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비쿠탄 마약왕’ 관리하는 국정원, 왜?

“범죄자는 범죄자가 잘 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비쿠탄 마약왕’으로 알려진 송모씨가 국가정보원의 관리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송씨가 마약 정보원인 이른바 ‘야당’이었다는 게 골자다. 국정원이 해외 첩보망을 구성하려 정보원과 미팅을 잡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많은 양의 마약을 유통하는 만큼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다. 마약 정보원들은 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게 외교·법무부와 경찰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직원들은 지난해 필리핀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사유는 마약 관련 해외 첩보망 구성. 이들은 현지에 있는 휴민트(인적 정보)와 마약계 사정에 밝은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대부분 교도소 내부에 있는 범죄자다. 이 중에는 ‘비쿠탄 마약왕’ 송모씨와 보이스피싱 1세대이자 경찰 출신 ‘김미영 팀장’ 박모씨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김미영 팀장’
직접 면담 진행

국정원 해외 파트 직원들은 간첩·마약 조사 관련 해외 첩보망 구성을 위해 자주 동남아를 방문한다. 대사관 소속 겸 외교관 신분인 국정원 직원이 조사하는 경우가 있으나 법률적 한계로 인해 국내 직원들이 파견된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정원 마약 조사관들은 지난해 네 번 이상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해 ‘마약왕 전세계’ 박왕열과 송씨, 박씨의 마약 유통 관련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송씨와 박씨와는 직접 면담을 진행했다.

필리핀 이민국 수용소 비쿠탄을 찾은 마약 조사관은 총 3명이다. 이들은 송씨와 박씨에게 “마약 유통 좀 그만해라. 다른 애들과 루트는 어디냐? 누가 제일 많이 관리하느냐”고 질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쿠탄에 있는 한 재소자는 “지난해 4월과 5월에 왔었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갔다”며 “이미 비쿠탄 수용소 내부에 있는 한국인들은 다 아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마약 조사관과 동석했던 한 재소자도 “수사기관 관계자가 항상 동석하지는 않는다. 필리핀 대부분의 감옥이 그런 곳이다. 박씨와 송씨가 해당 조사관들과 지속적으로 감옥 내에서 통화하고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주장했다.

마약 조사관들은 송씨와 박씨 조직이 이감된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과 비콜 교도소까지 찾아갔다. 지난해 말까지 접촉을 이어간 것이다.

이감된 인물은 박씨와 송씨를 포함해 이들이 관리하던 보이스피싱 관리책 2명으로 총 4명이다. 이들은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서부터 텔레그램을 통해 보이스피싱 및 마약 공급·유통책을 모집했다. 이 조직은 송씨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박씨를 영입한 이유로는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마약범죄 조직의 고질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약 조사관들이 이들을 찾아간 이유는 필리핀 민다나오 지방이 ‘제2의 골든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1의 골든트라이앵글은 태국과 미얀마, 라오스의 접경지역을 말한다. 특히 미얀마 동부 살윈강 동안의 산주 일대서 연간 약 100만t의 아편이 채취되고 아편서 생산된 헤로인이 한때 미국에 유통되는 헤로인의 60%에 달했을 정도다.

마약 조사관 수차례 필리핀 방문 접촉 확인
불법 아닌데…마약범 활용 정보 수집 적절?


아시아 지역에는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생산의 40%를 유통하고 있다. 메스암페타민 계열의 야바나 MDMA 같은 합성마약도 생산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인근 접경지대인 태국을 통해 탈북하려는 탈북민들의 탈북 경로로도 종종 이용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일부 탈북민이 마약 노동자로 활동하면서 ‘북한산 마약’을 제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국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필리핀 남동부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접경지역인 민다나오가 뜨기 시작했다. 이곳은 각각 흑색·적색경보 지역으로 나뉜다. 흑색·적색경보 지역은 여행금지와 출국 권고 대상 구역으로 흑색경보 지역을 정부의 허가 없이 방문한다면 국내 여권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국정원 마약 조사관들은 마닐라를 포함해 민다나오 지역 휴민트와 마약 정보원인 이른바 ‘야당’과 여러 차례 접촉한다. 송씨와 박씨도 정보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야당 출신 인사들의 설명이다.

한 마약 정보원은 “동남아서 한국 유통·공급책은 타국보다 귀하다. 한국 마약값이 동남아보다 10배 이상 비싼 만큼 한국 유통책을 활용하면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당국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만큼 우리도 용돈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료’를 받는다. 많은 양의 마약을 유통하고 있는 한국인이 정보기관과 여러 차례 접촉했다면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유통책과 조직은 돈을 벌고 국정원은 첩보 보고서를 작성하는 형식이다. 그 조직을 잡아내는 건 수사기관의 몫”이라고 지적했다.

복수의 마약 정보원들은 국정원과 야당 간 공조가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원조 야당은 소매치기 조직의 구역관리와 라이벌 소매치기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지하철 수비대에게 수사 정보를 제공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불법과 합법
애매한 선상

한 마약 조사관 출신 관계자는 “드라마처럼 직접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다. 불법과 합법의 애매한 선에 있고, 총을 들고 다니다가 발각되는 순간 외교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정원은 수사 권한이 없기에 예전부터 개입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마약 조사관들이 송씨와 박씨를 활용하는 이유에 관해 ‘큰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민다나오 지역의 한 인사는 “필리핀산 마약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지역은 마닐라 지역과는 다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슬람 과격단체가 테러 자금을 만들기 위해 필로폰 제조 판매까지 했는데 그들의 교관이 북한군이었고, 제조 기술자까지 지원해서 상당 부분의 마약이 퀄리티가 좋았다”고 주장했다.

<일요시사>와 접촉한 복수의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사실관계 확인 자체를 거부했다.


일각에서는 마약 정보원의 허위 정보에 따른 검찰과 경찰 수사의 문제가 마약사범 봐주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 경기도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50대 A씨는 검찰에 의해 억울하게 구속된 바 있다. 지난해 5월, A씨는 자신의 커피숍서 한 택배 상자를 받았다. 발신한 곳은 처음 보는 필리핀 주소지. 택배를 받은 지 30분 뒤, 사복 경찰이 들이닥쳤다.

택배 상자 안에는 필로폰 약 90g이 들어있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인천지검은 A씨를 필로폰 밀매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필리핀서 보낸 “부탁하신 것 보낸다”는 문자메시지가 정황 증거로 인정된 것이다.

“국익 위한
통상 활동”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정원 직원 B씨는 친분이 깊던 손모씨에게 실적을 요청했다. 손씨는 국정원서 활동비를 받고 정보원으로 일해온 마약 전과자다. 손씨는 B씨의 요청에 ‘마약사범 근황 파일’을 입수한 후, 여기에서 A씨의 개인 정보를 얻었다.

검찰에 따르면 손씨는 필리핀 마약상에게 A씨의 커피숍 주소지로 필로폰을 보내달라고 연락했다. 필리핀 마약상은 피규어 2개에 필로폰을 나눠 담아 국제우편으로 보낸 뒤, 손씨에게 송장번호를 보냈다. 손씨는 필리핀 마약상이 찍어 보낸 송장 사진을 국정원에 전달했다.


국정원은 해당 첩보를 인천세관에 넘겼고 손씨는 휴대전화 압수수색에 대비해 A씨 앞으로 “부탁하신 것 잘 처리했다”는 문자까지 보내두게 했다.

사건을 들여다본 용산경찰서가 서부지검에 사건을 송치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서부지검은 마약 배달 전, 피해자 주소를 제3자와 주고받은 거짓 제보 증거를 찾아내 손씨를 무고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세 달 뒤 인천지검은 A씨를 석방했다. 허위 제보자이자 국정원 마약 정보원이던 손씨가 서울서부지검의 수사 과정서 체포된 것이다. 마약 정보원들은 정보료와 ‘공적’이라는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위 피고인의 협조가 다른 마약 수사에 도움이 됐다’는 내용의 수사 공적서를 쌓으면 재판서 감형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손씨의 2014년 10월 광주고등법원 2심 판결문에는 “피고인이 국가정보원의 정보원으로서 활동한 전력이 있고 중대한 마약 수사에 협조한 공적이 있는 점(중략) 등의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들에 더 한다”고 판시돼있다.

국정원이 마약 정보원들에게 ‘실적’을 요구하는 상황도 적지 않다. 특히 허위 사실이 포함된 정보일 경우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범죄자를 활용한 정보 수집이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거센 이유다.

‘야당’ 공조 체계 40년 “더 큰 범죄 소탕 목적”
마약 피해 지속 불구 법무부 여전한 소극 행정

송씨와 박씨에 관한 국내 송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필리핀은 형사사법공조조약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했다. 필리핀서 장기간 수용 생활을 하는 한국인을 한국으로 이송하면 좋으나, 현재 수용자 이송 조약은 체결돼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법무부는 “송환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에 한해 이송 요청을 지속하고 있다”며 “필리핀 이민국과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법무부의 이 같은 입장은 2년 전과 다르지 않다. 시간이 가는 동안 이송 조약조차 체결하지 못한 점은 한국 정부의 소극 행정이라는 지적이다.

법무부는 일부 한국인 범죄자들에 관해 송환신청서를 보내지 않기도 했다.

범죄인 인도는 국제형사사법 공조 활동 가운데 가장 고전적 수단이다. 이는 관할권으로부터 도주한 범죄인은 범죄인 소재지국보다는 범죄 행위지국서 유효·적절하게 재판 또는 처벌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다만 범죄인 인도는 국제법상 확립된 제도가 아니다.

국제법상 의무가 아니므로 조약상 의무가 없는 한 타국의 인도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도 국제법 위반은 아니기에 각국은 인도 여부를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

한국 범죄인 인도법은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와도 상호주의를 적용해 인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도 대상이 되는 범죄는 원칙적으로 청구국 영역서 발생한 범죄다. 영해나 영공서 저지른 범죄는 물론, 공해상 청구국의 선박이나 항공기서 벌인 범죄도 포함한다.

범죄인은 수사 또는 재판을 받고 있거나 유죄판결을 받고 피청구국으로 도주한 자를 말한다. 인도 대상 범죄인은 주로 청구국 국민과 제3국인이다. 인도가 허용되는 범죄는 청구국과 피청구국의 법률로 모두 처벌 가능한 범죄여야 한다.

“경찰이
못하니…”

인도 요청을 거절하는 사유는 의무적 거절 사유와 재량적 거절 사유로 나눌 수 있다. 피청구국서 청구 범죄에 대해 이미 확정판결을 받은 경우도 의무적 거절 사유다. 박씨와 송씨의 경우 현지서 재판을 받고 있어 의무적 거절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법무부가 보이스피싱 혐의가 아닌 마약 유통 혐의로 송환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필리핀 정부가 ‘재량’을 근거로 거절할 가능성도 있으나 법무부는 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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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