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없는 박범계 장관의 한계

호랑이 기세 어디가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정부부처 장관들, 이른바 ‘순장조’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차기 대선이 임박하면서 상대적으로 이들의 존재감은 희미해지는 모양새다. 기세 좋게 입성한 장관도 상황은 비슷하다.

역대 정부를 통틀어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이렇게 유명세를 탄 경우가 있을까. 검찰과 법무부의 수장은 한때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대립했고, 한때는 손발 잘 맞는 ‘동지’처럼 지냈다.

검 잡는
선봉장

문재인정부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칼이면서 개혁해야 할 기관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국민 사이에서 사회 각 분야의 적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은 국민의 그런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문 대통령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검찰개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검찰의 기소 독점 체제를 깨고 권한을 분산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여권은 검찰개혁 법안 입법화로 발을 맞췄다. 

정부조직법에 따라 법무부 장관은 검찰, 행형, 인권 옹호, 출입국 관리, 그 밖에 법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검찰청법에도 법무부 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검사를 지휘한다고 돼있다. 다시 말해 검찰 ‘길들이기’의 선봉장은 법무부 장관이 맡게 되는 셈이다. 


다만 검찰청법은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감독한다고 명시했다. 이 부분을 두고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미묘한 힘겨루기를 벌인 적도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는 검찰총장 시절 국정감사에서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추·윤 대전 이후 발탁
검찰개혁 외치며 입성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윤 후보의 수사지휘권을 박탈하는 지휘권을 발동한 것이 부당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 아래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중론이었지만 일각에서는 검찰의 독립성을 감안해 통상적인 상명하복 관계와는 다르다는 의견도 나왔다. 

추 전 장관과 윤 후보는 ‘추윤 대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큰 갈등을 빚었다.

윤 후보는 당초 문정부에서 가장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 전 대통령 시절 한직으로 좌천됐다가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팀에 합류해 부활의 날개짓을 시작하더니 문정부 들어 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이라는 꽃길을 걸었다. 

꽃길이 가시밭길로 변한 건 윤 후보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비리 의혹을 수사하면서부터다. 윤 후보의 검찰은 조 전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고 불거진 가족 비리 의혹에 칼을 댔다.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수사 포문을 연 것.

이때부터 여권을 중심으로 검찰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조 전 장관에 이어 추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검찰과 법무부의 갈등이 가속화됐다. 추 전 장관은 ‘검찰 대학살’로 회자되는 검찰 인사를 시작으로 윤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수사지휘권 발동,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요구, 징계위원회 개최, 직무정지, 행정소송 등 사상 초유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전쟁 벌인
수장들

추 전 장관의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에 낙점된 인물이 바로 박범계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국회의원이다. 박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면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윤 후보와 사법연수원 동기(23기)라는 점에서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사이에 관계 재정립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와 ‘추미애 시즌 2’일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박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검찰개혁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2월1일 취임식에서 “국민의 명령인 검찰개혁을 위한 한 걸음을 이제 막 내디뎠을 뿐”이라며 “권력기관 개혁 과제를 더욱 가다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경찰과 상호 협력을 통해 국민의 인권보호는 물론 각종 범죄 대응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1년, 박 장관은 지난달 28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박 장관의 1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활발한 민생 개선 행보에 박수를 보내는 목소리도 있지만 정치적 중립성에 있어서는 낙제점이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대선과 맞물리면서 취임 초 호랑이 같은 기세는 사라지고 이제 존재감조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말도 있다. 

박 장관은 취임 첫 행보로 당시 코로나19 확진자가 대거 발생한 서울 동부구치소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코로나 방역이 민생”이라며 법무부가 아닌 동부구치소로 출근한 바 있다.

이 같은 행보는 지난해 총 112회 현장 방문으로 이어졌다. 일선 지청과 구치소, 보호관찰소 등을 두루 살피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취임 첫 검찰 인사 때부터 시작된 잡음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2월 신현수 당시 민정수석이 재직 40여일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신 전 수석은 문정부 유일의 검찰 출신 민정수석으로 문 대통령의 오랜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최악으로 치달은 검찰과 법무부의 관계 재정립을 위한 인사였다.

문제가 발생한 건 검찰 고위간부 인사 과정에서다. 박 장관이 신 전 수석과 충분한 조율을 거치지 않고 인사안을 발표했다는 것. 인사안을 두고 법무부와 청와대 민정수석실 간에 이견이 있었는데, 의견 차가 최종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무부 인사안이 대통령 선까지 올라가 확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법무부와 민정수석실 간에 이견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민정수석 패싱은 아니라는 입장을 전했다. 신 전 수석은 청와대의 만류에도 사의를 거두지 않았고 결국 사표는 수리됐다. 

임기 말엔
안 통하네


그보다 앞서 박 장관과 윤 후보가 만난 자리에서도 검찰 인사와 관련된 논의가 이뤄졌지만, 윤 후보의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문정부 관련 수사를 뭉개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온 이성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현 서울고검장)의 거취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 고검장은 유임됐고 이후 같은 해 6월 인사에서 서울고검장으로 영전했다. 

6월 검찰 중간간부 인사 때는 문정부 관련 사건을 이끌었던 수사팀장이 대거 교체됐다. 청와대 기획사정 의혹 사건,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사건,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사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비리 사건 등을 맡았던 검사들은 자리 이동이 이뤄졌다. 

검찰 직제개편과 맞물려 역대 최대 규모로 이뤄진 검찰 중간간부 인사에서 친정권으로 분류되거나 박 장관의 참모들이 주요 요직에 오른 반면 이른바 ‘윤석열 라인’으로 분류됐거나 정권 수사를 맡았던 인사들은 좌천성 발령을 받았다. 

최근 박 장관은 중대재해 관련 외부 전문가를 대검 검사급(검사장)으로 임용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는 중대재해 대응 능력 강화를 위해 노동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인사를 외부 공모 형식으로 검사장급 보직에 발탁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 내부에서 반발이 일었다. 수사 지휘 라인에 외부 인사를 보임한 전례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검사장 ‘알박기’ 논란이 함께 불거졌다. 김오수 검찰총장도 반대 의견을 냈다. 결국 박 장관은 계획을 철회하고 검사장 공모를 중단했다. 문정부 임기 말 인사 논란에 부담을 느껴 결정을 선회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첫 검찰 인사부터 패싱 논란 
100회 넘는 민생행보 긍정적

‘정치인 장관’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민주당 3선 국회의원인 박 장관은 지명 때부터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따라붙었다. 박 장관이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과 관련해 감찰을 지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전 총리 수사팀의 모해위증 교사 의혹 사건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넨 혐의로 기소된 한신건영 대표 고 한만호씨와 함께 수감됐던 재소자 최모씨‧김모씨가 당시 수사팀으로부터 ‘한씨가 뇌물을 준 게 맞다는 취지로 증언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최씨는 2020년 4월 법무부에 진정을 냈고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을 거쳐 대검 감찰부에서 맡았다.

대검 감찰부는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혐의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박 장관의 재심 지시로 이뤄진 대검회의(대검부장·고검장 회의)에서도 의혹을 받는 재소자들에 대한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박 장관은 역대 4번째, 문정부 들어서만 3번째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바 있다.

이어 박 장관은 감찰 카드를 꺼내들기에 이른다. 한 전 총리 수사팀의 모해위증 교사 의혹 사건을 두고 검찰의 수사 관행을 문제 삼아 법무부와 대검의 합동감찰을 지시한 것. 당시 검찰 안팎에서는 박 장관의 감찰 지시를 두고 ‘한명숙 구하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해 7월 박 장관은 합동 감찰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명숙 사건의 수사기록을 보면 공소가 제기된 이후에도 참고인들이 검찰에 100회 이상 소환돼 증언할 내용 등에 대해 미리 조사받은 사실이 확인됐다”며 “부적절한 ‘증언 연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증인의 기억이 오염되거나 왜곡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절차적 정의가 지켜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혐의 유무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대검의 무혐의 처분을 뒤집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성공?
실패?

박 장관은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문정부 마지막 법무부 장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임기 말로 갈수록 정부 부처 장관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일각에서는 양당 후보가 모두 검찰 수사 선상에 올라 있는 초유의 상황에서 선거 개입으로 비쳐질 만한 행보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역대 68번째 법무부 장관인 그는 향후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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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