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용서 구하고 떠난 노태우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11.01 14:49:40
  • 호수 1347호
  • 댓글 0개

전두환과 같은 길 전두환과 다른 길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한 노 전 대통령이 지병 악화로 숨을 거뒀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6·29선언, 북방외교, 남북대화 등 업적이 많다. 하지만 12·12쿠데타, 거액의 비자금 은닉 등 과오도 적지 않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 병원에서 사망했다. 서울대병원 측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서울대 재택의료팀의 돌봄 아래 자택에서 지냈다. 전날 저산소증과 저혈압 증세를 보였고 다음날 오후 12시45분 응급실로 이송돼 1시간가량 치료를 진행했다. 

오랜 기간
병상 생활

응급실로 이송됐을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통증에 대한 반응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오후 1시46분경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노 전 대통령은 희소병인 다계통위축증과 천식 등으로 오랜 기간 병상 생활을 해왔다. 병원 측은 허약한 전신 상태 등이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이라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김연수 서울대 병원장은 “반복적인 폐렴과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었다”며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 저혈압을 보였고 오늘 오후 12시45분경 응급실에 방문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됐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족은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을 공개했다.

그는 유언장을 통해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기술했다. 아울러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에 의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남겼다.

유족 측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긴 말씀을 전해드린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렀으며 국립묘지 안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국가장을 주관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한다. 다만 조문객의 식사 비용과 노제·삼우제·49재 비용과 국립묘지가 아닌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

다음 날인 27일, 노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정·관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사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재계 인사 가운데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다. 상주에도 이름을 올린 최 회장은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 이제는 아무쪼록 영면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명예회장도 오후에 빈소를 찾아 고인을 깊이 추모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은 “중국과의 외교 등 여러 업적을 남기셔서 존경하는 분”이라고 언급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빈소 좌우는 문재인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가 보낸 근조 화환이 자리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 및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보낸 화환도 함께 놓였다.

다른 조문객들도 “과오가 있었지만 선진국의 기반을 닦고 현대사의 이정표를 세웠다”며 노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88 서울올림픽 유치 깊이 관여 
남북평화 통일 정책 적극 행보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씨와 어머니 김태향씨 사이에 첫째로 태어났다. 밑으로는 동생 노재우씨가 있다.

김씨가 임신했을 때 구렁이가 몸을 휘감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할아버지 노영수씨는 구렁이를 용이라 여겨 태아 이름을 태룡(泰龍)으로 지으려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시선을 끌까 두려워 ‘어리석을 우(遇)’ 자를 넣어 ‘태우’라고 작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7세가 되던 해, 부친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산 노 전 대통령은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해 맨발로 등교하기도 했다.

그는 1946년 2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전씨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지만, 재학 당시엔 서로 모르고 지냈다. 나중에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제야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8년 경북중학교(현 경북고) 4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5학년 때 성적은 218명 중 68등으로 상위권에 속했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장래희망이던 의사가 되길 포기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돼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들어갔고 이등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헌병학교 9기를 우등으로 졸업해 교수부로 발령받았는데, 그곳에서 5세 위인 김용희 소령(교수부장)을 만나서 우정을 쌓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51년 10월 김 소령의 추천으로 육사에 입학한다. 생도 시절 럭비부를 창단해 연승을 거두는 등 운동능력에도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1951년 육군사관학교 정규과정 1기생으로 들어가 김복동, 박병하 등을 만났고 ‘오성(伍星) 그룹’을 결성했다.

1955년 육사 11기로 임관한 노 전 대통령은 이듬해 육군 5사단 소대장(소위) 발령을 받아 사단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그 시절 친구 김복동 중위의 대구 집에 자주 들락거리다 그의 누이 김옥숙을 보고 반해 청혼했고 1959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궁핍했던
유년시절

같은 해 노 전 대통령은 먼저 진급한 전씨와 미국 유학길에 올라 6개월간 함께 생활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귀국 후 군 최대 파벌 ‘하나회’의 시작점이 된 육사 11기생 친목 모임 북극성회를 조직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군 대위 신분으로 전씨와 함께 후배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지지하는 ‘카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그 이후 노 전 대통령은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중령으로 진급한 1967년 베트남전쟁에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했을 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4년 1월 마침내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고, 1976년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며 청와대에도 입성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1978년에는 사단장으로 전출된 전 전 대통령을 대신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1979년 10·26사태가 터지자 노 전 대통령·전씨를 주축으로 한 신(新)군부는 차근차근 군을 장악해갔다. 상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명령 없이 병력을 출동시켰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사반란 모의와 실행에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전씨에 이어 사실상 2인자였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중장, 대장으로 연거푸 진급했고 이듬해 7월 군복을 벗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노 전 대통령은 당(민주정의당)과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2년 체육부·내무부 장관을 잇달아 맡았다.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깊이 관여해 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는 등 스포츠 외교에 앞장섰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로 당선된 후 전씨에 의해 대표 최고위원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받으며 5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1987년 전씨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그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신군부 세력 ‘2인자’ 이미지를 벗고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씨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얻어낸 승리였다. 

취임 1년 차였던 1988년 7월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북방외교에 시동을 걸었다. 분단 후 남북 화해 무드가 싹튼 결정적 계기였다. 

제5공화국
2인자 군림

같은 해 9월 열린 서울올림픽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이 됐고, 1990년 10월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은 이후 민생 치안 확립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1988년 치러진 4·26총선에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했다. 

당시 전씨는 국회 청문회장에 출석해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 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 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텄고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유럽 국가와 수교를 넓혀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 같은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유럽의 몰락, 미국의 세계 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하는 비밀 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비자금 조성…뇌물수수 혐의
일관성 없는 경제 정책 펼쳐

노 전 대통령이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술회했던 그는 1990년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기여했다. 이는 김영삼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동시에 호남을 배제한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는 시위 등 온갖 불만이 표출됐던 시기로 ‘민주화’라는 타협이 불가피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용납하지는 않지만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십’으로 완충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3당 합당이 호남 차별주의로 이어지고 지역주의가 더욱 강화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3당 합당은 정치적으로는 승리지만 호남 등 지역 간 감정을 심화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제 분야의 점수도 높게 받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초기 국내 경제는 3저(저유가, 저금리, 저달러)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전두환정부로부터 무역흑자 기조를 이어받았지만,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으로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수서 택지 분양 사업, 율곡사업(차세대 전투기 및 무기도입 사업)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에까지 섰다. 이 같은 재벌과의 유착으로 정권 초기 시도했던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정의실천을 위한 개혁 추진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은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 지난 4월 노 전 대통령은 호흡곤란으로 위독해지자 119 구급대가 긴급출동한 바 있다. 당시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SNS에 부친의 상태를 언급하기도 했다.

노 관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인내심’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며 “(아버지의 병명이)소뇌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인데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 이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운을 뗐다. 

‘보통 사람’
빛과 그림자

그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지만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며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어 “어머니의 영혼과 몸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아버지를 섬기셨다”는 말로 노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 여사가 남편을 간호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렸다. 아울러 “지상에서 아버지께 허락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셨다. 인내심”이라고 글을 맺었다.



배너

관련기사

59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틈 공략’ 이재명표 동진 정책 막전막후

‘틈 공략’ 이재명표 동진 정책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새누리당 이혜훈 전 의원을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여야는 저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장동혁·한동훈·이준석 연대 등 위기 앞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내던 국민의힘은 이 대통령의 동진 정책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2월28일 새누리당 이혜훈 전 의원을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9월 발표된 정부 조직 개편 방안에 따라, 지난 2일 재정경제부·기획예산처로 분리됐다. 이 지명자가 초대 장관으로 임명된 기획예산처는 예산 편성·재정 기획 기능을 담당한다. 연말 휴일 깜짝 발표 한나라당·새누리당 소속으로 서울 서초갑에서 3선 의원을 지냈던 이 후보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을 지낸 경제통이다. 수려한 언변을 바탕으로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누리고 있다. 그는 지명 다음날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예금보험공사로 출근하면서 장관 후보자 지명 소감을 밝혔다. 이 후보자는 “불필요한 지출은 사전에 없애고, 민생과 성장엔 과감하게 투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며 “기획과 예산을 연동한 중장기 재정 운영을 통해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이 후보자를 임명하자,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일요일에 이 지명자 임명을 밝힌 것에 대해서도 “다음 날 조간 신문 톱을 노린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 기획조정국은 같은 날 이 후보자를 제명하기로 한 서면 최고의원회의 의결 사항을 발표했다. 기획조정국은 “이 후보자는 국민의힘 서울 중·성동 당협위원장인데도 이재명정부 국무위원 임명에 동의해 현 정권에 부역하는 행위를 자처했다”며 “지방선거를 불과 6개월 남기고 국민·당원을 배신하는 사상 최악의 해당행위를 했다”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겉으론 이 대통령의 이 후보자 임명을 환영했다. 민주당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같은 날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전문성을 인정받은 인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탕평인사”라면서 환영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후보자는 지난해 3월22일 손현보 세계로교회 목사가 주도한 집회에서 이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에선 충격을 받은 듯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이날 “윤 어게인을 외쳤던 사람도 통합 대상이 돼야 하느냐”며 “솔직히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윤준병 의원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통령을 향해 내란 수괴라고 외치고,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을 지지했던 이 전 의원에게 정부 곳간 열쇠를 맡기는 행위는 포용이 아니라 국정 원칙 파기”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적진인 국민의힘의 유명 정치인을 핵심 보직에 발탁한 것과 관련해 “당내 영향력이 비교적 약한 이 대통령이 민주당에 견제 목적 충격을 주기 위해 이 후보자를 임명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이 같은 주장의 바탕엔 예산 편성·재정 기획을 맡는 기획예산처의 특성이 있다. 기획예산처는 쉽게 말해 ‘금고지기’다. 이혜훈 기습 임명에 발칵 뒤집힌 국힘 적진 출신 곳간지기로…민주당 견제?” 일각에선 “국민의힘 내에서 영향력이 줄고 있는 이 후보자를 영입해 금고를 맡긴다는 건 민주당 의원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아니냐”며 “이 대통령이 민주당에 강력한 경고를 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아울러 “각종 갑질 의혹이 불거져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졌던 민주당 김병기 전 원내대표를 엄호하기 위한 물타기를 강하게 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하지만 “당내 역학 관계만을 고려한 대응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국민의힘·개혁신당은 다양한 정치적 구도와 이슈가 뒤엉켜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연이은 혼란과 어지러운 합종연횡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중심 축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 대해 이어지는 반발 속 ‘장동혁 체제’ 종말 가능성 ▲장 대표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의 갈등 ▲한 전 대표와 개혁신당의 오랜 갈등 ▲한 전 대표와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의 지난해 12월 깜짝 회동 ▲국민의힘·개혁신당의 특검 합의 등이다. 중심축만 해도 이렇게 많다. 이 틈은 이 대통령이 국민의힘의 허를 찌르는 기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이다. 국민의힘이 이 후보자 제명을 언급하더라도, “적진 출신을 주요 부처 수장 후보자로 임명했다”는 압도적인 흐름을 극복하긴 어렵다. 보수 야권 내부에선 지난해 12월26일부터 ‘장한석 연대’라는 표현이 나왔다. ▲장 대표 ▲한 전 대표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등이 연대할 가능성이 거론된 것이다. 국민의힘·개혁신당이 통일교 특검법을 공동 발의하고, 한 전 대표가 장 대표의 24시간 필리버스터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것을 근거로 제시된 가능성이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22일 오전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에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24시간 동안 진행했다. 이를 두고, 한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24일 자신의 SNS에 “장 대표가 장장 24시간 동안 온 힘을 쏟아냈고, 노고가 많으셨다”며 “민주당의 폭거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으니, 모두 함께 싸우고 지켜야 할 때”라면서 장 대표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장 대표는 같은 날 “필리버스터의 절박함·필요성에 대해선 누구도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일축했다. 극복 어려운 압도적 흐름 ‘장한석 연대’는 실제로 성사되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단 분석이 나온다. 보수 야권의 대표로 통하는 정치인 3명이 서로 물고 물리는 앙숙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를, 한 전 대표는 중·노년 여성을 축으로 한 중도 보수를, 이 대표는 젊은 남성을 축으로 한 개혁 보수를 상징한다. 이들 사이에 연대가 성사되면 사실상의 이념적 보수 대통합이다. 이 연합이 성사되면, 영남·강원 중심 토착 보수를 대표하는 국민의힘 내 언더 찐윤과 대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장 대표는 이 가능성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28일 국회서 진행된 기자간담회 중 “왜 ‘장한석’이란 말이 붙는지 잘 모르겠다”며 “당내 인사와 연대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당내 인사와 연대한다는 표현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동의·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연대는 국민께서 수긍할 수 있는 명분을 갖고 감동을 줘야 한다”며 “지방선거를 5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변화와 쇄신을 위해 더 노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전 대표와 연대할 가능성을 일축하면서도 이 대표와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당내 쇄신 후”라는 전제만 남겨놨다. 장 대표와 이 대표는 통일교 특검 추진이란 특정 이슈를 토대로 제한적 연대를 진행하고 있다. 근본적인 연대 가능성은 장 대표와 이 대표가 바라보는 지지층이 달라서 “실제로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을 남긴다. 장 대표는 강경보수 결집을 위해 당 차원의 장외집회를 추진·주도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특유의 합리성을 토대로 보수 성향 청년을 결집해 개혁신당의 정치적 공간을 일궜다. 정치적 공간 자체가 다르고, 그 공간 사이에 벽도 크게 세워져 있다. 현실적으로 벽을 허물고 손을 잡을 수 있을지 근본적인 회의를 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 집단 사이에 세워진 벽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국민의힘이 12·3 비상계엄에 대한 당 차원 공식 사과와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공식화해 추진하면, 개혁신당은 근본적인 혼란에 처할 수 있다. 국민의힘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적 공간을 더 넓힐 수 있지만, 근본적인 차별화가 어려워진다. 이 경우 개혁신당은 “국민의힘과 별개로 왜 따로 존재해야 하느냐”는 의문에 그대로 노출된다. 장 대표에게도 깊은 딜레마를 안긴다. 강경 보수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추앙하고 있다. 사과·절연은 강경 보수가 정치적 영역화를 시도하던 장 대표에게 크게 반발하면서 선을 그을 것이다. 하지만 5개월 후 예정된 지방선거는 장 대표에게 외연 확장이란 숙제를 남긴다. 선거는 손 하나라도 더 있어야 수월하다. 그래서 사과나 절연을 하지 않으면, 개혁신당과의 선거 연대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우의 수 윤 딜레마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당원 게시판 의혹과 관련된 조사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친한(친 한동훈)계로 분류되는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선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가 당원권 정지 2년을 권고했다. 당원 게시판 의혹 조사 결과가 최종 발표되고, 한 전 대표에 대한 징계 권고에 이은 국민의힘 윤리위원회의 확정까지 이어지면,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에서 사실상 축출된다. 그렇다고 신당 창당이란 모험을 하기도 어렵다. 신당 창당이란 실험은 이 대표가 이미 치렀다. 이 대표는 지난 2023년 12월 국민의힘을 탈당했고, 다음 달 창당해 그로부터 석 달 후 총선을 치러 국회 의석 3석을 확보했다. 이 대표는 경기 화성을에서 사실상 개인기로 선거를 치러 창당 직후 지역구에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오는 6월엔 지방선거와 몇몇 지역구에 대한 재보궐선거만 진행된다. 정치의 중심지 국회에서 세를 확보하기 위한 선거가 아니다. 게다가 이 대표는 지난 2022년 국민의힘 대표로서 대통령·지방선거 승리를 주도했다. 반면 한 전 대표가 지휘했던 전국 단위 선거는 지난 2024년 총선이다. 당시 국민의힘은 108석만 확보하는 대형 참패를 당했다. 한 전 대표는 곧바로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사퇴했다. 한 전 대표가 ‘24시간 필리버스터’를 마친 장 대표를 위로한 한 이유로는 이 같은 현실적 상황이 거론된다. 하지만 장 대표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한 전 대표를 콕 집어서 “당내 인사와 연대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동의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고 저격했다. 이 발언은 사실상 한 전 대표의 항복을 요구하는 메시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 대표 입장에서도 창당된 지 불과 2년이 안 되는 개혁신당만으로는 지방선거를 치르기 어렵다. 그는 지난해 8월 국회에서 연찬회를 열어 “지방선거 후보자들이 300만원대 비용만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하겠다”며 “재보궐선거에서도 최소 2~3석을 확보할 수 있도록 조기 선거 구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개혁신당은 현실적으로 국민의힘과의 연대가 필요하다. 민주당의 세가 막강하므로 최소한 제한적·전략적 빅텐트를 쳐야 제한된 여건에서 최대한 많은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는 탓이다. 연대하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하면, 국민의힘이 개혁신당에도 일정 부분 책임론을 전가해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장·한·석 연대 좌충우돌 보수 대표 3인 각양각색 그런데 개혁신당은 이 대표와 국민의힘을 주도하는 친윤(친 윤석열)계와의 갈등 끝에 창당됐다. 친한(친 한동훈)계와도 언론을 통한 상호 공방을 거치면서 “보수의 적자는 누구냐”는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이 정서는 규모는 적지만 당과의 밀착도가 높은 개혁신당 지지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뚜렷한 명분을 제시하지 않고선 당원·지지자의 비난을 이겨내기는 사실상 어렵다. 소규모 정당 특성상 사비를 모아 유세차를 마련해 선거운동을 할 정도로 열성적인 당원·지지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표는 이미 개혁신당 창당 도중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연대하려다가 당원·지지자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후 이를 취소하는 홍역을 치렀다. 국민의힘과 연대를 추진하려면, 당원·지지자를 설득할 수 있는 명분도 제시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이 후보자 임명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강수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였던 지난 2월 “민주당은 진보가 아닌 중도보수”라면서 보수 공략 의지를 밝혔다. 이어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 ▲허은아 대통령비서실 국민소통비서관 ▲새누리당 김용남 전 의원 등이 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임명되거나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혜훈 후보자는 이 대통령이 받아들인 보수 출신 인사 중 가장 중량급이다. 그의 임명은 이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 시절 추진했던 이념적 동진 정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단 상징적 정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민주당과 관련해선 강력한 부산시장 후보자로 여겨지던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도 휩쓸려 사퇴하는 등 사건이 발생하자 “통일교 관련 의혹이 민주당에도 스며든 것 아니냐”는 의심이 강하게 제기됐다. 민주당 김병기 전 원내대표 관련 의혹도 크게 불거지고 있다. 민주당도 크게 흔들려 정치적 아노미 상태에 놓을 수도 있었다. 이 대통령의 이 후보자 임명은 이런 상황에서 발표됐다. 이 대통령의 강수는 ▲보수 포용 이미지 형성 ▲보수 분열 시도 ▲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시선 분산 등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지지부진한 상황을 거듭하는 국민의힘이 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장담하긴 어렵다. 그러던 중 국민의힘에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해 12월22일부터 3일 동안 전국 성인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발표한 전국 지표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율은 41%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20%로 집계됐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 내 국민의힘 지지율도 19%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텃밭서도 고작 19% 현재 국민의힘에 대해선 온갖 혼란·가설이 난무하는 상황에 이어 이 대통령의 강수를 접한 후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따라서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중도 확정은커녕 전통적인 텃밭이나 제대로 사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다수의 홍이포를 보유한 대군은 성을 포위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집필한 김훈 작가는 “안에서 무너지는 것이 더 두렵다”고 강조했다. 보수는 밖에서 무너질 것인가, 안에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되살아날 것인가?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