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실패한 영웅’ 장태완

재조명되는 장군의 외길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 죽일 테니!” 이 대사는 영화 <서울의 봄> 명대사로 장태완 장군이 실제로 12‧12 사태 당시 신군부에 실제로 한 말이다. <일요시사>는 쿠데타를 저지하려 노력한 장 장군의 행보를 재조명했다.

12‧12 사태가 발발한 지 44년이 지나 영화 <서울의 봄>으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전두광(실제 인물 전두환) 패거리와 이를 막고자 한 이태신 장군(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의 단 9시간의 대립으로 구성돼있다.  

누리꾼들은 쿠데타에 끝까지 맞선 이태신 장군을 응원했다. 이태신 장군의 실제 인물은 장태완 소장이다. 장 장군은 1931년생으로 경상북도 칠곡군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해 11기로 임관했다.

전두환 견제
극적인 9시간 

소위 총알받이였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장교였다. 이후 제5군단 참모장, 1973년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발탁된 데 이어 12‧12 사태 3주 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장 장군이 임명될 당시 국가는 10‧26 사태가 발생한 후 일부 계엄 체제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책임을 맡게 된다.


최규하가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됐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은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79년 11월 장 장군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수도경비사령관은 서울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헌병, 특공, 방공 병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주 만에 12‧12 사태가 발생했다. 12‧12 사태가 성공한 뒤 신군부에 대항했던 장 장군은 신군부에 체포돼 서빙고서 45일간 조사를 받았다. 장 장군은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는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 생활을 마치게 됐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전두환이 움직였다. 신군부 소속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 구 일본 육군 헌병 주둔지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했다. 합동수사본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허삼수 육군 보병 대령은 합수부 수사관들 및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 총장의 관저를 찾아가서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진술조사를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정 총장의 신병을 확보했다.

당시 장 장군은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 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 총장이 불법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경비사령부로 즉시 돌아갔다.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등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장 장군은 불리한 상황에도 정 총장의 신병을 풀어달라고 신군부 측에 전화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회유하려는 신군부 측에 “너네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며 일갈하고 전화를 끊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장 장군은 신군부 반란군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 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며 33경비단의 전차중대를 보내 반란군 일당을 제거하려고도 했다. 또 대한민국 육군본부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직 신군부에 넘어가지 않은 9공수에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천만이 본 <서울의 봄> 이태신 실제 인물
“싹 깔아 죽인다” 하나회와 끝까지 대립

이 소식을 들은 신군부는 매우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9공수의 병력이 경인고속도로를 타면 1시간 이내로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반면, 신군부 세력의 1, 3공수의 병력의 교통요건이 더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9공수의 병력이 본거지에 들이닥치면 신군부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란군 측은 9공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육군본부 측에 전화를 걸어 “서울 한복판서 아군인 국군끼리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며 “우리도 더 이상의 무력 동원은 안 할 것을 약속할 테니 진압군 측에서도 9공수를 원대 복귀시켜라”는 내용의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육군본부 수뇌부들은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같은 국군 병력들끼리 그것도 서울 도심지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벌이는 위험천만한 참극만은 피하자는 이유로 신사협정을 받아들인다. 

반란군 진압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이었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9공수여단장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했고 9공수여단은 이 명령에 따라 병력을 부천IC 부근서 회군시킨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신군부는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를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로 보내고 3공수가 특전사령부를 공격하도록 했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에 점령당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 의해 체포됐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다 반란군 총격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진압군 거점은 수도경비사령부만 남게 된다. 장 장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명과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과 반란군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노재현 국방 장관의 사실상 백기투항하라는 지시를 들은 장 장군은 허탈해하며 병력들을 해산시켰다. 

“난 죽기로 
결심한 놈”


이후 반란군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에게 체포돼 서빙고서 45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장 장군은 해가 바뀐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생활을 마쳤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장 장군은 예편서를 쓰기 직전 전두환을 직접 만났다. 장 장군은 “전두환이 12‧12 사태 관련 경위를 묻자 자기들은 책임이 없고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2‧12 사태가 성공하자 전두환보다 윗기수인 육사 5기(정승화 총장)~8기와 종합행정학교 출신들이 대대적으로 전역하게 됐으며 기수와 상관없이 전두환 측에 비우호적인 세력들도 좌천되거나 군문을 떠났다.

이로서 전두환과 하나회 일원들은 군부 요직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실권자가 됐고, 이후 이들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는 등의 피를 뿌리면서 결국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장 장군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들의 체포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 장군은 이에 대해 “완고한 선비 기질이었던 제 아버님께서는 12‧12 사태 소식을 접하신 후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드러누우셨다”며 “예로부터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 집안은 모반자 밑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일이라시며 식음을 단절하시다 내가 석방되고 난 뒤인 80년 4월18일 73세로 별세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장군은 더 큰 슬픔을 겪었다. 장 장군의 아들이 실종됐다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장 장군 아들은 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6개월 간 보안대원 2명이 방을 차지하는 소란 속에서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에 진학했다. 1982년에는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평소와 같이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실종됐다가 칠곡군 낙동강변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들의 실종 
시체로 발견

장 장군은 회고록에 “만 한 달 동안 엄동설한의 강추위 속에서 낙동강의 매서운 강바람을 쐰 탓인지 전신은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있었다. 나는 얼어있는 아들의 얼굴에다 내 얼굴을 비벼대면서 흐르는 눈물로 씻겨주며 입으로는 아들의 눈부터 빨아 녹였다”고 적었다.

이어 “얼마 동안 빨다 보니 아들의 눈 안에서 사탕만한 모난 얼음 조각들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아들놈이 마지막 흘린 눈물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삼켜버렸다”고 했다.

아들의 죽음 이후 장 장군은 “우리 내외의 인생은 사랑하는 성호(아들)가 이 세상을 떠났던 1982년 1월9일로 끝난 것”이라며 “이제 남은 인생은 더부살이로서 우리 일가 3대를 망친 12·12 사태를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현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는 전두환정부 시절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 사장에 임명됐다. 한국증권전산은 증권거래소 자회사로 각 증권회사의 전산 업무를 공동 처리하는 회사다.

같이 반란군에 저항한 김진기 헌병감이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신군부 정부에 여러 보직을 제안받고도 야인으로 지냈지만 장 장군은 공기업 사장직을 수용하자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장 장군도 신군부를 용서하진 않았다. 장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한동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연락해 아들의 사망 이후 집안에만 있으면 더 속이 상한다며 직장서 근무를 통해 슬픔을 잊고 집안도 수습하라고 조언을 했고, 장태완도 거부감이 심했지만 가족 회의 끝에 남은 딸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수락한 것이다.

장 장군은 이후에도 12‧12 사태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1993년에는 여러 장성과 함께 전두환 등을 반란, 내란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반란세력 대적한 참군인들 재평가
12·12 사태 이후 가족들 비극까지

1996년 12‧12 사태과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전격 구속된 노태우·전두환 재판서 증인으로 참석해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됐는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장 장군은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때 장태완은 국회서 386세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당 활동 당시엔 장성 경력을 내세워 국방 분야서 주로 일했는데, 성향은 민주당 내에선 안보 보수파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도 현실 여건상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신중한 편이었다.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의 선제 작전으로 북한 해군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북한 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며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았다가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후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결정되자 승복했고 2002년 12월17일 노무현 후보 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분당 사태가 일어나자 새천년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에 동참했으나 정작 표결은 미국 방문으로 불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불출마,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2010년 7월26일 향년 78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1997년 4월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두환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기징역과 2205억원의 추징금을, 노태우에 대해서는 징역 17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초병 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이었다.

하나회 최후
전원 유죄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서 “우리나라의 헌법 질서 아래서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며 “피고인들의 정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결코 새로운 법질서의 수립이라는 이유나 국민의 합의를 내세워 형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12‧12 사태 반란군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유죄를 확정지었다. 

이어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 양쪽의 상고를 전부 기각해 황영시, 허화평에게 징역 8년,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에게 7년, 허삼수 6년, 최세창 5년, 차규헌, 신윤희, 박종규에게 3년6개월을 각각 확정지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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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목줄 잡은 대법원 막전막후

이재명 목줄 잡은 대법원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선을 앞두고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대권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후보가 또 한 번 판결대에 서야 할 상황에 놓인 것. 그 후보로서는 지난 대선 때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리스크를 떨칠 기회이면서 나락으로 빠질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대법원이 있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오는 6월3일 조기 대선이 열린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각 당은 최종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레이스에 돌입했다. 국민의힘은 컷오프를 거쳐 8명의 후보를 추린 후 1차 경선서 4명을 뽑았다. 2차 경선서 과반 득표자 여부에 따라 추가 경선을 진행해 최종 후보를 선정한다. 민주당은 3명의 후보가 4개 권역을 돌며 지난 27일, 이재명 전 대표가 대선후보로 결정됐다. 압도적 1위 제동 걸리나 국민의힘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악의 악재를 짊어진 상태다. 조기 대선의 책임 소재가 여당인 국민의힘에도 지워진 상황이라 내부가 혼란스럽다. 실제 후보 간에도 탄핵 찬성과 반대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최종 1인이 결정되는 다음 달 3일까지 후보 간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민주당은 ‘1극 독주’ 상황이다. 이 전 대표가 경선 지역마다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였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득표율보다 높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경쟁자로 나선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김동연 경기도지사 등은 한 자릿수 득표율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 지난 27일 마지막 경선서 이 전 대표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다자 대결, 양자 대결서도 이 전 대표는 국민의힘 후보를 압도하고 있다. 어떤 후보와 붙어도 15%~20%p 차이로 넉넉하게 앞선다.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재수 끝에 대권을 잡는 데 성공한 문재인 전 대통령 때와 오버랩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당시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표현이 선거를 지배했듯, 이번 대선은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이 유권자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최근 ‘이재명이냐, 아니냐’로 흘러가던 선거 구도에 대법원이라는 변수가 던져졌다. 지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처음 불거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전 대표의 발목에 달려 있던 ‘사법 리스크’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다시 한번 판결대 위에 올랐다. 이 전 대표는 20대 대선 과정서 고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1처장과 경기 성남시 백현동 한국식품연구원 부지 용도변경과 관련해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2022년 9월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로 판결했다. 항소심 유죄, 무죄로 뒤집어 김명수 체제서 7대 5로 회생 이 전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지난달 26일에 나왔다. 이후 헌재가 지난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인용하면서 이 전 대표의 대선 행보를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공직선거법 재판은 1심은 기소 후 6개월, 2·3심은 3개월 이내에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6·3·3 규정에 따라 대법원 판결은 대선 이후에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 전 대표의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이하 전합)에 회부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22일 오전, 이 전 대표의 공직선거법 사건을 오경미·권영준·엄상필·박영재 대법관으로 구성된 2부에 배당했다. 주심은 박영재 대법관이 맡았다. 그러나 곧이어 해당 사건을 전합에 회부했다고 밝혔다. 전합은 ▲소부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기존 대법 판례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 ▲소부서 재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경우 등의 상황에 올리게 된다. 사건이 전합에 회부되면서 조 대법원장과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재판 업무를 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 회피를 신청한 노태악 대법관을 제외한 12명이 최종 판결 선고를 포함해 심리 및 판단을 하게 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노 대법관은 이해 충돌을 우려해 전합으로부터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지난 22일 사건을 전합에 회부하고 첫 기일을 진행한 데 이어 지난 24일에도 기일을 잡았다. 대법원이 사건 심리에 속도를 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판결 선고 시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시에 이 전 대표 앞에도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놓이게 됐다. 먼저 대법원이 상고 기각을 하는 경우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대법원이 기각하면 공직선거법 사건은 그대로 마무리된다. 이 전 대표의 대선 가도에 정말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지는 셈이다. 변수 등장 경우의 수 반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는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한다고 해서 바로 형이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확정 판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대선 전에 최종 결론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이 경우에는 이 전 대표의 대선후보 자격 논란이 빚어질 수 있다. ‘파기자판’ 가능성도 나온다. 파기자판은 상급심 재판부가 하급심 판단에 잘못이 있다고 보고 원심을 파기하면서 사건을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판결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법원이 판결을 하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이후 보수 진영 등에서 대선 전까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두고 파기자판 가능성을 거론했던 바 있다. 대법원이 벌금 100만원 이상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다면 이 전 대표는 피선거권 박탈로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다만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에 대한 법리해석을 따지는 법률심에 해당하며, 징역 10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사건에 대해선 양형을 판단하지 않는다. 법조계에서는 파기자판 가능성은 작게 보고 있다. 대법원이 심리를 서두르는 것과는 별개로 선고가 대선 이후에 나면 헌법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점화될 전망이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5년 만에 평행이론? 여기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소추’에 대한 해석이다. 기소로 봐야 하는지, 기소와 재판을 합쳐서 봐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것. 또 이 전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재판 정지 여부도 맞물려 있다. 민주당은 대법원의 행보를 경계하는 듯한 모양새다. 민주당 황정아 대변인은 “이 전 대표는 우리 당 대선 (경선) 후보기도 하지만 선고 결과에 따라 우리 당이 직접적 영향을 받는 사건이라 당 차원의 입장 표명이 불가피하다”면서 “(대법원의)공정한 재판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정청래 의원은 “대법원이 국민 참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렸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전 대표의 운명이 또다시 대법원의 결정에 달렸다는 점이다. 앞서 이 전 대표는 지난 대선 전 대법원의 판결로 ‘기사회생’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 전 대표는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2년 6월 보건소장, 정신과 전문의 등에게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로 기소됐다. 또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 토론회서 ‘친형을 강제 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허위 발언을 한 혐의(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도 받았다. 1심과 2심 모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허위 사실 공표에 대해서는 판결이 엇갈렸다. 1심은 무죄, 2심은 유죄였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형량으로 대법원서 확정되면 이 전 대표는 5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상황이었다. 경기도지사직은 물론 대선 가도에도 브레이크가 걸릴 판이었다. 조희대 체제도 12명이 판결 이례적 속도전 대선 전에? 대법원은 이 전 대표의 사건을 전합에 회부했다. 판결에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과 11명의 대법관이 참여했다. 12명 대법관의 의견은 7(무죄) 대 5(유죄)로 갈렸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7명의 대법관은 이 전 대표의 발언이 “상대 후보자의 공격적 질문에 소극적으로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취지의 답변 또는 일부 부정확하거나 다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표현”이라고 봤다. 적극적으로 반대 사실을 공표했다거나 전체 진술을 허위라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반면 박상옥 전 대법관 등 5명은 이 전 대표의 발언이 유권자의 정확한 판단을 방해할 정도로 왜곡됐다면서 유죄 취지의 반대 의견을 냈다. 상대방 후보의 질문이 즉흥적인 것도 아니었고 이 전 대표도 답변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당시 판결이 낳은 후폭풍이다. 7대 5 판결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권순일 전 대법관의 행보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이는 재판 거래 의혹으로 번졌다. 특히 화천대유 실소유주로 알려진 김만배씨가 대법원 선고를 전후해 여러 차례 권 전 대법관의 집무실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확산됐다. 여기에 권 전 대법관은 퇴직 이후 2020년 11월부터 2021년 9월까지 화천대유 고문으로 재직하며 등록 없이 변호사로 활동한 혐의도 받았다. 이 기간 그는 1억5000만원의 고문료를 받았다. 또 대장동 개발업자들로부터 거액을 받거나 약속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른바 ‘50억 클럽’으로 지목된 6명 가운데 1명이기도 하다. 2표 차로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이 전 대표는 경기도지사 임기를 마치고 이후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결국 2022년 대선서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지긴 했지만 대법원 판결이 없었다면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이 전 대표는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다시 출발선에 서 있다. 고비마다 또 한 번? 문제는 이 전 대표의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다. 이 전 대표는 12개 혐의로 5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중에서 공직선거법 사건만 확정 판결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이번에 대법원이라는 산만 넘으면 이 전 대표 앞에는 ‘꽃길’만 깔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가시밭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건 대법원에 달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