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타결’ 일본과 비교하니…

버티기 승부수 먹혔다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7분간의 정상회의를 마친 뒤 나란히 악수를 나눴다. 3개월 넘게 이어진 한미 관세 협상이 극적 타결하며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협상에서 일본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일요시사>는 한일 양국의 정상회의 성적표를 비교해 봤다.

지난달 29일 오후, 경북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국제회의장. 이날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 중 가장 주목받은 날이었다. 87분간의 회담을 마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합의를 이뤘으며 무역 협상을 거의 마무리했다”고 말했고, 이재명 대통령은 “상호 이익의 균형점을 찾았다”고 밝혔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 속에서 한국은 마지막 협상국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이미 협상을 마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내는 국가에는 동일한 수준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정무역(Fair Trade)’을 내세운 ‘상호 관세(Reciprocal Tariff)’ 정책이었다.

지난해 말, 미국은 한국·일본·독일·중국 등을 대상으로 25%의 관세 인상 조치를 예고했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으로 대부분 무관세였던 한국엔 사실상 FTA 무력화 선언이었다. 자동차·반도체·철강 등 수출 주력 산업이 직격탄을 맞을 것이란 우려가 쏟아졌다.

자동차 업계는 25% 관세 적용 시 연간 4조원 이상 손실을, GDP 성장률은 0.2%포인트 하락을 우려했다.


문제는 시점이었다. 2024년 말 윤석열정부가 탄핵 정국에 돌입하면서 통상 대응은 사실상 마비됐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가 미국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차기 정부 출범 전까지는 실질적 협상이 불가능했다.

정치 공백 속에서 산업계는 초비상 체제에 들어갔다. 자동차·반도체 업계뿐 아니라 농축산물 시장 개방, 주한 미군 방위비, 정밀지도 반출 등 민감한 현안이 한꺼번에 거론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7월, “일본과의 무역 협상이 완료됐다”고 발표했다. 일본산 수입품에는 상호 관세 15%, 기존 25%보다 10%포인트 낮은 세율이 적용됐다. 대신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미국산 농산물·자동차 시장 일부 개방을 약속했다.

닷새 뒤 유럽연합(EU)도 6000억달러 규모의 투자와 함께 15% 관세율을 받아들이는 합의를 발표했다.

남은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미국은 “일본보다 낮은 관세율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한국이 결정을 미루면 25%가 그대로 발효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재명정부가 출범한 뒤 지난 6월부터 협상이 재개됐다. 첫 외교 과제로 한미 관세 협상을 꺼내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직후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미FTA는 우리 경제의 생명선”이라며 협상 재개를 제안했다.

곧바로 구윤철 경제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통상 대응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협상 실무 라인을 맡았다.


7월 초 워싱턴에서 첫 실무 협상이 열렸지만, 미국은 “한국이 미국 시장에서 얻는 이익이 과도하다”며 3500억~40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선제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은 “투자보다 관세율 조정이 우선”이라며 맞섰고, 양측의 입장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7월 말,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대한민국과 전면적인 무역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합의는 25%로 예고된 상호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조건이었다. 이 중 1500억달러는 조선업 협력 펀드(MASGA 프로젝트)로 운용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는 즉각 “큰 틀의 합의는 있었지만, 세부 조율이 남아 있다”고 발표했다. 당시 협상은 ‘얼마를 투자하고 어떤 관세율을 적용할지’까지만 결정됐을 뿐, 자금 운용·수익 배분·외환시장 충격 완화 조항 등 핵심 내용은 빠뜨린 상태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곧바로 “8월1일까지 최종 합의가 없으면 25%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최후 통첩성 문서를 보냈고, 협상은 교착에 빠졌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쌀과 쇠고기를 포함한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3개월 교착 끝 극적 결실
87분 회담 세부 조항 확정

8월 이후 한국 측은 외환시장 안정장치 삽입과 투자 상한제 설정을 요구했고, 미국은 자동차 15% 관세 유지와 농산물 시장 확대를 고수했다. 23차례 이상의 장관급 회담이 이어졌지만, 합의는 지연됐다.

교착을 깬 것은 10월 APEC 정상회의였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약 87분간의 정상회담 끝에 세부 협정을 매듭지었다. 핵심은 투자 구조의 변화였다. 총 3500억달러 중 2000억달러는 현금 투자, 1500억달러는 조선업 협력으로 구분됐다.

특히 현금 투자분은 연간 200억달러 상한(cap)을 두고 10년간 단계적으로 집행하기로 했다. 이는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로,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EU 협상에서는 허용하지 않았던 조항이다.

또 투자 운용 주체가 한국 쪽으로 넘어왔다. 양해각서(MOU)에는 “한국 추천 기업 참여” “상업적 합리성이 입증된 프로젝트에 한정” “수익 5대 5 배분” “외환 불안 시 납입 시기 조정 가능” 등의 조건이 명시됐다.

일본이 미국에 전액 위임한 것과 달리, 한국은 실질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수익 배분 구조도 새로 정리됐다. 원리금 상환 전까지는 5:5로 나누되, 20년 내 원리금이 상환되지 않으면 비율을 조정할 수 있다.

손실 발생 시 다른 사업 수익으로 보전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농산물 시장 개방 문제도 한국이 방어에 성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초기에 ‘쌀·쇠고기 전면 개방’을 요구했으나, 최종 합의문에서는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검역·비관세 절차 개선 수준의 협의만 반영됐다.

자동차 관세는 일본·EU와 동일한 15%로 확정됐다. FTA 무관세(0%)였던 한국에는 손실이지만, 25% 부과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다.


투자 규모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본의 투자 규모가 훨씬 크다. 일본은 총 5500억달러 규모의 금융 패키지를 제시하며 15% 상호 관세를 받아냈다. 반면 한국은 총 3500억달러로 규모가 작다. 하지만 협상 방식과 자금 운용 조건, 투자 결정권의 주체성 측면에서 보면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더 ‘관리 가능한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은 5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 중 대부분은 미국 정부가 지정하는 인프라 및 제조 투자 프로젝트에 사용된다.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투자처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다.

한국의 경우 투자 규모는 총 3500억달러지만 구조는 다르다. 투자금 전액을 한번에 내는 대신, 연간 200억달러 한도를 둬 10년간 분할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외환시장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다.

한국 정부는 “시장 매입이 아닌 방식으로 조달할 것”이라며 외환 수급 불안에 대응할 여지를 남겼다.

투자 결정권


두 나라 협상 결과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는 투자처 결정권이다. 일본 투자금의 사용처는 사실상 미국 정부가 결정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의 자금이 미국 내 산업과 인프라 재건에 직접 쓰일 것”이라고 밝혔다. 즉, 일본이 미국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 투자 결정의 자율성을 확보했다. 한국은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운용 주체가 되는 ‘상업 투자형’ 방식을 택했다.

한국이 제시한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금은 한국 정부와 민간 기업이 직접 프로젝트를 검토·선정해 집행하게 된다. 다만 투자 분야는 ‘미국 내 첨단산업 및 공급망 안정화 프로젝트’로 한정돼있어, 미국 정부가 제시한 전략적 방향 안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부분적 자율성을 가진 형태다.

한국이 제시한 부분은 원리금이 보장되는 사업 한정, 수익 5:5 배분, 외환 불안 시 납입 조정 요청 가능 등의 조건을 포함한다.

한미 협상의 결과로 적용되는 상호 관세율은 15%. 이는 일본, EU와 동일한 수치다. 하지만 출발점이 달랐다. 일본은 기존보다 관세율이 올라갔다. 반면 한국은 FTA로 무관세(0%) 상태에서 15%로 인상됐다. 한국은 무관세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됐지만, 이는 ‘불가피한 현실적 타결’로 평가되고 있다.

25% 관세가 그대로 적용됐다면, 한국 자동차 산업은 현대·기아차를 포함해 연간 4조원 이상 손실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농업 부문에서도 차이가 크다. 일본은 농산물 일부 개방을 수용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본 시장 내 미국산 농산물 점유율 확대를 협상 핵심 성과로 내세웠다. 반면 한국은 쌀·소고기를 포함한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을 끝까지 막았다. 검역 절차 개선 등 비관세장벽 완화는 일부 수용했지만, 시장 자체 개방은 내주지 않았다.

일, 즉시 납부·미국 위임
한, 10년 분납·자율 확보

김용범 정책실장은 “쌀‧쇠고기를 포함해 농업 분야에서 추가 개방을 철저히 방어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농업 방어전에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선방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협력 구조

핵심에 놓인 산업 분야도 다르다. 일본은 자동차·반도체 중심의 제조업 협력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미국 현지 공장 투자 확대를 공표했다.

한국은 방향을 달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이후 강조한 ‘조선업 부흥’을 공략해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를 내세웠다. 한국의 조선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미국 내 조선소 확충, MRO(유지·보수·정비) 및 기자재 공급망 구축 등이 포함됐다.

즉, 일본은 기존 산업의 연장을 선택했고, 한국은 미국의 정책적 수요를 충족시키며 협상 여지를 넓혔다는 평가다.

안전 장치

일본의 투자금은 일시 지급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의 즉각적 지원으로 미국 경제가 활력을 얻을 것”이라며 ‘즉시 집행’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연간 200억달러 상한을 두는 분납 구조로 설계했다. 한국은 이를 통해 외환시장의 급격한 변동을 차단했다.

또 납입 시기·금액 조정 조항을 넣어, 시장 불안이 발생하면 협의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EU 협상 때는 허용하지 않았던 조건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규모는 작지만, 운용의 안전성은 더 높다.

배분과 회수

수익 배분도 눈에 띄는 차이점이다. 일본의 경우 대미 투자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구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두고 “미국에 유리한 협상”이라고 공개 발언하기도 했다. 한국은 원리금 상환 전까지 5대 5 수익 배분으로 결정됐다.

또 20년 이내 원리금 전액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수익 배분 비율을 재조정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됐다. 즉, 한국은 수익형 구조, 일본은 정책성 구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관세 협상은 일본보다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외신들도 공통적으로 “한국이 일본보다 많은 양보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한국이 일본보다 덜 부담스러운 협상을 성사시켰다”며 “한국은 투자 규모는 작지만 상업적 합리성과 자주성을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수개월간 교착 상태였던 협상이 예상 밖의 진전으로 타결됐다”며 “이재명 정부의 외교적 성과”로 평가했다.

<블룸버그>는 “조선업 협력 1500억 달러는 트럼프 정부의 핵심 산업정책에 직접 부합하는 양보이자, 한국 기업에 실질적 이익을 제공할 조치”라고 분석했다.

한미 협상은 타결됐지만, 실질적 이행은 이제 시작이다. 2029년까지 이어질 3500억달러의 투자 계획이 어떻게 집행되고 어떤 산업에 배분되느냐에 따라 이번 합의의 진정한 평가가 내려진다. 또 일본과 달리, 한국은 조선업 협력이라는 ‘새로운 산업축’을 구축한 만큼 해당 프로젝트의 성패가 향후 통상 외교의 지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이번 회담에서는 관세 문제 외에도 핵추진 잠수함 협력이 새로운 의제로 떠올랐다. 이 대통령은 전날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추진 잠수함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결단해달라”고 요청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는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과 미국의 연료 공급이 필요하다. 다만 핵연료 공급과 기술 이전 등 세부 사항은 향후 추가 협의가 남아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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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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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