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격차> “단 한 건의 억울한 죽음 없도록...” 한국서 법의학자로 산다는 것

[기사 전문]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당장 떠오르는 게 전라남도 어느 작은 군이에요. 그 집에 아이가 하나 있는데 무슨 잘못을 해서 소년원에 갔다가 이제 출소를 했어요. 그래서 아빠가 아이 밥을 먹인다고 나갔다가 들어와서 잤는데, 엄마가 그날 하필 사망하신 거예요. 경찰은 아마 (사망자가)늘 알코올에 취해 있었고, 그러니까 “술 관련해서 사망한 것 같다”며 부검을 안 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근데 그 서의 수사과장님인지 형사과장님인지 제가 잘 아는 분이셨어요. 굉장히 사건에 대한 의욕과 열의가 있는 분이셔요. 그분이 그 서에 과장으로 계시면서 크게 나무라셨어요, 젊은 형사들을. “사인을 알 수 없을 때는 살인 사건에 준하는 것으로 처리하라고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이런 사건을 부검 안 하려고 하느냐. 당장 부검 지시 올려라”라고 해서 부검 지휘를 올렸고 법원 영장을 받아서 부검을 하는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복강 내 출혈이 치명상에 이를 정도로 다량이 나오고, 출혈의 원인은 장간막 파열이었어요. 술 취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누군가가 발로 배를 밟으면 딱 찢어지는 데가 거기입니다.

이 과장님은 벌써 딱 파악을 하셔요. “두 남자 중의 한 명이 범인일 거다. 남편 아니면 아들.” 그래서 아들을 먼저 불러 보셨대요. 아들을 불러 놓고 따뜻한 차 한잔 주면서 “어머니가 이렇게 안타깝게 돌아가셨는데 사인을 밝혀야 할 것 아니냐. 네가 그랬냐?”고 물으니 그 젊은 애가 “아니어라. 아버지가 그랬어라” 하더래요.

아들을 데리고 밥을 먹여서 집에 왔는데 아기 엄마라는 여자가 술 취해서 자고 있으니까 욕해 대면서 발로 밟아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잠들었으니까 언제 죽었는지 모르고... 점점 죽어가고 있었던 거예요, 아침까지. 아침이 돼서 보니까 사망했던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김장한 회장(대한법의학회): 모든 사람이 죽잖아요. 근데 모든 사람이 죽지만 죽음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아요. 자기가 죽으면 그건 자기 경험이 아닌 거고, 다른 사람이 죽는 거에 대해서 내가 경험한 거는, 내 경험이지만 끝난 사건 아니에요.


진행자: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내 부모님이나 형제가 사망하면 우리는 3일 동안의 장례 절차를 거칩니다. 이후 한 달 내로 사망신고를 마쳐야 하는데요. 이때 필요한 것은 내 가족의 ‘사인’이 기재된 문서입니다.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의 경우 해당 병원에서 사망 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병원이 아닌 곳에서 사망해 의사가 즉시 사인을 밝힐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양경무(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 일단 집에서 돌아가신 분 위주로 설명을 드리면요. 돌아가신 게 발견이 돼요. 그러면 신고하겠죠? 그러면 경찰이 와서 현장 및 시신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이제 ‘현장조사 및 시체 검안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이제 사인이 명확하지 않고 또는 유족이 “합병증 아니냐”라고 하는 부분, 또는 보험과 관련된 부분, 누군가 “가족이 혹시나 위해를 가한 게 아니냐”는 그런 의혹을 제기하잖아요? 그리고 사인이 불명확하잖아요?

그러면 이제 수사 지휘 요구서를 작성합니다. 그럼 검찰에서 그걸 보고 “부검이 필요하겠다”고 하면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고, 판사가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해서 영장을 받으면 그걸 경찰에 다시 전달하고,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을 근거로 해서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검대에 올라오는 시신이 1년에 1만 구쯤 됩니다.

진행자: 우리나라에서는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 시신을 대상으로 부검을 실시합니다. 이때 부검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검찰’입니다. 검찰이 부검 결정을 내리고 재판부가 영장을 발부하면, 그제서야 법의학자가 부검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법의학자들은 이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과연 어떤 문제점이 있는 걸까요?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형사소송법에 의해 ‘변사 또는 변사로 인한 죽음이 의심되는 때에는 지방검찰청의 검사가 검시해야 한다’가 딱 못 박혀 있습니다. 그 규정에 의해서 (검찰이)경찰을 지휘하고 있죠.

그런데 검사라는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수사 내지는 법에 전문가인 것은 분명할 것이나, 사람의 죽음에 관한 전문가라고 말할 수는 없죠.

윤창륙 교수(조선대학교 법치의학과): 주검에 대해서 가장 잘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법의관들이에요. 그럼 법의관이 주체가 돼야 해요. 근데 우리나라는 검사가 주체예요.

박대균 교수(순천향대학교 해부학교실): 그 사건에 대해서 이 시신에 대한 법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것에서 책임은 검사님이 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부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다른 분의 의견을 들었으면 좋겠다.

강현욱 교수(제주대학교 의과대학): 그건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 자체가 사법 해부이기 때문에 그래요. 철저하게 사법 해부 위주이기 때문에 ‘범죄와의 연관성이 없으면 굳이 부검을 안 해도 된다’는 그런 표현이죠.

양경무(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 우리나라는 사람이 사망을 하잖아요? 그러면 한 달 이내에 사망신고를 하는데요. 신고하기 전이면 돌아가신 게 명백한데 아직 살아 계신 분이에요. 행정적으로는요.

그 얘기는 개인정보 보호를 받아요. 그러니까 현장에서, 또는 부검을 할 때 이분의 필요한 질병 정보, 감염에 걸렸던 정보, 뭔가를 받고 싶은데 이게 다 (공유가)안 됩니다. 배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시신만 보고 부검을 하는 사례가 많아요.

박대균 교수(순천향대학교 해부학교실): 그런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고도 부패된 시신의 부검을 맡겨 놓으면... 법의관 선생님들은 이를 거부할 수가 없어요. (사인을)모르겠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거든요. 근데 답은 내줘야 되잖아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부검만 하면 사인을 알 수 있다?’ 아닙니다. ‘부검을 하면 사인을 알 수도 있다’입니다.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일방적으로 의뢰하는 사건에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그런 검시가 아닌, 이 죽음에 어느 수준의 조사가 필요한지, 부검까지 포함하는 조사인지, 외표 검사만으로 종결할 수 있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 우리들을 참여시키라는 거죠. 현장을 볼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고요.

진행자: ‘우리 사회에 부검이 필요하다’고 답한 시민은 51.9%, 그중 절반가량이 ‘범죄나 타살의 경우에 부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현 제도와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만약 범죄 혐의점이 없으면 사건은 ‘단순 병사’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법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묻힌 범죄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양경무(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 어디서 누군가한테 맞았어요. 맞고 걸어와서 출혈이 심해져서 (집에서)돌아가셨어요. 근데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제 “범죄 혐의점이 없다” 이렇게 보는 시각이잖아요.

김장한 회장(대한법의학회): 개인적으로 우리나라가 범죄 검거율이 높잖아요, 중범죄. 그게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봐요. 분모가 작으면, 확실한 것만 사건으로 입건해서 수사하면 검거율이 높죠. 불확실한 건 입건 안 해 버리면, 그거는 검거율에 영향을 안 미치니까. 그러면 아무도 모르죠. 묻혀지는 거지.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요.

그래서 우리가 법의학을 하면서 ‘그런 억울한 죽음을 많이 봤냐’ ‘아마 억울한 죽음이 있지 않겠냐’ 늘 얘기합니다.

양경무(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 병사인 게 확실하다는 건 현장에서 가족, 수사, 의사의 의견으로 정리가 돼요. 병사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내부 사인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그건 부검을 안 하고 넘어가요. 왜? 범죄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니까.

사인의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신이 많다고 봅니다. 거기에 얼마나 범죄가 묻혔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화장하면서 깨끗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부검을 안 하면 단서가 없는 거고, 어떤 의심점이 있어도 다시 그 건을 복귀할 수가 없는 상황이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그 부검이라는 것에 앞서서 전 단계에 사인을 의학적으로 좀 더 규명을 할 수 있는 그런 절차, 이것을 사망 전문가가 좀 더 만들 수 있게끔 도와줘야 돼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법의학자나 법의관이라고 봅니다.

진행자: 이런 시스템을 갖추려면 최소 몇 명의 법의학자가 필요할까요? 그리고 국내에는 몇 명의 법의학자가 존재할까요?

대다수의 시민들은 ‘대한민국에 법의학자가 적어도 100명 이상 있어야 한다’고 답했는데요. 하지만 현재 활동하는 국내 법의학자 수는 불과 60여명. 대한법의학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1.16명의 법의학자가 우리나라 인구 100만명을 책임지고 있는 셈입니다.

통상적으로 법의학자가 되려면 의과대학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을 진학해야 합니다. 이어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한 뒤 ‘병리학 전문의’ 면허도 취득해야 하죠. 즉 일반 의사와 같이 11년 이상이 걸리며, 오히려 추가적인 법의학 교육을 이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법의학자로서의 출발은 쉽지 않습니다. 일반 의사들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대우는 현실의 벽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는데요.

김장한 회장(대한법의학회): 저는 (법의학 전공)하지 말라고 해요. 개인적으로 법의학이나 이런 걸 할 필요가 있나... 왜냐면 본인이 희생하는 거에 대해서 사회가 감사하지 않으면 본인이 구태여 감사하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다른 일 하지.

사회가 너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다고 원망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지 마라. 어차피 감사 안 한다. 네가 좋은 거 해라.

강현욱 교수(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아닌 말로 부검에 대한 그걸 국가가 어떤 지불을 하거나 할 때도 쌍커풀 수술 만큼만 지불한다고 하면 제가 단언컨대 5년 이내에 10배로 증가할 겁니다. 법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법의학 강의를 하고 나면, 지난 이십 몇 년 동안 그랬습니다. 누구나 관심을 가져요. 학생들이 엄청난 수가 관심을 갖고 흥미가 있거든요. 모든 사람들이 결국 나중에 인턴 레지던트 과정에서 다 떨어져나가는 이유가 뭘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나가서 개업하는 친구는 자기보다 훨씬 많이 버는데 그거보다 (급여가)작다고 하면... 뜻이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부인의 반대, 가족의 반대 또는 남편의 반대에 부딪혀서 갈등을 겪어요. 누구한테나 그렇겠죠.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무시하라고 강요해서도 안 되는 거고요. 그건 현실입니다. 법의학을 한 사람들도 생활인이에요.

진행자: 지난 7월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의사 평균 연봉은 2억3000만원. 하지만 국과수에서 근무하는 법의학자의 평균 연봉은 6000~7000만원가량에 그칩니다. 또한 사회적 인식 탓에 신규 유입 인원이 없어, 법의학의 명맥이 끊기는 것에 대한 불안감 또한 주어지는데요.

그럼에도 그들은 ‘현재의 열악한 상황보다 답답한 건 권한의 부족’이라고 강조합니다.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의뢰된 사건에 대해서 ‘사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책임만 주어진 전문가’라고 정의하면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어오는 사건에 대해서만 대답을 해야 하는.

윤창륙 교수(조선대학교 법치의학과): 문제점이라기 보다는 발버둥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몸부림이면서 발버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김장한 회장(대한법의학회): 근데 법의학이 사실은 하도 바닥이라 이전부터 그랬을 거예요.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하는데, 안 올라간 게 한 50년이에요.

우리가 의료계 안에 있잖아요. 이게 상대적으로 각각의 분야와 다 비교를 하게 돼있어요. 절대적 빈곤 상태를 벗어난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에요. 상대적 빈곤이 들어가게 되면 사실 지내기가 더 힘들거든요. 그런 문제들이 있어요.

그 얘기를 좀 사람들이 알고 생각하라고 얘기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그걸(법의학을) 꺼리고 터부시하면 발전이 없어요.

법의학 하면 뭐 하는데? 맨날 죽은 시체 보고.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데... 법의학을 하는 사람이 말까지 못하게, 생각도 못하게 하면 뭐 하러 법의학을 하냐고. 미안한 얘긴데 미용 성형이나 하고 돈이나 벌지. 그거 안 하고 법의학을 하고 사회에 봉사하겠다고 하는데, (사회에서)그 얘기를 꺼리게 되면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도살장에서 식육 가공하는 사람하고 뭐가 다르냐고요.

이게 학문이라고 하잖아요. 학문은 학문적 입장이 있고, 거기에 따른 자기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 그건 학문이 아니에요. 학자가 아니에요. 그건 그냥 기술자에요. 우리끼리 하는 얘긴데, 법의학이 망할 학문은 아니에요. 사실 피해자는 국민이거든요. 그래서 그게 안타까운 거지. 그거는 국가가 망하는 거지, 법의학이 망하는 건 아니잖아요.

진행자: 법의학 제도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처음 시작된 건 2005년. 지금까지 총 7개 법안이 발의됐지만 그중 한 건도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20년이 되도록 개선되지 않는 환경 탓에, 법의학자들의 고충은 커져만 가는데요.

그렇다면 해외의 경우는 어떨까요?

니시오 하지메 교수(일본 효고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일본 법의학자들은 대학에 소속된 교원들이기 때문에 늘 부검만 하는 것은 아니고, 의대생들을 가르치거나 연구를 하는 것도 업무고 그 외에 부가적으로 부검도 하는 형태이지요.

일본에는 약 80개 정도의 의학부가 있는데요. 부검할 수 있는 ‘인정의’가 150명이 있고. 당연히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는 부검을 하는 사례도 많고, 그래서 한 대학에 인정의가 여러 명이 있기는 한데... 저희 같은 지방 의학부에는 인정의가 한 명 정도 있어 그 한 명이 모든 부검을 담당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힘들지 않나 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 흥미가 있거나 관심을 보이는 학생은 많은데, 졸업을 하면 임상 내과나 외과 쪽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법 의학자로 진출하는 학생은 그다지 많지 않은것 같습니다

진행자: 옆 나라 일본의 법의학계 역시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라면 어떨까요?

송혜정 법의관(시카고 쿡카운티 MEO): “내가 필요한 자료다” 그러면 법적인 소환장을 보낼 수 있어요. 어느 병원이든, 어느 의원이든 “이 사람의 의료기록 최근 2년 내 기록을 다 가져와라” 그러면 우리한테 가져와야 돼요. 경찰한테도 “이 사건의 전후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알아야겠는데, 좀 알아와라”고 하면 알아와요. 메디컬 이그재미너한테는 확실히 주어진 권한이에요. 사망진단서에도 권위가 있어요. 우리밖에 쓸 수 없으니까요.

지금 한국 법의학 하시는 선생님들이 가장 바라시는 게 그거거든요. 이거(환자의 정보)는 적어도 한번 우리한테 왔다 가야 되는데... 근데 그걸 검사가 “(부검)해라”하면 해야 되고,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못한다고도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진짜 체크해놔야 되는 그런 죽음들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진행자: 법의학자에게 정당한 권위를 부여하고,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는 미국. 부족한 권한으로 과중한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한국의 상황과는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국내 법의학자들이 여전히 부검실에 들어와 시신을 살피고, 혹여나 있을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 메스를 움직입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 속, 현실의 열악함을 뒤로 하고 진실을 찾는 사람들. 그들이 한국의 법의학자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윤창륙 교수(조선대학교 법치의학과): 법의학 하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예요. 처음에 법의학 하려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뭐랄까... 쉽게 생각하면 직업이기 때문이죠. 사람이 적은데 왜 이 일을 하냐?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더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오히려 역설적인 대답이 되겠죠.

양경무(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 한국의 법의학자로 사는 거는요. 어떻게 보면 조금 긴장의 연속이다. ‘내가 사인을 못 밝히면 어떡하지’라는 그 걱정.

윤창륙 교수(조선대학교 법치의학과): 그런데 법의학에 종사하다 보니까. 시신을 부검하고 사건사고를 접하게 되거든요. 그걸 보니까 이 사건이 왜 이렇게 난 건지, 사람들의 억울함이 이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사명감이 생기는 거예요.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그리고 자꾸 하다 보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아름다운 일이다’. 살아있는 내가 이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많은 아름다운 역할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일’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강현욱 교수(제주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이 가진 매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건 하나하나를 보자면 결국 이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가 왜 죽었는가 훑어가는 조사해가는 그 과정이에요. 너무 흥미진진해요. 그 과정 자체가.

박대균 교수(순천향대학교 해부학교실): 법의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물론 돌아가신 분의 인권을 지키고 돌아가신 분에 사망원인을 밝히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살아있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의 삶에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한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양경무(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 시신들이 저한테 특별한 모습을 다 제공한 거잖아요. 그래서 그거에 대한 부분을 제가 알고 있고 그거에 대해 제 스스로의 경험이 늘었다는 부분을, ‘제가 실력이 높아서 했다’고 생각되는 게 아니라 ‘그 시신들이 저한테 제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잘 이렇게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데... 그렇게 법의관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그러니까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어제와 오늘, 이달과 다음 달이 다르지 않게 똑같은 마음으로 시체를 대하고, 거기에서 뭔가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고, 그 진실에 근거해서 그 다음 후속 조치가 뭐가 필요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제 일이라고 믿고 있고 정년때까지 해야죠.
 

취재팀: 김태일/장지선
사진팀: 고성준/박성원
영상팀: 배승환/김희구/강운지/김미나
프로젝트: 죽음의 격차(죽어서도 차별받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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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