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용서 구하고 떠난 노태우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11.01 14:49:40
  • 호수 13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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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같은 길 전두환과 다른 길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한 노 전 대통령이 지병 악화로 숨을 거뒀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6·29선언, 북방외교, 남북대화 등 업적이 많다. 하지만 12·12쿠데타, 거액의 비자금 은닉 등 과오도 적지 않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 병원에서 사망했다. 서울대병원 측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서울대 재택의료팀의 돌봄 아래 자택에서 지냈다. 전날 저산소증과 저혈압 증세를 보였고 다음날 오후 12시45분 응급실로 이송돼 1시간가량 치료를 진행했다. 

오랜 기간
병상 생활

응급실로 이송됐을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통증에 대한 반응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오후 1시46분경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노 전 대통령은 희소병인 다계통위축증과 천식 등으로 오랜 기간 병상 생활을 해왔다. 병원 측은 허약한 전신 상태 등이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이라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김연수 서울대 병원장은 “반복적인 폐렴과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었다”며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 저혈압을 보였고 오늘 오후 12시45분경 응급실에 방문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됐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족은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을 공개했다.

그는 유언장을 통해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기술했다. 아울러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에 의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남겼다.

유족 측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긴 말씀을 전해드린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렀으며 국립묘지 안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국가장을 주관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한다. 다만 조문객의 식사 비용과 노제·삼우제·49재 비용과 국립묘지가 아닌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

다음 날인 27일, 노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정·관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사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재계 인사 가운데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다. 상주에도 이름을 올린 최 회장은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 이제는 아무쪼록 영면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명예회장도 오후에 빈소를 찾아 고인을 깊이 추모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은 “중국과의 외교 등 여러 업적을 남기셔서 존경하는 분”이라고 언급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빈소 좌우는 문재인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가 보낸 근조 화환이 자리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 및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보낸 화환도 함께 놓였다.

다른 조문객들도 “과오가 있었지만 선진국의 기반을 닦고 현대사의 이정표를 세웠다”며 노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88 서울올림픽 유치 깊이 관여 
남북평화 통일 정책 적극 행보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씨와 어머니 김태향씨 사이에 첫째로 태어났다. 밑으로는 동생 노재우씨가 있다.

김씨가 임신했을 때 구렁이가 몸을 휘감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할아버지 노영수씨는 구렁이를 용이라 여겨 태아 이름을 태룡(泰龍)으로 지으려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시선을 끌까 두려워 ‘어리석을 우(遇)’ 자를 넣어 ‘태우’라고 작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7세가 되던 해, 부친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산 노 전 대통령은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해 맨발로 등교하기도 했다.

그는 1946년 2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전씨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지만, 재학 당시엔 서로 모르고 지냈다. 나중에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제야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8년 경북중학교(현 경북고) 4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5학년 때 성적은 218명 중 68등으로 상위권에 속했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장래희망이던 의사가 되길 포기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돼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들어갔고 이등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헌병학교 9기를 우등으로 졸업해 교수부로 발령받았는데, 그곳에서 5세 위인 김용희 소령(교수부장)을 만나서 우정을 쌓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51년 10월 김 소령의 추천으로 육사에 입학한다. 생도 시절 럭비부를 창단해 연승을 거두는 등 운동능력에도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1951년 육군사관학교 정규과정 1기생으로 들어가 김복동, 박병하 등을 만났고 ‘오성(伍星) 그룹’을 결성했다.

1955년 육사 11기로 임관한 노 전 대통령은 이듬해 육군 5사단 소대장(소위) 발령을 받아 사단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그 시절 친구 김복동 중위의 대구 집에 자주 들락거리다 그의 누이 김옥숙을 보고 반해 청혼했고 1959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궁핍했던
유년시절

같은 해 노 전 대통령은 먼저 진급한 전씨와 미국 유학길에 올라 6개월간 함께 생활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귀국 후 군 최대 파벌 ‘하나회’의 시작점이 된 육사 11기생 친목 모임 북극성회를 조직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군 대위 신분으로 전씨와 함께 후배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지지하는 ‘카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그 이후 노 전 대통령은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중령으로 진급한 1967년 베트남전쟁에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했을 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4년 1월 마침내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고, 1976년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며 청와대에도 입성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1978년에는 사단장으로 전출된 전 전 대통령을 대신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1979년 10·26사태가 터지자 노 전 대통령·전씨를 주축으로 한 신(新)군부는 차근차근 군을 장악해갔다. 상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명령 없이 병력을 출동시켰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사반란 모의와 실행에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전씨에 이어 사실상 2인자였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중장, 대장으로 연거푸 진급했고 이듬해 7월 군복을 벗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노 전 대통령은 당(민주정의당)과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2년 체육부·내무부 장관을 잇달아 맡았다.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깊이 관여해 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는 등 스포츠 외교에 앞장섰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로 당선된 후 전씨에 의해 대표 최고위원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받으며 5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1987년 전씨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그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신군부 세력 ‘2인자’ 이미지를 벗고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씨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얻어낸 승리였다. 

취임 1년 차였던 1988년 7월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북방외교에 시동을 걸었다. 분단 후 남북 화해 무드가 싹튼 결정적 계기였다. 

제5공화국
2인자 군림

같은 해 9월 열린 서울올림픽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이 됐고, 1990년 10월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은 이후 민생 치안 확립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1988년 치러진 4·26총선에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했다. 

당시 전씨는 국회 청문회장에 출석해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 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 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텄고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유럽 국가와 수교를 넓혀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 같은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유럽의 몰락, 미국의 세계 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하는 비밀 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비자금 조성…뇌물수수 혐의
일관성 없는 경제 정책 펼쳐

노 전 대통령이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술회했던 그는 1990년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기여했다. 이는 김영삼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동시에 호남을 배제한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는 시위 등 온갖 불만이 표출됐던 시기로 ‘민주화’라는 타협이 불가피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용납하지는 않지만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십’으로 완충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3당 합당이 호남 차별주의로 이어지고 지역주의가 더욱 강화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3당 합당은 정치적으로는 승리지만 호남 등 지역 간 감정을 심화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제 분야의 점수도 높게 받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초기 국내 경제는 3저(저유가, 저금리, 저달러)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전두환정부로부터 무역흑자 기조를 이어받았지만,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으로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수서 택지 분양 사업, 율곡사업(차세대 전투기 및 무기도입 사업)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에까지 섰다. 이 같은 재벌과의 유착으로 정권 초기 시도했던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정의실천을 위한 개혁 추진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은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 지난 4월 노 전 대통령은 호흡곤란으로 위독해지자 119 구급대가 긴급출동한 바 있다. 당시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SNS에 부친의 상태를 언급하기도 했다.

노 관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인내심’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며 “(아버지의 병명이)소뇌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인데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 이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운을 뗐다. 

‘보통 사람’
빛과 그림자

그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지만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며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어 “어머니의 영혼과 몸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아버지를 섬기셨다”는 말로 노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 여사가 남편을 간호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렸다. 아울러 “지상에서 아버지께 허락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셨다. 인내심”이라고 글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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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1조4000억’ 세운5구역 재개발 이사 없는 이사회 미스터리

[단독] ‘1조4000억’ 세운5구역 재개발 이사 없는 이사회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조4000억원 규모 초대형 사업에 ‘변수’가 등장했다. 사업 진행 과정에서 불거진 절차적 정당성에 시비가 붙었다. 법정 공방으로 비화됐던 문제는 이제 결론만 남은 상태다. ‘모로 가도 수익만 내면 된다’는 재개발·재건축 시장에 브레이크가 걸릴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5-1구역, 5-3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이하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재 확인된 소송만 ▲손해배상 청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이사회 결의 부존재 또는 무효 확인 등 3건에 이른다. 겉으로는 순탄하게 진행 중인 듯한 사업의 이면에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일요시사> 1539호 ‘<단독> 1조4000억원 세운5구역 재개발 복마전’(https://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250331) 기사 참조). 꼬리에 꼬리 사법 리스크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은 서울 중구 산림동 190-3번지 일원 7672㎡ 부지에 지상 37층 규모의 업무복합시설을 짓는 프로젝트다. ㈜이지스자산운용이 주주로 참여 중인 세운5구역 피에프브이(PFV)가 시행을, GS건설이 시공을 맡고 있다. 태영건설이 시공권과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워크아웃에 돌입한 이후 GS건설이 인수했다. 대신자산운용이 업무시설에 대한 선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선매입 가격은 3.3㎡당 3500만원가량으로 계약금으로만 700억원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지스자산운용에 따르면, 현재 사업은 철거 단계로 예정대로 2030년에 개발이 끝나면 연면적 13만㎡가 넘는 최상급 오피스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문제는 몇 년째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는 ‘사법 리스크’다. 검찰, 경찰에 고발된 몇몇 사건은 종결됐지만 일부는 법정 공방으로 번졌다. 눈여겨볼 대목은 송사에 휘말린 이들이 현재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아무런 지분이 없는 ‘외부인’이라는 사실이다. 사업 초창기 기틀을 닦은 이른바 ‘개국공신’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지금은 연결고리가 없는 상태다. 그런데도 이들의 송사에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이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유는 시행을 맡은 이지스자산운용이 연루돼있기 때문이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자금 조달 역할로 합류했다. 부동산 매매, 분양 등을 하는 업체 대표 염모씨와 부동산 개발 관리 등을 하는 업체 공동대표 오모씨, 권모씨 등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토지 매입 자금이 부족해지자 이지스자산운용을 끌어들였다.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만남에서 “(사업에 합류할 무렵 인허가 문제 등이) 어느 정도 진행돼있었고 저희가 투자하기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투자해 진행하면 안정권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해 진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염씨가 대표로 있는 연합와이앤제이(이하 연합)와 이지스자산운용은 2019년 1월 공동사업 약정을 맺었다. 지분은 50대 50으로 맞췄다. 여기에 연합은 오씨, 권씨, 최씨, 박 전 이사 등과 따로 공동사업 약정을 맺었다. 지분 구조는 연합 50%, 오씨 30%, 권씨 10%, 최씨 7%, 박 전 이사 3% 등으로 구성됐다. 2030년 13만㎡ 업무복합시설 법정 공방 최소 3건 진행 중 2019년 6월 연합, 이지스자산운용, 국민은행(이지스펀드의 신탁사), 생보부동산신탁(현 교보자산신탁) 등은 주주협약서를 작성하고 ㈜세운5구역 PFV를 설립했다.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위한 시행사가 정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당시 지분 구조는 연합 47.1%, 이지스자산운용(17.2%)+이지스펀드(29.9%) 47.1%, 생보부동산신탁 5.8% 등이다. 대표이사는 염씨가 맡기로 했고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은 각 2명씩 이사를 추천해 총 4명으로 이사회가 구성됐다. 연합 측에서는 염 대표와 박 전 이사가 이사로 참여했다. 이 구성은 박 전 이사가 2020년 8월14일 이사직을 사임할 때까지 유지됐다. 이후 염 대표가 이지스자산운용에 지분을 넘기고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서 빠져나왔다. 현재 진행 중인 소송은 염 대표가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서 손을 떼는 과정에서 오간 돈, 이지스자산운용이 오씨와 권씨, 최씨 등에게 준 돈을 두고 불거졌다. 염 대표가 받은 378억원, 오씨 등 3명 등이 받은 94억원 등 약 480억원을 둘러싸고 소유권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세운5구역 PFV, 이지스자산운용은 돈을 지급한 주체라 송사에 연루돼있다. 이 소송은 당시 사업의 지분 구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시작됐기에 어떤 결론이 나오든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최근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소송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동안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이사회 관련 소송이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는 것. 세운5구역 PFV 4명의 이사 가운데 1명이었던 박 전 이사는 2023년 9월 ‘이사회 결의 부존재 또는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6월20일부터 2020년 8월14일까지 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이사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 기간 세운5구역 PFV가 진행했다고 알려진 이사회는 16번이다. 480억원 두고 초기 멤버 갈등 박 전 이사는 “세운5구역 PFV는 상근 직원이 없고 등기임원의 보수도 없는 특수목적법인으로, 이사회는 업무 집행의 법률적 효력과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가장 중요한 기구이자 어쩌면 회사 그 자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사회가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진행됐으니 그 결의 내용은 무효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운5구역 PFV는 명목상 구성된 페이퍼컴퍼니였던 만큼 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실질적인 경영 주체(이지스자산운용), 총괄 관계자가 책임져야 한다. 리모컨을 누른 사람(이지스자산운용)이 문제지, 리모컨(세운5구역 PFV)이 잘못이 아닌 것과 같다”며 “14개월 동안 이사로 재직하다가 정기총회도 거치지 않고 중도 사퇴한 건 더 가다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릴 것 같아서였다”고 털어놨다. 박 전 이사는 이사회가 실제로 진행되지 않고 서류 작업을 통해 조작됐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상법에 따르면 이사회는 대면 혹은 컨퍼런스 콜 등의 방식으로 진행하게 돼있다. 어디에도 서면으로 진행해도 된다는 문구는 없다. 대표이사였던 염씨가 이사회를 소집 통지하는 과정에서 보낸 공문에도 정확하게 기재돼있다”고 주장했다. 상법 제391조(이사회의 결의방법)에 따르면 이사회 결의는 이사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이사의 과반수로 해야 한다. 다만 정관으로 그 비율을 높게 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정관에서 달리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사회는 이사의 전부 또는 일부가 직접 회의에 출석하지 않고 모든 이사가 음성을 동시에 송·수신하는 원격통신 수단에 의해 결의에 참가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 <일요시사>가 입수한 ‘세운5구역 피에프브이 주식회사 이사회 소집통지’ 공문에 따르면 2020년 3월27일 오전 11시 이지스자산운용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진행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방법’ 부분에 ‘직접 참석 or 컨퍼런스 콜’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방어 근거 무너지나 박 전 이사는 해당 이사회에 참석한 적 없지만, 자신의 막도장을 이용해 의결이 이뤄진 것처럼 꾸몄다고 주장했다. 이사회 당일 다른 곳에 있던 적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박 전 이사는 “2019년 3차 이사회 이사록을 보면 그해 10월31일 재적 이사 전원 출석으로 이사회가 개최된 것으로 기재돼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지인들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서 스크린 골프를 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1시간가량 차이 나는 곳에 있던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사회 결의는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박 전 이사는 이 내용을 가지고 서울영등포경찰서에 염 대표 등을 ‘배임’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박 전 이사가 재직 당시 이사회 소집이나 의사록 작성 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실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불송치 처분했다. 박 전 이사는 “사후에 통보식으로 이사회 의결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이사회 자체의 절차적 하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검찰은 물론 염 대표, 이지스자산운용 모두 물리적 행위 자체가 없었던, 그래서 의결 자체가 무효인 이사회를 무기로 각종 고소·고발건을 방어해 왔다”며 “이사회에서 특별 결의사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본인들이 체결한 공동사업약정서 등에 기재돼있는데도 그조차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이사는 세운5구역 PFV가 토지를 매입하는 내용을 안건으로 다룬 이사회가 가장 문제라고 지적했다.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이 맺은 공동사업약정서에 따르면 ‘승인된 사업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자본적 지출’은 이사회 특별 결의사항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 특별 결의사항은 재적 이사 전원의 동의로 의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법원 절차적 하자 인정하면 사업 자체 흔들릴 가능성도 연합 등이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땅값 부풀리기’ 의혹이 제기됐다. 염 대표와 오씨 등이 재개발 구역의 땅을 사는 과정에서 특수관계인을 이용해 비싼 값에 매입했다는 의혹이다. 시행사가 직접 원주민에게 토지를 사는 방식이 아니라 그사이에 특수관계인을 끼워 넣어 차익을 봤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불기소의 근거 중 하나로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언급한 바 있다.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도 <일요시사>와의 만남에서 “땅값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재개발사업에서는 토지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협의에 따라 하는 것이지, 정확한 시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너무 비싸게 샀다면 의사결정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의사회 결의는 무조건 다 있었고 더 큰 의사결정은 주주총회를 통해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 전 이사의 주장대로 이사회의 절차적 하자가 인정돼 그 존재 자체가 무효가 된다면 결의 내용 역시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사회 관련 소송에 증인으로 참석한 당시 세운5구역 PFV 이사의 발언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4명의 이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가 같은 이사였던 박 전 이사를 ‘전혀 모른다’는 취지로 증언한 것이다. 대면 혹은 컨퍼런스 콜 등 온·오프라인 이사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박 전 이사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박 전 이사는 “내가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런데 서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다. 만나기는커녕 전화 한 통 한 적 없다. 세운5구역 PFV 측은 그제야 대면 결의는 없었다고 인정하면서 서면 결의도 인정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조합에 서면으로 이사회 결의를 한다고 말하면 조합장이 당장 쫓겨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지스자산운영 측은 “해당 건은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으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답변드리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리며 향후 법적 과정에서 투명하게 밝혀질 수 있도록 성실히 소명할 계획”이라고 입장을 전해왔다. 1심 판결 곧 나온다 일각에서는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에 위반될 소지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경험이 풍부한 한 관계자는 “SPC가 설립되고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사회 문제가 불거진 만큼 소송 결과에 따라 주무 관청의 인허가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