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김경수’ 친문잠룡 각축전 내막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20.11.16 10:09:38
  • 호수 12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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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아니고, 이재명도 아니다
‘제3의 인물’ 등장할까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친문 적자’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사실상 대권 레이스에서 탈락했다. 극적인 반전을 기대했던 친문 세력은 김 지사를 대체할 인물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여러 인물이 대체자로 거론되고 있다. <일요시사>는 계파의 명운이 걸린 친문의 대체자 찾기 프로젝트를 추적했다.
 

▲ 김경수 경남도지사 ⓒ고성준 기자

재판부는 2심에서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2년이다. 김 지사는 법정구속을 면했다. 친문(친 문재인) 일각에서는 김 지사가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대법 판결 
남았지만…

친문 핵심이자 친문 인사들의 비공개 모임인 ‘부엉이’ 출신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전해철 의원은 김 지사의 2심 선고 후인 지난 7일 “대법원에서 충분히 진실이 가려질 수 있도록 김 지사가 의연하게 대응하리라 믿고, 응원한다”고 밝혔다. 

같은 부엉이 출신인 민주당 황희 의원은 2심 선고 직후인 지난 6일 “(김 지사는)댓글 조작을 드루킹과 공모할 동기도 없고, 그 자체로 선거에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며 “전에 김 지사가 재판 증언을 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점이지만, 재판부가 정치권 선거문화에 (대한)이해가 부족해도 너무 과하게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김 지사의 대권도전은 현실적으로 힘들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임라인상 민주당은 늦어도 내년 9월까지 대선후보를 결정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판결까지 대략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강제 규정은 아니어서 언제 결판이 날지 예상할 수 없다. 

경선 일정 등을 고려하면 김 지사가 대법원 판결을 통해 사법족쇄를 풀더라도 대권 도전을 준비하는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다. 김 지사를 기소한 허익범 특별검사는 지난 10일 상고장을 제출했다.

친문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남은 기간 친문 대권주자를 찾지 못한다면, 친문 중심의 정권 재창출은 실패하게 된다. 이는 계파의 명운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당내 주도 세력인 친문이 그 자리를 내려놓을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문은 민주당 내 최대 계파다. 일각에서는 현재 민주당에 친문이냐 ‘신문(새로 유입된 친문)’이냐만 있을 뿐 비문(비 문재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비문 세력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힘을 못 쓰고 있는 현실이다. 

김 2심도 실형, 발등에 불 떨어져
범친문계 SK ‘바이든 모델’ 구상

이 같은 상황에서 만약 친문 중심의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다면, 민주당 내 잠자고 있던 비문 세력이 다시금 활동에 나설 수 있다. ‘친노 패권주의’로 몸살을 앓았던 새정치민주연합 시절로 회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 지사의 대권 레이스 탈락으로 친문의 플랜A는 어그러졌고 이제 플랜B로 전환할 때다. 바로 김 지사의 대체자 찾기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정세균 국무총리다. 정 총리는 ‘SK계(정세균계)’라는 자체 계파를 갖고 있지만, 범 친문으로 분류된다. 친문 지지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력 정치인이다.

김 지사 2심 선고 이후 정 총리는 정치적 보폭을 넓히고 있다. ‘식사정치’가 이를 방증한다. 지난 9일 정 총리는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을 초청해 만찬을 가졌다.

정치권은 정 총리의 잇따른 영남 방문을 예의 주시했다. 대권의 승패를 판가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유권자가 많은 영남 지역을 방문한 일도 그렇지만, 방문 당시 정 총리 입에서 나온 발언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세균 국무총리 ⓒ문병희 기자

지난 7일 경북 포항을 방문한 정 총리는 자신을 ‘포항의 사위’라 칭했다. 발언만 놓고 보면 마치 선거 유세를 방불케 한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정 총리는 대구를 찾았을 당시 “나는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중 유일한 TK(대구·경북)의 사위”라고 밝힌 바 있다.

정 총리는 지난달 30일, 경북 안동을 찾아 회의와 특강, 지역 포럼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앞서 지난달 16일에는 부산을 찾아 “부산·울산·경남 800만 시도민들의 간절한 여망이 외면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산·울산·경남이 염원하는 가덕신공항 건설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다.

정 총리는 지난 11일에도 부산을 방문해 민심을 청취했다.

플랜B 전환
SK 급부상

정 총리의 PK(부산·경남) 방문은 정치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호남 출신인 정 총리가 대권을 잡기 위해서는 영남 표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식 전략이다. DJ는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충청의 맹주인 자유민주연합 김종필(JP) 총재와 DJP연합을 결성, 대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지역연합의 힘은 이후 대선에서도 증명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 당선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세력인 호남의 힘과 PK 출신이라는 점이 만난 결과다. ‘포스트 DJ’ 후보 중 한 명인 정 총리의 영남 방문이 주목받는 이유다. 

메시지도 선명해졌다. 최근 정 총리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이의 갈등을 지적했다. 추 장관은 점잖았으면 좋겠고, 윤 총장은 자숙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앞서 정 총리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에 대해 “불필요한 논란이 계속된다면 총리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경고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정치권은 정 총리의 대권 도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지난 10일 광주KBS 특별대담에 출연한 정 총리는 사회자가 “내년 3월에 어떤 말을 할 시간이 다가올 것으로 보는가”라고 질문하자 “그때 보시죠”라고 답했다. 내년 초 대선 도전을 선언할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으로 읽힌다.

여권에서는 이 시기 총리 교체를 포함한 큰 폭의 개각이 이뤄질 것이라 관측한다. 정 총리는 지난 10일 세종 총리공관에서 진행한 취임 300일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개각은 두 차례로 나눠 진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개각 시점은 연말·연초보다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SK계는 정 총리와 보폭을 맞추고 있다. SK계 의원들이 주축인 ‘광화문포럼’이 최근 조찬모임을 갖고 활동을 재개했다. 포럼의 회장은 민주당 김영주 의원이, 운영위원장과 간사는 각각 이원욱·안호영 의원이 맡고 있다.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 총리는 ‘바이든 모델’을 구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정 총리는 미국 대선을 언급하며 조 바이든 당선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통합과 실용의 시대정신’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정 총리는 “미국 국민들은 분열이나 불안정, 대결과 반목을 물리치고 치유와 통합, 실용과 포용의 길을 제시한 바이든 당선인을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했고 그게 시대정신”이라며 “바이든 당선인은 품격 있는 정치인이고, 안정감도 있고 경륜이 풍부하고 또 포용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분”이라고 평가했다.

정 총리는 평소 통합·실용의 리더십을 강조해왔다. 총리로 취임할 때도 ‘통합 총리’를 강조했다. 이는 정 총리가 분석한 바이든의 시대정신과 일치한다.

6선 의원이자 국회의장 출신인 정 총리는 6선 상원의원이자 부통령으로서 상원의장을 겸한 바이든 당선인과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에 바이든을 언급하며 자신의 대권 의지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정치권에서 나온다.

대권 주자들 
춘추전국시대


민주당 김두관 의원 역시 친문의 선택을 받을 후보군으로 분류된다. 경남 남해 출신인 김 의원은 경남 양산을의 현역 국회의원이다. 경남 양산은 문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지역이다. 김 지사의 실형으로 대체자를 찾아야 하는 부산 친문의 선택이 김 의원 쪽으로 향할 수 있는 이유다.

정치권은 김 의원의 대권 의지가 정 총리 못지 않다고 본다. 김 의원은 지난 201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경남도지사직을 중도사퇴한 바 있다. 20대 국회에서 경기 김포갑 의원이었던 김 의원이 21대 총선을 앞두고 경남으로 귀향한 일을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선택이 아니었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김 의원은 ‘김해신공항 백지화’ 등 지역 현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특별보좌관 역시 정치적 보폭을 넓히고 있다. 최근 전국을 돌며 기초자치단체장 등 지역의 주요 인사들과 업무 협약식을 맺고 있다. 임 특보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하 경문협)’의 남북 도시 교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행보는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 ⓒ고성준 기자

임 특보는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다. 문재인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민주당 이낙연 대표와 마찬가지로 임 특보 역시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 ‘개국공신’으로 통한다. 임 특보가 김 지사와 돈독한 사이라는 점도 친문의 주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임 특보는 박원순계에서 친문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앞서 정치권은 박원순 서울시장 재임 시절 정무부시장을 맡았던 이력 등을 근거로 임 특보를 박원순계로 평가했다. 그러나 2016년 말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문재인 당시 경선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캠프에 합류, 대선 승리를 이끌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전국적 인지도와 친문 호감도를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인사 중 한 명이다. 복수의 친문 커뮤니티에서는 유 이사장의 대권 도전을 염원하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쟁력도 갖췄다. 유 이사장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처럼 유 이사장 역시 민주당 진영이 선호하는 영남계 진보인사다. 영남을 정치적 뿌리로 둔 보수 진영으로부터 ‘어용 지식인’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지만, 대중적 인지도로 이를 상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민주당 내부에 존재한다.

‘포스트 노무현’ 탄생?
70년생 젊은 피 ‘꿈틀’

문제는 대권 의지가 결여돼있다는 점이다. 유 이사장은 거듭된 ‘정계 복귀설’을 일축하고 있다. 

민주당의 젊은 피도 김 지사의 대체자로 주목받고 있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대표주자다. 그는 차기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런 기여를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1971년생인 박 의원은 올해 만 49세로 ‘세대교체론’의 선두주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양강구도를 구축한 1952년생 민주당 이낙연 대표(만 67세)와 1964년생 이재명 경기도지사(만 55세)보다 젊다. 여기에 박 의원의 개혁적 성향이 맞물려 차기 대선을 앞두고 세대교체론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박 의원은 86세대의 한계를 지적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86세대는 자기 기회를 다 소진했다고 본다” 등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지난 12일 연세대 강연에서는 “지금 대한민국 정치는 생물학적으로 매우 올드하다”며 “국회 평균 연령이 55세다.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세대들이 더욱 과감하게 들어서고, 대한민국의 시대교체를 선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고성준 기자

박 의원은 사립유치원 회계 부정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하는 등 의정활동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보이며 능력을 입증했다. 다만 ‘조금박해(조응천·금태섭·박용진·김해영)’의 일원으로 분류되는 등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박 의원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복무 특혜 의혹 등에 소신 발언을 내놓으며 친문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70년대생 중 친문의 주목을 받는 이가 또 있다. 바로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다. 박용진 의원이 대권 의지를 드러냈다면, 박 의원은 내년 4월에 치러지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에 박 의원은 차기보다는 차차기 대권주자로 언급된다.

박용진·박주민 의원은 정치적 자산에서 차이를 보인다. 중도개혁 성향인 박용진 의원이 외연확장에 강점을 보인다면, ‘세월호 변호사’인 박주민 의원은 열성 친문 지지자들로부터 큰 호감을 얻는 등 내부결속에 강점이 있다. 

장단점 뚜렷
누가 낙점?

정치권은 김 지사의 실형으로 당분간 ‘이낙연-이재명’의 양강 구도가 유지될 것이라 전망한다. 그러나 제3의 인물이 나온다면 양강 구도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특히 양강 구도가 오래 지속될수록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얼굴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다. 일종의 ‘피로감’이다. 이낙연 대표, 이재명 경기도지사 모두 친문 적자가 아니라는 점도 제3의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을 정치권에서 높게 보는 이유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옵티머스-이낙연 두 번째 의혹

옵티머스 측이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의 서울 지역 사무실에 1000만원 상당의 가구와 집기를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조선일보>는 검찰이 최근 옵티머스 로비스트로 활동한 김모씨로부터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의 지시를 전달받고 이 대표의 서울 사무실에 소파 등 1000만원 상당의 가구, 집기를 제공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해 수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대표 측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즉각 반박했다.

옵티머스 복합기 사건 이후 전수조사를 펼친 결과 사무실에 어떠한 지원도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

앞서 옵티머스 관련 업체인 트러스트올이 이 대표의 사무실에 있는 복합기 사용요금 76만원을 대납해줬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당시 이 대표 측은 “복합기는 참모진이 지인을 통해 빌려온 것으로, 그 지인이 트러스트올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고 해명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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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