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용서 구하고 떠난 노태우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11.01 14:49:40
  • 호수 1347호
  • 댓글 0개

전두환과 같은 길 전두환과 다른 길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한 노 전 대통령이 지병 악화로 숨을 거뒀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6·29선언, 북방외교, 남북대화 등 업적이 많다. 하지만 12·12쿠데타, 거액의 비자금 은닉 등 과오도 적지 않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 병원에서 사망했다. 서울대병원 측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서울대 재택의료팀의 돌봄 아래 자택에서 지냈다. 전날 저산소증과 저혈압 증세를 보였고 다음날 오후 12시45분 응급실로 이송돼 1시간가량 치료를 진행했다. 

오랜 기간
병상 생활

응급실로 이송됐을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통증에 대한 반응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오후 1시46분경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노 전 대통령은 희소병인 다계통위축증과 천식 등으로 오랜 기간 병상 생활을 해왔다. 병원 측은 허약한 전신 상태 등이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이라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김연수 서울대 병원장은 “반복적인 폐렴과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었다”며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 저혈압을 보였고 오늘 오후 12시45분경 응급실에 방문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됐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족은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을 공개했다.

그는 유언장을 통해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기술했다. 아울러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에 의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남겼다.

유족 측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긴 말씀을 전해드린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렀으며 국립묘지 안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국가장을 주관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한다. 다만 조문객의 식사 비용과 노제·삼우제·49재 비용과 국립묘지가 아닌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

다음 날인 27일, 노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정·관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사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재계 인사 가운데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다. 상주에도 이름을 올린 최 회장은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 이제는 아무쪼록 영면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명예회장도 오후에 빈소를 찾아 고인을 깊이 추모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은 “중국과의 외교 등 여러 업적을 남기셔서 존경하는 분”이라고 언급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빈소 좌우는 문재인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가 보낸 근조 화환이 자리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 및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보낸 화환도 함께 놓였다.

다른 조문객들도 “과오가 있었지만 선진국의 기반을 닦고 현대사의 이정표를 세웠다”며 노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88 서울올림픽 유치 깊이 관여 
남북평화 통일 정책 적극 행보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씨와 어머니 김태향씨 사이에 첫째로 태어났다. 밑으로는 동생 노재우씨가 있다.

김씨가 임신했을 때 구렁이가 몸을 휘감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할아버지 노영수씨는 구렁이를 용이라 여겨 태아 이름을 태룡(泰龍)으로 지으려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시선을 끌까 두려워 ‘어리석을 우(遇)’ 자를 넣어 ‘태우’라고 작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7세가 되던 해, 부친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산 노 전 대통령은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해 맨발로 등교하기도 했다.

그는 1946년 2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전씨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지만, 재학 당시엔 서로 모르고 지냈다. 나중에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제야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8년 경북중학교(현 경북고) 4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5학년 때 성적은 218명 중 68등으로 상위권에 속했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장래희망이던 의사가 되길 포기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돼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들어갔고 이등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헌병학교 9기를 우등으로 졸업해 교수부로 발령받았는데, 그곳에서 5세 위인 김용희 소령(교수부장)을 만나서 우정을 쌓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51년 10월 김 소령의 추천으로 육사에 입학한다. 생도 시절 럭비부를 창단해 연승을 거두는 등 운동능력에도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1951년 육군사관학교 정규과정 1기생으로 들어가 김복동, 박병하 등을 만났고 ‘오성(伍星) 그룹’을 결성했다.

1955년 육사 11기로 임관한 노 전 대통령은 이듬해 육군 5사단 소대장(소위) 발령을 받아 사단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그 시절 친구 김복동 중위의 대구 집에 자주 들락거리다 그의 누이 김옥숙을 보고 반해 청혼했고 1959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궁핍했던
유년시절

같은 해 노 전 대통령은 먼저 진급한 전씨와 미국 유학길에 올라 6개월간 함께 생활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귀국 후 군 최대 파벌 ‘하나회’의 시작점이 된 육사 11기생 친목 모임 북극성회를 조직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군 대위 신분으로 전씨와 함께 후배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지지하는 ‘카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그 이후 노 전 대통령은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중령으로 진급한 1967년 베트남전쟁에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했을 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4년 1월 마침내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고, 1976년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며 청와대에도 입성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1978년에는 사단장으로 전출된 전 전 대통령을 대신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1979년 10·26사태가 터지자 노 전 대통령·전씨를 주축으로 한 신(新)군부는 차근차근 군을 장악해갔다. 상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명령 없이 병력을 출동시켰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사반란 모의와 실행에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전씨에 이어 사실상 2인자였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중장, 대장으로 연거푸 진급했고 이듬해 7월 군복을 벗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노 전 대통령은 당(민주정의당)과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2년 체육부·내무부 장관을 잇달아 맡았다.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깊이 관여해 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는 등 스포츠 외교에 앞장섰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로 당선된 후 전씨에 의해 대표 최고위원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받으며 5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1987년 전씨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그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신군부 세력 ‘2인자’ 이미지를 벗고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씨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얻어낸 승리였다. 

취임 1년 차였던 1988년 7월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북방외교에 시동을 걸었다. 분단 후 남북 화해 무드가 싹튼 결정적 계기였다. 

제5공화국
2인자 군림

같은 해 9월 열린 서울올림픽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이 됐고, 1990년 10월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은 이후 민생 치안 확립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1988년 치러진 4·26총선에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했다. 

당시 전씨는 국회 청문회장에 출석해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 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 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텄고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유럽 국가와 수교를 넓혀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 같은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유럽의 몰락, 미국의 세계 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하는 비밀 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비자금 조성…뇌물수수 혐의
일관성 없는 경제 정책 펼쳐

노 전 대통령이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술회했던 그는 1990년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기여했다. 이는 김영삼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동시에 호남을 배제한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는 시위 등 온갖 불만이 표출됐던 시기로 ‘민주화’라는 타협이 불가피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용납하지는 않지만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십’으로 완충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3당 합당이 호남 차별주의로 이어지고 지역주의가 더욱 강화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3당 합당은 정치적으로는 승리지만 호남 등 지역 간 감정을 심화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제 분야의 점수도 높게 받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초기 국내 경제는 3저(저유가, 저금리, 저달러)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전두환정부로부터 무역흑자 기조를 이어받았지만,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으로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수서 택지 분양 사업, 율곡사업(차세대 전투기 및 무기도입 사업)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에까지 섰다. 이 같은 재벌과의 유착으로 정권 초기 시도했던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정의실천을 위한 개혁 추진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은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 지난 4월 노 전 대통령은 호흡곤란으로 위독해지자 119 구급대가 긴급출동한 바 있다. 당시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SNS에 부친의 상태를 언급하기도 했다.

노 관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인내심’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며 “(아버지의 병명이)소뇌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인데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 이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운을 뗐다. 

‘보통 사람’
빛과 그림자

그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지만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며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어 “어머니의 영혼과 몸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아버지를 섬기셨다”는 말로 노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 여사가 남편을 간호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렸다. 아울러 “지상에서 아버지께 허락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셨다. 인내심”이라고 글을 맺었다.



배너

관련기사

34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