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이후…> ⑤‘참패한’ 보수의 미래

‘침몰 직전’ 구멍난 통합호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이 21대 총선서 참패하면서 ‘선거 4연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뒀다. 역대 대한민국 선거 중 보수정당이 맞은 최악의 참패다. 이대로라면 2022년 대선도 어렵다. <일요시사>는 통합당의 향후 계획을 점쳐봤다.
 

▲ 지난 15일, 21대 총선서 미래통합당 여의도 당사서 출구조사를 지켜보고 있는 미래통합당 지도부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은 21대 선거서 103석(지역구 84석·비례대표 19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100석)을 겨우 지켜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경기·충청·제주 등 대부분의 지역서 우세를 보이면서 180석(지역구 163석·비례대표 17석)을 얻는 기염을 토했다.

중도 이탈
분당까지?

통합당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총선서 보수 세력이 결집했다는 점이다. 통합당의 주요지지 기반인 TK(대구·경북)에서는 범보수 진영이 석권했다. PK(부산·울산·경남) 역시 표심이 다소 갈렸지만 거의 분홍 물결로 덮혔다. 하지만 집토끼 잡기에 급급해 중도층을 놓쳤다는 뼈아픈 평가가 잇따랐다.

이번 선거로 통합당은 충격에 휩싸인 상태다.

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는 지난 15일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늦은 밤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21대 총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제1당을 자신했던 김종인 전 선대위원장 역시 “자세도 갖추지 못한 정당에게 지지를 요청해 송구하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김 전 위원장은 민주당과 통합당의 지난 선거를 진두지휘하며 승기를 잡아오면서 ‘선거의 달인’으로 불렸지만 통합당의 참패로 커리어에 적잖은 흠집이 나게 됐다.


이번 선거는 영·호남 지역구도가 더 굳혀져 거대양당 정치 형태로 다시 회귀하는 양상을 보였다. 선거의 승패를 가른 건 역시 중도 민심이었다. 통합당은 선거내내 ‘문정권 심판론’을 앞세워 네거티브 공세에만 집중했다.

텃밭만 겨우 지켜…대선도 먹구름
궤멸 위기 직면 가시밭길 앞날은?

선거 직전까지 휘말렸던 막말 논란은 민심이 등을 돌리는 데 불을 지폈다. 당 윤리위는 ‘세월호 텐트’ 막말 논란을 일으킨 경기 부천병의 차명진 후보에게 ‘탈당 권유’ 징계를 내렸다. 세대 비하 발언으로 빠르게 제명된 관악갑 김대호 후보에 견줘봤을 땐 상당히 낮은 수위의 징계였다. 수도권 후보들 사이에선 차 후보를 지키다 수도권 표심이 다 날아가게 생겼다는 읍소마저 터져 나왔다.

끝내 차 후보는 ‘현수막 성희롱’ 등의 발언을 이어가며 중도 민심 이탈을 자초했다.
 

▲ 기자회견 갖는 김종인 위원장

이번 선거로 통합당은 대선에 출마할 지도부급 인물들을 모두 잃었다. 황 전 대표는 종로서 민주당 대표주자인 이낙연 후보에게 선거 초반에 패색을 보였고, 심재철 원내대표는 경기 안양시동안을서 민주당 이재정 당선인에게 패했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 역시 4선 고지서 같은 판사 출신인 민주당 이수진 당선인에게 동작을을 내줬다.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광진을의 통합당 오세훈 후보는 민주당 고민정 당선인에게 꺾이면서 정치적 치명타를 입게 됐다.

진공 상태
비대위 출점?


이언주 의원 역시 광명서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배수의 진을 쳤지만 고향서 패했다. ‘세종시 설계자’로 꼽혔던 김병준 후보는 선거 전 세종을 ‘사지’로 칭하며 살아오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결국 강준현 당선인에게 밀려났다.

당내 입지도가 높은 대표주자들 역시 여의도 입성에 실패했다. 동대문을에 출마한 3선의 이혜훈 의원 역시 민주당의 파란 물결을 이겨내지 못했다. 구로을의 민주당 윤건영 당선인을 잡기 위해 투입된 통합당 김용태 후보 역시 무릎을 꿇었다. 김 후보는 양천을서 3선을 한 후 ‘윤건영의 자객’으로 구로을에 나섰지만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대선까지 남은 2년동안 통합당은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 당 정비에 사력을 다할 전망이다. 당헌 당규상, 당 대표 궐위 시에는 원내대표가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원래는 심 원내대표 주도로 비상대책위를 꾸린 후 빠른 시일 내 전당대회를 통해 당 대표 선출 등 지도부 구색을 맞추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다. 하지만 총선 패배로 권력 진공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당선자들 간 논의가 전제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유승민계
기대주는?

특히 김종인 전 선대위원장의 비대위행이 크게 점쳐진다. 당내 중진들 역시 김 전 위원장을 원하고 있고, 황 전 대표 역시 김 전 위원장에게 비대위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전 위원장이 이를 수락할지는 미지수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걸로 전해졌다. 기자회견서도 그는 “여기 올 때부터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선거하는 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임무라고 생각하고, 선거가 끝나면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고 얘기했다”고 했다. 다만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이 있는 만큼 당 안팎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셀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만약 김 전 위원장이 이를 거부하면 당은 오는 7∼8월 전당대회를 열어 당 대표를 선출할 전망이다. 따라 이 경우에는 중진들이 당 리더십 구축에 중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5선고지에 오른 이들이 유력한 대상이다. 주호영(대구 수성갑)·서병수(부산 진갑)·정진석(충남공주부여청양)·조경태(부산 사하을)의원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향후 지도부 구성에는 당에서 컷오프된 후 무소속으로 당선된 홍준표(대구 수성을)·김태호(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윤상현(인천 동구미추홀구을)·권성동(강원 강릉) 당선인들도 중요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홍 당선인은 당선 소감으로 “제대로 보수 우파 입지를 다지는 정당으로 만들겠다. 보수 우파 이념과 정체성을 잡고, 2022년 정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하겠다”며 당 재건에 힘 쓸 것을 시사했다.

비대위 김종인 유력 “5선 리더십 기대”
홍준표·김태호 부상…안철수계 영입설도

문제는 당의 복당 허용 여부다. 당은 무소속 출마자들에 대한 복당을 불허한다는 방침이지만 현재로서는 한 석이 아쉬운 만큼 이들을 외면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주호영 의원 역시 복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사실상 이들의 당 복귀는 시간문제일 것으로 예상된다.

당 재건 과정서 유승민 전 대표의 역할에도 관심이 쏠린다. 유 의원은 SNS에 올린 글에서 “저희들이 크게 부족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보수의 책임과 품격을 지키지 못했다”며 “더 성찰하고 더 공감하고 더 혁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지 위에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가치를 찾아 보수를 재건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총선 참패 속에서도 김웅(송파갑)·하태경(부산 해운대갑)·유의동(경기 평택을) 등 이른바 유승민계 인물들은 10명 넘게 생환했다. 대권 의지가 있는 유 의원이 비대위를 맡은 후 측근 의원들을 요직에 배치하면서 존재감을 다시 드러낼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이 외에도 4선에 오른 권영세(서울 용산)·박진(서울 강남을) 등도 당권 레이스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분류된다.

외연확장
국민의당?

끝으로 국민의당과의 통합 가능성도 점쳐진다. 중도층의 마음을 되돌리는 건 통합당의 첫 번째 과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연 확장이 시급하다. 그나마 정치적 궤를 함께하는 국민의당이 유력한 통합 후보다. 이번 총선서 국민의당은 6.8%의 비례 득표율을 얻으며 3석을 배분 받았다. 이들과 만약 합당이 이뤄진다면 안철수 대표 역시 통합당의 대권주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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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