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 떨게 한 ‘노란 봉투’ 정체

어느 날 배달된 ‘수상한 소포’

[일요시사 취재1팀] 옥지훈 기자 = 울산의 한 장애인 복지시설에 신원미상의 노란 소포가 도착했다. 대만서 발송된 이 소포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설 직원 3명이 소포를 뜯자 안에 가득 차 있던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기체를 들이마신 직원들은 호흡곤란과 마비 증세를 호소했다. 국립과학수사대는 해당 기체를 정밀 검사했지만, 화학물질에 관련한 특이점은 없었다고 보고했다. 

전국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외 우편물이 발송되면서 위험 물질에 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정체불명 소포’는 중국서 대만을 거쳐 국내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 우정 당국은 화물 우편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중국 선전발 환적용 우편물의 접수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대만 당국은 의심 우편물들이 중국 선전서 최초 발송돼 대만을 거쳐 한국으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대만 부총리 격인 정원찬 행정원 부원장은 “대만 수사 당국이 한국의 소포 사건과 관련해 전담팀을 구성해 조사하고 있다”며 “해당 소포는 중국 선전서 ‘경유 우편’으로 대만에 보내졌고, 대만을 거쳐 한국으로 발송됐다”고 밝혔다. 이어 “끝까지 추적 조사를 진행해 어떠한 부분을 강화해야 하는지 모든 상황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혹시 마약?
아님 폭탄?

경찰청은 정체불명 소포와 관련한 신고 건수가 지난 26일 오후 5시까지 3428건 접수됐다고 밝혔다. 우편물 개봉 후 가스나 독극물 등이 들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지만 피해사례는 없었다. 3428건 중 2265건은 정상 소포로 확인됐다. 전체 신고 건수 중 절반 이상은 오인 신고였던 것이다. 전날 오후 5시 기준 3021건보다 407건 늘어난 수치다.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서 유해 물질이 담긴 것으로 의심되는 소포가 발견돼 1700여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서울 서초우체국과 송파우체국에도 수상한 소포가 확인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충남 천안의 한 가정집에 배송된 국제우편물에서는 가스가 검출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 조사 결과 문제가 된 국제우편물은 노란색이나 검은색 우편 봉투에 ‘CHUNGHWA POST(중화우정)’, 발신지로 ‘PO Box 100561-003777, Taipei Taiwan(대만 타이베이)’ 등이 적힌 것들이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우편물 안에는 완충제만 들어있거나 비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과학연구소와 경찰 등이 정밀 분석한 결과 별다른 유해 물질은 없었으며 지금까지 폭발물이나 유해 물질이 확인된 사례는 아직 없다. 그러나 미확인 국제우편물이 전국 각지서 대거 발견된 만큼 관계 당국은 사실관계 파악에 힘을 쏟고 있다.

소포에는 립밤 같은 물건이 들어 있거나 충전재만 담겨 있는 등 비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찰청은 “울산서 해외 배송된 노란색 우편물을 개봉한 사람이 어지럼증 등을 호소한 사건 이후 전국서 해외 우편물 배송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며 “이와 유사한 우편물을 수취하신 분은 우편물을 개봉하지 말고, 즉시 가까운 경찰서로 신고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체불명 소포에 관한 우려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제주서 해외 우편물을 받았다는 주민 신고가 접수돼 화학물질 검사를 진행한 결과 신종 마약 성분인 LSD가 검출됐다. LSD는 환각 효과가 필로폰의 수백배에 달하는 합성마약이다.

시키지 않았는데 불쑥 외국서 발송
개봉 전 의심부터…육안 구별 불가

사건 당시 50대 남성은 탄저균 테러 소포를 연상시키는 우편물이 배달됐다며 제주시 조천읍 함덕파출소에 신고했다. 해외서 발송한 우편물에는 은박지에 스티커와 소크라테스 명언이 영어로 적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학물질 검사 결과 스티커서 LSD가 검출됐다.


탄저균 테러 소포 사건은 2001년 미국서 처음 벌어졌다. 미 상원의원 및 언론 매체 관계자들에게 탄저균이 묻은 우편물이 배달돼 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감염됐다. 일부 소포의 발신지는 2020년 7월 미국서 발생한 정체불명 씨앗 사건 당시 발신지와 같다고 전해진다. 해당 문구는 실제 발신자 주소가 아니라 대만 우체국 사서함 번호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당시 미국서 흙이나 씨앗 등이 담긴 중국발 정체불명 우편물이 발견돼 논란이 일었다. 당시 미국과 중국이 크게 갈등을 빚는 시기인 데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던 시기와 겹쳐 생화학 테러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 당국은 씨앗을 검사한 결과 겨자 등 일반 씨앗인 것으로 밝혀져 ‘브러싱 스캠’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브러싱 스캠은 온라인 거래 사기 수법 중 하나로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아무에게나 발송하고 수신자로 가장해 상품 리뷰를 올려 온라인서 판매실적을 부풀리는 행위를 말한다.

당시 미 농무부 관계자는 “정체불명 씨앗 소포들이 브러싱 스캠 수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며 “그러나 여전히 위험할 수 있어 씨앗을 받으면 즉시 신고하고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브러싱 스캠이 이어지면서 안전불감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화학 테러
위험물 공포

경찰은 이번 대규모 정체불명 소포 사건을 두고 브러싱 스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통상 알리바바나 아마존 같은 전자상거래 사이트에 입점한 중국 업체가 판매실적을 높이려고 가짜 고객을 동원하는 수법이다. 가짜 고객들은 브로커에게 돈을 받고 온라인서 무작위로 이름과 주소를 찾아 주문을 넣는다.

주문 이후 실제 물건보다 값이 저렴한 씨앗이나 가벼운 물건 등을 보낸다. 아울러 배송이 완료되면 가짜 고객이 업체에 후기를 좋게 써주는 방식이다.

알리바바 등 중국 내 유력 전자상거래 업체들은 브러싱을 막기 위한 자체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 당국까지 나서 브러싱 업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경정책을 이어가고 있지만 위법 행위는 여전하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는 브러싱 스캠이 금전 피해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개인정보가 악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주문하지 않은 중국발 소포를 받을 경우 전자상거래에 쓰는 비밀번호를 변경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 뉴욕 소비자보호부(DCP)서도 “(사기꾼들이)불법으로 당신의 개인정보를 침해한다”며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번 정체불명 소포는 대만을 단순 경유한 우편물로 발신자 추적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배송 기록이 남지 않는 ‘통상 우편’을 사용해 발신자 추적에 난항을 겪고 있다.

대만의 우정 당국인 중화우정은 중국 등에서 들어오는 화물을 영내에 반입하지 않고 X선 검사 등 간단한 안전 검사만 거쳐 제3국으로 발송하는 화전우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 경유 항공편이 많고 항공권 가격도 저렴해 이 중개 서비스를 이용하면 배송비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알리 익스프레스 등 해외 배송이 많은 중국발 물류가 주 고객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만 <연합보> 보도에 따르면 과거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가 한국과 일본 등에 제품을 자체 배송할 경우 평균 7일 정도 소요됐으나 대만의 화전우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배송 시간을 3~5일로 단축했다.

우리나라 우정 당국도 대만의 화전우처럼 국가 간 중개 환적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브러싱 스캠에 악용될 소지는 없다. 우리나라를 거쳐 제3국으로 발송되는 우편 환적 서비스는 화전우 시스템과 달리 추적 조회가 가능한 EMS와 ‘K-패킷’ 두 종류로 구성돼있다. 

우편 탐지
전국 6곳뿐

해외 우편물의 검사시스템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관세청은 마약 탐지 장비는 보유하고 있지만 화학·방사성 물질 탐지기는 보유하지 않은 실정이다.  

우편물에 든 내용물의 위해성 여부를 배송 전에 확인하는 절차는 관세청이 공항·항구 등에서 통관하면서 1차적으로 담당한다. 이후 배송 단계로 넘어오면 우정사업본부가 국제우편물류센터와 전국 주요 우체국, 우편집중국서 폭발물이나 유해 물질 포함 여부를 탐지한다.

우정사업본부 당국이 대규모의 브러싱 스캠 의심 우편물 접수 사태를 파악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우정사업본부와 관세청이 지난 5월 ‘마약 등 불법 물품 반입 차단과 국제우편 서비스 향상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밀수가 급증하는 가운데 마약 반입 차단을 위해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조치다.

이번 대규모 정체불명 소포 신고가 전국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두고 마약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급증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세청에 따르면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밀수 적발 건수는 2020년 292건서 2022년 461건으로 증가했다. 적발된 마약의 양은 38.2㎏서 361.2㎏으로 9.5배 늘었다.

배송 전 국제우편물에 대한 화학·방사성 탐지를 맡고 있는 우정사업본부의 부담도 줄어들 전망이다. 인천 영종도 소재 국제우편물류센터 내 세관검사를 위한 별도의 독립된 전용 장소인 ‘국제우편 세관검사장’을 신축하기로 했다.

브러싱 스캠, 바이오 테러 변질 가능성
“해외 우편물 검사시스템 강화” 지적도 

올해 하반기 내로 라만분광기와 이온스캐너 등 고성능 마약 탐지 장비 도입을 확대하고, ‘마약 분석 포렌식센터’를 인천국제공항에 구축한다. 라만분광기는 레이저를 이용해 최대 1만2000종의 물질을 실시간으로 화학반응을 분석·판별할 수 있는 장비다. 

우정당국은 ‘우편물 사전정보’ 등 국제우편물에 대한 정보공유를 확대해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 반입을 차단하기 위한 단속체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우편물 사전정보란 ‘만국우편협약’에 따라 세관신고 등을 위해 우편물을 보내는 국가가 받는 국가에 해당 우편물이 도착하기 전에 제공하는 우편물 정보를 말한다.

국제우편 세관검사장이 신축되면서 국제우편을 통한 생화학 테러 위험과 마약 밀반입 차단을 위한 단속체계가 더 강화될 전망이다.

손승현 우정사업본부장은 “국제우편을 통한 마약류 반입 등 불법 반입물 차단에 관세청과 함께 노력하겠다”면서 “관세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국민이 불편함 없이 우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태식 관세청장도 “국제우편물의 국내 반입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들이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마약범죄가 늘면서 일차적으로 공항이나 항구서 고성능 마약 탐지 장비 도입이 확대됨에 따라 유해 물질이나 폭발물 포함 여부도 탐지가 가능하게 된다. 아직 화학 및 방사능 물질 탐지기가 갖춰진 우편시설은 국제우편물류센터 등 전국 6곳에 그치고 있다. 

미국은 2001년 우편물을 이용한 탄저균 테러로 5명이 숨진 후 편지·소포 등에 대한 대응 요령이 정비돼있다. 중국도 2019년 브러싱 스캠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마련했을 정도로 해당 수법이 이미 퍼져 있는 상황이다.

의심 물건
대응 요령

미 우편공사 검사국은 내용물이 의심되는 소포를 받았을 때 접촉했을 경우 온수와 비누로 손을 세척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우편물을 즉시 격리하고 대피해야 한다고 전했다. 브러싱 스캠 의심 건이 발생하면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해당 온라인 쇼핑몰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업체에 즉시 연락하라고 권고한다. 미국 주요 전자상거래 플랫폼 업체들은 자사 홈페이지에 브러싱 스캠 대처 방법을 소개하고 피해 사례를 접수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주문하지 않은 택배를 받으면 향후 분쟁 소지를 막기 위해 미개봉 상태로 두거나 버리지 않는 게 좋다”며 “발신자가 명확할 경우 해당 업체에 알리는 등 객관적 증빙자료를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해외 개인정보 유출이 의심될 경우 의심되는 사이트의 정보를 수집해 한국인터넷진흥원 118에 민원을 접수할 수 있다. 

<ojh34522@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떠오르는 ‘탄저균 소포’ 악몽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미국에서는 탄저균을 이용한 소포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모두 5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당시 하얀 가루가 들어 있는 소포는 미국 방송사들과 의회로 발송됐다.

소포를 개봉한 사람들은 탄저병에 걸렸는데, 하얀 가루에는 탄저균이 섞여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와 언론들은 9·11 테러 직후 벌어진 사건 배경을 지적했다.

탄저균 테러의 배후로 세계적인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이끈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 정부의 생물방어 집단서 일하는 고위 과학자인 세균 전문가 브루스 아이빈스가 저지른 것으로 봤다.

사건을 수사받던 아이빈스는 기소를 앞두고 자살을 택했다.

사건의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기도 전에 수사는 일단락됐다. 

당시 전 세계는 탄저균 테러에 대한 공포감에 소포를 확인할 때마다 불안에 떨었다.

국내에서는 아직 우편 테러가 발생한 적은 없으나 대규모 정체불명 소포로 불안감은 지속될 전망이다.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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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정재관-박종철 ‘낙하산 고리’ 추적

[단독] 김건희-정재관-박종철 ‘낙하산 고리’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10·29 이태원 참사 당시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정재관 현 군인공제회 이사장(당시 대통령경호처 소속)에게 대통령실 인근 전단지 제거 상황을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 이사장은 대한토지신탁의 박종철 대표이사를 ‘낙하산으로 임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 대표가 김건희 일가의 양평 공흥지구 개발사업의 담당자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다.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관련 청문회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0월29일 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당시 대통령경호처 소속이던 정재관 이사장에게 대통령실 인근 담벼락에 붙은 전단지를 제거했음을 보고하는 취지의 문자메시지와 사진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공공기관 인사를 둘러싼 윤석열정부의 정치권 인맥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태원 참사 개입 정황들 이날 오후 10시51분 박 구청장이 보낸 문자에는 ‘전단지 제거 완료’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정 이사장은 ‘ㅋ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취지의 답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메시지가 오간 시간대는 소방 경찰 시민이 뒤엉켜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심폐소생술을 하던 10시49분과 겹친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는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가 대통령실 인근 전단지 제거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면 행정 대응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태원 참사 이후 인파 관리 실패와 초기 대응 부실이 핵심 책임 논쟁으로 이어졌던 만큼, 참사 당일 용산구청이 어떤 업무에 행정력을 투입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박 구청장은 청문회에서 해당 문자와 관련해 “전단지를 제거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우리 업무인 것 같아 전화해 보라고 한 것일 뿐 바로 나가서 제거하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문위원들은 문자 내용과 상황을 근거로 사실상 조치 지시가 있었던 것 아니냐며 강하게 추궁했다. 또 참사 상황에서 대통령실 인근 문제를 별도로 챙기고 이를 대통령경호처 인사에게 보고한 정황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사고 우려 민원 전화가 쇄도하던 때 박 구청장은 대통령실 인근 담벼락에 붙은 진보 단체 전단지를 다 떼어냈다며 사진과 함께 보고 형식의 문자를 보냈다. 이를 받은 정 이사장은 웃으며 “고생했다. 이태원 압사사고 안타깝고”라고 답한 것이다. 이번 문자 공개로 이태원 참사 당시 지방자치단체의 대응 판단과 대통령실 주변 기관과의 관계, 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행정 대응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박 구청장이 문자를 보낸 정 이사장은 김용현 당시 대통령경호처장과 절친한 육사 38기 동기다. 윤석열 캠프에서 ‘국방정책자문단 육사 8인회’로 통했으며 용산 ‘대통령실 이전 TF’에서 활동했다. ‘21세기 하나회’나 다름없다. 이태원 참사 전단지 제거 의혹 제기 보고받은 정, 대토신 사장 임명 개입? 박 구청장은 수사와 재판에서 이날 오후 10시51분에야 이태원참사를 인지했다고 주장했다. 느낌표까지 쓰며 “전단지 제거 완료”를 보고한 바로 그 시각과 분 단위까지 일치한다. 박 구청장이 참사 현장에 도착한 건 8분 뒤인 10시59분. 그 사이 박 구청장이 어디에 몰두했는지 그리고 대통령실 측근들과 어떤 소통을 한 건지 처음 드러났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연 청문회에서 양성우 이태원 특조위 위원은 “정재관이 전단지 제거를 요청했기 때문에 자랑하려고 보낸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박 구청장은 “전혀 아니”라고 답했다. 양 위원이 “정재관을 통해서 경호처장 김용현, 나아가 대통령 내외에게 전달될 것을 의식하고 보고한 것 아닙니까”라고 재차 질문하자, 박 구청장은 아니라고 답했다. 앞서 정 이사장은 특조위 조사에서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대통령실에 협조한 걸 자랑하려고 일방적으로 보낸 것 같다”고 진술했고, 이날 청문회에 불출석했다. 현재 정 이사장이 이끌고 있는 군인공제회는 약 17만명 군인 회원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대형 기관이다. 자산 규모는 20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하 기업 가운데 하나인 대한토지신탁은 군인공제회가 100% 지분을 보유한 부동산 신탁회사다. 사실상 공제회의 핵심 투자 및 사업 플랫폼 역할을 한다. 문제의 중심에는 정 이사장과 대한토지신탁 대표 박종철의 인사 흐름이 있다. 정 이사장은 2023년 1월 제16대 군인공제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예비역 육군 준장 출신으로 통상 소장 또는 중장급이 맡아왔던 자리에 임명된 이례적 인물이다. 군 안팎에서는 그의 발탁 배경에 윤 정부 핵심 인맥으로 꼽히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20조 책임진 원스타 준장 실제로 군인공제회가 창립된 1984년 이래 준장급이 이사장을 맡은 건 정 이사장이 처음이다. 예비역 준장 출신인 정 이사장이 발탁된 데에는 ‘김용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군 인사에 정통한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군인공제회 이사장은 현역 군인 및 군무원 37명으로 구성된 제113차 대의원회의에서 선출, 국방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취임하기 때문이다. 또 정 이사장은 육군사관학교 38기 출신으로 한미연합사 민군작전처장, 합참 민군작전과장, 국방부 국회협력단장 등을 거친 군 경력 인사다. 특히 국방부 국회협력단장 시절 정치권과의 연결고리를 구축하며 윤정부 핵심 라인과 가까운 인물로 분류됐다. 논란은 그로부터 약 4개월 뒤 이어진 박 대표를 선임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대표이사 선임 과정 역시 공제회 이사회 추천과 국방부 승인 절차를 거치는 구조이기 때문에 사실상 모회사인 군인공제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내부에서는 이 같은 인사 흐름을 두고 “군인공제회 수장 교체 이후 산하 기업 인사까지 연쇄적으로 바뀌는 전형적인 권력 인사 패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대한토지신탁 대표 선임 과정은 공개 채용 형식을 취하지만, 최종 후보자는 군인공제회 이사회의 추천을 받아야 하고 국방부 승인까지 거쳐야 한다. 결과적으로 공제회 수장의 의중이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박 대표의 과거 이력까지 다시 조명되면서 정치적 논란이 확대됐다. 박 대표는 과거 양평 공흥지구 개발사업을 담당했던 대한토지신탁 실무 책임자로 알려져 있다. 이 사업은 윤석열 전 대통령 장모 최은순씨 일가가 연루된 특혜 의혹 사건과도 연결된 사업이다. 당시 윤석열 측은 대선 과정에서 공흥지구 개발사업이 대한토지신탁 주도로 진행된 만큼 특혜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자료에서 박 대표가 해당 사업 담당자로 확인됐다. 2018년 12월 사업1본부장으로 퇴사한 박 대표가 정권 출범 이후 다시 복귀한 배경을 둘러싸고 ‘낙하산 인사’ 의혹이 제기됐다. 대한토지신탁은 지난 11월 초 <일요시사>와 통화하며 “2014년 양평 공흥지구 사업은 오래된 만큼, 담당자를 알 수 없다”고 일축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이 요청한 ‘대한토지신탁 양평 공흥지구 개발 담당자 명단’에는 박 대표를 비롯한 양평 공흥지구 사업 실무자들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재돼있다. 김건희 일가 집사로 활동 민중기 특별검사팀은 김건희의 가족 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ESI&D)가 양평 공흥지구 개발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고 의심하고 있다. 민주당 한준호 의원이 대한토지신탁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박 대표는 2014년 5월27일 양평 공흥지구 사업 담당자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박 대표는 대한토지신탁 사업1본부장으로 근무하다가 2018년 12월 퇴사했다. 2019년과 2020년에는 에이치에스파트너스그룹 사장과 비전알이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윤 전 대통령 당선 이후인 2023년 5월 대한토지신탁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이 같은 의혹은 대한토지신탁의 최근 경영 상황과 맞물리며 더욱 확대되는 분위기다. 대한토지신탁은 부동산 경기침체와 PF 부실 여파로 유동성 압박을 겪고 있다. 군인공제회는 최근 수천억원 규모의 재무 지원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대한토지신탁은 군인공제회로부터 지급보증과 채권 인수 등을 통해 수차례 자금 지원을 받았지만 경영지표 개선은 제한적이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의 노후자금이 부실 자회사 방어에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대한토지신탁은 군인공제회의 100% 전액 출자를 바탕으로 부동산 신탁 및 개발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군인공제회는 대한토지신탁의 주요 자금 조달이나 사업에 대한 지급보증을 지원하는 등 모회사를 지원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군인공제회는 대한토지신탁의 대표이사를 공모하는 모회사다. 대한토지신탁의 대표이사 선임 과정도 군인공제회의 자회사 인사 시스템과 상법 및 관련 법규에 따라 진행된다. 대표이사직이 공석이 되면, 군인공제회는 대한토지신탁 대표이사를 공개 채용한다. 지원자들은 정해진 기간 내에 지원서를 제출하며, 대한토지신탁 인사총무팀 등에서 서류 전형을 진행한다. 양평 공흥지구 사업1본부장이 대표이사로 김용현 입김?···군인공제회 연결고리 주목 논란의 핵심은 인사와 경영 책임의 연결성이다. 군인공제회는 군인 복지와 연금 재원을 운용하는 기관인 만큼 정치권 외풍으로부터 독립성이 중요하다. 정 이사장의 임명 배경부터 산하 기업 대표 인사까지 정치적 인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기관 운영의 투명성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상황이다. 군 관련 기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공제회 관계자들은 “이사장이 특정 정치 라인으로 임명되면 관련 인사들이 주요 보직에 연쇄적으로 배치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며 “기관의 본래 목적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선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군인공제회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 공우이엔씨도 자금난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공우이엔씨는 대한토지신탁과 마찬가지로 군인공제회가 출자한 자회사다. 1993년 설립된 제일종합개발은 1999년 공우개발사업소 창설로 이어졌다. 군인공제회관과 계룡대 등의 시설 관리, 예식장, 사우나, 체력 단련장 등을 직영하는 업체였다. 2000년엔 육군 오수처리시설 용역관리와 환경공사로 사업 분야를 넓혀 나갔다. <일요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부 핵심 사업은 이미 공우이엔씨 손을 떠난 상황이다. 2012년 국우터널이, 2022년엔 문학터널이 무료화됐다. 2023년엔 경북 영천 소재 군 골프장 충성대 체력단련장 운영이 종료됐다. 전자공시시스템에 게재된 2023년 감사보고서는 공우이엔씨 민간사업 관련 보증이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우이엔씨는 BTL이 아닌 기타 분야 사업에서도 2000억원대 보증을 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기준 공우이엔씨 기타 사업 보증액 규모는 835억원 규모였다. 이 중 시설관리용역 관련 보증액을 제외한 기타 사업 분야 보증액 규모는 394억원이었다. 2년 사이 기타 사업 관련 보증액이 1222억원 불어났다. 2년 사이 보증액이 약 335% 폭증한 셈이다. 이로 인해 자금난 얘기가 고개를 든 것으로 파악됐다. 공우이엔씨 상황은 2024년 들어 악화일로에 접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2023년 기준 공우이엔씨 매출액은 1066억5280만원 규모였다. 그러나 23억2986만원 규모 영업손실을 봤다. 내부적으론 2024년 손실액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내부 불안감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공우이엔씨 적자 허덕 정 이사장과 대한토지신탁 박 대표 인사 사이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군인공제회와 산하 기업 인사 구조상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제기되는 상황이다. 군인들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공공성 기관에서 정치권 인맥 중심 인사가 반복될 경우 제도적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