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태풍’ 검찰의 명운

21대 국회 개원 전에 잡아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비판 수위가 연일 높아지고 있다. 21대 총선서 집권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윤 총장이 궁지로 몰리는 모양새다. 21대 국회가 시작되기까지 이제 30일 남짓 남았다. 윤 총장의 명운이 이 한 달에 달렸다는 말이 들린다.
 

▲ 윤석열 검찰총장 ⓒ문병희 기자

윤석열 검찰총장은 21대 총선서 유독 자주 언급됐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립 등 검찰 개혁에 대한 엇갈린 목소리와 함께 선거의 중심에 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공수처 출범을 외치며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은 공수처법 폐지를 주장했다.

개혁의 창

이 과정서 윤 총장의 거취에 대한 언급도 여러 차례 나왔다. 범여권 비례 위성정당인 열린민주당은 윤석열 사퇴’ ‘윤석열 퇴진을 거침없이 외쳤다.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 민주당은 지역구서만 163석을 얻어 통합당(84)을 압도했다. 절대적인 의회 권력을 손에 넣은 민주당은 검찰 개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채비를 하고 있다.

실제 총선 직후 윤 총장에 대한 비판 강도는 세지고 있다. 민주당의 비례정당인 더불어시민당 우희종 공동대표는 총선 다음날인 지난 16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 총장의 퇴진을 종용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윤 총장의 거취에 관한 기사를 공유하며 “서초동에 모였던 촛불시민은 힘 모아 여의도서 이제 당신의 거취를 묻고 있다”고 썼다. 이어 “그토록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당신, 이제 어찌할 것인가?”라고 덧붙였다.


우 공동대표는 지난 20일에도 “나 역시 그들(촛불시민) 중 한 사람으로서 페북(페이스북)에 개인 의견 남긴 것이 그리 오만한 것인가. 어느덧 검찰 개혁을 말하면 오만한 것이 되는 사회가 됐느냐”고 반문했다.

앞서 지난 17일 통합당 김용태 의원이 “선거에 졌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우희종의 하늘을 찌르는 오만방자는 무엇인가. 기다렸다는 듯이 윤석열 총장의 목을 베겠다고 나선 당신의 후안무치에는 내 비록 선거에 졌으나 준엄히 경고한다”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

민주당 승리로 개혁 드라이브 
윤 총장 비판 수위 높아져

선거기간 내내 윤 총장을 비판했던 열린민주당 최강욱 당선자도 가세했다. 최 당선자는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9단독 정종건 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을 앞두고 정작 법정에 서야 할 사람들은 한 줌도 안 되는 검찰정치를 행하고 있는 검사들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윤석열 검찰총장의 지시에 따른 정치검찰의 불법적이고 정치적 기소로 저는 오늘 법정으로 간다이미 시민들의 심판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당선자는 법무법인 청맥 변호사로 일하던 201710월 조국 전 법무부장관 아들 조모씨의 인턴활동 확인서를 허위로 발급해줘 대학원 입시업무를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 1월 최 당선자를 기소했다. 최 당선자는 검찰의 기소를 두고 날치기 기소’ ‘정치 기소라고 비판해왔다.

윤 총장은 선거 당일 투표를 마친 이후 대검찰청 간부들과 만난 자리서 정치적 중립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 최강욱 전 청와대 비서관 ⓒ문병희 기자

그는 이날 정치적 중립은 펜으로 쓸 때 잉크도 별로 들지 않는 다섯 글자지만, 현실서 지키기 어렵다선거 사범 수사서 엄정중립을 명심하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여야의 언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하지만 일각에선 윤 총장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21대 국회가 개원하면 당장 공수처 출범이 가시권에 들어올 것이고, 공수처장까지 결정되면 윤 총장의 입지가 지금보다 좁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검찰은 20대 국회 임기가 한 달여 남은 현재 민감한 수사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총선 이틀 뒤인 지난 17일 바이오 업체 신라젠의 이용한 전 대표와 곽병학 전 감사가 구속됐다. 이들은 신라젠의 면역항암제 펙사벡의 임상 중단 사실이 공시되기 전 회사 내부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대거 팔아치워 거액의 손실을 회피한 혐의를 받는다. 신라젠은 펙사벡 개발의 기대감으로 주가가 한때 고공 행진을 했지만 임상시험이 중단되면서 폭락했다.

검찰은 21일에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신라젠 서울사무소, 문은상 대표이사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지난해 8월에 이은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압수수색이다. 문 대표 역시 이 전 대표나 곽 전 감사처럼 거액의 지분을 처분한 바 있어 같은 의혹을 사고 있다. 또 자본 없이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신주인권부사채(BW)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회사 지분을 부당하게 취득했다는 의혹도 제기돼있다.

신라젠 의혹은 MBC서 제기한 검언유착의혹과도 닿아있다. MBC는 채널A 기자가 윤 총장 측근 검사장과 유착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신라젠 관련 비리를 집요하게 요구했다는 내용으로 보도한 바 있다.

유 이사장은 지난 21일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방송서 신라젠 연루 의혹에 대해 거듭 부인했다. 앞서 보수진영에서는 유 이사장 등 일부 여권 인사가 신라젠 설명회에 참여한 증거가 있다며 이번 사건과의 연루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 이사장은 이날 방송서 아무리 파도 안 나온다. 지금도 파고 있다면 포기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가 이렇게 세게 나올 때는 검사들도 여기 파 봐도 물이 안 나오나 보다하고 접어야 한다구속된 신라젠 임원 두 사람의 휴대전화, 다이어리를 뒤져도 안 나올 거다. 실제 전화번호를 모르고 만난 적이 없으니까. 행사장서 한 번 인사한 것 말고는이라고 했다.

속도 내는 신라젠·라임 수사
당선된 기소 인사들 때문?

검언유착 의혹은 본격적인 수사 단계에 돌입했다. 채널A 기자와 현직 검사장 간 유착 의혹에 대해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이 낸 고발장을 토대로 이뤄지는 수사다. 김 상임대표는 지난 21일 검찰 조사에 앞서 채널A 기자가 한 일은 언론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검찰 수사까지 이뤄져 안타깝지만 사실 조사권이 없는 상태서 진실을 밝히기 어려워 검찰에 고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 당사자도 검언유착 의혹과 관련해 SNS에 허위사실을 퍼뜨린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한 상태다. 법치주의바로세우기행동연대는 지난 19일 최 당선자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해 달라고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 유시민 작가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

이 단체는 최 당선자가 지난 3편지와 녹취록상 채널A 기자 발언 요지라는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 이 대표님, 사실이 아니라도 좋다. 당신이 살려면 유시민에게 돈을 줬다고 해라.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다라는 부분이 허위사실이며 채널A 기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18일에는 라임펀드 환매중단 사건(라임사태)과 관련해 청와대 전 경제수석실 행정관 김모씨가 구속됐다. 현재 금융감독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 전 행정관은 지난해 2월부터 1년간 청와대서 파견근무를 하면서 라임사태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라임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종필 전 라임 부사장과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도 지난 23일 검거됐다. 주요인물들이 구속되면서 검찰의 칼끝이 어디까지 미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수사의 방패

검찰이 21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수사 속도를 높이는 것에 대해 검찰 개혁 드라이브가 걸리기 전 최대한 성과를 올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또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하명수사 의혹 등과 관련해 기소된 인사들 가운데 민주당 황운하 당선자, 한병도 당선자 등이 원내에 입성하게 된 상황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