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일요시사 대기획>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④최초 확인한 이주노동자 부검률

‘내국인 5배’ 돈벌러 와서 조용히 저 세상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일할 때는 ‘우리 직원’이지만 사고가 나면 ‘남의 나라 사람’이 된다. 없으면 현장이 마비될 정도로 의존도가 높지만 막상 드러날라 치면 내쫓아 버리기 일쑤다. ‘코리안 드림’을 꿈꿨던 이주노동자는 먼 타국 땅에서 소리도 없이 스러져 차가운 부검대 위에 오른다. 

2020년 12월20일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 기숙사에서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속헹씨가 머물던 비닐하우스 숙소는 난방이 가동되지 않아 영하 16도의 강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인 김달성 목사는 당시 속헹씨의 사인을 ‘동사(저체온증)’로 추정했다. 

타국서
쓸쓸하게

속헹씨는 2016년 4월 비전문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입국해 포천의 채소농장에서 4년 넘게 일했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비전문취업 비자를 받은 이주노동자는 최장 4년10개월까지 일할 수 있다. 속헹씨는 지난해 1월 프놈펜(캄보디아의 도시)으로 출국하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 대신 부검대에 올랐다. 

변사사건이 일어났을 때 검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은 검사에 있다(형사소송법 제222조). 이때 검시(檢視)는 변사자 또는 변사의 의심이 있는 사체를 포함한 현장 상황 등 모든 것에 관해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법률적인 관점에서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한 수사기관의 행위다. 

의학적 관점에서의 검시(檢屍)는 검안과 부검으로 나뉜다. 검안은 사체를 손상하지 않고 외표를 살피는 행위고 부검은 사체를 해부하는 행위다. 검안으로 정확한 사인 규명이 이뤄지지 않을 때 부검을 진행한다. 부검은 그 목적에 따라 사법부검·행정부검·병리부검 등으로 나뉘는데 한국은 사체와 범죄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사법부검이 대부분이다.


형사소송법 제139조(검증)는 ‘법원은 사실을 발견함에 필요한 때는 검증을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동법 제140조(검증과 필요한 처분)는 ‘검증을 위해 신체의 검사, 사체의 해부, 분묘의 발굴, 물건의 파괴, 기타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고 돼있다.

‘평온하지 못한 죽음’ 많아
사망 관련 자료 거의 없어

동법 제173조(감정에 필요한 처분)도 ‘감정에 관해 필요한 때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사체의 해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부검의 법률적 근거를 살펴보면 ‘검증’ ‘감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검증은 법률적 정의로 ‘법관이나 수사관이 자기의 감각으로 어떤 대상의 성질이나 상태 따위를 인식해 증거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은 ‘재판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가 의견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부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범죄에 연루돼 순탄치 못한 죽음을 맞았다는 의미와 일정 정도 닿아있다. 니시오 하지메 일본 효고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는 저서 <죽음의 격차>에 “내가 매일 대면하는 사람은 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이른바)‘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저술했다.

한국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변사자 수는 3만명 전후로 추산된다. 2020년 사망자 수가 처음으로 30만명을 넘어섰다. 2020년 기준 전체 사망자의 약 10%가 변사인 셈이다. 이 가운데 8000~9000명이 부검대에 오른다. 경찰과 의사의 검안, 검사의 검시를 거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법의관 앞에 놓이는 사람들이다.

범죄 연루
부검 대상


국과수에 따르면 2020년 부검 건수는 8813건이다. 2016년 8046건, 2017년 8538건, 2018년 8530건, 2019년 8566건 등 한 해 평균 8500건을 부검했다. 사망자 대비 법의부검률(법의부검 시행 수/사망자 수)은 2.9~3%, 변사자 대비 법의부검률(법의부검 시행 수/변사자 수)은 23~24%다.

국과수 등을 통해 공개된 법의부검률은 내국인, 즉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산출한 결과다. 그렇다면 외국인 부검률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외국인 부검 관련 자료는커녕 사망 관련 자료도 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국과수 감정관리시스템 역시 2015년에 이르러서야 외국인 체크란이 생겼다. 

지난 7월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포스트 코로나 다시 시작하는 기초의학’을 주제로 제29회 기초의학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안전사고’를 주제로 진행한 대한법의학회 프로그램에서 이주노동자 부검 현황과 관련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박종필 연세대 법의학과 조교수와 김기하 조교의 ‘이주노동자의 법의부검에 대한 고찰’ 연구다.

김 조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시작됐고 그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출입과 체류가 증가하면서 한국 사회에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이들에 관한 법의부검을 비롯한 사망원인 통계 분석은 이뤄지지 않아 현황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 법의부검 중 이주노동자(미등록 이주노동자 포함)의 부검 현황을 조사하고 연도별 부검률, 사망원인 및 사망의 종류에 대해 분석했다”고 밝혔다. 

절차 문제?
위험 노출?

이주노동자 부검과 관련해 유의미한 통계가 발표된 건 이번 연구가 처음이다. 박 교수와 김 조교는 이주노동자 사망자 수와 법의부검 시행 수로 법의부검률을 산출했다. 앞서 이들은 외국인과 이주노동자의 기준을 명확히 하기 위해 UN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개념을 사용했다.

UN의 국제이주노동자권리협약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그 사람이 국적국이 아닌 나라에서 유급활동에 종사할 예정이거나 이에 종사하고 있거나 또는 종사해온 사람’이다. 이 기준에 따라 ▲외국 국적으로 취업활동이 가능한 체류 자격의 종류를 소지한 사람 ▲20세 이상 취업활동을 목적으로 입국한 사람 ▲취업비자 외 경제적인 목적으로 일하는 경우로 이주노동자를 정의했다. 

<일요시사>가 박 교수와 김 조교가 기초의학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이주노동자 부검 관련 자료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이주노동자 부검률은 내국인 부검률과 비교해 최소 4.6배, 최대 6배까지 높았다. 이주노동자가 사망 이후 부검대에 오르는 비율이 내국인에 비해 높다는 뜻이다. 

2016년 이주노동자 사망자 수는 2469명이고 이 가운데 336명(13.6%)을 부검했다. 2017년 17.3%(435명/2515명)로 치솟은 부검률은 2018년 16.4%(425명/2587명), 2019년 17.3%(462명/2670명), 2020년 17.4%(495명/2843명)를 기록했다. 

세부 내용 따라 격차 커질 수도
위험한 환경 노출로 죽음 위기↑


박 교수는 “이주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내국인과 비교해 그 절차가 복잡하다. 수사 후 그 결과를 해당 대사관이나 본국에 있는 가족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원칙대로 하다 보니 내국인은 넘어갈 건도 부검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부검률이 높게 나타났다고 보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 사망 당시 이주노동자가 처해있던 상황이 법의부검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고사나 산업재해, 타살 등 내국인도 일반적으로 부검을 하는 사례에 높은 빈도로 노출돼있기 때문에 부검률이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지점은 후자”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주노동자 부검률이 현재 연구 결과보다 더 높게 나타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추락했거나 가격당하는 등 물리적 손상이 아닌 직업병이나 직업성 질환은 산출 과정에서 산업재해가 아니라 질병으로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검률이 내국인과 비교해 5배 넘게 높다는 점은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더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연령대가 20~60대에 집중돼있는 이주노동자의 특성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내국인 사망자 연령별 분포를 보면 신생아나 노인 등 아주 어리거나 고령일 때 생을 마감하면 부검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는 신생아나 고령층이 많지 않다. 연령대의 양 가장자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부검률이 상당한 수준인 셈이다. 

앞뒤 빼고도
더 높았다


특히 20~40대 등 내국인의 경우 사망률이 낮은 연령대로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이주노동자의 부검률이 더 높게 나타날 수 있다. 또 내국인 20~40대의 사망원인 1위가 극단적 선택인 반면, 이주노동자의 경우 사고사나 타살의 비율이 높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내국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이주노동자 주변에 ‘죽음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주노동자 법의부검 연구 박종필 연세대 의과대학 조교수·김기하 조교 인터뷰

“외국인 사망 자료 없다”

지난 9월20일 연세대 의과대학 본관에서 ‘이주노동자의 법의부검’에 대해 연구 중인 박종필 법의학과 조교수와 김기하 조교를 만났다.

이들은 지난해 3월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해 지난 7월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초의학 학술대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다음은 박 교수·김 조교와의 일문일답.

-연구를 시작한 계기는.

▲의과대학 학생 때부터 이주노동자라는 특정 계층에 관심이 있었다. 그 관심을 이어오다가 법의학자가 된 뒤 부검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특히 이주노동자를 자주 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를 실제로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박종필)

-자료는 어떻게 수집했는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본원과 지역사무소, 한국법의의원, 경북대 등에서 부검 자료를 받았다. 이중에서 이름 등을 통해 외국인을 선별했다. 재외동포 등 이름으로 구분이 어려운 때는 부검장부를 확인, 크로스체크를 진행해 누락률을 낮추려고 노력했다.(김기하)

부검하다 자주 접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외국인 사망 자료가 정말 없다. 법의부검률을 사망자 수 대비가 아니라 변사자 수 대비로 산출하려 했는데 기관에서 외국인 변사자에 대한 개념이나 분류 자체가 전혀 안 돼있었다. 이 자료가 없다 보니 법무부에서 받은 총 외국인 사망자를 분모로 해 부검률을 낼 수밖에 없었다.(김기하)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는데. 

▲결과는 유의미하게 나온 게 맞는데 디테일한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내국인 전체 사망자 수는 통계청에서, 외국인 사망자 수는 외교부나 법무부를 통해 확보했다. 문제는 외교부나 법무부에서 이(사망자 수) 통계를 어떻게 산정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통계의 불확실성이 있어 이 결과에 대해 어디까지 의미 부여를 해야 될 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박종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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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