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없는 박범계 장관의 한계

호랑이 기세 어디가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정부부처 장관들, 이른바 ‘순장조’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차기 대선이 임박하면서 상대적으로 이들의 존재감은 희미해지는 모양새다. 기세 좋게 입성한 장관도 상황은 비슷하다.

역대 정부를 통틀어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이렇게 유명세를 탄 경우가 있을까. 검찰과 법무부의 수장은 한때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대립했고, 한때는 손발 잘 맞는 ‘동지’처럼 지냈다.

검 잡는
선봉장

문재인정부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칼이면서 개혁해야 할 기관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국민 사이에서 사회 각 분야의 적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은 국민의 그런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문 대통령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검찰개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검찰의 기소 독점 체제를 깨고 권한을 분산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여권은 검찰개혁 법안 입법화로 발을 맞췄다. 

정부조직법에 따라 법무부 장관은 검찰, 행형, 인권 옹호, 출입국 관리, 그 밖에 법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검찰청법에도 법무부 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검사를 지휘한다고 돼있다. 다시 말해 검찰 ‘길들이기’의 선봉장은 법무부 장관이 맡게 되는 셈이다. 


다만 검찰청법은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감독한다고 명시했다. 이 부분을 두고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미묘한 힘겨루기를 벌인 적도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는 검찰총장 시절 국정감사에서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추·윤 대전 이후 발탁
검찰개혁 외치며 입성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윤 후보의 수사지휘권을 박탈하는 지휘권을 발동한 것이 부당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 아래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중론이었지만 일각에서는 검찰의 독립성을 감안해 통상적인 상명하복 관계와는 다르다는 의견도 나왔다. 

추 전 장관과 윤 후보는 ‘추윤 대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큰 갈등을 빚었다.

윤 후보는 당초 문정부에서 가장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 전 대통령 시절 한직으로 좌천됐다가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팀에 합류해 부활의 날개짓을 시작하더니 문정부 들어 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이라는 꽃길을 걸었다. 

꽃길이 가시밭길로 변한 건 윤 후보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비리 의혹을 수사하면서부터다. 윤 후보의 검찰은 조 전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고 불거진 가족 비리 의혹에 칼을 댔다.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수사 포문을 연 것.

이때부터 여권을 중심으로 검찰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조 전 장관에 이어 추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검찰과 법무부의 갈등이 가속화됐다. 추 전 장관은 ‘검찰 대학살’로 회자되는 검찰 인사를 시작으로 윤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수사지휘권 발동,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요구, 징계위원회 개최, 직무정지, 행정소송 등 사상 초유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전쟁 벌인
수장들

추 전 장관의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에 낙점된 인물이 바로 박범계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국회의원이다. 박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면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윤 후보와 사법연수원 동기(23기)라는 점에서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사이에 관계 재정립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와 ‘추미애 시즌 2’일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박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검찰개혁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2월1일 취임식에서 “국민의 명령인 검찰개혁을 위한 한 걸음을 이제 막 내디뎠을 뿐”이라며 “권력기관 개혁 과제를 더욱 가다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경찰과 상호 협력을 통해 국민의 인권보호는 물론 각종 범죄 대응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1년, 박 장관은 지난달 28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박 장관의 1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활발한 민생 개선 행보에 박수를 보내는 목소리도 있지만 정치적 중립성에 있어서는 낙제점이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대선과 맞물리면서 취임 초 호랑이 같은 기세는 사라지고 이제 존재감조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말도 있다. 

박 장관은 취임 첫 행보로 당시 코로나19 확진자가 대거 발생한 서울 동부구치소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코로나 방역이 민생”이라며 법무부가 아닌 동부구치소로 출근한 바 있다.

이 같은 행보는 지난해 총 112회 현장 방문으로 이어졌다. 일선 지청과 구치소, 보호관찰소 등을 두루 살피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취임 첫 검찰 인사 때부터 시작된 잡음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2월 신현수 당시 민정수석이 재직 40여일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신 전 수석은 문정부 유일의 검찰 출신 민정수석으로 문 대통령의 오랜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최악으로 치달은 검찰과 법무부의 관계 재정립을 위한 인사였다.

문제가 발생한 건 검찰 고위간부 인사 과정에서다. 박 장관이 신 전 수석과 충분한 조율을 거치지 않고 인사안을 발표했다는 것. 인사안을 두고 법무부와 청와대 민정수석실 간에 이견이 있었는데, 의견 차가 최종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무부 인사안이 대통령 선까지 올라가 확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법무부와 민정수석실 간에 이견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민정수석 패싱은 아니라는 입장을 전했다. 신 전 수석은 청와대의 만류에도 사의를 거두지 않았고 결국 사표는 수리됐다. 

임기 말엔
안 통하네


그보다 앞서 박 장관과 윤 후보가 만난 자리에서도 검찰 인사와 관련된 논의가 이뤄졌지만, 윤 후보의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문정부 관련 수사를 뭉개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온 이성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현 서울고검장)의 거취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 고검장은 유임됐고 이후 같은 해 6월 인사에서 서울고검장으로 영전했다. 

6월 검찰 중간간부 인사 때는 문정부 관련 사건을 이끌었던 수사팀장이 대거 교체됐다. 청와대 기획사정 의혹 사건,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사건,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사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비리 사건 등을 맡았던 검사들은 자리 이동이 이뤄졌다. 

검찰 직제개편과 맞물려 역대 최대 규모로 이뤄진 검찰 중간간부 인사에서 친정권으로 분류되거나 박 장관의 참모들이 주요 요직에 오른 반면 이른바 ‘윤석열 라인’으로 분류됐거나 정권 수사를 맡았던 인사들은 좌천성 발령을 받았다. 

최근 박 장관은 중대재해 관련 외부 전문가를 대검 검사급(검사장)으로 임용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는 중대재해 대응 능력 강화를 위해 노동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인사를 외부 공모 형식으로 검사장급 보직에 발탁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 내부에서 반발이 일었다. 수사 지휘 라인에 외부 인사를 보임한 전례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검사장 ‘알박기’ 논란이 함께 불거졌다. 김오수 검찰총장도 반대 의견을 냈다. 결국 박 장관은 계획을 철회하고 검사장 공모를 중단했다. 문정부 임기 말 인사 논란에 부담을 느껴 결정을 선회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첫 검찰 인사부터 패싱 논란 
100회 넘는 민생행보 긍정적

‘정치인 장관’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민주당 3선 국회의원인 박 장관은 지명 때부터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따라붙었다. 박 장관이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과 관련해 감찰을 지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전 총리 수사팀의 모해위증 교사 의혹 사건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넨 혐의로 기소된 한신건영 대표 고 한만호씨와 함께 수감됐던 재소자 최모씨‧김모씨가 당시 수사팀으로부터 ‘한씨가 뇌물을 준 게 맞다는 취지로 증언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최씨는 2020년 4월 법무부에 진정을 냈고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을 거쳐 대검 감찰부에서 맡았다.

대검 감찰부는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혐의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박 장관의 재심 지시로 이뤄진 대검회의(대검부장·고검장 회의)에서도 의혹을 받는 재소자들에 대한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박 장관은 역대 4번째, 문정부 들어서만 3번째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바 있다.

이어 박 장관은 감찰 카드를 꺼내들기에 이른다. 한 전 총리 수사팀의 모해위증 교사 의혹 사건을 두고 검찰의 수사 관행을 문제 삼아 법무부와 대검의 합동감찰을 지시한 것. 당시 검찰 안팎에서는 박 장관의 감찰 지시를 두고 ‘한명숙 구하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해 7월 박 장관은 합동 감찰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명숙 사건의 수사기록을 보면 공소가 제기된 이후에도 참고인들이 검찰에 100회 이상 소환돼 증언할 내용 등에 대해 미리 조사받은 사실이 확인됐다”며 “부적절한 ‘증언 연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증인의 기억이 오염되거나 왜곡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절차적 정의가 지켜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혐의 유무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대검의 무혐의 처분을 뒤집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성공?
실패?

박 장관은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문정부 마지막 법무부 장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임기 말로 갈수록 정부 부처 장관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일각에서는 양당 후보가 모두 검찰 수사 선상에 올라 있는 초유의 상황에서 선거 개입으로 비쳐질 만한 행보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역대 68번째 법무부 장관인 그는 향후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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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