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현지 취재> 국내 유입 루트 ‘마약 성지’를 가다

코리아타운 슬럼가서 퍼지는 ‘샤부’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국내 마약은 대부분 동남아서 유통된다. 최악의 생산지대를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른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 접경지역에 한정됐던 영역은 캄보디아와 필리핀, 베트남 등지로까지 넓혀졌다. 필리핀 슬럼가와 코리아타운에까지 퍼져 일반인이 순식간에 유통책과 투약자가 될 수 있는 ‘셋업 범죄’도 심각하다. <일요시사>는 지난달 말부터 필리핀 현지 마약 사건과 범죄인 인도조약 문제, 유명 한국인 범죄자들의 상황을 들여다봤다.

필리핀 코리아타운은 여러 곳에 있다. 정부 차원서 공식적으로 지정된 곳은 한 곳이지만 수도인 마닐라 안에 마카티, 말라테, 클락 앙헬레스 등 번화가에 코리아타운이 몰려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극빈층 수십만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필로폰의 일종인 ‘샤부(Shabu)’라는 각성제를 판매하기도 한다. 문제는 아이들마저 살기 위한 수단으로 마약 소비·판매 행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살기 위한
수단으로

필리핀은 연간 약 500t의 필로폰과 1500t의 헤로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이 2016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지역 경찰과 마약 조직의 유착으로 제대로 규제되지 않았다. 헤르난디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취임 후 마약 조직과 연루된 혐의로 체포된 경찰 고위직만 수십명에 달한다.

이들 중 일부는 경찰서 내에서 마약을 판매하기도 했다.

실제 필리핀 국가 경찰은 지난해 말 마닐라 톤도서 67억페소(약 1632억원) 상당의 필로폰 990kg을 압수했다. 수사 과정서 사건에 연루된 마약 단속반 소속 정보요원의 개인 소지품, 신분증 등도 발견됐다. 이 사건은 최근 필리핀 경찰이 압수한 필로폰 양 중 ‘역대급’으로 꼽힌다.


당시 경찰은 마약 구매자로 위장해 판매자와 거래를 시도하는 수법으로 범인에게 접근해 대량의 마약을 숨겨둔 건물을 습격했다. 경찰은 현장서 50세 남성을 체포하고, 현장에 남겨진 공범의 신분증 등을 발견했다.

아주린 주니어 필리핀 경찰청장은 당시 “더 많은 경찰관이 마약 거래에 연루돼있으며, 이번에 적발된 경찰관은 ‘작은 선수’에 불과할 것”이라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이어 “부패 행위를 저지른 경찰관은 공정한 심판을 받을 것이며, 필리핀 경찰은 직급을 막론하고 어떠한 잘못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벤허 아발로스 내무장관은 지난달 이와 관련해 “50명의 용의자 중 48명이 CCTV 영상에 등장했으며, 추가로 2명의 경찰관이 공모 혐의로 기소됐다”고 말했다.

또 “이들을 상대로 국가경찰위원회가 형사소송 외에도 행정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행정소송서 공식적으로 기소될 수 있는 혐의에는 중대한 위법 행위와 중대한 직무태만이 포함되고, 유죄가 입증되면 해임, 수당 몰수, 공직 자격 박탈 등의 처벌을 받게 된다”고 강조했다.

사실 필리핀 고위직 경찰 간부가 마약 매매에 연루된 경우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2019년에도 필리핀 국가 경찰국장이었던 오스카 알바얄데 장군이 100kg이 넘는 필로폰을 판매한 경찰관들을 보호했다는 혐의로 사임했다.

법무부는 그를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사건을 취하했다. 필리핀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서 1년에 발견되는 필로폰만 1t이 넘는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필로폰은 더 많다. 발견되지 않은 마약 중 일부가 슬럼가나 번화가로 뿌려진다”고 주장했다.

1년에 필로폰·헤로인 500~1000t씩 생산 전 세계로
‘골든 트라이앵글’ 핵심 지대…“골든타임 놓쳤다”


필리핀 경찰이 필로폰을 압수한 지역 톤도는 극빈층이 밀집된 ‘슬럼가’로 알려져 있다. 일부 NGO 단체가 꾸준히 봉사활동을 할 정도다. 슬럼가 아이들은 마닐라서도 손꼽히는 부촌인 보니파시오 글로벌시티와 마카티의 고층 빌딩을 보고 자란다.

한 필리핀 교민 단체 관계자는 “한국 청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성공하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배우지만 필리핀 슬럼가 아이들은 마약 유통 방법이나 인신·성매매를 배운다”며 “손쉽게 돈 버는 방법으로 인식된 지 오래”라고 말했다.

톤도를 포함한 슬럼가서 자란 아이들은 각성제(필로폰의 한 종류)인 샤부를 들고 다닌다. <일요시사>와 만난 두 명의 현지 아이도 “샤부! 샤부!”라며 마약을 사달라거나 여러 차례 판매하려 했다.

초등학생으로 추정됐던 소피아라는 이름의 한 아이는 한쪽 팔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이 아이 팔에는 여러 개의 주삿바늘 자국이 보였다. 소피아는 “샤부 1g을 팔면 일주일을 먹고살 수 있다”며 “2000~3000페소 정도만 벌면 된다. 더 많이 팔면 저 빌딩으로 이사할 수 있다고 어른들이 말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마약 판매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 것이다.

수년간 마약 판매의 삶을 이어온 것은 소피아뿐만이 아니다.

NGO 단체 관계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슬럼가에 거주하는 필리핀 주민 대부분이 일시적 기억상실, 심장 두근거림, 호흡기 질환 등을 달고 산다. 증상이 수은 중독, 미나마타병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역대급
압수물

수은은 신경계를 공격하고 평생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어린이에게 매우 해로운 독성이 강한 금속으로 고용량에서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실제 필리핀 슬럼가에 흐르는 하천에는 기준치 이상의 필로폰과 코카인이 검출되는 경우가 많다.

금 가공공장서 나온 수은으로 오염된 찌꺼기가 아이들이 목욕하고 일하는 강으로 곧장 흘러 들어오기도 한다.

코리아타운이 위치한 앙헬레스의 상황도 심각하다. 앙헬레스는 과거 미군의 세계 최대 공군 기지가 위치해 한때 중산층이 밀집돼있던 지역이었지만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을 계기로 기지가 폐쇄되면서 명성이 뒤집혔다.

이른바 홍등가로 알려진 워킹 스트리트 ‘필즈 애비뉴’(Fields Avenue)에는 성매매하려는 남성들이 대거 몰린다. 이곳에는 바, KTV(노래방), 비키니바(호스티스바), 마사지바 등이 즐비해 있으며 여기서 성매매도 성행한다.


길거리에 서 있는 여성들이 성매매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들은 때론 마약을 사고팔거나 전달하기도 한다. <일요시사>와 만난 한 필리핀 여성은 “매일 성매매 일을 할 순 없다. 다른 돈벌이로는 마약을 전달해 받는 수수료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여성도 “10명 중 절반은 마약 전달 경험을 해봤을 거다. 공급을 하다가 검거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했다.

성매매 종사자 중 일부는 마약 판매 행위로도 삶이 유지되지 않으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셋업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셋업 범죄란 경찰을 포섭한 이후 죄가 없는 사람에게 함정을 마련해 고소하거나 신고해서 뇌물을 요구하는 기획 범죄를 뜻한다.

비극의
대물림

관광객을 협박해 돈을 주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경우가 대다수다. 강제추행 또는 마약 신고 무마의 대가로 수억원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한 외사 경찰관은 “태국, 캄보디아 등지서도 셋업 범죄가 종종 발생하긴 하나 필리핀에 비할 바는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공권력이 범죄의 주체다 보니 한 번 걸려들면 빠져나오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필리핀서 성매매는 불법이다. 특히 18세 미만 성매매는 종신형에 처해질 수 있다. 피해자 입장에선 ‘대사관에 알려져 한국서 미성년자 성매매로 처벌받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느니 돈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외교부 관계자는 “셋업에 가담한 경찰은 범죄가 들통나면 처벌받기 때문에 끝까지 유죄를 주장할 것”이라며 “또 이역만리 타국서 증거를 모아 무죄를 받아내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금전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리핀 관광청에 따르면 매년 500만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필리핀을 방문하고, 이 중 120만명이 혼자 오는 남성들이다. 이들 대다수의 국적이 한국, 미국, 중국, 호주로 알려져 있다.

앙헬레스 슬럼가는 톤도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아이들이 마약을 팔거나 성매매를 하는 점에서 같지만 다양한 인종으로 이뤄져 있다. 흰 피부, 검은 피부뿐 아니라 한국인의 특징을 갖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대부분 ‘섹스 투어리스트’(성매매를 하러 온 관광객)다.

필리핀서 성매매가 불법이지만 강력한 단속이 없이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1억원이 넘는 필리핀 인구 중 100만명 가까이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고 있을 정도다. 추산치지만 실제로 근접할 것이라고 보는 게 현지 교민들의 이야기다.

환각 관광 아지트서 무슨 일이…
10대 아이들 유통책으로 돈벌이

2012년 미 국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6위 아동 성매매 관광객 송출 국가다. 엑팟(ECPAT) 등 국제 아동 성매매 관광 근절 단체는 “한국 관광객의 아동 성매매는 소아성애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아동성매매가 용인되는 상황서 이를 저지르는 이른바 상황적(situational) 구매자”라고 분석했다.

필리핀 당국도 인신매매법을 제정하는 등 성매매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는 있지만 유보적이다. 국제노동기구(ILO), 세계보건기구(WHO) 등에 따르면 섹스 투어는 필리핀 국내 총생산(GDP)의 2~14%를 차지할 만큼 충격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앙헬레스에 종착하는 많은 여성은 주변의 빈곤 농촌 지역인 사마르, 레이테, 비사야 등지서 온다. 이 여성들은 도시서 돈을 벌어 부모와 형제자매를 먹여 살리겠다는 생각 하나로 도시로 이동한다. 하지만 도시에도 그들을 위한 일자리는 거의 없다. 어쩔 수 없이 유흥업으로 빠지게 되지만 생활비 마련을 위해 ‘빚쟁이’로 전락한다.

빚을 갚기 위해 성매매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게 마약 유통이라고 한다.

마약 유통 과정서 인신매매 협박을 당하기도 한다. 앙헬레스서 인신매매업자는 여성에게 과도한 수수료 등을 부과하고 신분증을 압수해 사기성 계약을 작성한다. 여성이 성매매 굴레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협박의 굴레에 갇히는 건 마찬가지다. 필리핀 마닐라 북부 팡판가주의 한 호텔서 14세 어린 소녀 20명이 구출된 일화도 있다. 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있었으며 이들을 중개하는 업자는 거리서 아이들을 거래해 성매매에 이용했다.

얼마나
한국으로?

부모들도 아이를 돈벌이에 이용하기도 한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 <스테이시 둘리 인베스티게이츠>는 2017년 필리핀서 엄마들이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녀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영상을 찍어 팔거나, 성매매를 주선하는 장면을 보도하기도 했다.

성매매 경험이 있다는 한 10대는 “한 번의 성매매로 돈을 버는 것보다 샤부 1~10g 판매해 돈을 버는 게 더 쉽다”며 “유통책만 잘 알고 있으면 하루에 마약 판매로 1만페소도 벌 수 있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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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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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