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비자금’ 국세청 조사 플랜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5.07.31 14:36:59
  • 호수 1542호
  • 댓글 0개

노씨 일가 향하는 재계 저승사자

[일요시사 취재2팀] 김성민 기자 = 더불어민주당 임광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세청장으로 취임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문제가 재조명됐다. 앞서 임 청장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노태우 비자금’ 문제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고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하기 위해 모친 김옥숙 여사가 가지고 있던 ‘선경 300억’ 메모를 증거로 제출했다. 비자금 존재를 스스로 알리게 되면서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다.

‘선경 300억’
메모 의혹

지난 재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최근 진행된 인사청문회를 통해 연일 ‘노태우 비자금’ 문제가 불거졌다. 지난 1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영환 의원은 “국세청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자산이 증여·대여·상속의 형태로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끝까지 추적해 조세 정의를 살려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당시 임광현 국세청장 후보자도 조세 정의 실현에 공감을 표했다. 서울청장과 국세청 차장 등을 지낸 임 청장은 지난해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뒤 “혐의가 나왔는데,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며 국세청을 상대로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강력한 조사를 주문한 바 있다.

노태우 비자금 논란이 재차 불거진 것은 9개월여 만이다. 지난해 5월 말 노 관장이 이혼소송에서 ‘선경 300억’ 메모를 제시하며 ‘이 돈이 기업 성장의 종잣돈이 됐기 때문에 노 관장의 기여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재산분할 1조3808억원 지급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후 같은 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비자금 문제가 뜨겁게 논의됐으나, 탄핵 국면 등 혼란스러운 상황 속 관심권에서 벗어났다. 그간 시민단체는 노 관장의 불법 비자금 은닉 의혹 관련 고발을 이어나가는 등 실체 규명 목소리를 키웠다.

노태우 비자금 논란이 재조명되면서 노 관장 등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가 이뤄질지도 관심사다. 임 청장의 발언을 고려했을 때 당국의 조사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다. 노 전 대통령 일가와 관련해 접수된 고발 건은 7건 이상이지만, 조사는 지지부진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소환 조사 없이 자금 흐름만 파악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임 청장은 지난해 노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드러난 노태우 비자금에 대해 상속세 세무조사를 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임 청장은 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인 지난해 7월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세청 업무보고에서 “빨리 조사해서 이것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효한 채권인지 차명 재산인지, 증여인지 밝혀야 한다”며 “법원 재판 기록에서 탈루 혐의가 나왔기 때문에 세무조사 착수 근거가 된다”고 강민수 전 국세청장에 촉구했다.

진땀 빼는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관장
이혼소송서 무리수 둔 부친 검은돈

노 관장 이혼소송 항소심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1991년 고 최종현 SK 회장에게 300억원가량의 금전적 지원을 한 다음 증빙으로 약속어음 네 장을 받았다고 봤다. 또 항소심 법원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고 김석원 쌍용 회장에게 200억원을 맡기고 받은 돈이 차용증과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300억원이 노 전 대통령이 최 회장에게 공짜로 준 돈(증여)이라면, 돈을 준 시점이 1991년이기에 세무조사를 할 수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국세청이 ‘인지한 날로부터 1년’간 과세가 가능하다고 법규가 마련돼있지만, 이렇게 제도를 정비한 시점이 1991년이기에 ‘인지한 날로부터 1년’ 요건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최 회장에게 빌려준 돈(채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채권채무는 소멸하기 전까지 계속 살아있고, 채권자가 죽어도 자녀가 채권상속을 포기하지 않으면 자녀에게로 채권이 승계된다.

노 전 대통령이 2021년 사망한 후 그 권리는 노소영 측으로 넘어가게 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국세청은 그 채권이 상속 재산인지 세무조사로 확인해야 한다.

당시 임 청장은 “증여라면 최종현 회장이 그 당시 300억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에 대해 증여세를 탈루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명망 있는 기업가가 탈세자라는 것에 대해서 그 후손과 회사가 인정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본다”고 전제를 달았다.

이어 “재판 기록에서 보듯이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당시 선경(SK의 옛 이름)에 300억원 주고받은 증빙들 약속어음 네 장과 선경 300억원이라고 쓴 메모를 이렇게 오랜 시간 왜 보관했겠나. 이것은 우리 재산이다. 나중에 딴소리할 수 있으니 증거로 가지고 있자. 그런 의도로 보는 게 타당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또 “빨리 세무조사 착수해서 계좌 추적하고, 자료 제출 요구하고, 당시 관계자들에게 문답서를 받아야 한다. 혐의가 나왔는데도 방치했다가 조세채권을 일실하게 되면 책임 문제가 있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촉구했다.

임 청장은 국세청 조사국장을 지난 고위 공무원 출신 정치인으로 국세청 재직 당시 세무조사 관련 최고의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신임 청장
강력 의지

업무보고에서 강 전 청장은 “차용증 내지 약속어음에 대해선 저희가 재판을 보도된 내용만 봤기 때문에 그 부분이 명확히만 된다면 세무조사에 착수할 수 있다. 다만, 특정 건에 대해서 하겠다, (단정적으로) 말씀 못 드리고, 아시다시피 국세청에서 과세해야 할 내용이라면 당연히 과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원칙론으로 답했다.

이에 임 청장은 국세청에서 법원에 최태원-노소영 재판 기록이나 제출된 증거, 협조 요청했는지 물었다. 상당한 수준의 탈루 혐의가 포착된 경우 국세청은 각 기관에 과세 명목으로 자료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 거꾸로 탈루 혐의가 포착됐음에도 아무 조처를 하지 않으면 책임·업무 방기에 해당한다.

국회 상임위 업무보고에서 말이 나온 만큼 국세청이 간과하는 건 매우 어렵겠으나, 임 청장은 조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법원 재판 과정에서 인정된 사실만으로는 과세하기 어렵고, 과세를 완성하려면 세무조사를 통해 추가 증빙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옛날 일인 만큼 재판 자료를 빨리 확보해 관련자가 누군지, 어떤 계좌로 돈이 들어갔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가 신임 국세청장으로 복귀한 만큼 ‘노태우 비자금’ 조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강 전 청장은 “말씀하신 대로 법령 검토, 시효 검토 등 여러 부분을 저희가 해보고 과세해야 할 건이면 당연히 (세무조사)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임 청장은 “저는 전직 대통령의 정직하지 못한 자금, 국가에 추징됐어야 할 자금, 그러나 추징되지 못한 자금, 이 자금에 대해서 국세청에서 조세 정의 차원에서 국민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차원에서 세금으로라도 환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실력 발휘할 것을 재차 촉구했다.

당시 송언석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은 “국세청에서 실력 발휘하는 것은 참 중요한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들은 굉장히 걱정스러운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같다”며 어깃장을 놨다. 송 기재위원장은 국민의힘 의원이자, 기재부 2차관의 예산 관료 출신이다.

“국고 환수
반드시 필요”

임 청장 외에도 지난 1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정성호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는 여당 의원들의 비자금 환수 필요성이 지속해서 강조됐다.

정 후보자는 비자금 환수 필요성을 묻는 질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장경태 의원은 “‘노태우 비자금’을 끝까지 처벌하고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 5·18 정신”이라며 “비자금이 회수될 수 있도록 법무 행정에 신경 써달라”고 요청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5·18기념재단 등 ‘오월단체’도 지지부진했던 세무 당국의 조사 및 환수 움직임이 빨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단체들은 지난 16일 ‘정성호·임광현 후보자 발언 환영 입장문’을 내고 “이혼소송에서 확인된 비자금, 김 여사의 대규모 보험료 납부·기부 활동 등 새로운 단서가 나오고 있다.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며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국가 권력을 불법적으로 찬탈하고, 그 지위를 이용해 거액의 부정 축재 재산을 형성했다. 이들 재산은 국민의 고통과 희생 위에 쌓인 불의의 산물이다. 은닉 및 세대 승계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단체들은 ▲법무부와 국세청의 신군부 세력 및 일가의 재산 흐름 전면 재조사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검찰의 적극적인 수사 ▲국세청의 은닉 재산 증여·상속·대여 여부 확인과 추적 ▲독립 몰수제 등 국회의 신속한 법 개정 등을 촉구하고 있다.

불법 비자금 관련 조사와 환수 등에 속도를 붙을 것으로 유력하게 점쳐지는 이유는 해당 내용이 이재명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기도 해서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월 대선후보 시절 5·18 민주화운동 4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국가 폭력, 군사 쿠데타 시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처벌하고, 소멸시효를 없애 상속자들에게도 민사상 배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명정부 사활 건 모양새
여야 막론 조사 찬성 분위기

앞서 시민단체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추진환수위원회(환수위)는 이재명정부 출범 직후 노 관장 등 노 전 대통령 일가 수사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환수위는 “국민이 선택한 이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노 전 대통령 은닉 비자금 등 군사정권 과거사를 끝까지 해결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제 국민의 염원인 군사정권 과거사 청산을 최우선으로 해결해 달라”며 “지금, 과거 청산은커녕 청산돼야 할 과거는 더욱 비대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사자들의 호의호식은 더 화려해지고 있다는 인식을 국민들이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든 사건이 바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다. 국민은 이제야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고 밝혔다.

환수위는 노 관장뿐만 아니라 동생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도 비자금 불법 은닉의 주동자로 보고 있다. 지난 15일 “노 이사장이 운영 중인 동아시아문화센터가 ‘노태우 비자금’ 핵심 기지”라며 센터를 국세청에 고발했다.

환수위는 “노 전 대통령 추모를 명분으로 설립한 공익재단을 비자금 세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평생 직업이 없었던 김 여사의 돈이 노 이사장의 센터로 들어갔다. 이 돈이 ‘노태우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노태우 비자금을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 정부에서 최대 수천 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국고로 환수하기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미 별세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환수를 위해선 입법은 물론 수사가 필요하다.

비자금 환수를 위해선 비자금 일부가 실제 SK그룹에 유입됐는지 확인해야 하는 데다 현행법상 범죄자가 사망하는 등의 이유로 공소 제기가 불가능한 경우는 범죄수익을 몰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해부터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 중이다.

문제는
공소시효

민주당 장경태 의원은 지난해 9월 헌정 질서 파괴 범죄자의 범죄 수익에 한해 공소 제기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도 몰수 및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범죄수익은닉규제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 박준태 의원도 비슷한 시기 형사 공소 제기 없이도 범죄수익임이 입증된 자산을 몰수할 수 있는 ‘독립몰수제’가 포함된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독립몰수제는 올 1월 발표된 법무부 업무 추진 계획에도 포함됐다. 

<smk1@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