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력 상실’ 공수처 막다른 이중고

사람도 없고 능력도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위기다.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수사력 논란에 행정인력 정원이 20명으로 제한돼있어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특히 공수처에 파견업무를 수행하던 공무원들도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맡고 있던 사건 처리도 느려지는 분위기다. 공수처는 정치권에 법 개정을 통한 인원 확충을 요구하고 있으나 과연 올해 안에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인력난에 빠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정치권에 법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행정인력 정원 제한을 풀어달라는 게 골자다. 그러나 수사력 논란조차 해소하지 못해 공수처가 정치권에 요구할 명분이 없다는 게 현실이다. 여당인 국민의힘 안팎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해온 ‘공수처 폐지설’을 다시 꺼내는 분위기다.

모자란 인력

공수처는 지난달 29일 정부과천청사에서 브리핑을 통해 처음으로 인력난을 호소했다. 김중열 공수처 기획조정관은 “인력 운용 현실이 점차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다”며 “근로자가 누려야 할 권리가 있음에도 대체 인력이 없고 인력이 적다 보니 근로자 공무원 개개인의 권익 침해까지 우려되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 기획조정관은 “행정인력 이탈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내년엔 수사관들에게 행정업무를 맡길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표했다.

공수처법 제11조(그 밖의 직원)에 따르면 1항은 ‘수사처의 행정에 관한 사무처리를 위해 필요한 직원을 둘 수 있다’고 규정한다. 같은 조 2항에서 ‘1항에 따른 직원의 수는 20명 이내로 한다’고 규정, 공수처 행정직원의 정원을 2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공수처 외 다른 부처 정원의 경우 일반적으로 법률에서 직접 정하지 않고 대통령령 등에서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지만, 공수처는 공수처 검사(처장, 차장 포함 25명 이내), 수사관(40명 이내)과 마찬가지로 법에서 행정직원의 정원이 제한돼있어 법률 개정 없이는 인력난 해소가 불가능하다.

지난달 말 현재 공수처 행정직원 정원은 법률상 20명이지만 ▲기획조정관 ▲인권감찰관 ▲대변인 ▲기획재정담당관 ▲운영지원담당관 등 5명의 국·과장을 비롯해 인사혁신처, 법제처 등에서 특정한 직무를 맡기 위해 파견된 직제파견자 2명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공수처가 가용 가능한 행정인력은 불과 13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13명 중 1명은 현재 육아휴직 상태다.

맡아야 할 업무가 정해져 있다 보니 언론 대응과 감사, 예산 등을 포함한 정치권 대응, 정보화 기록관리를 1명이 맡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 인원 급감 “수사관이 전산처리까지”
파견 공무원 수십명 제자리로…사건 속도↓

공수처 관계자는 “법률에 따라 중앙행정기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공수처는 이 인원으로 1개 부처가 맡는 행정업무 전반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 결과 행정직원 13명 가운데 5명(약 38%)이 과중한 업무, 육아, 건강상 문제 등의 사유로 휴직 의사를 밝혔거나 휴직 예정이고 일부는 이직 요청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공수처의 인력난은 최근 들어 극심해졌다. 인력난 해소를 위해 타 공공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등으로부터 직원을 파견받거나 공무직 인력을 투입해 대응해왔으나 지난해 말 48명이었던 파견 인력이 11월 현재 20명으로 줄었다.

공수처 관계자는 “파견업무를 수행하던 공무원 대부분이 제자리고 돌아갔다. 임시방편에 불과한 파견을 지속할 수는 없다”며 “법 개정이 되지 않으면 수사관들이 행정업무를 맡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수사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공수처는 현재 급여담당 직원이 육아휴직에 들어가 대변인실 직원이 대체 투입돼 지원 근무를 하고 있고, 장기 병가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직원이 업무를 대행할 인력이 없어 조기 복귀해 통원치료를 하며 근무하고 있는가 하면, 밀린 현안 업무로 인해 육아휴직도 신청하지 못하는 직원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명의 행정인력은 인사, 총무, 회계, 국회, 홍보, 감찰 등 중앙행정기관이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절대적으로 부족한 규모로 법률상 부여된 조직유지 기능 수행이 곤란하다는 게 공수처의 판단이다.

실제 대체 인력이 없는 조직 상황을 고려해 법이 보장하는 휴직 등 권리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조직의 사기 저하는 물론 일부 직원의 경우 이직을 요청하는 등 조직 이탈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정책능력진흥원은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정책연구용역을 수행한 뒤 최근 발간한 ‘공수처 조직역량 강화 방안 마련 정책연구 보고서’에서 공수처의 적정한 행정인력 규모를 50명으로 산출하기도 했다.

“초라한 성적표, 법 개정 명분 없다” 목소리도
윤석열 직접 폐지 불가…국힘, 지우기 나서나

공수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으나 정치권에서 관련 법 개정 후 통과까지 빠르게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국민의힘에서는 “이 틈에 공수처를 폐지시켜야 한다”며 윤 대통령이 주장해온 ‘공수처 폐지설’을 꺼내는 분위기다.

수사력 논란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공수처가 법 개정을 요구할 명분이 없다는 점도 국민의힘의 움직임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사실 민주당도 공수처를 통한 정권 수사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추세도 아니라서 당내에서 공수처와 관련된 반박을 하고 있지 않았다”며 “최근 법 개정 요구가 있었는데 공수처가 그런 주장을 할 명분이 있느냐는 식의 의견이 주를 이루는 건 맞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폐지시켜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공수처가 목소리만 컸지,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준 적이 없는 건 사실이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실제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실이 공수처로부터 받은 영장(체포·압수·구속) 청구 및 발부 현황 자료에 따르면 공수처는 2021년 1월부터 체포영장 4건과 구속영장 2건을 각각 법원에 청구했지만 한 건도 발부받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공수처는 ‘고발 사주’ 의혹으로 손준성 당시 대구고검 인권보호관을 상대로 체포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됐고, 이후 구속영장을 2차례나 청구했다가 모두 기각당했다. 같은 기간 피의자 주거지 등을 수색하는 행위인 압수수색 역시 60건을 청구했지만 16건(기각률 26.6%)은 기각됐다.

사건 처리는 전체 4550건 중 지난 3월 ‘스폰서 검사’로 불린 김형준 전 부장검사를 기소한 것을 포함해 총 3건을 재판에 넘기는 데 그쳤다.

공수처를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 폐지시킬 수는 없다. 정부조직법상 부처가 아닌 별도 특별법에 근거한 조직으로 대통령이 아닌 국회의 감독·통제를 받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수사력 논란

대선 과정에서 공수처는 사실 윤 대통령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옵티머스 펀드 사기 부실수사와 고발 사주, 판사 사찰 문건 불법 작성 의혹 등으로 수사를 진행했으나 공수처의 칼날은 날카롭지 못했고 현재는 조준마저 불가능해졌다는 지적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도 공수처에 대한 관심을 끈 모양새다. 검찰 견제기구라는 명분으로 공수처 설립을 강행한 뒤 정권이 바뀌자 당내 핵심 논의에서 아예 제외됐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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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사’ 국힘 생존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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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법원이 주호영 국회부의장의 대구시장 경선 컷오프 관련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그러자 주 부의장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항고할 뜻을 내비쳤다. 주 부의장의 강경 대응은 저조한 국민의힘 지지율과 맞물려 혼란상을 더욱 극적으로 비추고 있다. 과연 국민의힘이란 ‘대마’는 ‘불사’의 존재일까?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에서 컷오프된 것에 반발해 지난달 26일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수석부장판사 권성수)는 지난 3일 이를 기각했다. 그러자 주 부의장은 곧바로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법원 결정에 반발했다. 법원 결정 바로 반발 주 부의장은 “저는 그동안 이번 컷오프가 절차·내용 모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왔다”며 “법원의 판단과 별개로 이번 공천 과정이 과연 당원·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공정하고 민주적인 절차였는지는 여전히 엄중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주 부의장은 지난 6일 항고를 제기했다. 이어 지난 8일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항고심 판단을 끝까지 지켜본 후 제 거취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선 일각에서 제기했던 무소속 출마설을 일단 유보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어 주 부의장은 “항고심 판단을 기다린다고 해서 이번 공천 난맥상과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체제의 책임을 덮고 가겠단 뜻은 결코 아니”라며 “이런 공천 구조를 만든 세력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공천은 충성의 대가나 숙청의 도구가 아닌, 오직 국민 앞에 가장 경쟁력 있고 책임 있는 후보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을 컷오프한 것을 ‘숙청’이라고 암시했다. 주 부의장이 대구시장 출마에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6선인 주 부의장은 대구 수성에서만 국회의원을 지냈다. 대구 수성을에서는 4선을 지냈고, 수성갑에선 재선에 성공했다. 이 중 4선을 했던 지난 2016년 총선 수성을 선거에선 친박(친 박근혜)계 주도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 출마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게 이겼다. 문제는 주 부의장이 당내 최다선인 6선 의원 겸 국회부의장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명예가 곧 실권을 보장하진 않는다. 아울러 주 부의장이 차기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해 7선에 도전하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같은 6선인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각각 부산 사하을·경기 시흥을을 지역구로 두고 있다. 부산은 이미 격전지가 된 데다 조 의원은 민주당계 정당과 국민의힘 소속으로 각각 3선 했고, 경기 시흥을은 수도권이다. 국민의힘의 안정된 텃밭으로 분류되는 대구 수성을에서 7선에 도전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설령 7선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도 참패 가능성이 제기되는 국민의힘이 2년 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다는 보장도, 국회의장이 되리라는 보장도 하기 어렵다. 오는 2028년 총선까지 연일 떠들썩하게 이어지는 계파 갈등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후 대안 야당으로 발돋움하면서 이재명정부가 실정으로 지지율이 폭락하는 상황이 겹쳐야 승리를 노려볼 수 있다. 주 부의장이 국회의장에 도전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불확실한 국회의장…‘텃밭 7선’ 대신 대구? 연이은 공천 가처분 세례 속 서울 지지율 13% 따라서 주 부의장이 대구시장 출마에 집념을 불태우는 것은 필연이다. 대선 패배 후 대구시장에 출마해 당선됐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전례도 있다. 주 부의장으로선 “나라고 출마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니란 분석이 있다. 대구시장으로서 임기를 마친 후 대권에 도전하거나 당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가능성은 일명 ‘주한 연대설’로 통하는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와의 연대설 때문에 불거졌다. 이는 국민의힘 이정현 전 공천관리위원장이 주 부의장을 컷오프한 직후 불거졌다. “주 부의장이 무소속으로 대구시장에 출마해 대구 수성갑에서 재보궐선거가 진행되면, 한 전 대표가 여기에 출마하는 형식으로 연대한다”는 설이다. 한 전 대표 측으로선 손해 볼 게 없다. 한 전 대표는 지난달 25일 채널A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보수 재건이 필요하다고 공감하면서 나서겠다고 했다”며 “우린 이미 연대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반면 주 부의장은 신중한 반응을 내비쳤다. 그는 지난달 26일 기자들을 만나던 중 주한 연대설 관련 질문을 받자 “제 코가 석 자인데 딴 생각할 여지가 있겠느냐”고 답변했다. 다만 무소속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선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준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따라서 주한 연대설 성립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나왔다. 주 부의장의 항고 제기는 국민의힘의 치명적 문제 하나를 외부로 노출했다. 국민의힘에선 당내 처분에 대해 연이어 법원으로 달려가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가깝게는 주 부의장과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컷오프에 대한 가처분을 신청했다. 김 지사는 주 부의장과 달리 가처분이 인용돼 경선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멀게는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배현진 의원에 대해 각각 결정했던 제명·당원권 정지 1년 징계의 효력도 법원에서 정지됐다. 4건의 가처분 모두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 판단했다. 재판부는 주 부의장 건에 대해서만 국민의힘의 손을 들어줬다. 장 대표는 김 지사가 신청한 가처분이 인용된 다음 날인 지난 1일 기자들과 만나 “법원이 정치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며 “재판장이 국민의힘에 와서 공천관리위원장과 윤리위원장을 하면 될 것 같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해선 “정치의 사법화가 심각할 정도로 진행된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공천 관련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의힘의 지방선거 승리 가능성을 어둡게 하는 신호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갤럽은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2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상대로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조사원이 직접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율은 48%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18%로 집계됐다. 제 코가 석 잔데… 서울에선 민주당 지지율이 51%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13%로 집계됐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민주당 지지율은 42%로,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7%로 집계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 바람). 영원한 격전지 서울에서도 양당의 지지율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여론조사 결과 수치가 공개되자,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한 지적이 날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4일 자 사설을 통해 “국민의힘은 지금 수도권에서 후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며 “현행법상 15% 이상 득표해야 선거 비용을 전액 보전받을 수 있는데 그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한다는 것”이라며 현실을 짚었다. 이어 “말로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했을 뿐 실제로는 반대로 하고 있다”며 “공천 혼란에 대해서도 가처분을 인용한 법원 탓만 할 뿐, 어떻게 수습하고 책임질지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등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라면, 수습·책임을 맡을 당 대표는 보이지 않는 셈이다. 해당 매체는 “어렵게 나선 후보들은 국민의힘 상징색인 빨간색을 포기하고 흰색 점퍼를 입고 다닌다”며 “인구가 1300만명에 달하고 국회의원 의석수도 가장 많은 경기도에선 지사 출마자를 구하지 못해 공천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현실도 짚었다. <조선일보>가 짚은 국민의힘의 현실은 신체를 통제할 두뇌 없이 거대한 군집을 이룬 채 각자의 역할을 맡은 군집 생물에 비유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관해파리를 들 수 있다. 관해파리는 겉으로 볼 땐 덩치 큰 해파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역할을 맡은 독립 개체들이 모인 군집이다. 이 개체들은 먹이 섭취·이동·번식 등 각각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각각의 개체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연결돼있지만,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뇌는 없다. 개체 중 누군가가 제 역할을 못하면 모두 죽는다. 단세포생물인 점균류도 먹이를 찾을 때, 각자의 세포가 알아서 효율적인 길을 찾는다. 이를 통제할 뇌는 없지만, 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최적의 경로를 결정한다. 그런데 잘못된 경로를 찾으면 방향을 틀 능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는 것은 군집 전체가 굶어 죽는 일이다. 페로몬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는 군대개미 집단도 선봉에 선 개미가 길을 잃으면 모든 개미가 원을 그리다가 지쳐 죽는다. 제 역할 못하면…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는 원심적 경쟁 이론을 주장했다. 보통의 민주주의 국가에선 정당이 중도층의 표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강경한 여당과 무책임한 야당이 양립할 땐 정당이 중도층을 설득하기보다 진영 결집에 따른 조직표 구성에 몰두한다. 이런 구도에선 중도층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정치적 대화도 단절된다. 이런 상황에선 후보자들은 당의 승리와 중도 확장을 포기하고, 강성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중도층이 정치에 냉담해지면서 설득 가능 대상으로 강성 핵심 지지층만 남기 때문이다. 가성비 높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후보자들이 지도부를 거부하면서 강성 핵심 지지층에게만 구애하는 각자도생에 몰두한다. 이는 결국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국민의힘의 지방선거 준비 과정에서 서울시장·경기도지사 경선에선 구인난에 빠졌지만, 대구시장·경북도지사 경선은 열기가 과도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특히 대구시장 경선엔 국회부의장·경제부총리·원내대표 등 당정의 핵심을 지낸 인사들이 모두 출마했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띄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리처드 카츠와 아일랜드의 정치학자 피터 메어는 정당을 카르텔·프랜차이즈 기업에 비유하는 독특한 이론을 발표했다. 카츠와 메어는 “현대 정당이 시민의 자발적 후원보다 국가의 정당 보조금·공천권 등 국가의 자원에 의존해 서로 담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앙당과 지역구 후보의 관계를 본사와 가맹점주 관계로 규정했다. 따라서 중앙당이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지 못하거나, 시장에서 자원의 가치가 폭락하면 가맹점주의 불만이 폭발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매개로, 캐나다의 정치학자 켄 카티는 “정당이 실제로 프랜차이즈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티에 따르면, 정당은 브랜드로서만 기능하고, 선거에선 후보가 중앙의 브랜드를 빌려온다. 공천은 결국 이들 간 계약 관계 역할을 한다. 이는 실제 정치적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일 서울 쌍문역 일대 쌍리단길을 방문했다. 오 시장의 현장 방문에 동행한 국민의힘 소속 서울시의원들과 도봉구의원들은 국민의힘의 상징색 빨간색이 아닌 흰색 점퍼를 입었다. 오 시장도 서울시 로고가 새겨진 흰색 점퍼를 입고 현장을 돌아다녔다. 지난달 31일 진행된 국민의힘 서울시장 본경선 후보들 대상 첫 토론회에서도 후보들은 장 대표를 비판했다. 이들은 “흰색 점퍼에 눈이 간다면 동그라미 푯말을, 빨간색 점퍼에 눈이 간다면 엑스 푯말을 들어달라”는 진행자의 요구에 일제히 엑스 푯말을 들었다. 오세훈 ‘흰색 점퍼’ 현장행 “빨간색 입고 싶다” 대우그룹·프랑스 사회당 등 한순간에 망한 대마들 하지만 말은 날카로웠다. 오 시장은 “빨간색 점퍼를 입고 싶은 마음을 엑스 푯말을 들어 표현해 봤다”고 말했다. 미래통합당 윤희숙 전 의원은 “흰색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장 대표”라며 “이번 공천이 마무리되면 백의종군을 결심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빨간 당 출신이 빨간색을 안 입는 자기모순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도 “장 대표가 확장하지 못했다면 후보들이 확장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달엔 장 대표의 지원 유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본사에 대한 가맹점주들의 집단행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서울시당위원장을 맡은 배 의원도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의 서울 지지율 13%의 주역 장동혁 지도부가 기초단체장 후보를 못 구한 지역의 후보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선거 패배 가능성이 내·외부에서 연이어 제기되고 있지만, 국민의힘 지도부에 대해선 “변화할 의지도, 대책도 없는 것 같다”는 평이 나온다. 이 같은 상황은 카츠와 메어가 이미 이론적으로 짚었다. 이들은 “카르텔 정당은 국가 자원을 독점하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바둑으로 치면, 국민의힘은 여러 개의 돌로 넓게 자리 잡은 곤마인 ‘대마’와 비슷하다. 시사 분야에서 관용적으로 잘 쓰는 표현 중 하나는 ‘대마불사’다. “대기업이나 대형 금융기관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망하지 않는다”는 관용 표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는 대마불사로부터 비롯됐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상황은 당시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의 해체였다. 김우중 당시 회장은 ‘세계 경영’이라면서 해외 업체를 공격적으로 인수했다. 그러다 IMF 금융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거쳤지만, 삼성자동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 과정에서 엄청난 빚을 져 결국 워크아웃을 선언했다. 김 전 회장도 해외로 도피했다. 대우그룹은 그렇게 해체됐다. 국제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캐나다의 집권당 진보보수당은 경제 실정과 내부 갈등 끝에 구심력을 잃고 연이은 당원 탈당 사태를 겪었다. 그 결과 150석을 넘게 보유했던 거대 여당이 선거 한번에 2석만 건지는 참패를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에서도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했던 사회당은 지난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강경한 좌파 성향 브누아 아몽 대선후보를 선출했다. 그러자 사회당 소속 정치인 다수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창당했던 신생 정당 앙 마르슈로 옮겼고, 당은 선거에서도 참패했다. 반대로 민주당은? 민주당은 대구시장 선거 승리를 위해 대구에서 일정한 기반을 갖추고 있고 선거 승리 경험도 있는 김부겸 전 총리를 대구시장 후보로 선출했다. 이어 지난 8일엔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김 후보와 함께 대구 농수산물도매시장을 방문하는 등 승리 의지를 드러냈다. 구인난을 겪고 있는 국민의힘과 달리, 민주당에선 추미애 의원이 치열한 경선 끝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돼 주목받고 있다. 대마불사는 과연 영원한 걸까. 대마불사만 믿고 배짱 영업을 해도 되는 걸까. 대우그룹 해체는 국민의힘에 어떤 의미를 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