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심층취재>② 끝나지 않은 악몽

“악마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지옥입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2년이 흘렀다. 가해자의 시간은 매일 흐르고 있지만 생존자의 시간은 감금됐던 그날에 멈춰 있다. 잃어버린 2년, 그리고 앞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그날의 악몽은 생존자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중인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피해자

2020년 11월11일 오전 11시20분.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3단독 353호 법정. 원고 김가은(가명)과 피고 강정준(가명)의 민사재판이 열렸다. 오전 11시7분경 수의를 입은 강정준이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강정준의 목에 있는 한자 문신이 눈에 띄었다. 

얼굴만 봐도
두려움 떨어

판사가 사건번호를 부르면서 원고와 피고를 각각 호명했다. 김가은의 변호인이 “원고 김가은씨가 지금 오는 중입니다”라고 하자 강정준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3~4분 뒤,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김가은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쳐다봤지만 김가은은 강정준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1년6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강정준은 변호인 없이 변론했다. 강정준은 “왜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민·형사상의 합의서를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의금도 지불했는데 또 다시 이렇게 한 이유를(잘 모르겠습니다). (김가은이) 저에게 보복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강정준이 말한 합의서는 김가은이 쓴 처벌불원서를 뜻한다.

판사가 발언 기회를 주자 김가은은 합의서에 대해 설명했다. 김가은은 “합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민사를 뜻하는) ‘민’ 자를 삭제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김가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판사는 합의서 내용을 확인하고 “여기에 민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은 없네요”라고 설명했다. 

강정준은 재판이 끝나자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법정을 나섰다. 그 사이 김가은은 강정준과 마주칠까 봐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강정준이 사라지고도 김가은은 한참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갔어요? 갔어요?”하고 변호인에게 재차 확인했다. 김가은은 “심장이 터질 뻔했다”며 마치 감금됐던 그때로 돌아간 듯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생존자 김가은은 가해자 강정준에 의해 2018년 10월초 자신의 집에 감금됐다가 11월7일 탈출했다. 감금 기간 동안 강정준으로부터 폭언·협박·폭행·성폭행 등을 당했다. 11월9일에 검거된 강정준은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6월, 강간 혐의로 징역 1년6월 등 4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사건 후 2년이 지났지만 김가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만신창이다. 2번의 수술 과정에서 장기 일부를 잘라냈고, 강정준의 폭행으로 생긴 골반염은 이미 여러 차례 재발했다. 또 머리에 반복적인 폭행이 가해지면서 후유증으로 광시증(어둠 속에서 눈앞에 빛이 번쩍하는 현상)이 생겨 시력이 떨어졌다.

심리상태는 더 심각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으로 깊은 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잠이 들어도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밤마다 괴한에게 쫓기는 꿈, 재해가 일어나는 꿈, 칼로 위협당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다고 했다.

데이트폭력은 미혼남녀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차이를 보일 뿐 가정폭력과 그 양상이 비슷하다. ▲생존자에 대한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 ▲생존자의 무기력으로 인한 적극적 대응 실패 ▲당사자 간의 해결을 요구하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대응 ▲친밀한 관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주변의 반응 등이다. 그 결과는 생존자의 완벽한 고립이다. 

가스라이팅
합의서까지

#. 심리적 지배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은 데이트폭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해 양상이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때릴 때마다 “네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주는 것이다” 등의 말로 폭행을 합리화했다. 자존감을 깎는 방법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김가은을 조종한 것이다.

폭언과 폭행이 반복되자 김가은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강정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강정준이 원하는 모습으로 외관을 꾸몄고, 말과 행동도 강정준의 뜻에 따랐다. 강정준의 요구도 무조건 다 들어줬다. 탈출 이후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김가은씨는 정말 강정준씨의 꼭두각시였네요”라고 말했을 정도.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 폭언과 폭행에 김가은의 정신은 붕괴됐다. 탈출 이후 몸은 수술 등을 거쳐 회복이 진행된 반면 정신적인 부분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경찰 조사와 재판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차마 데이트폭력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던 김가은은 모든 일을 혼자 처리했다. 처음에는 도와주던 친구도 점차 멀어졌다. 

사건 후 2년 지났지만
정신적 상처는 그대로

김가은에 대한 강정준의 심리적 지배는 탈출 이후 7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완전한 고립에 빠진 김가은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정준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강정준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지만 이후에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였다. 김가은은 강정준을 10번 이상 접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감금할 당시에도 폭행을 저지르고 난 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김가은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도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김가은에게 처음 폭행을 가했을 때, 김가은의 2차 탈출 시도에 폭행을 가했을 때도 그랬다. 김가은은 강정준에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계속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바깥에 나가고 싶은데 갈 곳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나를 피했고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요. 강정준이 계속 편지를 보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더라고요. 솔직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강정준밖에 없었어요.” 

강정준의 각서와 김가은의 합의서가 오간 시점도 이때쯤이다. 강정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 ‘(강정준이 김가은의 이름으로 받은) 대출금과 카드빚 변제에 힘쓰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했고, 김가은은 ‘강정준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 ‘형사상 합의했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특히 채무 압박에 시달리던 김가은은 엄마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돈을 갚겠다는 강정준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추심업체로부터 하루에 10통 이상 전화가 오고 집으로도 사람이 찾아오던 때였다. 강정준은 카드빚과 대출금 변제를 호소하는 김가은에게 해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7개월 동안 반복했다.

“빚에 대한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어요. 몸과 마음이 아픈 것보다도 더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강정준은 계속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래도 해주실 거다’ 라면서 죄책감을 자극하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계속 돈에 절절 매니까 그걸 이용한 느낌도 들어요.”

하지만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이 끝난 후 강정준은 돌변했다. 

“사실 2019년 1월 합의서를 써준 직후부터 후회했죠. 몸이 낫고 정신을 조금씩 차리기 시작하니까 강정준의 모든 게 다 이상해 보였어요. 오히려 (2019년) 6월에 강정준이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서 ‘사람 안 변하는구나’ 했어요. 심지어 합의금조차 5개월이 지나서야 보내주더라고요.”

카드빚만
3000만원

2019년 6월 강정준은 김가은에게 ‘이제 재판도 끝났으니 너한테 잘 보일 필요 없겠다. 너 내가 나가면 머리에 칼 꽂을 거니까, 밤길 조심해라. 조금 있으면 출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시켜서 너 죽여버릴 거다. 옛날 기억 다시 떠오르게 해줄게’라고 협박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강정준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어요. 확실하게 죗값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 경제적 파탄
하지만 김가은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대출금과 카드빚이 어마어마했다. 강정준이 한 달 동안 김가은의 카드로 쓴 돈은 3000만원에 이른다. 강정준은 헤어짐을 요구하는 김가은에게 돈을 주면 헤어져 주겠다고 말했다. 전정가위(가지치기용 가위)로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면서도 1억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의 명의로 2000만원가량의 카드론 대출을 받았다. 이 돈으로 강정준은 자신의 빚을 갚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강아지를 2마리 사들였고, 지포라이터와 가방 등 명품 쇼핑을 했다. TV, 청소기 등 집안의 가전도 마구잡이로 바꿨다. 2018년 11월7일 이후 검거될 때까지도 강정준은 김가은의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모든 돈은 김가은의 명의로 대출받았기 때문에 빚도 고스란히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사건 전 17평대 전셋집에 살고 있던 김가은은 사건 이후 연체기록이 잔뜩 남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2019년 6월 몸도 마음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채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것도 말 그대로 돈이 너무 없어서였다. 

“집 형편이 좋지 않아 손을 벌릴 수가 없었어요. 내가 벌어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죠. 또 불면증도 너무 심했어요. 일을 하고 몸을 혹사시키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까 싶어 일자리를 찾아봤어요. 운 좋게 한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게 됐죠.” 

회사생활은 6개월 만에 한계에 다다랐다.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손 떨림,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바짝 얼어버리는 몸, 회사로 걸려오는 연체 독촉전화, 자꾸만 주변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다. 회사 동료들도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결국 지난해 말 회사를 그만뒀다. 
 

대출금과 카드빚 연체기록은 두고두고 김가은의 발목을 잡았다. 최종합격한 또 다른 회사에서 연체기록을 이유로 채용취소를 통보했다. 첫 출근 후 퇴근하는 길에 받은 전화였다. 연체기록이 확인돼 채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하루 일한 것은 일할로 계산해 돈을 챙겨주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계속 일을 하려고 한 게, 집에만 있으면 나를 아예 놓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최종합격했다가 취소되니까…. 통보를 받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엄청나게 울었어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

김가은은 올해 2월 전문상담기관을 찾았다. 일이나 취미 등으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던 시도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첫 상담 당시 김가은은 ‘우울감 및 불안감이 지속적이고 침습(원치 않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 및 해리 증상, 회피 행동과 과각성(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 관련 증상’이 있는 상태였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 ‘스스로를 굉장히 유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로 인식’ ‘일상의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고 주변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힘겨운 상태’ ‘자책하는 면이 있음’ ‘외상적 경험 이후 유발된 정서적 혼란감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음. 이것이 대인상과 자아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등의 소견이 나왔다.

“길을 가다가도 울컥해요. 갑자기 머릿속에 기억이 떠오르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화도 엄청나게 나요. 강정준이나 강정준 누나는 저한테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어요. 그저 자기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걸 제 탓으로 돌리고 있어요. 자기 엄마가 잘못되면 절 죽이겠다고. 그게 왜 내 탓이에요, 대체?”

상담사들은 김가은이 최소 몇 년 동안 상담치료 등 전문적인 의료기관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 전폭적으로 김가은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가은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원에서 신용불량자 신세
연체기록 때문에 채용 취소도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형제도 없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어요. 솔직히 할머니께서 저를 세심하게 챙겨주신 편은 아니라 모든 걸 혼자 해야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한 것도 할머니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그랬던 거고요.”

“친구들은 제 상황을 자세히 몰라요.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아직도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 ‘한심하다. 언제까지 그 일에 휘둘릴 거야’라면서 욕하기도 해요. 그러면 ‘네가 사건에 대해 뭘 알아’ 하고 속으로 말하고 말죠. 어떤 친구한테는 말해보려 했는데, 몇 마디 하니까 ‘징그럽다고 그만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회사 생활, 대학원 준비, 사업 준비, 운동, 독서 등으로 바빴던 김가은의 삶은 이제 단조로워졌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 그러다 일주일에 1번 상담을 위해 병원에 가고 아주 가끔 친구들을 만난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산더미처럼 많지만 무기력증이 김가은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강정준에 대한 추가 고소도 준비해야 하거든요. 공갈도 있고, 협박도 있고. 고소 시효가 있어서 빨리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마음은 급한데 뭘 하려고 하면 집중도 안 되고. 일상을 사는 방법을 아예 까먹은 것 같아요.”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바깥으로 다 드러내면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속은 다 썩어 문드러졌거든요. 정말 회사 다니고 사회생활하면서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요. 제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하면서요. 사실 이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고 힘들잖아요, 충분히. 근데 왜 내가 이런 것까지….”

#. 엄습해오는 공포

강정준은 2022년 11월 사회로 돌아온다.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김가은은 올해 초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이전 집은 악몽의 공간이 됐다. 줄곧 원룸에서 살다가 처음 넓은 집으로 이사하게 돼 직접 페인트칠까지 하면서 꾸몄던 집이었다. 30년간 쓴 이름도, 주민번호도 바꿔야 한다. 김가은이 아는 강정준은 ‘출소하면 너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한 말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가족에도
말 못해요”

“2018년 11월7일에 탈출하고 보호소에서 잤던 때가 생각나요. 그때 30일 만에 정말 편안한 잠을 잤거든요. 그 이후로 편안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그래도 지금은 발 뻗고 잘 수 있죠. 그런데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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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청구서 받은 한국 제3의 선택

동맹 청구서 받은 한국 제3의 선택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요구했다. 결국 한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원유 수입의 61%는 호르무즈와 연결돼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이란 전쟁에 사실상 편입되면 헌법·여론·대이란 관계까지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2020년 청해부대 독자 파병 모델이 다시 주목받는 가운데, 과연 한국은 한미동맹의 ‘청구서’와 국익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각)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에게 한미 연합 군사 훈련 규모의 대폭 축소를 지시했다. 그 근거는 “나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협은 열고 전쟁 선 긋기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트루스소셜 계정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면서 “오래전부터 미국이 한국과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여하기로 동의해 온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한미 연합 훈련은 비용이 많이 들고,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북한을 일컬어 “내가 취임한 이래로 미국에 위협적이지 않고, 미국을 존중해 온 국가”라고 하며 “전적으로 부적절하고 적대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칭한 한미 연합 훈련은 지난달 17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한미 연합 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폭 축소’를 지시한 이유는 “취소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훈련 대폭 축소의 근거로 자신과 김 위원장과의 관계를 들었지만, 국내에서는 다른 신호로 받아들였다. 국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을 “호르무즈 파병을 위한 압박” 신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14일 자신의 트루스소셜 계정을 통해 중국·프랑스·일본·한국·영국 등 5개국을 지명하면서 “미국이 홀로 해상을 보호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어 5개국에 “즉각 군함을 파견해서 호르무즈 해협 통행로 확보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요구의 명분은 “이란이 해협을 봉쇄하면 이들 국가의 원유 공급에도 영향이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Hopefully’라는 표현을 활용했다. 명령보다는 조금 약한 표현이었지만, 전 세계는 ‘명령 아닌 명령’ 혹은 ‘요구 아닌 요구’로 해석했다. 5개국이 거론된 기준은 경제적 이익이었다. 이 때문에 동맹국이 아닌 중국도 파병 요구 대상으로 거론된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석유의 90%를 호르무즈 해협에서 조달하고 있다”는 명분을 제시했다. 물론 실제로는 경유분 40% 미만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 프랑스·영국은 미국과 나토 동맹을 맺고 있다. 한국·일본은 각각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의 전략적 경쟁국이다. 중국에 대한 파병 요구가 없었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에 끊임없이 반복해 온 전형적인 부담 분담이 될 뻔했다. 중국이 파병 요구 대상에 포함된 순간 우리에 대한 파병 요구도 더욱 진지해진 것이다. 지난해 기준 우리 원유 수입의 약 61%와 나프타 수입의 약 54%가 호르무즈 해협과 연결돼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중국도 참전? 트럼프식 부담 분담 새 기준 헌법 제5조 앞 고민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호르무즈 항행 보호와 미국의 대이란 전쟁 상황은 현실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는 군함 파견을 거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초의 압박을 가했던 지난 3월 독일·스페인·이탈리아는 “즉각적인 함정 파견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독일과 협의하지 않았고, 독일군 파견에 필요한 유엔·유럽연합·나토 차원의 근거도 없다”고 반발했다. 프랑스도 미국의 대이란 작전과 거리를 두면서 미국 주도가 아닌 별도의 호르무즈 통행 확보 구상을 추진했다. 전투 상황이 안정된 후 이란과의 긴장 완화까지 병행하면서 유조선을 호송한다는 취지의 구상이었다. 영국·프랑스는 “방어적이고 독립적인 다국적 임무”라는 명분으로 다국적 방어 임무에 한정해 작전에 참여했다. 영국은 지난 5월 ▲자율 기뢰 탐색 장비 ▲타이푼 전투기 ▲구축함 HMS 드래곤 ▲대드론 장비 등을 보냈다. 하지만 “미국과 함께 이란과 싸운다”는 인상을 지우는 방식의 파병이었다. 애초 트럼프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미국 중심의 연합군이었다. 한국·일본·독일·호주 등은 영국·프랑스의 다국적 임무 공동성명을 지지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에도 한미 연합 훈련 대폭 축소라는 현실적인 체감이 닥쳐왔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도 해상 초계기·군수 지원함·기뢰 제거 전력 등 구체적인 군사 옵션을 공개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 안보를 위해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데, 한국은 미국이 필요로 할 때 왜 중동에서 역할을 하지 않느냐”는 트럼프식 계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응수였다. 한국의 호르무즈 파병에는 여러 쟁점이 있다. 그런데 그중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헌법적 쟁점이다. 우리 헌법 제5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란 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이미 미국·이란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범여권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더불어민주당 이기헌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파병 요구는 동맹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요구”라며 “국회는 국익과 헌법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파병 요청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엔 독자 지금은 실전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도 “호르무즈에 단 한 척의 군함도 보내서는 안 된다”며 “한·미 상호방위조약에도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나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한다”는 취지로 규정된 한·미 상호방위조약 제1조였다. 이 의원은 지난 7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다시 파병 반대 주장을 펼쳤다. 그는 “국제 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 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적 가치가 중요한 판단 근거였다”며 “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이후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에도,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은 유엔 회원국 간 영토 보전·정치적 독립에 대한 무력 위협·무력 행사를 금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예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공격과 무력 공격에 대응하는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이다. 따라서 파병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위헌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결국 파병을 결정하더라도 파병 동의안의 문구와 파병 시 수행할 작전의 내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파병 이전에 파병의 성격부터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특히 미국은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시작했다. 선전포고는 법적 판단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역사적 문제 제기는 충분히 가능하다. 정식 전쟁 선언과 명확한 전쟁 목표 없이 군사행동부터 선행됐다는 불안정성을 충분히 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전쟁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헌법적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아울러 우리 군의 임무가 무엇으로 규정되느냐에 따라 헌법적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가령 한국군이 ▲상선 호위 ▲기뢰 제거 ▲수색 구조 ▲해상 초계 ▲군수 지원 등에 한정된 임무만 수행한다면 이는 국제 항행 보호 및 자국민·자국 선박 보호 목적의 방어적 해외 파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란 함정 선제 타격 ▲이란 본토 공격 지원 ▲미군의 공격 작전에 정보·표적·화력 측면에서 직접 결합 ▲미국의 작전지휘체계에 편입 등의 상황이 파병의 성격으로 확정된다면 이는 전쟁의 일부로 평가될 수도 있다. 이미 이란은 지난 7일(현지시각) 에스마일 바가이 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X에 한국어 성명을 발표했다. 이란은 이 성명을 통해 “현재 이란 국민은 미국의 침략적 행위에 맞서 자위하고 있으며, 여성·어린이를 상대로 한 미국의 전쟁범죄에 단호히 대응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다른 국가가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에서 군사적으로 주둔하거나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의 당사자를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에 대해서는 “이란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64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양국 관계는 줄곧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이란은 대한민국과의 우호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경고했다. 청해부대 딜레마 여론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는 지난 3월 <에너지경제신문>의 의뢰로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2명을 상대로 무선(100%) RDD 자동응답조사(ARS) 방식으로 진행한 미국의 해군 파병 요청 관련 긴급 현안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의 60.9%는 파병에 반대했고, 37.2%는 “매우 반대”였다. 찬성 의견은 34.4%였고 “매우 찬성”을 선택한 사람의 비율은 17.9%였다. 당시에는 파병 반대 목소리가 더 컸다는 간접 근거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압박을 가한 현시점에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개혁신당 개혁연구원이 지난 6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17명을 대상으로 무선 RDD 방식의 ARS 자동응답 방식을 적용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론은 첨예하게 엇갈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중 34.9%는 군 병력 파병을 지지했지만, “방어용 무기만 지원하자”는 의견도 31.8%였다. “군사 지원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도 27.6%였다. 이렇듯 여론도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어 위헌·여론 비판을 피할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개혁연구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3월 미국의 요청 이후 현재까지 호르무즈 해협 파병 여부를 최종 결정하지 않았다. 이 같은 정부의 대응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전체 응답자 중 50.9%는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을 선택했다. “잘하고 있다”는 응답을 선택한 비율은 42.2%였고, “잘 모르겠다”는 응답을 선택한 비율은 6.9%였다. 지난 3월부터 파병 결정 시 실제 파병할 수 있는 유력한 부대로는 청해부대가 거론된 바 있다. 정부는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인 2020년 국회 동의 없이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를 확대해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한 적이 있다. 미국과 이란은 당시에도 충돌했다. 당시 정부는 ‘국군부대의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 파견 연장 동의안’의 단서 조항을 근거로 국회의 별도 동의를 받지 않았다. 동의안에는 “유사시 우리 국민 보호 활동 시에는 지시되는 해역을 포함한다”는 문구가 포함돼있었다. 이를 토대로 문재인정부는 청해부대의 활동 영역을 한시적으로 확대했다. 병력? 무기? 불참? 세 갈래 갈린 민심 다만 당시 청해부대 파병은 미국의 연합군 참여 요청과 무관하게 독자 파병 형식을 취했다. 이 옵션이 다시 부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상황은 2020년과 다르다. 미국이 다시 ‘미국이 요청한 다국적 호르무즈 군사작전 참여’를 요구하며 강하게 압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그해 5월에 이르기까지 청해부대가 실제로 호르무즈 해협에 투입된 적이 없었다. 아울러 당시와 달리 현재 임무·지휘 체계·교전규칙이 질적으로 달라진다면 기존 파병 동의안을 확대 해석해 처리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국회 동의를 받는 게 헌법 제60조의 취지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나폴레옹 놀이’를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는 1806년 베를린 칙령을 통해 영국을 대상으로 한 대륙봉쇄령을 발동했다. 이는 유럽 전체와 영국 간 무역·교류를 모두 차단해 영국 경제를 질식시키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경제적 피해 때문에 대륙봉쇄령에서 이탈했고,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몰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도 나폴레옹 1세의 대륙봉쇄령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은 물론 전략적 적대국인 중국에까지 해협 확보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상황이다. 이란에 대한 해상 봉쇄와 강한 경제 압박도 병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적국의 경제적 생명선 조이기 전략 ▲봉쇄의 성공이 제3국의 협조에 달려 있다는 점 ▲패권국의 강력한 협조 요구 ▲경제·안보 조치가 동맹국 통제 문제로 확대된다는 점 등의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이란은 미국의 봉쇄 조치 이후 원유 수출이 크게 감소해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적 부담 분산과 이란 고립이라는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대륙봉쇄령은 비현실성에서 비롯된 유럽 각국의 비협조·밀무역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이탈을 거쳐 러시아 원정의 대실패로 연결됐고, 결국 나폴레옹 1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 균열과 국내 이익의 경계선을 교묘하게 오가면서 21세기판 대륙봉쇄령을 시도하려고 한다. 이란의 경고 우리의 응수 패권국이 자신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참여국이 감수할 수 있는 국익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강제로 만든 연합은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 같은 흐름이 보이는 현 상황에서 지지율 하락세에 시달리고 있는 이재명정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23년 전 이라크 파병 문제에 시달리다가 지지율 하락과 진보 진영의 비토에 직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뇌가 이 대통령의 눈가에 아른거리고 있진 않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