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삼오오’ 대학가 시국선언 실체

학생은 없고 극우만 득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선고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가장 먼저 탄핵을 촉구했던 대학가서 갑작스레 탄핵 반대 바람이 불고 있다. 하지만 정작 대학의 주인인 학생과 교수들의 참여는 적다. 이에 빈집을 노린 ‘여론몰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체포 이후부터 이어진 대학가 시국선언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 재학생과 교수, 교직원이 아닌 외부인들도 자신의 신념에 맞춰 탄핵 찬반 집회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인이 참여한 시국선언에 대학 내부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처음엔
퇴진 촉구

지난해 12월에 대학가에는 윤 대통령 탄핵 찬성 시국선언이 한창이었다. 대학생들이 전국 대학가 곳곳에 모여 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 총학생회 연합 단체인 ‘한국대학총학생회공동포럼’은 지난해 12월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스타광장서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 규탄에 나섰다. 공동 기자회견에는 고려대·서강대·연세대·이화여대·한국외대·한국과학기술원(KAIST)·광주과학기술원(GIST)까지 전국서 총 7개교의 총학생회장이 참석해 차례로 대통령 규탄 발언을 했다.

이 시기 대학 각 캠퍼스서도 시국선언은 진행됐다. 서울교대 총학생회는 ‘민주주의를 이뤄냈노라 말할 수 있도록 예비교사들이 행동하겠습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부 규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연세대 재학생·졸업생 일동 또한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어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윤석열정권 퇴진 촉구 1809인 대학생 시국선언’을, 한국외대 재학생 일동 역시 ‘윤석열정권 퇴진 145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주최했다.

이 같은 시국선언 바람은 국내외 교수들에게도 퍼져갔다. 한양대 교수진 일동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본관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한양대 교수·연구자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국회는 전원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동의하라”고 규탄에 나섰다.

같은 날 전 세계 23개국 170여개 대학서 활동 중인 한인 교수와 연구자 등 300여명도 “반헌법적 내란을 일으킨 윤 대통령의 탄핵과 처벌을 요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국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학생들도 시국선언 흐름에 올라탔다. 전국 법학전문대학원 학생 1014명 일동은 성명문을 내고 “헌법을 짓밟은 윤석열에게 법학도로서 응당 분노합니다”라며 정권 규탄에 가담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과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역시 각각 지난해 12월5일과 6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가세했다.

일부 대학 총학들은 대통령 규탄을 위한 재학생들의 뜻을 모으기 위해 학생총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계엄 주동 세력의 반민주적 사태에 대한 학생 결의’라는 제목의 학생총회를 개회했고 1000명 이상의 재학생이 결집했다.

전국 대학 40여곳 탄핵 반대
재학생 수는 10~20명 내외?

서울대 학생들은 당시 캠퍼스 광장서 전체 학생총회를 열고 ‘윤석열 퇴진 요구의 건’을 의결했으며, 안건은 총 투표수 2556표 중 찬성 2516표로 가결됐다.


전국 40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 대표들도 정권 규탄에 동참했다. 이들은 “전공의 등 의료인을 처단하겠다는 것은 윤 대통령이 정권 유지와 사익을 위해 의료 개악을 이용했음을 보여준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진행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힘을 합쳐 윤 대통령 퇴진의 목소리를 내던 대학가는 어느새 탄핵 반대파와 찬성파가 대립을 이루는 장소가 됐다.

가장 먼저 탄핵 반대의 목소리를 낸 대학교는 연세대다. 지난달 10일 연세대에서는 탄핵 찬성 측과 탄핵 반대 측의 맞불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지난해 12월12일 연세대서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윤 대통령 퇴진 요구안 의결’에 대한 학생총회가 열린 후 공식적인 첫 집회다.

탄핵 찬성 측은 이날 오후 1시 학교 정문서 집회를 시작했다. 약 21명의 재학생, 동문, 일반인이 모였다. 이들은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 연세대 행동’이라는 현수막과 ‘쿠데타 옹호 말이 되냐! 민주주의 지켜내자’ ‘서부지법 폭동 강력 규탄한다’ ‘열사 정신 계승하자’ 등의 팻말을 들었다.

학내 탄핵 찬성 집회를 주도한 연세대 사회학과 4학년 김태양씨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며 “반민주적 폭거를 저지른 윤석열과 쿠데타 동조자들에 대한 심판은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극우 세력은 서부지법 난동 같은 폭력 사태까지 일으키며 탄핵 절차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며 “대학서도 극우의 논리가 고개를 들고 있고 연세대, 서울대, 한양대 등에서 탄핵 반대 시국 선언을 하겠다는 일부의 움직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연세대 학생총회 참석자 2733명 중 2704명이 윤석열 퇴진에 찬성한 데서 드러나듯이 다수의 학생들은 윤석열 퇴진을 바라고 있다”며 “윤석열 퇴진이야 말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한열, 노수석 정신을 올바르게 잇는 일”이라고 외쳤다.

반면, 탄핵 반대 측에서는 찬성 측에 ‘간첩이냐’ ‘거짓말과 선동으로 얼룩진 사기 탄핵을 규탄한다’는 말을 10여명이 외칠 뿐이었다.

순수 모임?
세력 개입

연세대를 시작으로 윤 대통령의 모교인 서울대와 고려대, 경북대 등 전국 주요 대학 40여개는 윤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자유수호대학연대’라는 보수 성향 대학생 단체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김준희 자유수호대학연대 대표는 단체에 대해 “대학교서 탄핵 찬성 시국선언만 열리는 것을 보고 뜻을 같이 하는 대학생들이 모여 탄핵 반대 시국선언을 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다”며 “현재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카이스트, 한국외대 등 다수의 대학교서 약 9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자유수호대학연대 관계자는 “(각 학교)졸업생과 대학원생 분들에게도 접촉을 해서 최대한 많은 인원을 동원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자유수호대학연대는 참여자 모집부터 장비·인력 지원까지 체계적으로 진행하며 대학별 시국선언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최종 선고를 앞둔 3·1절에 대학로 일대를 가득 채우기도 했다.

경찰에 따르면 전국 33개 대학 연합체 자유수호대학연대 회원 등 2500여명은 이날 낮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사대부초 인근 차로를 차지하고 전국 대학생 탄핵 반대 시국선언 대회를 개최했다.

행사에 몰려든 인파 상당수는 유튜버와 보수 집회 참가자였다. 보수단체 ‘사단법인 자유실천연대’ ‘호국총연합회’ 등의 대형 깃발들이 집회 현장 곳곳서 나부꼈다. 보수단체가 학생들의 집회 경호를 자처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이날 김 대표는 “윤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돼야 한다”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각 대학의 탄핵 반대 시위였다. 연세대와 서울대, 고려대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퍼졌다”고 자평했다.

대학가에서는 자유수호대학연대가 주관하는 시국선언에 재학생이 아닌 외부인 참석 비중이 높고, 서명 건수도 전체 학생 수 대비 낮아 학교를 대표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윤 대통령 탄핵 반대 릴레이 시국선언 현장서 재학생 참가자는 10~20명 내외로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극우 유튜버나 탄핵 반대 단체 관련자 등 외부인 중심으로 집회가 진행됐다. 


대표하기
어렵다

한국외대 시국선언 일동이 밝힌 이번 시국선언 서명 동참자는 약 300여명으로 그 중 절반은 익명이었다. 지난해 기준 한국외대 재적 학생 수가 2만2599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 1.3%가 해당 의견에 동의한 셈이다. 먼저 시국선언을 진행한 서울대도 졸업생까지 포함했으나 약 500명의 서명을 받는 데 그쳤다. 지난해 기준 서울대의 재적 학생 수는 2만1671명이다.

고려대는 지난달 21일 탄핵 반대 집회와 이에 맞서는 학생들이 충돌하며 아수라장이 됐다. 유튜버 등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거 몰리며 경찰이 출동해 중재에 나서는 상황까지 벌어졌지만, 참여자 가운데 재학생은 10여명에 그쳤다.

내란 사태 직후 학생회와 교수, 교직원들이 모두 목소리를 모아 탄핵 찬성 시국선언을 한 것에 반해 지극히 극소수의 학생들이 탄핵에 반대한 셈이다.

이를 두고 재학생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연세대 게시판에는 지난 5일 ‘연세대학교 명칭을 내건 무책임한 발언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문이 올라왔다.

성명문은 “마치 해당 의견이 연세대 전체 또는 공식적인 입장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대외적으로 학교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개인의 입장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포장하는 것은 학문의 신뢰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한 관계자는 “자유수호대학연대가 주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재학생, 대학원생, 졸업생의 수가 지극히 적다”며 “아무리 이들의 시국선언이 방학에 이뤄졌다고 해도 10~20명의 각 대학 동문들이 참여하는 것에 학교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고 꼬집었다.

이어 “사실 자유수호대학연대 이름을 내걸고 한 대학서 시국선언을 진행해야 할 수준”이라며 “자유수호대학연대와 극우 단체들이 릴레이 시국선언으로 교내에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많은 구성원 탄핵 촉구”
윤 지지자 2030 내세워

그러면서 “각 대학 학생회들은 2차 시국선언을 준비 중”이라며 “지난 5일 고려대서 발표한 탄핵 찬성 2차 시국선언에는 교수님과 학생, 교직원 등 582명이 참여했는데 이야말로 학교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고려대 2차 시국선언을 준비한 재학생 노민영씨는 “방학 중 고려대서 극우 세력이 결집하는 것을 보며 참담함을 느꼈다. 윤 대통령 탄핵은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란을 옹호하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대학가 여론이 뒤바뀐 것처럼 여겨지는 걸 보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학생, 동문, 교수 등 많은 학내 구성원들이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고 내란 종식을 바라고 있다는 다짐을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5일 학생 2626명 의견을 모아 윤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했던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도 2차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날 시국선언에 나선 숙명여대 학생들은 ‘대학생이 앞장서서 민주주의 지켜내자’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극우 세력의 내란 옹호 행위 규탄한다” “내란 옹호 세력은 숙명서 나가라”고 외쳤다.

연서명에 참여한 숙명여대 학생 1112명은 “최근 내란 옹호 세력이 대학가를 표적 삼아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며 “이런 세력이 숙명을 흔들려는 시도에 엄중히 분노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 탄핵은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고도 지적했다. 이들은 “윤석열 퇴진을 위한 시국선언은 탄핵 찬성 시국선언으로, 내란 옹호 세력은 탄핵 반대 세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이어 “하지만 이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내란을 일으킨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숙명여대 학생들은 “대학가를 침범하고 있는 내란 옹호 세력도 부정의한 권력을 비판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외쳤던 우리의 목소리를 훼손할 수는 없다”며 “윤석열 탄핵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7일 2차 시국선언을 발표한 한국외대 재학생 조세연씨는 “정말 탄핵에 반대하고 싶다면 학생들의 총의를 모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어야 한다. 지난주 탄핵 반대 시국선언은 그러지 않았고, 원색적인 욕설과 고성이 이어져 공감하기 어려웠다”며 “학교가 이런 공간으로 남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강의실을 돌며 시국선언 취지를 발표하고 연서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 놓고
국민 명령?

한편 윤 대통령 지지 모임인 ‘대통령 국민변호인단’이 2030 청년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탄핵 반대가 국민의 명령”이라는 궤변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지난 4일부터 탄핵 심판 선고일까지 헌법재판소 앞을 찾아 탄핵 반대 기자회견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형식으로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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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