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은 김만배 입 열려는 이유

침대서 계산기 두드리는 키맨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대장동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 김만배씨가 눈을 떴다. 김씨는 지난달 14일, 경기도 수원시 율전동 인근 도로서 본인의 차량을 주차한 뒤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그의 변호인이 이를 발견해 수원 아주대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그가 수차례 걸쳐 흉기로 목과 가슴 등에 스스로 상처를 입힌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의 의미심장한 문자메시지를 발견한 변호인이 빨리 119에 신고한 덕분에 김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의료진이 적절한 조치를 취한 덕분에 김씨는 당일 제 발로 걸어나올 정도로 건강이 호전됐으나, 몇 일 뒤 폐에 통증이 있다며 경기도 모처 병원에 재입원했다. 약 2주간 입원치료를 받던 김씨는 지난달 31일, 옮길 병원을 찾지 못해 현재는 자택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극단적
몇 번째?

병원 측은 김씨의 상처가 알려진 것보다 크지 않으며 전치 4주의 진단서를 끊어줬다고 밝혔다. 김씨는 4주간 치료를 충분히 받은 뒤 이번 달 중순쯤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몇몇 소식통에 따르면, 안정을 되찾은 김씨는 현재 침대에 누워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그가 두드리고 있는 계산기는 ‘입을 열 경우’와 ‘열지 않을 경우’를 계산하는 복잡한 계산기다.

정계 전문가들은 그가 입을 열 경우 이 대표의 정치생명이 끝날 것이라 보고 있고, 열지 않을 경우엔 윤석열정부의 검찰을 비롯한 여권 전체가 곤경에 처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는 대장동 특혜 의혹이 처음 불거졌을 때부터 꾸준히 언급됐던 ‘주범’ 중 한 사람이다. 천화동인 1호의 실소유주가 본인이라고 말한 최초의 사람이며, 검찰이 유력하게 보고 있는 대장동 일당의 우두머리격 범죄 혐의자기도 하다. 

1992년부터 기자 생활을 이어온 김씨는 약 30년간의 기자 경험을 토대로 정계와 법조계 인맥을 두루 형성해왔다. 검찰은 이때 쌓은 인맥을 통해 대장동 개발사업에서 각종 민원과 허가를 해결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또 검찰은 대장동 일당과 정치인, 법조계 인사들을 대장동 개발사업에 끌어들인 인물도 김씨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김씨는 2014년 한 경제지 법조팀에서 근무하던 중 당시 성남시장 재선에 성공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를 처음 만났다. 김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표를 “인터뷰 외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라고 둘러댔지만, 여러 정황들은 그와 이 대표 간의 연결고리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순일 전 대법관과의 연결고리가 그중 하나다. 권 전 대법관은 2020년 7월, 이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재판에 참여했던 인물로 김씨와 선후배 사이다. 그는 이 대표의 재판 이후 두 달 뒤인 9월 퇴임 후 월 1000만원 이상의 고소득을 받는 화천대유의 고문으로 재직했다.

공교롭게도 김씨 회사인 화천대유에서 일한 점, 퇴임 직전 성남시장이었던 이 대표의 재판에 참여했던 점은 많은 이들의 의심을 샀고, 정계에서는 곧 권 전 대법관이 이 대표의 재판에 공정하게 참여했는지를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국민의힘 이양수 선대본부 수석대변인은 지난 3월 논평에서 “한 언론의 단독 보도를 통해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가 대장동 설계자 이재명 후보를 살려내기 위해 권 전 대법관을 포섭한 상황들이 새롭게 드러났다”며 “검찰에 제출된 녹취록에서 김만배가 2020년 3월 동업자 정영학 회계사에게 ‘내가 대법관한테 물어보니 이것도 금액에 상한선이 없는 거고’라고 이야기했다.


남욱 변호사 역시 지난해 10월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며 “‘2019년부터 권 전 대법관에게 50억원을 줘야 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고 주장했다.

대장동 퍼즐 핵심 스모킹건의 고민
이 도우미? 저격수? 얼마 안 남았다

당시 국민의힘 측의 문제 제기처럼, 권 전 대법관은 이 대표의 재판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대표는 2012년 분당구보건소장 등에게 친형의 강제입원 절차를 밟도록 지시해 ‘직권남용 혐의’를 받은 바 있다.

문제는 2018년 지방선거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방송 토론회에서 상대 후보가 이 대표에게 “형님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셨냐. 보건소장 통해서 입원시키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 없습니다. 저보고 ‘정신병원에 형님을 입원시키려 했다’ 이런 주장을 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답변해 논란이 일었다.

상대 후보 캠프와 보수진영은 당시 이 대표의 답변이 ‘거짓말’이라고 판단했고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 등으로 선거 직전인 2018년 6월 10일, 법원에 이 대표를 고발했다. 검찰은 같은 해 12월, 친형의 강제입원 등 3개의 사건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 등의 혐의로 이 대표를 재판에 넘겼다.

이 대표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그는 친형의 입원은 강제가 아닌 정신질환자에 대한 적법한 입원이었으며 공무집행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이 대표가 강제로 입원을 종용했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권자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선거인의 정확한 판단을 그르칠 정도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이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안심하고 있던 이 대표에게 긴장감을 던져준 건 2심 재판부였다.

2심 재판부는 1심 결과를 뒤집으며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을 맡은 수원고등법원 형사 2부(임상기 부장판사)가 원심의 무죄를 파기하고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것이다.

다시
구세주?

2심 재판부는 이 대표가 지방선거 과정에서 2002년 검사를 사칭한 전력이 있는데도 방송에 나와 이를 부인한 점, 친형을 입원시키기 위해 보건소장 등에게 강압적으로 지시한 점, 또 방송에서 해당 내용에 대해 부인한 점을 모두 문제 삼으며 유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정신보건법에 따른 절차 진행을 지시하고 이에 따라 형에 대한 입원 절차 일부가 진행되기도 한 사실을 일반 선거인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이를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유죄 판결을내렸다. 유죄 선고를 받아든 이 대표는 한동안 자리를 지키며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이때 상당수 정계 전문가들은 이 대표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3심에서 2심 재판부의 결과를 뒤집는 경우가 드물기도 한 데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뒤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도 외면받던 이 대표가 정치적으로 재기하기엔 무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선출직 공무원은 재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으면 5~10년간 피선거권까지 박탈되기 때문에,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많은 정치인들은 그대로 정치 은퇴 수순을 밟는 경우가 많았다.

궁지에 몰린 이 대표를 구해준 것이 3심 재판부였고, 그중 한 명이 권 전 대법관이었다. 대법원은 이 대표에 대한 판결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결론지었다. 

전원합의체 하에서는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고 대법관 총 인원의 3분의 2가 재판에 참여한다. 총 12명이 참여한 이 대표의 재판에서는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7대5로 이 대표의 승리였다.

법조계에 따르면 당시 선임 대법관이었던 권 전 대법관이 사실상 캐스팅 보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법조계 인사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전해 듣기론 당시 5대5로 팽팽히 갈린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권 전 대법관이 이 대표 측의 손을 들어줬고, 대법원장이 관례에 따라 같은 표를 던진 것으로 안다”며 “따라서 사실상 권 전 대법관이 판결의 ‘키맨’이었던 셈”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후에 권 전 대법관이 화천대유서 일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많은 이들은 권 전 대법관의 ‘이재명 판결’에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국민의힘 측과 정치평론가들은 김씨와 이 대표, 그리고 권 전 대법관 간 연결고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재명냐
돈이냐

현재 이 대표가 처한 위기 상황은 2심 선고 직후의 상황과 거의 흡사하다. 이 대표의 측근인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과 정진상 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은 대장동 일당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현재 구속 기소된 상태며 남욱 변호사와 유동규 전 성남개발도시공사 기획본부장은 연일 이 대표에 대한 폭로를 이어나가고 있다.

유 전 본부장은 출소 후 매일같이 폭로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이재명은 다 알고 있었다. 모를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이재명과 정진상이 핵심으로 태양과 수성 정도라면 나와 김용은 목성 정도”라고 폭로했다. 그는 이 대표가 선거자금 흐름, 즉 뇌물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한 정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 대표에 대한 뇌물죄를 주장하고 있다.

유 전 본부장은 2014년 이 대표가 성남시장 재선을 앞두고 김 전 부원장에게 1억원을 줬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2013년과 2014년, 정 전 실장에게는 명절 떡값 명목으로 3000만원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정 전 실장은 유 전 본부장으로부터 총 2억4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남 변호사의 주장 역시 윤 전 본부장의 폭로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대장동 사업)당시 성남시장이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의사에 따라 모든 것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최종 권한은 시장에게 있는 것이다. 유동규가 약속해서 나는 믿었지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어느 순간부터는 유동규 위에 있는 분들에 의해 사업이 진행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즉, 대장동 개발에 관한 모든 결정권은 이 대표에게 있었으며 유 전 본부장을 비롯한 나머지 실무진은 이 대표의 뜻을 전하는 매개체 정도라는 것이 남 변호사의 주장이다. 그는 “당시엔 나도 책임이 몰리는 걸 방어하려고 좀 과장되게 진술했다. 법정서 솔직히 말하겠다”며 법정 싸움을 예고했다.

그러나 <일요시사>와 만난 법조계 전문가는 이들의 주장이 힘을 받으려면 김씨의 주장까지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문가는 “폭로의 토대는 모두 김씨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들로, 두 사람 모두 김씨로부터 들은 사실을 기반으로 폭로를 이어가는 점도 눈에 띈다”며 “김씨에게 전해들은 사실을 기반으로 폭로하고 있는데, 이는 김씨가 부정해버리면 그만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유 전 본부장과 남 변호사의 증언들은 모두 ‘직접’ 확인하지 않은 사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연결고리’ 역할을 자처했던 김씨로부터 대부분의 사실을 ‘전해 듣고’ 행동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계좌추적팀 신설 압박 수위 높여
수상한 자금 흐름 자료 넘겨받아

또 모든 혐의자가 만장일치로 사건의 정황을 설명하는 것과 이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재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상반된 주장을 하는 증인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경우, 재판부가 무죄 추정 원칙을 따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 법조계 인사의 설명이다.

만일 세 명의 입이 모두 맞춰진다면 증거 수준의 중요한 단서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이 대표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법조계 출신의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김씨가 돈을 지키기 위해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이 인사는 “만일 부패방지법에 걸리게 되면 김씨가 대장동으로부터 벌어들인 모든 돈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며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 물론 부당하게 얻은 돈을 국가가 강제로 회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김씨가 부패방지법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동안 이 대표를 감싸왔고, 법원으로부터 법적 처벌은 받을지언정 돈은 내놓겠지 않겠다는 주의로 수사에 임해왔다는 것이다.

부패방지법에 따르면 공직자가 업무 처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이용해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취득하게 한 때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범죄로 얻은 수익은 몰수·추징한다. 

만일 김씨가 남 변호사, 유 전 본부장과 합세해 이 대표의 혐의를 증언한다면 그 자체로 부패방지법에 걸리게 돼있어 ‘범죄로 얻은 수익’ 모두를 국가에 헌납해야 한다. 검찰은 화천대유 대주주 김씨의 구속영장에 750억원의 뇌물공여 혐의를 적시했다. 

검찰은 김씨가 유 전 본부장에게 2015년 개발이익의 25%(약 700억원)를 주기로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가 유 전 본부장에게 실제로 전달한 5억원과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 아들에게 전달한 50억원에 더해 약속한 700억원을 공소장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들은 또 해당 자금을 추적하기 위해 별도의 ‘계좌추적팀’을 신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은 반부패수사1부를 주축으로 기업들의 금융범죄를 담당했던 계좌추적팀을 만들어 대장동 개발로 얻은 불법자금을 추적하고 있다.

이 계좌추적팀은 현재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부터 ‘수상한 자금 흐름’ 자료를 모두 넘겨받아 조사 중이다. 김씨의 마지막 보루가 ‘돈’이라는 것을 간파한 검찰은 범죄혐의를 입증해 그의 모든 돈을 환수할 의지를 내비쳤다.

물론 김씨가 두드리고 있는 계산기에는 이 부분도 포함돼있다. 정치권은 최근 김씨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라 보고, 김씨의 입이 열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한다. 

민주당 조응천 의원은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서 “어쨌든 검찰은 이 대표가 이 모든 걸 알았고, 그 이익을 이용했고, 이런 직접 관련성을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싶어 한다”며 “그분이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진술 거부, 묵비권 행사하면서 진술로는 막힌 상태”라고 현재 수사 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조 의원은 “(검찰이)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서는 것은 다 털어버리겠다, 당신 사법 절차가 다 끝나면 ‘알거지’를 만들어주겠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단은 
묵비권

유 전 본부장과 남 변호사처럼 어차피 돈을 못 지킬 바에야 형량이라도 줄이려 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김씨의 입에 여러 사람의 정치적 명운이 달려 있다. 검찰은 그의 입을 열기 위해 오늘도 김씨의 ’돈‘을 추적 중이다.
 

<ingyu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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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생전 걸음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경찰서를 드나들었고 송사를 치르느라 법정을 오갔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법원에서 날아온 문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 어떤 실수는 손쓸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당시에는 실수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갔다가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습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계약이 이뤄진 상태라면 더더욱 원상복구가 쉽지 않다. 김모씨가 처한 상황이 딱 그렇다. 놀라서 해줬다가 사건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7월 김씨는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에 거주할 목적으로 전세 계약을 맺었다. 계약 기간은 2017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 2년, 보증금은 2억200만원으로 했다. 해당 빌라의 등기부등본을 보면 김씨가 전세 계약을 맺은 후 임대인이 바뀌었다. 문제는 새로운 임대인이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씨는 전세 계약 기간 만료 후인 2019년 9월 해당 빌라에 임차권등기를 마쳤다. 임차권등기명령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임차주택에 대한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하면서 이사할 수 있는 제도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임차주택에 거주할 때는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로도 대항력이 발생한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 퇴거하게 되면 이사하는 곳으로 주소를 옮겨야 하니 임차권등기명령을 통해 대항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차권등기명령은 등기부등본에 기재되는 만큼, 강한 대항력을 가진다”고 부연했다. 다시 말해 등기부등본에 임차권등기명령이 기재돼있다는 것은 세입자는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지만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임을 의미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김씨가 주택도시보증공사(이하 HUG)에서 운영하는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에 가입해 뒀다는 사실이다.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은 전세 계약이 종료됐을 때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전세보증금을 HUG가 대신 돌려준다는 내용이 골자다. HUG가 임차인에게 먼저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뒤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해 청구하는 방식이다. 김씨는 2019년 10월 HUG로부터 전세보증금 전액인 2억200만원을 받았다. 전세 살다 보증금 못 받아 전세보증금 보험으로 구제 이후 김씨는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했고 해당 빌라와 관련한 일은 새카맣게 잊고 지냈다. 그는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에서 “HUG에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았으니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 2019년 이후 5년여 동안 해당 빌라와 관련해 김씨에게까지 영향이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해당 빌라의 주인이 바뀌는 등 소유권 변동이 일어났지만 김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그러다 지난해 11월 김씨에게 임차권등기명령 취소 신청서가 날아들었다. 김씨는 “법원에서 문서가 송달돼 크게 당황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문서에 기재된 번호로 연락했더니 7년 전 전세로 살았던 빌라의 집주인이라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집주인이 임차권등기를 말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며 “갑자기 법원에서 종이가 날아오고 소송을 제기한다는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씨는 임차권등기 말소를 위한 서류를 직접 떼 서울 서초동의 한 법무사 사무실에 가져다줬다고 했다. 그 결과 지난해 11월20일 김씨가 해당 빌라에 걸어놨던 임차권등기가 말소됐다. 해당 빌라에 김씨가 행사할 수 있던 권한이 소멸한 것이다. 동시에 집주인으로서는 등기부등본이 깨끗해지는 효과를 얻게 됐다. 이렇게 되면 세입자를 구하는 일도 수월해진다. 줄줄이 꼬였다 이때 김씨가 간과한 사실은 HUG의 존재였다. 김씨가 해당 빌라의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고 임차권등기를 말소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한 세입자가 돈을 받은 뒤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주는 게 실제 일반적인 절차다. 이 과정에서도 공인중개사 등 부동산 전문가는 보증금을 돌려받기 전까지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김씨는 전세보증금을 HUG에서 받았다. HUG 입장에서는 해당 빌라의 집주인에게 2억200만원 즉, 돌려받아야 할 돈이 있는 상황에서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으로 말소해버린 것이다. 동시에 김씨가 배당 순위에서 밀리게 되면서 HUG는 대위변제한 보증금을 회수할 방법이 요원해졌다. 여기에 은행, 지자체 등 후순위 채권자들도 있는 상황이다. 김씨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HUG 경기관리센터(이하 HUG 경기센터)는 “모든 임차인은 HUG에 대위변제를 받으면서 대위변제증서를 작성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씨가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을 당시 작성한 대위변제증서에는 ‘본인(김씨)은 HUG가 대위변제금 및 제반 비용을 회수할 때까지 HUG의 동의 없이 주택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겠으며 본인의 주택임차권등기 말소로 인해 HUG에 손해가 발생할 경우 배상할 것을 확약한다’는 문구가 기재돼있다. HUG 경기센터는 “HUG는 대위변제 물건을 경매에 넘겨서 배당을 회수하는데 임차권등기명령을 무단 말소하면 경매에서 배제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HUG에 연락했으면 대신 응소해 임차권등기를 지켰을 텐데 당시 김씨가 연로해 이런 생각을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낙장불입 그러나… 김씨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집주인이) 내가 전세보증금을 반환받았기 때문에 임차권등기를 말소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본인(집주인)이 손해를 보고 있다. 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으면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나를 속였다”며 “내 입장에서는 전세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집주인 말에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김씨가 집주인과 해당 빌라의 채권자들에게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피고(집주인)가 원고(김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의적인 기망행위를 했다거나 그로 인해 김씨가 신청 취하 행위 자체에 착오에 빠져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김씨의 “속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현재 김씨의 상황은 여의치 않다. HUG 경기센터는 대위변제한 보증금 회수를 위해 일단 김씨의 부동산 등에 가압류를 걸어둔 상태다. 그러면서도 김씨의 상황을 참작하고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임차권등기 무단 말소 무효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HUG 측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한번도 진행한 적 없는 소송이라고 한다. “억울하다” 법원 인정 안 해 HUG, 구제 위해 소송 제기 HUG 경기센터는 “그동안 임차권등기가 말소되면 복구할 가능성이 없는 것(낙장불입)으로 보고 임차인 손해배상 청구로 업무를 진행해 왔는데, ‘임차권등기 말소 무효 소송을 통해 원상복구 가능성이 있다’는 법률 자문이 있어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소송이 HUG의 승소로 종결돼 임차권등기가 부활하면 김씨에 대한 구제가 가능하다. 이때 김씨는 소송 실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HUG 경기센터가 제기한 소송은 김씨에게 해당 빌라에 걸려 있던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이 없다는 취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HUG가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만큼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도 HUG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김씨의 임차권등기 말소 행위는 무효라는 게 골자다. HUG 경기센터는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 말소하면서 채권 선순위로 올라온 은행, 세무서, 지자체 등이 김씨의 억울함을 헤아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응소하지 않길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은 김씨가 별도로 제기했던 소송에 모두 대응한 전력이 있어 HUG가 제기한 소송에도 응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HUG가 김씨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대신 구제를 위해 소송을 진행하는 것처럼 이들 후순위 채권자들도 집주인의 허위 소송에 안타깝게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한 김씨를 구제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고 전해왔다. 실제 김씨가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은행 한 곳은 대응하지 않았다. 순간 실수 인정될까? 김씨는 집주인과 채권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의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HUG와도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법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일이 벌어지고 HUG로부터 연락을 받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며 “재산은 (가압류로) 묶였고 소송비용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