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심층취재>② 끝나지 않은 악몽

“악마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지옥입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2년이 흘렀다. 가해자의 시간은 매일 흐르고 있지만 생존자의 시간은 감금됐던 그날에 멈춰 있다. 잃어버린 2년, 그리고 앞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그날의 악몽은 생존자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중인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피해자

2020년 11월11일 오전 11시20분.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3단독 353호 법정. 원고 김가은(가명)과 피고 강정준(가명)의 민사재판이 열렸다. 오전 11시7분경 수의를 입은 강정준이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강정준의 목에 있는 한자 문신이 눈에 띄었다. 

얼굴만 봐도
두려움 떨어

판사가 사건번호를 부르면서 원고와 피고를 각각 호명했다. 김가은의 변호인이 “원고 김가은씨가 지금 오는 중입니다”라고 하자 강정준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3~4분 뒤,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김가은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쳐다봤지만 김가은은 강정준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1년6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강정준은 변호인 없이 변론했다. 강정준은 “왜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민·형사상의 합의서를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의금도 지불했는데 또 다시 이렇게 한 이유를(잘 모르겠습니다). (김가은이) 저에게 보복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강정준이 말한 합의서는 김가은이 쓴 처벌불원서를 뜻한다.


판사가 발언 기회를 주자 김가은은 합의서에 대해 설명했다. 김가은은 “합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민사를 뜻하는) ‘민’ 자를 삭제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김가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판사는 합의서 내용을 확인하고 “여기에 민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은 없네요”라고 설명했다. 

강정준은 재판이 끝나자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법정을 나섰다. 그 사이 김가은은 강정준과 마주칠까 봐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강정준이 사라지고도 김가은은 한참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갔어요? 갔어요?”하고 변호인에게 재차 확인했다. 김가은은 “심장이 터질 뻔했다”며 마치 감금됐던 그때로 돌아간 듯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생존자 김가은은 가해자 강정준에 의해 2018년 10월초 자신의 집에 감금됐다가 11월7일 탈출했다. 감금 기간 동안 강정준으로부터 폭언·협박·폭행·성폭행 등을 당했다. 11월9일에 검거된 강정준은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6월, 강간 혐의로 징역 1년6월 등 4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사건 후 2년이 지났지만 김가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만신창이다. 2번의 수술 과정에서 장기 일부를 잘라냈고, 강정준의 폭행으로 생긴 골반염은 이미 여러 차례 재발했다. 또 머리에 반복적인 폭행이 가해지면서 후유증으로 광시증(어둠 속에서 눈앞에 빛이 번쩍하는 현상)이 생겨 시력이 떨어졌다.

심리상태는 더 심각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으로 깊은 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잠이 들어도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밤마다 괴한에게 쫓기는 꿈, 재해가 일어나는 꿈, 칼로 위협당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다고 했다.

데이트폭력은 미혼남녀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차이를 보일 뿐 가정폭력과 그 양상이 비슷하다. ▲생존자에 대한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 ▲생존자의 무기력으로 인한 적극적 대응 실패 ▲당사자 간의 해결을 요구하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대응 ▲친밀한 관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주변의 반응 등이다. 그 결과는 생존자의 완벽한 고립이다. 


가스라이팅
합의서까지

#. 심리적 지배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은 데이트폭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해 양상이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때릴 때마다 “네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주는 것이다” 등의 말로 폭행을 합리화했다. 자존감을 깎는 방법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김가은을 조종한 것이다.

폭언과 폭행이 반복되자 김가은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강정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강정준이 원하는 모습으로 외관을 꾸몄고, 말과 행동도 강정준의 뜻에 따랐다. 강정준의 요구도 무조건 다 들어줬다. 탈출 이후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김가은씨는 정말 강정준씨의 꼭두각시였네요”라고 말했을 정도.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 폭언과 폭행에 김가은의 정신은 붕괴됐다. 탈출 이후 몸은 수술 등을 거쳐 회복이 진행된 반면 정신적인 부분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경찰 조사와 재판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차마 데이트폭력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던 김가은은 모든 일을 혼자 처리했다. 처음에는 도와주던 친구도 점차 멀어졌다. 

사건 후 2년 지났지만
정신적 상처는 그대로

김가은에 대한 강정준의 심리적 지배는 탈출 이후 7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완전한 고립에 빠진 김가은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정준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강정준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지만 이후에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였다. 김가은은 강정준을 10번 이상 접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감금할 당시에도 폭행을 저지르고 난 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김가은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도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김가은에게 처음 폭행을 가했을 때, 김가은의 2차 탈출 시도에 폭행을 가했을 때도 그랬다. 김가은은 강정준에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계속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바깥에 나가고 싶은데 갈 곳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나를 피했고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요. 강정준이 계속 편지를 보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더라고요. 솔직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강정준밖에 없었어요.” 

강정준의 각서와 김가은의 합의서가 오간 시점도 이때쯤이다. 강정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 ‘(강정준이 김가은의 이름으로 받은) 대출금과 카드빚 변제에 힘쓰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했고, 김가은은 ‘강정준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 ‘형사상 합의했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특히 채무 압박에 시달리던 김가은은 엄마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돈을 갚겠다는 강정준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추심업체로부터 하루에 10통 이상 전화가 오고 집으로도 사람이 찾아오던 때였다. 강정준은 카드빚과 대출금 변제를 호소하는 김가은에게 해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7개월 동안 반복했다.

“빚에 대한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어요. 몸과 마음이 아픈 것보다도 더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강정준은 계속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래도 해주실 거다’ 라면서 죄책감을 자극하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계속 돈에 절절 매니까 그걸 이용한 느낌도 들어요.”


하지만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이 끝난 후 강정준은 돌변했다. 

“사실 2019년 1월 합의서를 써준 직후부터 후회했죠. 몸이 낫고 정신을 조금씩 차리기 시작하니까 강정준의 모든 게 다 이상해 보였어요. 오히려 (2019년) 6월에 강정준이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서 ‘사람 안 변하는구나’ 했어요. 심지어 합의금조차 5개월이 지나서야 보내주더라고요.”

카드빚만
3000만원

2019년 6월 강정준은 김가은에게 ‘이제 재판도 끝났으니 너한테 잘 보일 필요 없겠다. 너 내가 나가면 머리에 칼 꽂을 거니까, 밤길 조심해라. 조금 있으면 출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시켜서 너 죽여버릴 거다. 옛날 기억 다시 떠오르게 해줄게’라고 협박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강정준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어요. 확실하게 죗값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 경제적 파탄
하지만 김가은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대출금과 카드빚이 어마어마했다. 강정준이 한 달 동안 김가은의 카드로 쓴 돈은 3000만원에 이른다. 강정준은 헤어짐을 요구하는 김가은에게 돈을 주면 헤어져 주겠다고 말했다. 전정가위(가지치기용 가위)로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면서도 1억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의 명의로 2000만원가량의 카드론 대출을 받았다. 이 돈으로 강정준은 자신의 빚을 갚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강아지를 2마리 사들였고, 지포라이터와 가방 등 명품 쇼핑을 했다. TV, 청소기 등 집안의 가전도 마구잡이로 바꿨다. 2018년 11월7일 이후 검거될 때까지도 강정준은 김가은의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모든 돈은 김가은의 명의로 대출받았기 때문에 빚도 고스란히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사건 전 17평대 전셋집에 살고 있던 김가은은 사건 이후 연체기록이 잔뜩 남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2019년 6월 몸도 마음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채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것도 말 그대로 돈이 너무 없어서였다. 

“집 형편이 좋지 않아 손을 벌릴 수가 없었어요. 내가 벌어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죠. 또 불면증도 너무 심했어요. 일을 하고 몸을 혹사시키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까 싶어 일자리를 찾아봤어요. 운 좋게 한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게 됐죠.” 

회사생활은 6개월 만에 한계에 다다랐다.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손 떨림,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바짝 얼어버리는 몸, 회사로 걸려오는 연체 독촉전화, 자꾸만 주변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다. 회사 동료들도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결국 지난해 말 회사를 그만뒀다. 
 

대출금과 카드빚 연체기록은 두고두고 김가은의 발목을 잡았다. 최종합격한 또 다른 회사에서 연체기록을 이유로 채용취소를 통보했다. 첫 출근 후 퇴근하는 길에 받은 전화였다. 연체기록이 확인돼 채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하루 일한 것은 일할로 계산해 돈을 챙겨주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계속 일을 하려고 한 게, 집에만 있으면 나를 아예 놓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최종합격했다가 취소되니까…. 통보를 받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엄청나게 울었어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

김가은은 올해 2월 전문상담기관을 찾았다. 일이나 취미 등으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던 시도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첫 상담 당시 김가은은 ‘우울감 및 불안감이 지속적이고 침습(원치 않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 및 해리 증상, 회피 행동과 과각성(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 관련 증상’이 있는 상태였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 ‘스스로를 굉장히 유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로 인식’ ‘일상의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고 주변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힘겨운 상태’ ‘자책하는 면이 있음’ ‘외상적 경험 이후 유발된 정서적 혼란감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음. 이것이 대인상과 자아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등의 소견이 나왔다.

“길을 가다가도 울컥해요. 갑자기 머릿속에 기억이 떠오르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화도 엄청나게 나요. 강정준이나 강정준 누나는 저한테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어요. 그저 자기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걸 제 탓으로 돌리고 있어요. 자기 엄마가 잘못되면 절 죽이겠다고. 그게 왜 내 탓이에요, 대체?”

상담사들은 김가은이 최소 몇 년 동안 상담치료 등 전문적인 의료기관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 전폭적으로 김가은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가은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원에서 신용불량자 신세
연체기록 때문에 채용 취소도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형제도 없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어요. 솔직히 할머니께서 저를 세심하게 챙겨주신 편은 아니라 모든 걸 혼자 해야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한 것도 할머니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그랬던 거고요.”

“친구들은 제 상황을 자세히 몰라요.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아직도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 ‘한심하다. 언제까지 그 일에 휘둘릴 거야’라면서 욕하기도 해요. 그러면 ‘네가 사건에 대해 뭘 알아’ 하고 속으로 말하고 말죠. 어떤 친구한테는 말해보려 했는데, 몇 마디 하니까 ‘징그럽다고 그만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회사 생활, 대학원 준비, 사업 준비, 운동, 독서 등으로 바빴던 김가은의 삶은 이제 단조로워졌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 그러다 일주일에 1번 상담을 위해 병원에 가고 아주 가끔 친구들을 만난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산더미처럼 많지만 무기력증이 김가은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강정준에 대한 추가 고소도 준비해야 하거든요. 공갈도 있고, 협박도 있고. 고소 시효가 있어서 빨리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마음은 급한데 뭘 하려고 하면 집중도 안 되고. 일상을 사는 방법을 아예 까먹은 것 같아요.”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바깥으로 다 드러내면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속은 다 썩어 문드러졌거든요. 정말 회사 다니고 사회생활하면서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요. 제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하면서요. 사실 이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고 힘들잖아요, 충분히. 근데 왜 내가 이런 것까지….”

#. 엄습해오는 공포

강정준은 2022년 11월 사회로 돌아온다.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김가은은 올해 초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이전 집은 악몽의 공간이 됐다. 줄곧 원룸에서 살다가 처음 넓은 집으로 이사하게 돼 직접 페인트칠까지 하면서 꾸몄던 집이었다. 30년간 쓴 이름도, 주민번호도 바꿔야 한다. 김가은이 아는 강정준은 ‘출소하면 너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한 말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가족에도
말 못해요”

“2018년 11월7일에 탈출하고 보호소에서 잤던 때가 생각나요. 그때 30일 만에 정말 편안한 잠을 잤거든요. 그 이후로 편안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그래도 지금은 발 뻗고 잘 수 있죠. 그런데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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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