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비자금 환수 ‘독립몰수제’ 막전막후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5.08.21 09:02:54
  • 호수 15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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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눈 멀어···제 발등 찍은 노소영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노태우 일가의 비자금 실체 규명에 관한 목소리가 국회·학계·정부에서 커지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SK 회장 간의 이혼소송에서 ‘신군부의 자금이 SK그룹의 밑바탕이 됐다’고 인정되면서다.

노태우 비자금은 지난해 노소영 관장이 재산 분할 소송에서 904억원의 비자금 흔적이 담긴 ‘김옥숙 메모’를 증거로 제시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노 관장 측은 “부친의 300억원이 SK에 흘러가 그것이 SK를 키웠다”고 주장하며 그 300억원의 가치가 현재 기준 1조3808억원에 이른다는 항소심 재판부 판결을 이끌었다.

법안 발의
급물살

이혼소송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1조원 재산 분할 판결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환수를 위한 ‘독립몰수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정부와 학회는 내란 등 국가 폭력 범죄로 대물림된 불법 자금을 취한 범죄자를 사망 등 이유로 기소하지 못해도 범죄수익을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독립몰수제 법안 발의를 추진 중이다.

이르면 올해 안에 관련 법안이 통과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박균택 의원(더불어민주당, 광주 광산갑)은 지난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가 폭력범죄로 인한 범죄수익 환수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최근 박 의원은 ‘범죄수익은닉처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해 내란과 같은 국가 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당사자 사망, 공소시효 만료 등에도 범죄수익을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범 개정을 추진 중이다.


발제자로 나선 박재평 교수(충남대 로스쿨)는 “공권력의 조직적 개입 등으로 실체가 드러나기 어려운 국가범죄처럼 기소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 범죄수익을 환수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례 역시 몰수나 추징 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해 실질적인 몰수 요건이 충족됐더라도 유죄 판결 자체가 불가능하면 허용하지 않고 있다.

법무부 국제형사과 전성환 검사는 토론 세션에서 “범죄수익의 해외 유출이 많은데 확정 판결까지 기다리면 실효적으로 환수가 어렵다”고 현행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법무부도 올해 업무보고에 독립몰수제를 반영해 적극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국가범죄 저지른 자와 상속인 추징
여권발 법안 정기국회서 논의 본격화

전 검사는 “독립몰수제는 미국·영국·독일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태국·페루 등 국가가 보편적으로 도입한 필수 제도”라며 “국가 폭력범죄뿐만 아니라 마약, 금융 사기 등 민생 침해 범죄로까지 독립몰수제 도입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몰수제 도입 논의는 40년 넘게 해결하지 못한 신군부 비자금에 대한 사회적 분노에서 촉발됐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주도한 신군부는 1979년 12·12 쿠데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거쳐 정권을 차지한 후 10년 넘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1조원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

두 대통령은 ‘정치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기업인들로부터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을 챙겼고 전두환은 2205억원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867억원을 미납했다.

정부는 올해 초 ‘전두환 자택’ 소유권 이전 소송에서 당사자 사망을 이유로 패소하는 등 추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추징금 2628억원을 완납한 것으로 알려진 노태우 비자금은 지난해 딸 노 관장의 재산 분할 소송에서 불거졌다.


토론자로 나선 더불어민주당 강성필 부대변인은 “노태우 비자금을 재산 분할 근거로 삼아 노소영에게 1.3조원을 주는 것은 국가가 불법 비자금을 제도권으로 인정해준 것”이라며 “재산 분할이 아닌 국고로 환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검은돈
승계 의혹

지난해 국정감사 등에서도 김옥숙 여사가 210억원의 차명 보험금을 납부하거나, 아들 노재헌이 운영하는 재단에 147억원을 기부하는 등 다수의 비자금 운영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시민단체 등의 고발도 이어져 검찰이 관련 의혹에 대해 수사 중이다.

이에 따라 독립몰수제가 도입되면 수사기관의 신군부 비자금 환수 움직임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박준태 의원(국민의힘)과 장경태 의원(민주당)은 비자금 환수 관련 법리적 근거를 뒷받침하는 법안을 발의해 여야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박성훈·송석준 의원(국힘), 김영환·김승원 의원(민주당) 등 노태우 비자금 관련 질의가 쏟아졌다.

지난 국감에서 김옥숙의 차명 보험 210억원을 최초로 폭로했던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간담회 축사를 통해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라며 “부정한 자산을 환수하는 것이 정의의 실현이며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라고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의 비자금 환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도 축사에서 “노태우 일가의 900억원대 추가 비자금 정황이 드러났지만 추징금 완납을 이유로 사실상 면죄부를 받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지적한 뒤 관련 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담회를 주최한 박균택 의원은 “12·3 불법 비상계엄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독립몰수제를 도입해 부정 축재 재산을 끝까지 환수해야 한다”며 “관련 법안 통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해외는 당연
우리만 이제

독립몰수제 법안 추진은 이재명정부에서도 적극적이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지난 5월 광주 5·18 기념식에서 “국가 폭력 또는 군사 쿠데타 시도는 철저하게 처벌하고 소멸 시효를 없애서 상속자들에게도 민사상 배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독립몰수제’ 도입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 역시 인사청문회 당시 독립몰수제 도입 필요성에 대한 박 의원의 질의에 “양형체계에 변화를 주는 것으로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사망이나 피의자 특정 불가 등으로 범죄수익이 일실되지 않도록 (독립몰수제)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비자금 환수는 국민적 공감대가 높은 역사적 과제다. 강성필 부대변인은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몰수법의 취지에 찬성하는 비율은 85%에 달하며, 이 가운데 소급 적용을 통해 원금과 수익까지 모두 적극 환수해야 한다는 응답이 70%에 달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허연식 5·18기념재단 위원은 “과거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과정에 신군부 비자금에 대한 유의미한 제보들이 있었지만 입법적 한계로 조사에 착수하지 못했다”면서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지금이라도 실현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국회의 실질적인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박진우 5·18기념재단 기록진실부장은 “몰수한 금액들을 향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더 논의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5공화국뿐 아니라 6공화국, 노태우정권에서 진행돼 축적한 것으로 알려진 비자금의 규모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의견이다.

사망·은닉으로 못 찾는 현행법
‘끝까지 받아내는’ 법 도입 필요

전문가들은 독립몰수제가 단순히 재산만 몰수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게 아닌 실제 비자금이 어떻게 조성됐고, 나눠졌고 어떻게 쓰여졌는지, 또 어떻게 은닉됐는지까지 철저한 조사가 동시에 같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독립몰수제는 신군부의 비자금 환수에만 필요한 것이 아닌 해킹, 보이스피싱, 대규모 금융 사기 등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위협하는 많은 민생 침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법안이기도 하다.

전성환 법무부 국제형사과 검사는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위협하는 많은 민생 침해 범죄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범죄자들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하거나 이들이 해외에 체류하는 등 소재 불명이라는 이유로 기소 중지가 되어 사건이 중단되거나 수사 또는 재판이 장기화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존재한다”며 “이 경우 범죄수익이나 피해자들의 피해금이 발견되더라도 법원의 몰수 증인 판결을 받을 수가 없어서 국가가 범죄수익을 환수하기 어렵고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은 더욱 불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최근 대부분의 범죄수익은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 이 같은 해외 유출 범죄수익을 실효적으로 환수하기 위해서는 범죄인에 대한 국내 확정 판결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독립몰수제도를 통해 신속히 법원의 몰수 판결문을 받아 대상국에 공조 요청을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2025년 1월 업무계획에 독립몰수제 도입 추진을 포함시켰다. 독립몰수제 도입은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자 법무부 장관의 주요 추진 사항 중 하나로, 이에 법무부도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 대통령
공약으로

독립몰수제도는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국가가 도입하고 있는 제도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선진 제도라기보다 이미 대부분의 국가가 유지하고 있는 보편 필수적인 제도다. 국회와 정부, 학계 등이 독립몰수제 도입 필요성에 적극 공감함에 따라 관련 법안이 연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smk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학생들도 아는 노태우 비자금

지난 6월 경기대학교의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초청 행사가 갑작스럽게 취소됐다.

노 관장은 지난 6월16일 오후 경기대 예술대학을 찾을 예정이었으나 그가 예정 시간 직전에 불참을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표면적으로는 노 관장의 건강상 이유였지만, 대학 캠퍼스에 대자보가 붙고 반대 시위가 예정돼 있는 등 학생들의 반발이 잦아들지 않은 게 큰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실제 ‘노소영 관장님의 경기대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인사말이 적힌 플래카드가 교내에 걸리자 학생들은 즉각 반발했다.

학생들은 “노소영은 독재자 노태우의 딸로, 이혼소송 과정에서조차 ‘선경 300억’이라는 메모와 50억원짜리 약속어음 6장을 제출해 비자금의 실체를 스스로 인정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이 비자금은 온전히 규명되지 않았고, 은닉재산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며 “그런 인물이 학문과 진실의 공간인 대학에 발을 들이려는 것도 모자라, 이를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경기대 재학생 일동’이라는 허위 명의까지 동원되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내에 걸린 ‘노소영 초청 규탄’ 대자보엔 “계엄의 악몽” “군사독재의 수혜자이자, 불법 비자금 은닉 의혹의 중심” 등 비판 글이 적혔다.

노 관장 방문 예정일 당일엔 학생들의 시위도 계획됐다.

결국 노 관장의 경기대 방문은 취소됐지만 쿠데타로 헌정 질서를 파괴한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불법 비자금을 감춰두고 대를 이어 부를 누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대학가로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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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