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철수’ 못 하는 이유

이번에 접으면 다음은 없다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이번에는 양보도, 중간 철수도 없다. 사실상 철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마저 철수하면 벌써 5번째다. 그러나 이번 포기는 자칫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에게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어 보인다. 이런 탓에 안 의원이 이번에는 반드시 완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과연 안 의원이 전당대회 레이스서 당 대표 당선으로 완주할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을 ‘적’으로 규정해버렸다. 이 같은 이유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안 의원과 윤 대통령의 관계에 시선이 쏠린다. 두 인물은 지난 20대 대선 직전, 극적으로 단일화를 이뤄내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당시 대선후보를 이겼다. 단일화 때 윤 대통령과 안 의원은 공동정부를 구상하겠다며 함께 손을 번쩍 들어 보이기도 했다. 이후 안 의원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인수위원장을 맡으며 공동정부 약속이 어느 정도 이뤄지는 듯 보였다.

억지로
잡은 손

안 의원은 위원장으로서 윤정부의 밑그림을 그리며 맡은 역할을 해 나갔지만, 시작부터 불편한 기류가 감지됐다. 윤정부 내각 구성에 안 의원이 추천했던 1·2차 인원이 모두 배제됐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안 의원은 돌연 하루 동안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며 인수위에 우회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전문성을 가진 분야에 대해 조언하고 싶었으나 그런 과정이 없었다고 밝혔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문제는 금세 일단락됐지만 두 인물의 불편한 동행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정치권에 따르면 안 의원을 배제하는 이유로는 몇 가지가 거론된다. 

우선 안 의원은 윤 대통령의 여러 제안들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인수위 시절 윤 대통령은 안 의원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었다. 그는 윤정부 초대 총리 0순위로 하마평에 올랐다. 국민의힘 내에서도 유력하게 검토하던 카드다. 윤정부가 중도보수 방향으로 몸집을 키우고, 안 의원을 통해 국민통합을 내세우겠다는 전략이 가능해서다. 


총리직은 안 의원 입장에서도 상당히 고민되는 부분이었겠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단박에 거절했다. 거절 배경은 인수위원장과 총리 중 하나의 선택지만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두 자리 중 대내외적으로 윤정부 인수위에 힘을 보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수위원장직을 선택했다. 그러나 최근 안 의원은 총리직을 제안받은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또 다른 문제는 보건복지부 장관직 인선이었다. 윤 대통령은 재차 안 의원에게 복지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이 역시 거부했다.

이 같은 안 의원의 두 차례 제안 거절은 윤 대통령 입장에선 상당한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윤 대통령은 대선 당시의 단일화를 잊지 않은 듯, 안 의원에게 경기도지사 출마를 권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대차게 거절했다. 일각에선 안 의원이 인수위원장직을 맡았을 때부터 당권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실제로 안 의원은 보궐선거에 출마해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불편한 관계
윤 대통령 분노, 경고로 끝날까

보궐선거를 통해 무난히 당선된 안 의원은 국회 입성 후 초반에는 당권 도전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으나, 정치권에선 당 대표 도전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출마 시기를 저울질하던 그는 결국 지난달 9일, “윤석열 대통령과 운명공동체”라며 출사표를 던졌다.


이날 안 의원은 “(차기)총선의 최전선은 수도권이다. 170석 압승을 위해 수도권 121석 중 70석은 확보해야 한다”며 ‘총선 수도권론’을 주장했다.

문제는 그의 출마를 두고 당내 분위기가 썩 달가운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초반만 해도 그의 지지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 양보하는 게 아니냐는 시선이 가득해서다. 그는 정치를 해온 10년 동안 여러 차례 양보하는 모습으로 ‘양보의 아이콘’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도 붙었다. 

첫 양보 때만 해도 ‘아름다운 양보’라며 오히려 이미지가 상승하는 효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의 철수는 점점 악수로 돌아갔다. 지금껏 안 의원의 양보만 해도 4번이다. 지난 20대 대선서도 “더 이상 양보는 없다”며 강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결국 물러났다. 

안 의원은 내부보다 외부 세력이 더 많아 불리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투표 방식도 다소 안 의원에게 불리한 방식(당원투표 100% 반영)으로 바뀌면서 지지율은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이후 나경원 전 의원과 유승민 전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지지율이 큰 폭으로 널뛰었다. 

나·유 전 의원의 불출마 선언 이후 김기현 의원과 양강구도를 굳히는 분위기다. 꾸준히 당내 표심에 힘들이고, 김 의원의 김연경·남진 SNS 사진 논란 등 여러 상황들이 안 의원에게 플러스가 된 덕분이다.

일부 복수의 여론조사를 통해 지지율이 역전되자 자신감이 상승한 안 의원은 아예 한발 더 나아갔다. 연대보증인보다 한 단계 위인 안윤(안철수-윤석열) 연대를 꺼내 들었고,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 세력을 작심하고 비판했다. 

이번에는
진짜 완주?

친윤(친 윤석열) 세력을 작심하고 공격한 이유는 당내 비윤(비 윤석열) 세력을 끌어모으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석된다. 이 같은 행보는 윤 대통령을 불편하게 만든 모양새로 무엇보다 안윤 연대에 불편한 기류가 강하다. 

정치권에 따르면 해당 표현과 관련해 참모들에게 “국정 최고 책임자이자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특정 후보와 연대한다는 주장은 비상식적이고 도를 넘은 무례의 극치”라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 의원은 잠행 모드에 들어갔다. 인수위 때처럼 일정을 취소해버렸다. 일각에서는 안 의원 중도 사퇴설까지 흘러나왔다. 안 의원으로서는 상당히 고민될 수밖에 없던 지점이다.

정치권 안팎에서 안 의원 사퇴설이 불거지자, 경선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인 김영우 전 의원이 “사퇴는 절대 없다”며 급하게 진화에 나섰다. 현재 소위 가장 잘나가는 후보기 때문이다. 숨 고르기가 안 의원에게 오히려 독이 된 듯 보인다.

이는 친윤계 의원들과 김 의원이 안 의원의 과거 이력으로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튿 날 고민을 끝낸 안 의원은 “안윤 연대 표현을 삼가겠다며 자중하겠다”며 한발 물러나는 액션을 취했다. 본인 역시 지지율 1, 2위를 오가는 시점에서 장고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다고 해석된다. 


여러 곳에서 제기된 사퇴 의혹에 대해서도 직접 “아니다”라며 완주 의사를 내비쳤다. 실제 안 의원은 사퇴할 수가 없다. 이번마저 레이스를 마치지 못하면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의 경고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회를 방문한 이진복 정무수석은 안 의원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력 경고했다. 

안 의원은 과거와 달리 본인 의지가 상당하다. 완주 의사를 내비친 만큼 정치권도 그의 완주 여부를 주목하고 있다. 사실상 당 대표가 되기에는 지금이 적기다. 선거 레이스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몇몇 여론조사에서는 그가 당권주자 후보 중 지지율 1위라는 결과가 나온다. 

어느 쪽에?
둘 다 불가

또 현재까지는 대통령실의 압박을 견딜 정도인 듯 보인다. 안 의원을 향한 압박은 지지율에 달렸다. 지지율이 계속 오르면 대통령실과 친윤계 의원들은 더욱 압박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지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면 굳이 견제할 이유가 없다. 존재감을 키워줄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다소 불안한 상황이다. 직전까지는 1위를 굳히는 듯 보였지만, 나 전 의원과 김 의원이 연대가 불안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오히려 두 인물의 연대 변수가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나 전 의원을 지지했다가 안 의원을 지지하는 당원들과 국민의힘 지지층은 반감이 있다”며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당무에 개입하고 경쟁 후보에 대해 억압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폭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맞는지 당원들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나김(나경원-김기현) 연대가 이뤄졌더라도, 나 전 의원을 지지한 뒤, 유 전 의원을 지지했던 당원 표심이 안 의원에게 흡수됐다는 것. 

나 전 의원이 불출마를 거론한 이상 이 같은 변수는 이미 빠져 버린다. 안 의원 입장에서는 나 전 의원의 손을 잡지 못한 게 뼈아픈 점이다. 나 전 의원 역시 불출마 전까지 당권후보들 중 지지율이 가장 높았다. 안 의원이 나 전 의원과 연대했다면, 친윤 세력의 표심까지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김 의원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기록하긴 했지만, 확실히 1위를 굳히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지난 50일 동안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 윤핵관은 김 의원을 당 대표로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무리수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도 점지한 인물이라기에는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표심 끌어 모으기 불리해진 형국
‘친윤이냐 비윤이냐’ 중대 기로에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결국 김 의원을 향한 국민의힘 지지층의 반감을 어떻게 희석할 수 있을지가 숙제라는 것이다.

문제는 안 의원이 윤핵관 세력을 지지하는 당원들의 표심을 얻기가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안윤 연대라는 표현으로 공분을 산 뒤, 공식적인 윤심 주자는 김 의원 한 명이다. 

비윤 세력 역시 떠안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한발 물러선 게 오히려 비윤 표심을 가르는 데 영향을 끼친 모양새다. 천하람 순천갑 당협위원장의 등장으로 비윤 세력은 이준석계와 안 의원을 두고 고심 중이었던 표심이 천 위원장 쪽으로 쏠렸다. 

결국 안 의원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스탠스는 반윤 이미지를 갖지 말아야 할 것으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이나 윤핵관이라는 워딩 자체가 차후 친윤 세력에 반감을 표출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안 의원은 반드시 결선투표 진출에 성공해야 한다. 그가 중도 사퇴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결선투표까지만 올라간다면, 다소 지지율이 적게 나오는 비윤 세력의 표심을 흡수할 수 있어서다. 

그 입장에선 상황이 다소 불리해졌지만 앞으로 당 정상화 문제 정도를 언급해 세를 불려 나가야 한다. 자칫 공천 문제를 꺼냈다가는 또다시 역풍이 불 수도 있다. 

차기 총선과 관련해서는 안 의원이 당 대표에 당선될 경우, 분당 및 친윤계 의원들의 탈당 이야기까지 흘러 나온다. 윤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신평 변호사 역시 자신의 SNS에 “안 의원이 대표가 된다면 경우에 따라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을 탈당한다”며 “정계 개편을 통한 신당 창당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같은 주장은 대놓고 안 의원의 대표 당선에 반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까지 등판해 해명에 진땀을 빼야 했다. 

나경원처럼
강한 압박?

김 위원장은 과거 당을 창당했던 이력이 화려하다. 열린우리당, 새정치민주연합, 국민의당 등 여의도 정계 개편 전문가로 통한다. 안 의원이 원래 국민의힘 출신이 아닌 만큼, 당내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일만한 사안이다.

이와 관련해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지지율이 오를수록 대통령실의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며 “만약 안 의원이 대표가 된 뒤 공천을 건들게 된다면, 경고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대통령실 경고에… 말도 뒤집은 안철수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을 향한 대통령실의 경고가 제대로 먹혀든 모양새다.

지난 8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안 의원이 “옳지 않다”고 말해서다.

이어 “앞으로는 이 장관 사퇴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앞서 안 의원은 이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해온 바 있다.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철회한 시점은 대통령실의 연이은 경고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와 관련해 안 의원은 “일을 마무리하고 책임졌어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정치권에서는 앞으로 안 의원이 대통령실과 어긋나는 메시지를 내는 경우에는 수습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차>

 



배너

관련기사

17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