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전경련 새 수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8.14 14:16:34
  • 호수 14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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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 키 잡은 ‘동전의 제왕’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제39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전경련은 오는 22일 개최하는 임시총회서 기관명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꾸고, 새 회장으로 류 회장을 추대할 것이라고 지난 7일 밝혔다. 임시총회서 추대안이 가결되면 류 회장은 2년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직을 맡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일본경제단체연합회를 모델로 삼고 다른 대기업을 모아 1962년 8월16일 창립했다. 이후 주요 민간기업체·금융기관·국책회사 등을 대상으로 회원을 확보했다. 민간종합경제단체로서 법적으로 사단법인의 지위를 갖고 있으며,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전경련 회관을 두고 있다.

글로벌 단체
글로벌 인맥

전경련 회장직은 2년에 한 번씩 선출 방식으로 뽑는다. 이를 위해 400명에 달하는 전경련 회원은 회장 추천 절차를 밟는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으로 시작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구자경 LG그룹 회장, 최종현 SK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 대체로 대기업 총수가 맡았다.

회원은 67개 제조업, 무역, 금융, 건설 등 업종별 단체와 공기업을 제외한 대표적인 대기업 436개로 구성돼있다. 전경련은 지난 5월18일 산하에 있는 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 통합해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로 거듭나고, 기관명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꾼다는 내용의 혁신안을 발표했다. 무려 55년 만의 교체다.

전경련은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회장직에 내정한 배경으로 “글로벌 무대서의 경험, 지식, 네트워크가 탁월하다. 새롭게 태어날 한국경제인협회가 글로벌 싱크탱크이자 명실상부 글로벌 중추 경제단체로 거듭나는 데 리더십을 발휘해줄 적임자”라고 강조했다.


제39대 전경련 회장이 된 류 회장은 어떤 인물일까? 류 회장은 1958년 3월, 경북 안동서 고 류찬우 풍산그룹 창업주의 막내아들로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의 13대손이다. ‘가문을 욕보이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던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류성룡의 겸손함을 본받으려 했다.

일본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국제학교에 다닌 그는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다트머스대서 경영학 석사를 수료했다.

일본 유학 때 꿈은 야구선수였고 농구도 열심히 했다. 류 회장은 1982년 풍산 금속공업에 입사해 경영 수업을 받은 뒤 부친인 류 창업주가 별세하자 이듬해인 2000년 풍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류 창업주는 원래 첫째 아들 류청씨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류청씨가 미국서 사업에 실패한 이후 후계 구도서 배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류 회장이 풍산서 이뤄낸 업적은 많다. 미국 정·재계와 친분이 깊어 미국통으로 평가받는 류 회장의 인맥이 프랑스로 확장되기도 했다.

“글로벌 중추 경제단체로 만들 적임자”
미국 정‧재계 친분에 프랑스 인맥까지

지난 6월22일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풍산을 포함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그룹, SK, LG, 한화, 대한항공, 효성 등 8개 그룹 회장단은 전날인 21일 프랑스 엘리제궁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났다. 재계 순위가 70위권 안팎인 풍산이 대통령 만남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방위산업 분야서 프랑스와의 협력 방안이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유럽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방산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장이다. 실제 우크라이나는 전쟁으로 월평균 35만발의 탄약을 소모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의 탄약 생산량은 월 1만4000발에 불과하다.


유럽연합(EU)은 탄약 생산량을 연 100만발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며,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는 한국 정부와 풍산에 현지 탄약공장을 설립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면담으로 풍산이 유럽 내 생산거점 확보와 안정적 방산 수익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여기에 류 회장의 마당발 인맥이 풍산의 영업에도 힘을 실어줄 것이란 기대가 높아졌다.

류 회장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인연이 각별하다. 이 인연은 류 회장 부인인 고 노신영 전 국무총리 둘째 딸 노혜경씨 덕이라는 의견이 있다. 

노 전 총리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알고 있었고, 사위인 류 회장에게 소개하면서 부시 가문과 친분을 쌓았다는 후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류 회장은 2018년 타계한 아버지 부시를 ‘대디(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이 같은 인맥은 그의 업적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2009년 조지 전 미국 대통령의 최고경영자 하계 포럼 특별강연은 류 회장이 직접 주선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09년 7월31일 제주에 도착해 전경연 회장단과 만찬 회동을 한 뒤 8월1일 CEO 포럼서 특별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재계 인사들과 골프도 쳤다.

부시 전 대통령은 같은 달 3일 풍산의 초청으로 안동시를 방문했고, 풍산고등학교서 특강을 하고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돌아봤다. 

이런 인맥을 이용해서 류 회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정부와 미국 간 가교 역할을 했다. 역대 대통령 방미에 단골로 수행하는 경제인 중 한 사람이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도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하며, 한미재계회의 7대 한국 측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재계에선 ‘동전의 제왕’으로 불리며 활발한 동전 외교를 펼치고 있다.

소탈한 성격
다양한 경험

이는 유년 시절 유학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게 도움이 됐다. 류 회장은 일본서 자랐고, 미국서 대학원을 다녔던 덕분에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하다. 일년 중 절반을 미국 출장을 다닐 정도로 해외 비즈니스에 주력했다. 가족들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서 45일 정도로 나눠 한국과 미국서 지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노 전 총리가 외무부 장관과 총리를 지내서 외교 인맥이 탄탄하다. 다만 집안 인맥을 이어받더라도 본인의 노력 없이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류 회장이 해외 사정에 밝고 활달한 성격이다 보니 미 정·재계 인사들과 깊은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해외 출장에 비서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짐을 들고 다닐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풍산그룹은 혼맥으로 인해 정계 쪽 인사들과 인연이 깊다. 류 회장의 형인 류청씨는 198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딸 박근령씨와 결혼해 대통령 집안의 사위가 됐다. 하지만 6개월 만에 파경을 맞게 돼, 류청씨는 일찌감치 사업서 손을 떼 현재 그룹과는 교류가 없다.


이런 상황에 더해 풍산그룹은 특혜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최첨단 무기보다 재래식 무기를 기반으로 전개되면서 탄약‧포탄 수요가 세계적으로 급증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EU가 우크라이나에 1년 넘게 무기 지원을 지속해 자국 방어용 탄약 재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우방국인 한국에 포탄을 대여해 국내 유일의 탄약·포탄 제조기업인 풍산이 수혜를 누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5월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에 따르면 풍산은 올 1분기 매출 7711억원에 영업이익 590억원을 올렸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0.4%, 영업이익은 19.5% 증가했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풍산이 방산 부문서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종현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풍산이 기존에 주력으로 탄약을 수출하던 미국과 중동 외에 유럽 지역까지 시장이 확대되고 있어 올해 방산 매출액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방산 수익성은 내수보다 수출이 월등히 높아 이익구조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류 회장이지만, 구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류 회장의 아들이 징집 대상에 속하는 나이라는 점을 들어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류 회장의 부인과 아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앞서 풍산그룹의 지주사 격인 풍산홀딩스는 2014년 5월9일 류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8만6000주를 가족인 헬렌 노, 류성왜, 로이스 류에게 증여한다고 공시했다. 헬렌 노는 류 회장의 부인 노혜경씨며, 류성왜와 로이스 류는 그의 딸과 아들이다.


방산 부문
최대 실적

눈에 띄는 것은 노혜경씨와 류성곤씨가 미국인으로 돼있다는 점이었는데, 두 사람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다. 반면, 류성왜씨의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표시돼있었다.

물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풍산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와 류 회장 가문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다르다. 풍산그룹은 1970년 4월부터 한국조폐공사로부터 소전(무늬 또는 글자를 새겨 넣기 직전의 동전) 생산업체로 지정되면서 우리나라, 미국, 호주 등에도 납품할 만큼 급성장했다.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방위산업에 진출해 소구경 총탄부터 포탄까지 대한민국 국군이 쓰는 탄약의 국산화를 시작했고, 지능화와 정밀화 등을 통한 첨단 탄약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국내 대표적인 방위산업체로 성장했다.

류 창업주가 ‘방위산업의 대부’로 불리는 동시에, 풍산그룹이 대표적인 방위산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외에도 류 회장은 선조 때부터 각별하게 나라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 류 회장은 “선조에 누가 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류 창업주의 확고한 인생관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으며, 류 창업주 역시 창업이념을 ‘사업보국(사업을 통해 나라에 보답한다)’으로 내걸었을 정도로 애국심이 남다르다.

더욱이 류 회장의 부인 노혜경씨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차녀로, 한국의 명문가 집안이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것은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무엇보다 세간에서는 류 회장의 아들인 류성곤씨의 당시 나이가 22살(1993년생)에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병역기피를 위한 것 아니냐는 여론이 강했다.

이에 대해 풍산그룹 측은 “개인적인 사안”이라는 입장을 냈다. 풍산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국적 변경은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서 이뤄진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으로 (회사 입장서)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류 회장의 발목을 잡는 일이 또 있었다. 부산 센텀2지구 개발사업 관련 특혜 의혹을 받고 있던 풍산그룹이 과거 국방부로부터 헐값에 해당 부지를 매입했다는 공식 문서가 공개됐다. 개발이 진행될 경우 토지보상금이 5000억원에 육박한다.

재계 순위 70위권인데 왜?
아들 군대, 국유지 논란도

2018년 10월15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민중당 김종훈 의원이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매매계약서와 합의서에 따르면, 1981년 당시 27만평 규모의 조병찬(현 풍산 부지) 부지였던 이 땅은 3년 거치 후 7년 균등 분할상환 조건으로 풍산이 259억원에 매각했다.

이 과정서 국유지를 비롯한 부동산, 각종 장비 및 운영자재 등의 동산, 사업권이 수의계약을 통해 풍산에 매도된 것이다. 해당 부지는 국방부가 헐값에 국유지를 매각했다는 특혜 의혹이 제기돼왔다. 방위산업 목적의 국유지인 이 땅은 풍산의 공장 부지와 건물 30여개를 제외하면 절반 이상이 개발제한에 묶여있다. 

해당 부지는 2015년 부산시와 풍산이 맺은 센텀2지구 첨단산업단지 양해각서(MOU)에 따라 현재 개발을 목전에 두고 있어 파장을 낳고 있다. 이날 공개된 매매계약서 8조7항에는 매매계약 이후 지정된 군수산업 목적을 폐기했을 경우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특약사항도 있었지만 1999년 4월9일 이유 없이 삭제됐다.

일각서 “방산기업인 풍산그룹이 기업 특성상 국방부와 밀착한 관계를 맺고 특혜를 받은 것 아니냐”고 꼬집는 이유도 이 부분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일감 몰아주기 제재 대상을 대기업서 중견기업으로까지 확대하면서, 풍산그룹도 조사 대상서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풍산그룹은 이미 지난해 국세청 세무조사를 한 차례 받기도 했다.

풍산 부지 특혜 논란은 다시 불붙을 전망이다. 부산시가 ‘대체 부지’로의 이전을 추진하지만 수천억원에 달하는 매각 차익 특혜 논란을 해소할 공공 회수 방안은 사실상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풍산은 센텀2지구 사업으로 8000억원이 넘는 매각 차익을 기록할 전망이다.

류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선임 전이지만 이미 외교부 출신 인사의 부회장 영입 논란이 이어지면서 시끄러운 상황이다. 최근 재계에 따르면 류 회장은 전경련 사무국의 상근 부회장으로 외무 관료 출신을 영입하고 본인은 전경련 부회장 당시 직책으로 해오던 대미 정계 네트워크 구축과 관리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관료 출신 영입을 두고 전경련이 환골탈태를 통해 정경유착의 이미지를 벗겠다는 혁신안을 냈지만 실상은 예전 모습을 답습하는 꼴이라는 우려 목소리도 제기된다. 또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이 오는 22일 임시총회를 기점으로 직무대행서 내려오는 대신 상근 고문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져 논란을 키우고 있다.

정경유착
환골탈태?

김 직무대행은 그간 차기 회장이 나타나더라도 고문이든, 자문이든 전경련에 남아 필요한 역할을 하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바 있다. 이를 두고 전경련 안팎으로 혁신을 위해 이름까지 고치는 마당에 김 직무대행이 상근 고문 자리에 남으면 정경유착의 전형적인 모양새로 비칠 수 있다며 볼멘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아직 부회장과 상근 고문 등에 대해서는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 이번 임시총회 안건으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우선 회장님을 선임한 이후 문제”라고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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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