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VS 윤석열 탄핵 지연전 비교

끌면 끌수록…시간은 누구 편?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된 지 10여일 만에 첫 단추를 끼웠다. 헌법재판소의 강행이 있어서 가능했다. 윤 대통령 측은 여전히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변호인단은 준비기일 당일에 겨우 구성됐다. 앞서 수사와 탄핵심판에 당당히 나서겠다고 밝혔던 윤 대통령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에 최장 180일인 탄핵심판 기간이 초과할 것이라는 우려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 2주가 지났지만 관련 절차는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 윤 대통령이 변호사 선임을 이유로 서류조차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변호인을 통해 “탄핵 심판에 당당히 나서겠다”고 말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겨우 겨우
첫 단추

지난 14일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300명이 표결에 참석해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가결됐다. 탄핵안 가결 이후 우원식 국회의장은 탄핵소추의결서를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정 위원장은 탄핵소추의결서 정본과 사본을 각각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와 대통령실로 보냈다.

지난 14일 오후 7시24분 탄핵소추의결서가 대통령실에 전달되면서 윤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다. 이제는 수사기관과 헌재의 시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첫 단추 끼우는 것부터 문제가 되고 있다. 윤 대통령이 헌재의 탄핵 심판 관련 접수 통지 및 준비명령 수취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지난 16일부터 우편과 인편을 통해 윤 대통령에게 탄핵 심판 접수 통지와 출석요구서, 준비명령 등 서류를 보냈으나 송달에 실패했다. 관저에 보낸 우편은 경호처가 수령을 거부했고, 대통령실로 보낸 우편은 수취인이 없다는 이유로 반송됐다. 

구체적으로 인편으로 총 세 차례, 우편으로는 네 차례 대통령 관저와 비서실에 전달됐지만 배달되지 않았다. 계엄포고령 1호와 계엄 관련 국무회의 회의록 등 준비명령서는 인편과 우편으로 각각 두 차례 전달됐으나 수취인 부재, 경호처 수취 거부 등으로 직접 송달에 실패했다.

과거 대통령 탄핵심판 때와 비교하면 어떨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통과된 것은 2016년 12월9일이다. 박 대통령 쪽은 일주일 만인 같은 달 16일 헌재에 소송위임장과 답변서를 제출했다. 201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의 경우,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 5일 만에 소송위임장과 의견서가 헌재에 제출됐다.

헌재는 이에 형사소송법 제65조, 민사소송법 제187조에 따라 지난 20일 서류가 도달해 송달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 제65조, 민사소송법 제187조, 관련 대법원 판례를 종합하면, 정당한 사유 없이 소송서류 송달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등기우편으로 발송할 수 있고 송달의 효력은 소송서류가 송달할 곳에 도달된 때에 발생한다.

10일 동안 서류 수취 안 해 ‘버티기’
미루다 준비기일 당일 변호인단 제출

따라서 헌재가 대통령 관저로 보낸 탄핵 심판 서류들은 지금껏 경호처의 수취 거부로 송달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헌재의 발송송달 조치에 따라 송달이 이뤄진 것으로 간주한다.


헌재 측은 이번 발송 송달을 통해 서류가 지난 20일 목적지에 도달한 것으로 보고 효력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그간 있어왔던 심판 서류 ‘송달’에 대한 법리적 논란을 해소한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 24일까지 계엄 관련 국무회의록, 증거 목록, 입증 계획 등을 제출하라고 명령했고, 27일 계획된 윤 대통령의 변론준비기일은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고지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 측은 지난 24일에도 헌재가 명령한 국무회의록과 증거 목록, 입증 계획 등을 제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27일 변론준비기일은 무리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 대외 공보 역할을 수행 중인 석동현 변호사는 지난 24일 오전 기자회견서 “형사소송서도 기소 사실을 인지한 후, 변호사를 선임하고 공소장 부본 확인하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면서 “27일 변론준비기일은 무리”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대통령의 워딩”이라고도 했다.

이에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을 지낸 노희범 변호사는 “지금까지 대통령 탄핵심판이 두 차례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기간을 주지도 않았다”면서 “답변서를 준비할 수 있는 기간, 대리인을 선임할 수 있는 기간을 충분히 줬다”고 지적했다.

이어 “헌재는 변론준비절차를 27일로 정해서 고지했고, 대통령도 충분히 알았을 것”이라며 “ 지난 14일 담화문을 통해 윤 대통령은 스스로 계엄 선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탄핵 심판이든 수사든 당당하게 맞서겠다고 얘기했으면서 계속 지연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계속 (탄핵 심판)서류 송달을 거부하고 대리인 지정도 안 하면서 송달됐다고 하니까, 준비 기간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고 적반하장”이라며 “이렇게 (절차를)지연하거나 서류 송달조차 거부하는 경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렵사리 헌재의 탄핵심판절차가 시작됐지만 법조계에서는 윤 대통령이 헌재 심판을 늦출 변수가 남아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재 재판관 임명이 가장 큰 변수로 꼽힌다.

우선 윤 대통령이 대리인단을 확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로 꼽혔다. 실제로 지난 26일까지도 오직 윤 대통령과 40년 지기라는 석동현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하는 정도로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대리인단 불출석에 따른 재판 지연은 앞서 변론준비절차기일이 연기된 ‘검사 탄핵 심판’ 사건서도 나왔다.

그대로 
따라하기?

지난 18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 검사 3명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변론준비절차는 3분 만에 끝났는데, 국회 측 대리인단이 불출석했기 때문이다. 국회 측 대리인단은 지난 16일쯤 선정됐지만 선임 절차에 시간이 걸려 불출석했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헌재는 윤 대통령이 대리인단 명단을 제출하든 재판에 불출석하든 심판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헌재의 한 관계자는 “첫 변론준비기일에 윤 대통령이나 대리인이 출석하지 않으면 궐석재판으로 진행하자는 의견이 내부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궐석재판이란 피고인이 불가항력의 사고 없이 법정에 출정하지 않는 상태서 피고의 출석 없이 진행되는 재판을 말한다. 재판부가 윤 대통령에 대한 유감 표명과 함께 궐석재판 가능성을 시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헌재가 윤 대통령이 불출석한 상태서 불가피하게 궐석재판을 진행할 경우에는 늦어도 내년 1월부터 본격적인 변론이 가능할 전망이다.

노 변호사는 “윤 대통령 측에서 나오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준비 기간이 부족하다고 하면 12월30일이나 31일쯤 한번 정도 더 변론준비기일을 갖지 않을까 예상한다”며 “내년 1월부터는 본격적인 변론 절차로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변론준비기일 전날까지 변호인단 명단을 제출하지 않다가 재판 시간 4시가량 전인 지난 27일 오전 9시30분경에 헌재에 헌법재판소 출신 배보윤 변호사와 강력·특수통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 배진한 변호사 등을 선임했다는 소송위임장을 제출했다.

이로 인해 궐석재판이 이뤄지지는 않을 예정이다. 윤 대통령 변호인단은 석 변호사의 예고와 다르게 첫 변론준비기일에도 참석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최 권한대행의 헌재 재판관 임명 여부다. 국민의힘은 야당이 신임 재판관 임명동의안 처리를 강행할 경우 헌재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해 부당함을 다투겠다고 예고한 가운데 임명동의안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도 함께 낼 것으로 관측된다. 


헌재법 제65조는 ‘헌재가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받았을 때는 직권 또는 청구인의 신청에 의해 처분의 효력을 정지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더라도 결과가 나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가처분 신청을 병행할 것이란 전망이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3일 더불어민주당이 강행한 ‘상설특검 규칙 개정안’에 대해 권한쟁의심판과 효력정지 가처분을 함께 신청한 전례가 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권한쟁의심판 청구가 한 대행의 임명 권한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라 별도의 가처분 신청이 결과론적으로 유의미하진 않겠지만 시간을 끌기 위한 정치적 공세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가처분
가능성도

국민의힘이 권한쟁의심판과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고 여야의 갈등 지속으로 후보자 3인의 임명 시기가 늦어지면 윤 대통령 측에서 이를 재판 지연 전략의 빌미로 활용할 가능성도 크다. ‘9인 체제가 꾸려진 뒤에 공정한 재판을 받겠다’는 이유로 심리 연기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석 변호사는 현재 헌재가 재판관 3명이 공석인 것을 지적하며 “6인의 불완전한 합의체”라고 말했다. 그는 “변론준비절차는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법률가로서 부인하지 않지만, 본격적인 심리를 6인 체제로 할 수 있느냐를 포함한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논쟁적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석 변호사의 말은 헌재가 6인 체제로 본격적인 탄핵 심판 심리를 진행할 경우 이를 문제 삼아 탄핵 심판을 지연시킬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또 헌재서 본격적으로 변론이 시작된 뒤에 재판관들이 임명될 경우 윤 대통령 측에서 공판 갱신 절차를 요구하며 시간 끌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탄핵 심판은 형사소송법을 준용하는데, 형사소송법은 공판 도중 재판부 구성이 바뀌면 증거조사를 다시 하는 등 갱신 절차를 밟도록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지난 26일, 당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여야가 헌법재판관 임명에 관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거론하면서 “여야가 합의해 안을 제출하면 즉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겠다”고 못 박았다. 헌재서 궐석재판을 진행하더라도 차후 윤 대통령 측이 재판의 정당성을 빌미로 재판은 다시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윤 대통령이 탄핵 심판 시작 전부터 지연 전략을 펼쳤다면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을 진행하면서 지연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과거 박 전 대통령도 탄핵 심판 정국서 고의로 심리를 지연했다는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당시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3차례 열린 변론준비기일에 ‘국회의 탄핵 사유에 객관성이 부족하다’면서 각 기관과 기업에 무더기로 사실조회를 신청하며 노골적으로 지연 전략을 펼쳤다.

이후 형사재판과 같은 엄격한 입증 책임을 요구하면서 90명에 달하는 증인을 무더기로 신청했다. 신청이 기각돼도 거듭 신청해, 당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당시 헌재는 “탄핵 심판 사건은 형사재판이 아니라 헌법재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박 전 대통령 측의 요구를 지적했다.

문제는 대행의 재판관 임명 여부
박처럼 무더기 증인 신청 가능성

당시 탄핵심판 주심이었던 강일원 전 재판관은 박 전 대통령 측의 추가 증인 신청에 대해 “피청구인(대통령) 측에서 여러 기관에 사실조회 신청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게 채택되면 관련 증인은 필요 없을 것 같다”며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다.

결국 헌재는 36명에 이르는 증인을 채택했지만 이 중 상당수가 심판정에 나오지 않아 25명만이 신문을 받았다.

재판부는 반복된 질문엔 제동을 걸며 심리에 속도를 내기도 했다. 이정미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 입에서는 “생략”과 “효율”이라는 단어가 반복돼 나왔다. 이 권한대행은 증인신문 도중 “비효율적이다” “내용이 지엽적”이라며 박 대통령 측 신문을 여러 차례 막아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증인이 앞서 답변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기도 했다.

심리 중반에 들어서자 박 전 대통령 측은 ‘대리인단 전원 사퇴’ 카드를 꺼내 들 낌새를 내비치기도 했다. 새 대리인단이 선임될 때까지 심리는 멈추고, 심판이 재개되더라도 기록 검토를 위한 시간을 요청할 수 있어 심리가 늘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회 탄핵소추위원 측은 ‘대리인단이 없어도 탄핵 심리는 계속 진행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헌재에 제출하는 등 시간 끌기 전략 방어에 힘을 쏟았다.

박 전 대통령 측은 막판에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출석해 최후진술 할 가능성을 보이며 최종변론기일을 늦춰달라는 요청도 했다. 그러자 헌재는 최종변론 기일은 재판부가 정한 날짜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헌재는 “국정 공백과 사회적 혼란이 두 달 이상 지속되고 있다. 1년이고, 2년이고 재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12월9일에 탄핵안이 가결되고 탄핵 심판이 청구된 지 91일 만인 2017년 3월10일에 재판관 8명 전원 찬성으로 파면됐다.

윤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처럼 정식 변론서도 지연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서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딨느냐”고 한 데 이어 석 변호사가 연일 내란죄를 전면에 내세우며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내란죄 성립 여부에 대해 우선적으로 다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석 변호사는 윤 대통령이 계엄 선포 당시 국회의원을 ‘체포해라’ ‘끌어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다고 하는 등 구체적 사실관계도 부인했다. 탄핵 심판서도 이 같은 주장을 펴며 구체적인 법률 위반 여부는 물론 수사기록이나 언론 보도 등이 증거로 인정되는지를 다툴 수 있다.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박 전 대통령처럼 ‘12·3 비상계엄 사태’의 관련자를 무더기로 증인 신청할 가능성도 있다.

남아있는 
변수는?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으나 이를 풀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헌재에 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한 법조인은 “윤 대통령이 공개 변론서 직접 입장을 밝히거나 가처분 신청을 낸다면 탄핵 심리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되면 탄핵 심판보다 가벼운 가처분에 대한 판결을 우선적으로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관련 서류조차 안 받으며 지연 전략을 펼치고 있는 윤 대통령이 어떤 변수를 만들고 이에 대처하는지가 중요해 보인다”고 일침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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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우리에게 추석은 차례를 지내거나 귀향을 하는 것이 익숙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차례를 지내는 비중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긴 연휴를 활용한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자기계발 등을 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추석에 차례를 지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초반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차례와 제사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셈이다. 알바 우선 통계청 조사에서도 명절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긴 연휴를 여행으로 보내려는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했다.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행 중개 플랫폼 스카이스캐너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7%가 이번 추석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응답했다. 특히 해외여행 비중이 크게 늘었다. 10년 전 대비 명절 여행에 긍정적인 인식이 37%에서 70%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인기 여행지는 일본(43.1%)이 1위였고, 이어 베트남(13.2%), 중국(9.6%), 태국(7.5%), 대만(6.2%) 순이었다. 도시별로는 일본 후쿠오카(20.2%)가 가장 높은 검색 비율을 기록했으며, 오사카(18.3%), 도쿄(15.4%), 방콕(8.9%), 타이베이(8.0%)가 뒤를 이었다. 여행을 가지 않고 명절 연휴를 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긴 연휴를 활용해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 수요도 급증했다. 당근마켓과 같은 알바 커뮤니티와 플랫폼에는 “추석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20대 청년은 “쉬는 날이 길어 잠깐이라도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고, 한 대학생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세트 포장 알바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명절 기간에는 업무강도가 높아 평균 시급의 1.5배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근무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명절 시즌 알바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맞춰 구인·구직 플랫폼들은 ‘추석 알바 채용관’을 운영하며 수요를 모으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소매점과 전통시장에서 단기 인력을 모집하고, 선물용 고기·과일 세트 포장, 택배 상·하차, 진열·판매 등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절반 이상 “안 지내요” 77%가 여행 계획 세워 지난해 추석 구인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절반 이상(53.9%)이 단기 용돈 벌이를 위해, 22.2%는 고물가로 인한 지출 부담 때문에, 18.2%는 여행 경비나 등록금 등 목돈 마련을 위해 명절 알바를 계획했다고 답했다. 이는 명절을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보내지 않고, 생계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계발하며 추석 나기’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 중에는 독서나 온라인 강의, 어학 공부, 자격증 준비 등에 연휴를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터디 카페와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일부 출판사나 문화 기획사에서는 명절 연휴에 맞춰 북콘서트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명절이 휴식 기간만이 아닌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가족 모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MZ세대는 가족·친척 모임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한 청년은 “친척들과 모이면 취업·결혼 얘기 등으로 잔소리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친척 모임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필요한 경우에만 가족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활동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연휴를 도심에서 보내는 ‘혼추족’을 겨냥해 유통·외식업계도 다양한 이벤트를 내놓고 있다. 수도권 맛집 가이드, 추석맞이 전시·공연, 집콕형 OTT·게임 프로모션 등이 대표적이다. 편의점과 HMR(가정 간편식) 업체는 명절 한정 도시락·한상 차림 제품을 늘리고, 명절 기간 반값·카드 제휴 할인 등 단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추석 선물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굴비·한우·고급 과일 세트 등 전통 품목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실속형·소포장 선물세트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에서는 고급 커피·차 세트, 수제 디저트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소포장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과 자기계발이 더 유익해” 명절 스트레스 가족 모임 불참 온라인몰에서는 올리브 오일, 참기름, 견과류, 꿀 등 건강 지향 소품목 세트가 매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속형·소포장 선물을 찾는 배경에는 고물가 부담과 1~2인 가구 증가가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고가 선물을 준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보관이 편리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명절을 함께 보내는 가족 규모가 줄면서 필요한 양만큼만 담긴 선물세트가 ‘부담 없는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가격 대비 효용을 중시하는 MZ세대 소비자층도 이 같은 흐름을 이끌고 있다. 모바일 선물하기 판매는 전년 추석 대비 두 배 이상 늘었고, 온라인몰도 같은 기간 선물세트 매출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편의점 앱을 통한 선물세트 매출은 연중 대비 100% 이상 신장세가 관측됐고,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선물하기 거래액도 두 자릿수 증가를 이어가고 있다. 마켓컬리는 추석 기간 한시 선물하기 서비스를 운영하며 홍삼·화장품 등 선물 품목을 확장했다. 명절 식문화 자체도 간편화 된 흐름이 뚜렷하다. 1인 가구 1012만명, 2인 가구 600만명으로 소규모 가구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대형마트의 간편 차례상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증가했다. 편의점의 냉장·냉동 HMR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했고, 명절 한정 도시락은 1인 가구 밀집 상권에서 판매 비중이 높았다. 이번 추석에도 이런 흐름에 맞춰 대형 마트는 간편 차례상·냉동 밀키트 대형 할인전을, 편의점 4사는 명절 도시락 출시와 제휴 할인행사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밀키트와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증가한 데에는 물가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 설문에선 추석 전체 지출 예산이 평균 71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26%가량 늘었다는 응답이 나왔다. 지출 중에는 부모 용돈·선물 비중이 절반을 웃돌았고, 차례상 비용·내식 비용도 적지 않았다. 품목별로 과일·수산물·햅쌀·송편 등의 차례상 음식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입 축산물 고려 비율도 늘었다. 이 때문에 “차례상 형식을 간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선택의 시대 추석을 준비하는 한 30대 가정주부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차례를 안 지내거나 설에 한 번만 지내는 집이 많다. 고물가 시대에 음식을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담되는 것 같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간소화하더라도 차례를 지내는 행위에 의미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