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멍덩’ 김기현 총선 로드맵

장관보다 못한 희미한 존재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아무래도 국민의힘이 인물난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내부를 향해 주먹질하는 이들까지 몽땅 끌어안고 가도 모자란다는 평이 나온다. 차기 총선까지 남은 기간은 약 8개월. ‘양당 지도부 붕괴설’은 이전부터 꾸준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내년 총선은 김기현 대표의 리더십을 확인할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지난해 원내대표 역임 당시 ‘여소야대’ 국면서 윤석열정부 출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완벽한 정권교체를 위해 윤석열 후보를 선택해달라”고 외치던 김 대표는 지난 3월8일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서 친윤(친 윤석열)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당 대표 자리를 꿰찼다.

친윤계발
리더십?

김 대표 체제는 출범 이후 당내 이슈를 처리하는 데만 주목한 나머지 민생을 위한 혁신안을 내놓지 못했다는 등 아쉬운 평을 받았다. 이를 두고 김 대표가 ‘윤심’(윤 대통령의 의중)에 과도하게 치우쳤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제시됐다. 당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차단돼 국민의힘에 변화와 혁신이 부족했다는 이유다.

의제와 입법 등을 두고 과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 끌려다닌 형국이다. 김 대표의 리더십 위기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최근 김 대표를 중심으로 한 총선 체제가 예고되면서 판이 뒤집힐 가능성이 제시됐다. 연이어 터지는 국민의힘 리스크에도 김 대표가 적정선서 처리했다는 ‘징계 리더십’이 떠오르면서다.


지난 5월10일 ‘전광훈 우파 통일’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김재원 최고위원은 당원권 1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녹취록 유출’ 사태로 자진 사퇴한 태영호 의원에게는 같은 날 당원권 정지 3개월이 떨어졌다. 최근에는 ‘수해 골프’ 논란의 당사자인 홍준표 대구시장에게 당원권 정지 10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제 식구 감싸기식인 민주당의 ‘방탄 국회’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 게 득이 됐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다만 김 대표의 리더십이 총선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 대표 리스크가 민주당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1998년에 임야와 목장 용지를 합쳐 3만5000평의 토지를 구입했다. 이후 울산시가 이 일대에 KTX 울산역과 연계되는 도로 개설사업을 검토하면서 이 지역 땅값이 크게 뛰었다. 해당 의혹은 전당대회서도 숱한 논란을 빚었다. 사전에 내부정보를 활용해 역세권 토지를 구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지난 6월 교섭단체 대표연설 당시 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이 김 대표를 향해 “울산 땅, 땅, 땅”이라고 외치며 땅 투기 의혹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밖에도 자신의 측근을 울산 지역 공공기관 요직에 임명하는 의혹을 받는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다수 존재한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마찬가지로 개인 사법 리스크가 임기 동안 김 대표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전망이다.

최근에는 총선을 앞두고 인재 영입을 둘러싼 리더십 논란이 수면으로 올라오는 모양새다. 수도권 중심으로 인물난이 심각한 상황서 김 대표 지도부의 인재 영입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 목소리가 나왔다.

총선이라는 중요한 의제를 앞둔 상황서 당 대표는 승리를 위해 진두지휘에 나서야 한다. 참신한 인재를 내세워 총선 승리를 판가름할 수도권의 표심을 얻지 못하면 패배하는 것이 자명하다는 설명이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온갖 악재를 겪는 상황서 국민의힘이 총선 승리를 이끌지 못한다면 김 대표의 리더십에 본격 위기설이 불어닥칠 것으로 관측된다.


한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민주당조차 내년 총선서 수도권 표를 얻기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국민의힘에 마냥 호재는 아니다. 민주당에 등을 돌린 표심이 국민의힘으로 향할 것이란 보장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근 여의도 장관들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여당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는 평가 역시 김 대표에게 압박을 가하는 모양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원희룡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 장관, 박민식 보훈부(이하 국가보훈부) 장관 등은 윤정부 기조를 대변하면서 야당과 맞서 싸우는 등 ‘스타 장관’으로서 몸집을 키우고 있다.

몸 키우는 유승민·이준석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대표적인 총선 주자로 꼽히는 원 장관은 ‘서울양평고속도로’를 둘러싼 야당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보수층의 눈길을 끌었다. 앞서 ‘대장동 1타 강사’로 이름을 띄운 원 장관은 ‘고속도로 1타 강사’로 국민과의 소통에 나섰다.

이를 시작으로 야당의 공세를 ‘가짜뉴스’로 규정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모습이 보수층에게는 긍정적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한 장관은 윤정부 출범 이후 야당을 상대로 거침없는 언변을 선보였다는 평을 받는다. 최근에는 쌍방울 대북 송금 의혹을 두고 이 대표의 수사망을 좁혀가면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민주당을 향한 ‘사이다 발언’을 트레이드마크로 보수층의 지지를 받는 만큼 국민의힘 내부서도 그의 출마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박 장관은 “고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데 장관직을 걸겠다”고 선언하면서 잠재적 총선 후보 대열에 합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백 장군은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면서 여야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진보 진영서 ‘반민족행위자’로 여겨지는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평가되면서다. 그러던 중 박 장관은 최근 백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 내 백 장군 안장자 정보서 ‘친일’ 문구를 삭제했다.

사실상 보수 진영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밖에도 박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기념관 건립에 속도를 내줄 것을 당부하는 등 보수층 겨냥에 힘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장관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여당의 존재감이 밀린다는 점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 대표가 정국 이슈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면서다. 장관이 여당의 역할까지 대신하면 당의 존재감이 약화되고 권력의 무게추가 정부로 기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중도층의 표심을 사로잡을 만한 여당만의 이슈가 전무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좋든 싫든 총선 승리를 위한 확실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여의도
금쪽이


현재 정치권에서는 중도우파의 관심을 끌어당길 수 있는 인물로는 유승민 전 의원과 이준석 전 대표가 거론된다. 이 둘은 여당의 약점으로 꼽히는 청년과 중도층서 지지층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내부 분란 없이 하나로 뭉쳐 ‘원팀’ 전략을 펼치는 것이 총선 승리의 길로 제시되면서 본격 김 대표 체제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생겼다. 당의 ‘안정’과 ‘고착’은 한 끗 차이인 만큼 여러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만 두 인물은 당을 향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하기로 유명한 만큼 이들을 안고 갈 경우 리스크도 염두에 둬야 한다. 김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전략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당 지도부가 고민에 빠진 사이 유 전 의원과 이 전 대표는 활발한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전 대표는 2021년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에 당 대표 후보로 출마해 36세의 나이로 최연소 제1야당 당수로 뽑혔다. 국민의힘에서는 당시 후보 자격이었던 그를 두고 “거침없는 발언은 장점이자 리스크”라며 이 전 대표를 견제하기도 했다.

청년 보수층을 업고 탄탄대로를 걷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 전 대표는 지난해 성접대 의혹에 대한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당원권 1년6개월 정지를 받았다.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는 이 전 대표의 성접대 의혹을 ‘품위유지 의무 위반’으로 규정했다.

국민의힘은 징계 사흘 만에 ‘권성동 직무대행 체제’를 의원총회서 의결하며 전열을 재정비했다.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윤 대통령이 권 직무대행에게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 윤 대통령의 발언에 이 전 대표는 “자신이 양의 머리를 흔들며 개고기를 팔았던 사람이었다”면서 대통령실을 향해 지난 선거는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칼을 던졌다.

이후 정부여당을 향한 이 대표의 쓴소리 정치가 본격 막을 올렸다는 평이다. 당원권이 정지됐지만 자신의 SNS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연일 존재감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윤 대통령이 수해복구 지원을 언급하며 ‘이권 카르텔 정치 보조금 폐지’를 주장한 것을 두고 ‘오류’라고 지적했다. ‘이권 카르텔’은 정치 용어고 ‘수해복구’는 절박한 현안인데 이 두 가지를 엮는 것은 적절치 못한 뜻이다.

품을까
내칠까

정확한 액수나 범위조차 설정되지 않은 상태서 보조금을 산출하겠다는 점 역시 꼬집었다. 이 전 대표는 “이런 메시지를 낼 것을 대통령에게 조언한 참모는 당장 잘라야 한다”며 윤 대통령과 여당을 동시에 비판했다.

이 밖에도 후쿠시마 오염수, 양평고속도로 등 쟁점을 따져가며 여당을 향한 비판을 이어갔다. 이 전 대표가 내년 노원병 총선 출마 의사를 여러 차례 피력한 만큼 정치권에서는 내년 총선을 대비한 예열이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에는 유튜브 채널 <여의도 재건축 조합>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정책토론에 나섰다. 현안에 대해 평가하고 의견을 내기보다는 교육, 환경, 경제 등 다양한 분야와 관련된 정책 논의에 집중하겠다는 취지다. 유튜브에는 이 전 대표와 함께 비윤(비 윤석열)계 인사로 꼽히는 천하람 국민의힘 순천갑 당협위원장과 이기인 경기도의원이 출연했다.

유 전 의원 역시 다시 목소리를 키우면서 정치 입문 신호탄을 쏴 올렸다. 유 전 의원은 2020년부터 대선 출마 의지를 밝힌 인물이다. 2021년 8월9일에는 대선캠프를 출범시켰지만 지지도가 당시 후보였던 윤 전 검찰총장과 국민의힘 홍준표 의원에게 못 미치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6월 지방선거로 치르는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지만 국민의힘 경선서 패배했다. 언제나 대선을 향한 목표가 있는 만큼 윤 대통령을 향한 날을 거둘 생각이 없다는 게 일부 정치권의 시각이다.

앞서 그는 윤 대통령의 장모가 통장 잔고증명 위조 등 혐의로 법정 구속됐으나 대통령실이 입장을 내지 않는 것을 두고 “선택적 침묵”이라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국민 앞에 떳떳이 입장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 가장 민감한 사안으로 꼽히는 공천 체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한 라디오를 통해 “대통령께서 정치를 안 해 보셔서 그런데 여기에 지금 국민의힘을 자기가 완전히 장악을 했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했다. 공천에 목을 맨 의원이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것일 뿐 대통령을 향한 충성과 맹세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해석이다.

앞서 유 전 의원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출마할 계획에 선을 긋고 “공천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고 밝힌 것을 두고 신당을 창당할 것이란 풀이가 나왔다. 더 나아가서는 대선을 노리는 게 아니냐는 정치권의 해석도 존재한다.

고개 드는 비대위설
믿을 건 도덕성뿐?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은 두 인물을 품고 갈지 빠르게 털어야 할지 당 내부서도 좀처럼 의견이 모이지 않는 듯하다. 일각에서는 포용론을 제시하며 이 전 대표와 유 전 의원을 안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장은 서먹한 관계일지라도 다가오는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중도우파의 표를 빠르게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내서도 내년 총선 공천서 이 전 대표와 유 전 의원을 배제하고 있지 않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다만 다른 한쪽에서는 포용론 자체가 시기상조란 분위기다. 조직강화특별위원회(이하 조강특위) 운영 등 조직정비가 이루어지는 만큼 특정 인사에 대한 공천을 논의하는 것은 이르다는 설명이다. 아직 비윤계에 대한 당내 여론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 역시 포용 논의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좀처럼 당론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대통령실은 김 대표가 전체적으로 당이 책임을 지고 주도하는 ‘이기는 총선’을 주문할 전망이다. 당의 ‘안정’과 ‘고착’은 한 끗 차이인 만큼 당의 혁신을 위한 새로운 움직임이 나와줘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총선을 넘기지 못한 채 ‘김기현호’가 가라앉을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차기 비대위원장으로 하나둘 거론되는 인물이 있는 모양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전부터 차기 당 대표로 여러 명이 거론되고 있다”면서도 “다만 개개인의 리스크를 다 털지 못한다면 김 대표와 피차 일반일 것”이라고 말했다. 여소야대 국면이 지속되는 만큼 국민의힘이 민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총선까지 김 대표 체제가 유지될지 불투명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김 대표가가 공직자의 도덕성과 윤리, 공직기강을 강하게 밀고 나갈 것으로 예상했다. ‘2021년 민주당 돈봉투 의혹’과 ‘쌍방울 대북 송금’ 등의 문제가 민주당의 최대 약점인 만큼 도덕성을 강조해 우위에 서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아직 유효한 만큼 총선이 국민의힘에게 유리한 판도로 흘러갈 것이란 긍정적인 시나리오도 제시된다.

휴가 끝
전쟁 시작

국민의힘에 따르면 김 대표는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6일까지 휴가를 냈다. 휴가가 끝나는 대로 여야는 총선 체제에 돌입할 것으로 관측된다. 휴가 기간 동안 김 대표는 총선 전략 등 당 안팎의 현안에 대한 구상에 나설 예정이다. 이번 총선에 윤정부 성적표가 달렸다. 휴가를 마친 김 대표의 움직임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놓을 수 없는 긴장의 끈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휴가 중에도 야당을 향한 칼날을 감추지 않고 있다.

지난 1일 김 대표는 ‘김은경 혁신위’(이하 혁신위)가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젊은 사람들과) 1대1 표결해야 하느냐”고 발언한 것을 두고 “민주당의 노인 비하 DNA는 못 고친다”고 비판했다.

지난 3일에는 “우리 당 같으면 이미 지위를 막론하고 벌써 중징계를 했을 것”이라며 민주당에 있어 윤리 기준은 강자의 이익이라고 비꼬았다.

이재명 대표를 겨냥해서는 “삼고초려 끝에 초빙해 온 인물이 현란한 플레이를 하고 계시는데 이 대표는 ‘오불관언’”이라고 꼬집었다. <박>

 



배너

관련기사

40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