긍정적 입장도 상당히 있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에서도 합당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지도부에서 친명(친 이재명)계로 불리는 이언주·황명선·강득구 최고위원은 합당 발표 다음 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대로 된 통합을 위해서라도 정청래식 독단은 이제 끝나야 한다”며 정 대표를 겨냥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번 합당 제안에 앞서 정 대표와 이재명 대통령 간 교감이 있었던 것처럼 언론 보도가 됐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어 “당무는 당의 책임이고, 당이 결정해야 한다. 마치 대통령이 관여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합당 논의에 이 대통령을 끌어들인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기자회견 말미에 ▲정 대표의 공식 사과 ▲독선적 당 운영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 마련 ▲합당 제안을 언제, 누구와, 어디까지, 어떻게 논의하였는지 등을 밝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합당·1인1표제, 쏟아지는 안건 “뭐부터 해결해야…” 여당도 혼란 이런 상황서 정 대표의 대표 공약인 ‘1인1표제’가 최종 관문인 당 중앙위원회(이하 중앙위) 표결에 다시 부쳐지면서 논란이 재점화할 전망이다.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표 행사 가치 비율을 현행 20대 1 이하에서 1대 1로 변경하는 것을 골자로 지난해 중앙위원회에서 재적위원 과반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됐다. 정 대표가 압도적 당심으로 당선된 만큼 정치권 일각에서는 1인1표제 통과로 인한 권력 재편을 견제해왔으나 두 달 만에 또다시 날 선 공방이 예고된 것이다. 지난달 19일 당무위원회는 해당 안건 상정을 중앙위서 결정한 뒤 같은 달 22~24일 권리당원 투표 절차를 마무리했다. 1인1표제 안건에 대한 투표 결과 ▲찬성 85.3%(31만5827명) ▲반대 14.7%(5만4295명)로 집계됐다. 당은 이달 2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당헌·당규 개정에 대한 안건을 투표로 부칠 예정이며 중앙위원 온라인 투표는 3일까지 진행된다. 권리당원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정 대표는 “당원들의 압도적 다수의 뜻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1인1표제 굳히기에 나섰다. 정 대표는 “당원들의 뜻을 받들어 민주당을 더 좋은 민주주의 정당으로 만들겠다”며 “당의 모든 의사와 진로는 당원들이 가라는 대로 가고 당원들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도 페이스북에 “참여율은 지난번 16.81%에 비해 15% 가까이 높아졌고, 찬성률은 비슷하다. 압도적인 찬성 여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힘을 실었다. 1인1표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질 때마다 정 대표는 이 대통령을 방패처럼 소환했다. 정 대표는 “1인1표제는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 당원주권정당, 당원주권시대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재명 당 대표 시절부터 3년여간 꾸준히 요구되고 논의했던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이어 “당원과 대의원 1대 20 미만을 결정할 때도 많은 반대와 저항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며 “1인1표제는 논의할 만큼 논의했고 영남권 등 전략 지역 원외위원장들께서도 그 당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양해했던 사안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1인1표제는 이 대통령이 추진했던 사안인 만큼 민주당이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민주당과 당원들은 정 대표가 충분한 논의 없이 중요한 사안을 본인 페이스대로 밀어붙인다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지난해 27표 차이로 1인1표제가 처음 부결됐을 당시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과반에 가까운 상당수 최고위원이 우려를 표하고 숙의를 원했음에도 강행, 졸속 혹은 즉흥적으로 추진된 부분에 대해 유감”이라며 정 대표를 공개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 세력 강화’를 위해 합당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의심이 가라앉기도 전 1인1표제로 또다시 당을 흔들면서 반청(반 정청래) 정서가 퍼졌다. 이재명정부가 출범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여당이 흔들리자 정 대표의 진퇴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합당 발표 이튿날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 앞에선 당원들이 주도하는 합당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정청래 사퇴’ 등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합당 반대”를 외쳤다. 민주당 일각에도 정 대표의 ‘졸속 추진’ 행보가 이어진다면 사퇴 요구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 대표의 모든 행동이 ‘자기 정치’ 프레임으로 귀결되면서 승부수가 자충수가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정 대표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전문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자신의 선택을 두고 당내 반발이 이어지자 우회적으로 심경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겨냥한 듯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자신의 SNS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당원의 뜻은 독단으로 결코 꺾을 수 없나니, 흔들리는 것은 뿌리 없는 꽃뿐”이라며 저격 글을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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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도 필요 여의도 안팎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민주당은 혁신당과의 합당과 1인1표제 추진에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사전 논의 없이 진행된 점 등 정 대표의 독단적인 행동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민주당 김지호 대변인 역시 “당내 문제 제기는 합당 자체보다는 의견수렴 절차가 급작스럽게 진행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가 당권을 쥐었을 당시 잡음은 예상됐으나, 일단 지르고 수습하는 예측 불허한 행동이 반복되면서 신뢰를 잃은 게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 대표 취임 이후 ‘명청 갈등’ ‘당정 불협화음’ 등으로 민주당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최고위원들의 반발 역시 당에서도 정청래 체제에 대한 위험성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근거로 해석된다. 당 대표 임기 종료까지 반년이 남았지만 정 대표의 연임 의혹은 여전한 만큼 갈등 역시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정 대표는 당원주권시대를 거듭 강조했지만 막상 중요한 사안은 독단으로 결정하면서 당 안팎으로 불만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1인1표제로 당원 중심 원칙을 강화하자”면서 합당 등 중요한 사안을 대표 혼자 결정하는 건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혁신당과의 합당 제안에 당내 반발이 이어지자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당원들이 이 문제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박 수석대변인은 “(합당이라는) 당 대표의 제안은 정무적 판단과 그에 따른 정치적 결단의 영역”이라며 “그렇기에 앞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전 당원 토론, 투표 등 정해진 절차를 거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활발하게 당원의 의견을 묻는 그런 토론의 장을 마련하겠다”며 “당원주권시대에 걸맞게 당원의 뜻을 최종적으로 묻고,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당원이 합당하라면 하는 것이고 하지 말라고 하면 못 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나 정 대표가 논의를 띄우고 당원에게 ‘예’ ‘아니오’로만 의견을 묻는 행위가 당원주권정당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로만 당원 주권 시대? “이제는 숙의 민주주의로” 이에 한 정치권 관계자는 “1인1표제의 경우 정 대표는 당원들의 찬성률이 압도적이었다고 말하지만 투표율은 저조했다. 이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들여다 보지 못하고 숫자에만 매몰됐다”며 “이것을 당원주권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현재 소수의 당원이 당의 여론을 이끌고 있다. 일반 국민의 시선에서 ‘나머지 당원들은 무책임하게 방관하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당 대표가 논의를 띄우고 ‘자, 여기에 O, X로만 투표해!’ 하는 식이니 당과 당원 간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인1표제와 혁신당과의 합당 모두 찬성 여론이 높다. 그럼에도 정 대표를 향한 반발은 거칠다. 결국 민주당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라 배의 키를 쥔 선장을 향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합당 방식에 반발한 민주당 최고위원들 역시 “정 대표의 선택적 당원주권”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대통합을 가로막는 정 대표의 독선과 비민주성을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다”며 “선출된 최고위원들이 의견조차 낼 수 없는 구조, 대표 결정에 동의만 강요하는 구조는 민주적 당 운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은 같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서 파열음이 나는 만큼 결국 정 대표의 리더십이 관건이다. 3대 개혁의 빠른 추진, 혁신당과의 합당을 통한 지방선거 승리, 이정부의 성공 등 각종 요구가 쏟아지면서 이를 한데 어우르는 ‘통합형 당 대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 대표의 자기 정치 프레임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동안 자기 정치 의혹이 숱하게 제기된 만큼 조 사무총장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당내 가장 큰 경쟁자인 한동훈 전 대표를 내치려고 하는 것은 당권을 계속 강화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그야말로 자기 정치 아닌가”라며 “반면 정 대표는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조국 대표와 함께하자고 하는 것인데 이걸 자기 정치라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엄호에 나섰다. 민주당의 민주주의 체제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자이크 민주주의 평화 그룹 백왕순 대표는 <일요시사>를 통해 “숙의 민주주의의 부재”를 꼬집었다. 민주주의 제자리걸음 백 대표는 “1인 1표제가 맞냐 틀리냐 갑론을박이 이어지는데 당원주권시대에는 이 방법이 옳다. 다만 이득을 놓고 계파 간의 힘겨루기만 이어지니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라며 “혁신당과의 합당도 마찬가지다. 통합하면 이기고 분열하면 진다. 그런데 이를 차기 당권 문제와 연결해 해석하니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대한민국은 숙의 민주주의가 아닌 절차 민주주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찬반이 극명한 사안에 대해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당원이 직접 토론하고 의견을 내는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불안한 민주당 혁신당도 ‘흔들’ 합당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놓고 조국혁신당이 자당 의원들 입단속에 나섰다. 혁신당 황운하 의원이 “민주당과 합당할 경우 혁신당 조국 대표가 통합한 당의 공동대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경고한 것과 더불어 입조심을 당부한 것이다. 혁신당은 조국 대표가 즉각 황 의원의 이날 발언에 경고했다고 밝혔다. 혁신당 대변인실은 입장문을 통해 “혁신당 최고위는 이 문제(황 의원 발언)에 대해 논의하고, 이 같은 논의를 전혀 한 바가 없으며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며 “조 대표 역시 강한 경고를 했음을 알린다”고 밝혔다. 이어 “혁신당은 공식적 기구를 통해 합당과 관련된 논의를 해왔으며 위와 같은 논의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조 대표를 비롯한 혁신당 구성원 누구도, 민주당과 합당과 관련된 실무 논의를 진행한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