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피플> 대통령 이재명 60년 인생사

안동 산골 소년공 대한민국 지도자로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제21대 대통령선거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대선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실시된 조기 선거였으며, 정치권 전반에 걸친 격변 속에서 치러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를 상대로 본선에 나섰고, 그 결과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1964년 12월22일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서 태어났다. 5남2녀 중 다섯째로, 이 대통령의 유년기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시작됐다. 출생신고조차 제때 이뤄지지 않아 음력 기준으로 나이를 따지게 됐으며,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생일을 무속인을 통해 정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가족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수입이 너무 적어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찢어지게
어려웠다

이 대통령의 가족은 1976년,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한다. 당시 이주한 지역은 공장과 달동네가 공존하던 성남 상대원동이었고, 9명의 대가족은 반지하 단칸방에 거주했다.

이사 직후 어머니는 시장 공중화장실 관리인으로 일했으며, 이 대통령과 여동생은 대변 20원, 소변 10원을 받는 화장실 요금을 걷는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청소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동시에, 주변에서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이런 생활환경 속에서 이 대통령은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13세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성남 일대의 여러 공장서 일하며 ‘소년공’으로 불리는 시기를 보냈다. 체인 수공업 공장, 고무공장, 냉장고 부품 조립 공장, 시계공장 등을 전전했다. 하루 12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철야 작업이나 주야 맞교대 근무도 잦았다.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유해 화학물질 냄새가 가득한 공간서 환기 없이 일했고, 제대로 된 보호장비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10대 초반의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가혹한 노동이었다.

이 대통령은 큰 사고로 장애를 얻게 되는데, 이는 대양실업이라는 야구 글러브 공장서 발생했다. 프레스 기계에 왼쪽 팔이 끼어 심각한 상해를 입었고, 이 사고로 평생 팔이 굽는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이후 병역 판정서 지체 장애 6급으로 면제받았다. 또, 시계공장서 사용된 접착제 등 독성 화학물질의 영향으로 인해 후각 기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공장서 퇴근한 뒤 독서실에 가서 새벽까지 공부했다. 책상에 압정을 뿌려 졸음을 참았는데, 몸에 압정이 박힌 채 잠든 날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1년3개월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했다. 그의 나이 16세 무렵이었다.

당시 검정고시 합격률은 낮았고, 특히 고교 검정고시를 단기간에 통과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검정고시 합격 이후 그는 곧바로 대학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입시 준비 과정서도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다. 과외는커녕 참고서조차 마음대로 사지 못해, 도서관과 중고 책방을 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하게 된다.

등록금은 물론 매월 20만원의 생활비까지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중앙대학교 법대는 높은 입시 경쟁률을 자랑했고, 장학 선발 기준도 매우 엄격했다.

중앙대학교는 이 대통령이 처음으로 입학한 ‘정규 교육기관’이었다. 검정고시로 학력을 취득한 이 대통령은 교복이나 학교생활에 대한 로망이 커서, 실제로 대학 입학식에 중·고등학교 교복을 빌려 입고 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학 생활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극심한 가난 흙수저 출신
주경야독 끝 사법시험 통과

당시 이 대통령이 입학한 1982년은 대한민국 사회가 군사정권 아래 놓여 있던 시기였다.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고, 사회는 억압과 저항으로 뜨거웠다. 전두환정권 집권 초기로, 대학가는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중앙대학교 도서관서 우연히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록 영상과 책자를 접하게 된다. 당시까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광주 사건을 ‘폭동’으로 인식하고 있던 그는, 실제 내용을 접한 뒤 충격을 받았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훗날 밝혔다.

이후 그는 5·18 민주화운동을 삶의 가치관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준 사건으로 언급했고, 광주를 ‘사회적 어머니’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사법시험 합격을 목표로 정진했다. 정규 고등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서 대학에 입학한 만큼 기초 법학 이론에 대한 학습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독학과 반복 학습을 통해 실력을 쌓았다.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서 법전을 정독하며 정리한 필기 노트를 수차례 복습했고, 기출문제와 판례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이 과정서 고등학교 교과 과정의 기본 개념을 별도로 익혀야 했다.

법대 재학 중에도 경제적 여건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일부 기간 동안 과외, 논술 지도 등으로 생활비를 보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학금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충당할 수 있었고, 월세와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 가급적 학교 시설을 활용하며 지냈다.

이 대통령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재학 중 시험에 도전했고, 학부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어 1988년 제18기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입소 당시에도 그는 학부 시절처럼 조용하고 성실한 수강생으로 알려졌으며, 노동법이나 사회복지 관련 과목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사법연수원 과정서 이 대통령은 고 노무현 당시 변호사가 진행한 강연을 들은 경험이 있다. 이 강연은 훗날 이 대통령이 노동·사회적 약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로 언급된다. 특히 인권 변호사로서의 진로를 선택하게 되는 계기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13세부터
생업 전선

이 대통령은 대학 시절 학력, 재정 등 여러 제약을 극복하며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1988년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한 뒤 판사나 검사직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대다수의 연수원 수료생이 안정적인 법조 직군에 지원하던 분위기 속에서, 이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노동자, 서민,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변론을 맡기 시작했다.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인권 중심의 법률 지원에 주력했다. 1990년대 당시 수도권 외곽 지역이던 성남은 개발 압력과 토지 보상 문제로 각종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는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용도 변경 비리 의혹이나 성남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 등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해당 사건들은 개발 이익을 둘러싼 특혜와 비리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핵심이었으며, 이 대통령은 관련 주민들과 함께 행정감시 및 법률 대응을 주도했다.

특히 분당 파크뷰 사건은 그가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본격적인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분양 과정서의 특혜, 가격 조작, 공무원 연루 의혹 등이 불거지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 대통령은 해당 의혹을 지역 언론과 시의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이 활동은 당시 성남지역서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이 대통령을 ‘행동하는 변호사’로 인식하게 되는 배경이 됐다.

그는 지역의료 공백 문제 해결에도 힘을 쏟았다. 2003~2004년 무렵, 성남서 운영되던 종합병원들이 연이어 폐업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로 인해 지역 주민의 진료 접근권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러자 그는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제안하고 추진했다. 주민 서명을 주도하며 총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시의회에 조례안을 제출했지만, 당시 다수당이던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들의 반대로 조례는 부결됐다.

이 대통령은 동료들과 시의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항의 농성을 벌였고, 이 과정서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수배되기도 했다. 수배 기간 동안 성남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은신하며 숙식을 해결했다고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이 일을 계기로 정치에 나서게 됐다.


그는 이후 공개 연설서 “2004년 3월28일, 성남주민교회 지하서 눈물로 결심했다”며 “시립병원의 꿈을 정치로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 대통령은 정당 정치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같은 해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첫 출마 이후 지역 사회 내에서 그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고, 시민단체 및 자발적 지지자 모임을 중심으로 조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본격적
존재감

결국, 2010년 지방선거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후보로 다시 성남시장에 출마해 당선되며 민선 5기 시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변호사 시절부터 이어온 공공성·복지 중심의 정책 기조를 행정 영역서 실현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대통령의 정치적 커리어는 이 시점을 기점으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2010년 7월 성남시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취임 초기 성남시는 극심한 재정난에 직면해 있었다. 전임 시장 시절의 무리한 개발과 방만한 예산 집행으로 인해 시의 채무는 7300억원에 달했다.

당시 공무원 월급조차 지급이 어렵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으며, 시 재정은 파산 직전이라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이른바 ‘모라토리엄(지급 유예) 선언’을 통해 부채 구조 조정에 나섰다. 공무원 해외 연수와 관행적 예산 낭비 항목을 전면 삭감하고, 고위 공무원 인사 기준을 대폭 손질했다. 이 대통령은 직접 차량을 운전하고 비서진 없이 이동하며 시장의 권위적 이미지도 벗기 시작했다.

시민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며 ‘24시간 트위터 시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복지 행정서도 선도적인 정책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상교복’과 ‘청년배당’이었다. 그는 성남시에 거주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교복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일정 연령의 청년들에게 연간 100만원 상당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청년배당 정책을 도입했다.

이 같은 정책은 이후 경기도지사와 대선후보 시절까지 이어지는 ‘보편적 복지’ 철학의 기초가 됐다.

성남서의 성공적인 행정으로 인해 이 대통령에게 더 넓은 정치의 길이 열렸다. 2014년 지방선거서 재선에 성공한 그는, 이후 2016년 촛불 정국을 전후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강한 어조로 탄핵을 요구하며, SNS와 방송 출연 등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빠르게 높였다.

이 대통령의 직설적이고 명확한 화법은 지지층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 당시 문재인·안희정 후보와 함께 주요 주자로 부상했으나, 경선서 문재인 후보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약 21.2%의 지지를 얻었다. 경선 과정서 이슈 제기, 특히 기본소득과 지방분권 등은 이후 정치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무현 만나 인권 변호사 길로
성남시장으로 정치 인생 시작

대선 경선 이후 이 대통령은 다시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2018년 지방선거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전국 최대 광역단체의 수장이 된다. 경기도지사로서 그는 행정의 디지털화, 데이터 기반 정책 결정, 사회복지 확대 등에서 성과를 냈다.

대표 정책으로는 ▲경기도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 ▲청년기본소득 ▲배달특급 등이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신속한 대응으로 높은 행정 평가를 받았다. 전 도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한 결정은 전국적 논의로 확산되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시 한번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경기도지사 시절, 이 대통령은 안 좋은 일들에 자주 휘말리게 됐다. 여러 차례의 사생활 논란과 형사 고발이 이어졌으며, 대장동 개발사업 의혹은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1년 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이듬해 2022년 3월 치러진 대선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이 대통령은 정치 전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어 8월에는 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표 시절 그는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며, 윤석열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집중했다.

또 당내 개혁을 강조하며 공천 시스템 개선, 당헌·당규 개정 등의 작업을 추진했다.

2023년부터는 이른바 ‘검찰 수사 정국’이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성남FC 후원금,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며, 총 5차례 이상 검찰에 출석했다. 그러나 국회 체포동의안은 부결됐고, 기소 후에도 그는 대표직을 유지하며 당내 결속을 이끌었다.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되며 조기 대선 정국이 열렸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월10일 공식 선언을 통해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 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이후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으로 대통령직이 공석이 됐기 때문에 정해진 조기 선거 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의 당내 경선서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를 상대로 89.77%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후보로 선출됐다. 경선 과정서의 당내 이견은 크지 않았고, 계엄령 사태 이후 당내 결속은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공고히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다시 대선에 출마했고, 제21대 대통령선거서 49.42%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머쥐게 됐다.

크고 작은
논란·의혹

이번 대선은 2022년 제20대 대선서 불과 0.73%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던 이 대통령이 세 번째 도전 만에 거둔 승리였다. 동시에 탄핵과 계엄이라는 초유의 정치 상황 이후 선출된 첫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속 치러진 이번 대선서 이 대통령의 당선으로 3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당선 직후 이 대통령은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승리를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국가의 조속한 회복과 경제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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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