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뚝심의 리더십 파울루 벤투 감독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21일(한국시각), 지구촌 대축제 2022 카타르월드컵이 개막됐다. 손흥민과 황희찬, 김민재 등 역대급 커리어를 쌓고 있는 선수들이 즐비하지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같은 조인 H조에 우루과이와 포르투갈, 가나 등 상대적으로 우세한 강팀이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한국을 H조 최약체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선수들의 컨디션과 공격진의 실전 감각에 우려가 나오고 있다.

“팬들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지난 13일 오후 10시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 전 파울루 벤투 감독이 밝힌 말이다. 16강 진출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만큼 최소한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라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발언으로 풀이된다. 

선수 시절
특출난 수비

벤투 감독은 창보단 방패 스타일이다. 다이내믹하지 않은 플레이를 선호해 일부 선수와 마찰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을 정도다. 이로 인해 장기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벤투 감독이 월드컵 일정을 소화하며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포르투갈 리스본 출신의 벤투 감독은 선수 시절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하부리그 팀인 CF 벤피카에서 성인무대에 데뷔한 벤투 감독은 이 팀에서 보인 활약을 통해 아마도라로 이적해 서서히 출전 시간을 확보했다.

이 시기에 국내 컵 대회 우승에 기여하는 등 커리어도 향상됐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뛴 비토리아 SC에서 본격적인 선수 인생의 꽃을 피웠다. 비토리아에서 보낸 세 시즌 동안 벤투는 리그 95경기에 출전해 13골을 기록하는 등 우수한 기량을 보여줬고, 대표팀에도 처음으로 발탁됐다.


1996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벤투 감독은 SL 벤피카로 이적했다. 비토리아 시절만큼 부동의 주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시즌 당 30~40경기를 뛸 정도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고, 두 시즌 간 리그 49경기에 나와 2골을 기록했다.

두 시즌을 보낸 후 벤투 감독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오비에도로 이적했다. 벤투 감독은 네 시즌 동안 오비에도의 핵심 미드필더로 기용됐다. 매 시즌 30경기 이상을 리그에서 소화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총 리그 136경기 4골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이 시기에 우루과이 출신의 명장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 밑에서 뛰기도 했다.

어느덧 선수생활의 말년으로 접어든 벤투 감독은 2000년 고향팀인 리스본의 스포르팅 CP로 이적했다. 스포르팅에 합류한 이후에도 그는 기량을 한동안 유지했다. 이전까지는 국내 컵 대회에서의 두 차례 우승을 제외하면 우승과 인연이 적었던 벤투 감독이었지만, 스포르팅에서는 2001-2002시즌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과 컵 대회 우승의 더블을 이룩하는 데 핵심 선수로 활약하면서 마침내 리그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또 이때는 아직 어린 유망주였으나 훗날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뛰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노쇠화의 길은 피할 수 없었고, 2003-2004시즌 출전 기회가 확연히 줄어들자 시즌이 종료된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에는 1992년 1월15일,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A 매치에 데뷔해 총 35경기에 출전했다. 루이스 피구, 파울루 소자, 후이 코스타, 주앙 핀투 등과 같은 포르투갈 골든 제네레이션의 일원이긴 하지만, 피구 및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선수생활 초기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골든 제네레이션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메이저대회가 1989, 1991 피파 유스 챔피언십이었는데 당시 벤투 감독은 선발되지 못했다. 포르투갈 골든 제네레이션이 처음 성인팀으로 등장한 유로 1996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벤투 감독은 20대 후반에야 실력이 만개한 대기만성형이었다.

창 아닌 방패 플레이 추구
강팀 공격 무력화 가능할까


하지만 포르투갈 황금세대의 정점이었던 유로 2000에 당당히 국대로 선발됐다.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은 죽음의 조인 A조(독일, 루마니아, 잉글랜드) 3번 포트로 속해 있었지만, 강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조 1위로 올라가서 8강에서 터키까지 꺾고 4강에 올라갔다. 이 당시 유로에 거의 무관심했던 한국에서도 새벽에 중계되는 포르투갈 경기를 챙겨본 축구팬이 많았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벤투 감독은 매 경기 주전으로 풀타임 출장했다. 포르투갈은 4강에서 당시 최정점의 전력을 가졌던 프랑스와 만났다. 1-1의 팽팽한 승부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지네딘 지단의 페널티킥 골든골을 허용하면서 아쉽게 탈락했다.

포르투갈의 붙박이 주전이었기 때문에, 33세의 노장이었음에도 2002 한일월드컵에도 출전했다. 인천에서 열린 32강 본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한국전에서 후반 이영표가 골 에어리어로 넘겨주는 크로스를 막지 못하고 보고만 있다가 박지성이 받아 골로 연결해 포르투갈이 1-0으로 패하며 조 3위로 월드컵 16강에 실패한 바 있다.(21위)

벤투 감독은 안정적인 후방 빌드업과 수비 전환에서는 조직적인 전술 플레이를 강조하되, 후방 빌드업이 끝난 후에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선수의 개인기를 바탕으로 자율적인 플레이를 바라며 강조하는 매니저 육성형 감독에 가깝다.

선수들에게 전술적 움직임을 세세히 요구하기보다 선수들의 개인적인 실력과 움직이는 플레이에 직접 디테일하게 코칭하려고 하는 유형이며 전술이나 용병술은 보수적이다 보니 경기 흐름을 바꾸는 빈도가 적은 편이다.

확고한 점유율 획득을 기본으로 하되 점유율 자체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빠른 템포의 전진패스를 통한 속도감 있는 공격 전개를 주 전술로 사용하고 있다. 즉, 빌드업을 중심으로 시원한 공격을 하는 토털 풋볼을 추구한다.

공격 시에는 4-2-3-1이나 4-4-2, 혹은 4-1-3-2가 그의 주요 트레이드 마크며, 양쪽 풀백과 중앙 미드필더 라인이 공격 진영으로 높게 올라오면서 수적 우위를 점하고, 동시에 상대 수비수를 유인해 상대의 수비진을 허물어 버리고, 이 틈을 1선의 스트라이커와 2선의 윙어들이 파고들어 기회를 갖는 전술을 기본으로 한다.

안정·조직적
전술 보인다

그래서 1선 스트라이커도 2선의 선수들과 자유로운 스위칭 플레이가 가능해야 하고 2선이 강한 대표팀 사정상 이 같은 플레이가 가능한 원톱이 각광받는다. 2선이 전 포지션에서 가장 강한 대표팀 특성상 반드시 필요한 플레이이며 공격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전술이라 볼 수 있다.

수비 시에는 4-4-2 전술로 공격수 2명부터 차례로 전방 압박을 시작해 공을 직접 뺏어내거나 롱볼을 유도해 따내는 전략을 사용한다.

전술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후방 빌드업이다. 이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거의 낙점돼있던 조현우를 김승규로 바꾼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후방 빌드업은 보통 김영권-김민재 사이에 황인범이나 정우영이 들어와 쓰리백을 만든 후 보다 넓은 시야 및 킥력과 정확도가 좋은 기성용의 시원한 롱패스를 통해서 공격을 시작한다.


홍철, 김진수, 이용, 김문환 등 공격적인 풀백들과 중앙의 이재성, 남태희 등 활동성 있는 미드필더들이 상대 수비를 휘저으면 황의조, 손흥민, 권창훈, 나상호, 황희찬 등 공격수들이 침투해 경기를 주도해 나간다.

체계적인 압박 시스템을 갖춘 강팀을 상대할 경우 전반적으로 라인을 내리거나 후방에 숫자를 많이 두며 손흥민을 필두로 빠르게 뒷공간을 노리는 등 실리적으로 경기를 운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전술의 틀은 유지된다.

이 같은 전술은 굉장히 빠른 축구를 추구하기 때문에 경기가 잘 풀려 나간다면 굉장히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볼 수 있지만 안 풀린다면 그야말로 답답한 경기가 될 수밖에 없다.

장점은 역습으로 상대방의 허를 찔러 경기를 쉽게 풀어갈 때가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벤투 감독이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데 능한 매니저 유형에 가까운 감독이지, 지략과 전술에 능한 감독은 아니라서 계획적으로 팀을 이끌 경우, 변수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거나 지략가 유형의 상대 감독이 재빠르게 대응해버리면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첫 경기
매우 중요


지난달 가진 최종 예선 이란전 원정에서 손흥민의 골로 1-0 리드를 가져왔으나 이후 상대팀의 전술 변화와 선수단의 체력 고갈로 말리기 시작했고 결국 실점으로 이어져 1-1로 비겼다. 특히 실점의 기점이 된 이재성은 이미 체력 문제로 인해 수차례 실수하는 모습을 보인 상황에서 감독이 미리 교체를 해줬어야 했는데 교체 타이밍을 놓쳤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플랜B 준비 미흡의 연장선이 아니냐는 비판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달 예선에서는 그동안 플랜A를 고집한 벤투 감독의 노력이 빛을 보였다. 선수들의 호흡이 완성에 가까워지면서 아랍에미리트와 이라크를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어떻게 보면 벤투 감독은 국가대표팀을 클럽처럼 운영하는 것인데, 아무리 실험해봤자 결국 월드컵에서 통하려면 완성된 전술과 뛰어난 조직력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플랜B는 버리고 선수들을 최정예 선수들만 뽑아서 조직력을 키우는 쪽으로 간 것이다.

여기서 볼 때 벤투 감독이 최정예에 올인하는 방식은 모 아니면 도의 결과를 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H조 상대국들의 선택은 한국과 정반대다. 가나는 카타르 도하와 환경이 유사한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지난 17일 스위스를 상대로 평가전을 치렀다. 포르투갈은 홈이긴 하지만 가나와 전력·스타일이 유사한 나이지리아와 격돌했다.

일본의 경우 지난 1일 일찌감치 월드컵 최종 엔트리를 짰고, 두바이에 훈련 베이스캠프를 차린다. 이번 대회 다크호스로 꼽히는 캐나다와 두바이에서 평가전을 치르고 카타르로 입성할 계획이다. 대한축구협회도 카타르에 들어가 유럽파들이 모두 합류하면 비공개 평가전을 추진할 것이라는 얘기는 있지만, 아이슬란드전은 출정식을 빌미로 상업적 성격에 너무 치중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선수단 구성을 결정하고, 월드컵 본선에 맞춘 전술을 가다듬어야 하는 벤투 감독으로서는 여러 제한된 조건에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는 시기다.

일단 아이슬란드전에서 몇 가지 테스트는 필수적이다.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조규성의 활용법이 제일 큰 숙제다. 최근 유럽파 황의조의 경기 감각이 좋지 못한 상황이다. 부진이 장기화돼 임대 중인 올림피아코스와의 계약을 조기 해지하고 원 소속팀 노팅엄 포레스트로 간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리스본 출신 월드 클래스 수비형 미드필더
주요 선수 부상·체력 저하·부진 잇단 악재

다음은 수비다. 월드컵 본선에서 벤투호는 아시아 예선과는 다른 방향의 경기 운영이 불가피하다. 주도권을 잡고 공격 중심의 능동적 전개를 하기란 어렵다.

벤투 감독도 지난 6월 브라질과의 경기를 통해 그 부분을 인정했다. 유럽파가 주축인 공격·미드필드와 달리 김민재를 제외하면 나머지 수비라인이 모두 소집되는 만큼 이번 아이슬란드전 준비 과정에서는 수비 훈련에 초점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벤투호의 성공 여부도 크게 엇갈린다. 그만큼 한국은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다는 뜻이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카타르월드컵에서 한국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10회 연속 월드컵에 나서는 태극전사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위라는 최고 성적을 낸 바 있다. 러시아월드컵을 조 3위로 마친 후 벤투 감독을 선임해 4년간 준비해왔다”고 소개한 <인디펜던트>는 손흥민과 김민재의 활약도를 주목했다. 해외서도 현재 대표팀의 확실한 기둥으로 두 선수를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인디펜던트>는 한국의 카타르월드컵 최종 성적을 8강으로 예측했다. “첫 경기가 한국에 승부처다. 우루과이전에서 패배하지 않으면 조 1위도 노려볼 수 있다. 손흥민이 인상적인 활약을 펼칠 것이다. 8강전에선 스페인에 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반대 평가도 있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지 <디애슬레틱>은 한국을 가장 기대되지 않는 팀의 그룹에 뒀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팀들을 네 등급으로 분류한 <디애슬레틱>은 한국을 성공이 기대되지 않는 팀으로 봤다. 폴란드·일본·이란·사우디아라바아·카타르·에콰도르·가나·튀니지 등이 한국과 함께 4등급으로 분류됐다. H조 기준으로는 한국과 가나의 예선 탈락을 전망했다.

물론 변수도 존재한다. 일단 가나의 귀화 프로젝트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가나축구협회는 본선 진출 확정 후 가나 혈통의 이중국적자 이냐키 윌리암스(아틀레틱 빌바오), 티라크 램프티(브라이튼), 모하메드 살리수(사우샘프턴)를 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바이어 레버쿠젠의 미드필더인 캘럼 허드슨-오도이, 수비수인 제레미 프림퐁의 귀화를 마지막까지 노크하는 모습이다. 지난 9월 귀화 선수들이 새롭게 가세했지만 조직력에 녹아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조직력이 정비된다면 가나는 월드컵 예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팀이 돼 H조의 복병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

벤투호는 주요 선수들의 부상도 신경써야 한다. 지난 2일 새벽(한국시각) 열린 챔피언스리그 마르세유 원정에 나선 손흥민이 상대 수비수 샹셀 음베바의 어깨에 안면을 강타당해 전반 29분 만에 의료진의 부축을 받고 교체됐다.

16강 넘어
8강도 가능

부상 직후 손흥민은 안와 골절, 뇌진탕 증상이 의심됐다. 경기 후 역전승을 거두며 동료들과 라커룸에서 환호하는 사진이 나와 큰 부상은 아닐 것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속팀 토트넘은 지난 3일(한국시각) 홈페이지를 통해 손흥민이 안면 골절로 수술을 받게 됐다고 밝혔다. 월드컵 개막을 불과 17일 앞둔 시점에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대형 악재가 터진 셈이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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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