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발’ 윤석열 제거 플랜

그냥 나갈래? 끌려 나갈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다음달 25일이면 윤석열 검찰총장이 취임한 지 1년이다. 불과 1년 사이에 윤 총장에 대한 평가는 크게 바뀌었다. 임기 반환점도 돌지 않은 상황서 이미 ‘식물총장’으로 전락했다는 말도 나온다. 윤 총장은 법에 보장된 2년 임기를 채울 수 있을까?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해 6월17일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장이던 윤석열 검찰총장을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했다. 문 대통령의 인사에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환영’ 입장을,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이하 통합당)은 ‘코드 인사’라는 엇갈린 입장을 내놨다. 당시 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윤 후보자는 검사로 재직하는 동안 각종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 수사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며 “부당한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원칙을 지킴으로써 검찰 내부는 물론 국민적 신망도 얻었다”고 치켜세웠다. 

처음에는
환영하더니…

반면 당시 통합당 민경욱 대변인은 “문재인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윤 후보자는 서울중앙지검장에 올랐고, 이후 야권 인사들을 향한 강압적인 수사와 압수수색 등으로 자신이 ‘문재인 사람’임을 몸소 보여줬다”며 “그러던 그가 이제 검찰총장의 옷으로 갈아입게 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수사의 독립성은 날 샌 지 오래다. 청와대는 하명을 했고 검찰은 이에 맞춰 칼춤을 췄다”며 “이제 얼마나 더 크고 날카로운 칼이 반정부 단체, 반문(반 문재인) 인사들에게 휘둘려 질 것인가”라고 덧붙였다. 

실제 윤 총장의 청문회서 저격수를 자처한 통합당 의원들의 공격에, 민주당 의원들은 방어에 나섰다. 통합당이 도덕성을 이유로 윤 총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할 때에도 민주당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여야 간 이견으로 윤 총장의 청문보고서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문 대통령은 윤 총장을 43대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지난해 7월25일 문 대통령은 윤 총장을 ‘우리 윤 총장’이라고 칭하며 신임을 표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윤 총장은 권력형 비리에 대해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자세로 아주 공정하게 처리해 국민의 희망을 받았는데 그런 자세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자세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자세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청와대든 정부든 또는 집권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정말 엄정한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국민이 체감하게 되고 권력형 부패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윤 총장에 대한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와 신뢰는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180도 달라졌다. 지난해 8월 문 대통령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이후부터 생기기 시작한 골은 점점 깊어지는 모양새다. 당시 윤 총장과 검찰은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조 전 장관 수사에 뛰어들었다.

한명숙 전 총리 진정 사건 
민주당서 ‘자진사퇴’ 발언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을 주장하는 시민들이 서초동으로, 문재인·조국 사퇴를 주장하는 시민들은 광화문으로 집결했다. 이때부터 민주당서 윤 총장에 대한 비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찰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 시점도 비슷하다. 조 전 장관에 이어 추미애 장관이 법무부 수장으로 입성하고부터는 검찰 인사를 비롯해 윤 총장 주변부로 압박이 들어갔다. 

윤 총장은 기소권으로 맞섰다. 지난 1월 조 전 장관의 아들에게 허위 인턴증명서를 발급해 대학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를 전격 기소했고,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하명수사 의혹과 관련해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 13명을 무더기로 기소했다.
 

▲ 추미애 법무부 장관 ⓒ고성준 기자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소환해 조사했다. 


그러자 21대 총선 과정서 윤 총장을 대하는 민주당과 통합당의 자세가 바뀌었다. 통합당은 ‘윤석열 지키기’에 나섰고 열린민주당 등 범여권에선 ‘윤석열 때리기’로 맞섰다. 순식간에 공수가 바뀐 것이다. 실제 이번 총선서 윤 총장은 그 누구보다 높은 관심을 받았다. ‘조국 이슈’가 불거지면서 자연스럽게 윤 총장이 따라 나온 것.

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총선 전 윤 총장에 대해 “가장 정직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법을 법대로 집행했다고 생각을 해서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윤 총장이 조국 사태서 ‘법대로 하겠다’고 하니까 윤 총장을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이 현 정부의 모습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지난 총선서 범여권으로 분류된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당시 후보)는 총선 전 윤 총장의 부인 김건희씨를 자본시장법 위반과 사문서위조 및 사기죄 공범 혐의로, 윤 총장의 장모 최모씨에 대해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 총장의 거취를 두고 논란이 크게 불거지진 않았다. 하지만 총선서 민주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윤 총장의 거취 문제가 수면 위로 확실하게 떠올랐다. 민주당 의원들의 입에서 ‘자진사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뇌물수수 사건에 대한 검찰의 위증교사 의혹 감찰 문제를 두고 갈등이 불거지는 과정에서였다.

조국 이후
완전히 돌변

한 전 총리 사건 재판 때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서 증언했던 A씨는 지난 4월 검찰 수사팀이 거짓 진술을 강요했다는 취지로 법무부에 진정을 냈다. 이 진정 사건을 어디에서 맡을지를 두고 윤 총장과 추 장관의 갈등이 심화됐다. 

추 장관은 해당 진정을 대검 감찰부서 조사하도록 지시했고, 윤 총장은 징계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실에 배당했기 때문이다. 윤 총장이 진정 사건을 대검 감찰부에 배당하면서 사태는 봉합되는 방향으로 갔지만 이 과정서 윤 총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주당 설훈 최고위원은 지난 19일 최고위원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각을 세운 지 얼마나 됐느냐. 그런 상황서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겠느냐”며 “적어도 책임 있는 자세를 갖춘 사람이라면, 나라면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이어 “(검찰총장의) 임기 보장과 상관없이(법무부 장관과의) 갈등이 이렇게 일어나면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라고도 했다. 
 

▲ ‘함구령’ 내린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병희 기자

윤 총장 거취에 대해서 민주당 지도부가 언급한 첫 사퇴 요구다. 설 최고위원은 YTN 라디오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서도 “윤 총장이 정부와 적대적 관계라고까지 하기는 지나치지만 어쨌든 각을 세운 건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라고 비판하면서 “장모 사건 등으로 조금 진중하나 했더니 이렇게 또 장관과 각을 세우는 것은 잘못됐다. 조만간 결판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대검 인권부는 조사 권한이 없는데 조사 총괄을 맡기겠다는 것은 상급자인 법무부 장관의 지시를 위반한 월권행위”라며 “윤 총장이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어떻게든 (제 식구)봐주기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김 의원은 유튜브 채널 ‘시사발전소’서 “윤 총장은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라며 “검찰 기득권 지키기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윤 총장이 검찰 역사상 가장 최악의 검찰총장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지난 22일 비공개 최고위원회서 “누가 묻더라도 윤 총장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마라. 이름도 거명하지 않겠다”며 함구령을 내렸다. 이어 “문제가 있으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차원서 대응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제 겨우
취임 1년

이 대표의 ‘입단속’에도 민주당 김두관 의원은 지난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 총장만큼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자신의 장모 혐의는 물론 검찰 제 식구 감싸기와 야당의 명백한 비리 사건은 수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외서도 윤 총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더불어시민당의 공동대표를 지낸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지난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총선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윤 총장 세력이나 유착 언론들이 윤 총장에 대한 사퇴 요구가 마치 라임 사태 등에 연루된 정권이 이를 덮으려고 하는 것인양 연계하며 버텨선 안 된다”며 “윤 총장도 문 대통령을 위해 일한다고 했다면 임명권자의 부담을 덜어드리는 차원서 결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도 지난 22일 국회 최고위원회서 “이제 권부에 성역이란 없다. 눈 밝은 시민들은 검찰총장을 응시하고 있다”며 “진실과 정의를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을 직시하고 이제 껍질을 벗고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꼼수를 반복하는 양치기 소년 같은 태도를 반복한다면 주권자가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검 인권부장이 인권감독관실과 대검 감찰과를 통솔하듯이 조사를 담당하도록 한 윤 총장의 지시는 법무부 장관의 지시를 어기는 것”이라고 직접 비판했다. 
 

▲ 추미애 법무부 장관 ⓒ고성준 기자

한 전 총리 사건, 검언유착 의혹 사건의 전문수사자문단 소집 결정 등을 이유로 윤 총장과 갈등을 빚고 있는 추 장관은 지난 24일 공개석상서 윤 총장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냈다.

추 장관은 이날 오전 경기 과천청사 대회의실서 열린 제57회 법의 날 정부포상 전수식 축사 당시 “(국민으로부터)권한을 위임받은 자가 각종 예규 또는 위임 취지에 반하고 있다”며 “자기 편의적으로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 법 기술을 부리고 있어 대단히 유감”이라고 윤 총장을 에둘러 비판했다. 

문 거리 두기…추 우회적 비판
국민 여론은 사퇴 반대 우세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제6차 공정사회반부패정책협의회에 참석한 추 장관과 윤 총장에게 “지난주 법무부와 검찰서 동시에 인권 수사를 위한 태스크포스가 출범했다”며 “권력기관 스스로 주체가 돼 개혁에 나선 만큼 ‘인권수사의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대로 서로 협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협의회는 민주당서 윤 총장의 사퇴 요구가 제기되던 시점에 이뤄진 터라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발언이 원론적인 수준에 그치면서 민주당 이 대표의 ‘함구령’처럼 윤 총장 거취 논란에 대해 거리를 두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문 대통령의 당부에도 추 장관은 윤 총장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지난 26일 추 장관은 검언유착 의혹 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된 한동훈 부산고검 차장검사에 대한 직접 감찰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섰다. 한 검사장은 윤 총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그러면서 추 장관은 26일 국회서 열린 초선의원 혁신포럼에 참석해 “윤 총장이 제 지시를 절반 잘라 먹었다”며 “장관 말을 겸허히 들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지휘랍시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범야권은 범여권의 공세에 ‘윤 총장 지키기’로 맞서는 모양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지난 22일 윤 총장에 대한 여권 일각의 사퇴 공세와 관련해 야권의 공동 대응을 제안했다. 그는 “민주당은 윤 총장에 대한 핍박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한 뒤 “양심적인 범야권의 뜻을 모아 윤 총장 탄압금지와 법무부 장관의 공정한 직무수행을 촉구하는 국회 결의안을 공동 제출하자”고 요구했다. 

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민주당의 윤 총장 비판 공세에 “제발 좀 쓸데없는 언행을 삼가면 고맙겠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려고 애쓰는 검찰총장, 감사원장에 대해 정치권이 지나치게 간섭하고 국회가 딱한 언사를 행사하고 있다”며 “이렇게 해선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여권 치고
야권 막고

윤 총장은 여러 공세에도 불구하고 ‘자진사퇴’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국민여론도 사퇴 반대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다. <데일리안>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에 의뢰해 지난 22∼23일 양일간 국민 10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4%가 여권이 제기한 윤 총장의 사퇴 주장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한다는 38.9%에 그쳤다.(자세한 내용은 알앤써치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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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