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나 주요 언론의 공식 발표는 없지만, 말레이시아 말라카 주지사 모흐드 알리의 오는 19일 방한 가능성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국왕 선출과 헌법 질서를 관리하는 마상회의 총재 자격을 겸한 인물이고, 말라카는 말레이반도 최초의 독립 국가이자 인도·중국을 잇는 해상 무역의 상징적 거점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ASEAN 정상회의 기간 중 지난해 10월27일, 이재명 대통령과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의 정상회담 이후, 말레이시아는 한국과의 방산·반도체 후공정·배터리·디지털경제 협력 확대를 언급해 왔다. 이 같은 협력 기조의 연장선에서 말라카 주지사 방한 가능성도 함께 거론되고 있다.
싱가포르가 사실상 동남아의 초강력 허브를 독점해 온 구조 속에서, 말레이시아가 한국과의 협력을 전략급 의제로 격상하고 ASEAN 정상회의 이후 불과 3개월 만에 말레이시아 13개주를 관장하는 마상회의 총재가 직접 방한한다는 것은 외교·경제 차원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로 읽힌다.
최근 쿠알라룸푸르 주요 언론은 한국을 “말레이시아 산업 고도화의 핵심 파트너”라고 규정했고, 안와르 총리 역시 “한국과의 협력은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미래 성장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조용했던 양국 관계에 드물게 등장한 정책 신호다.
그러나 이 변화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려면, 왜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지난 수십년간 뚜렷한 갈등이 없었음에도 교류가 제한적이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국은 정치적 마찰 없이 교류를 이어왔지만, 관계를 전략적 단계로 끌어올릴 결정적 동력은 부족했다. 말레이시아에게 한국은 매력적이되 중심축은 아니었고, 한국에게 말레이시아는 필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국가였다. 이 미묘한 거리감이 결단을 늦추며 양국 관계를 오랫동안 ‘조용한 정체’에 머물게 했다.
그 근본 배경은 경제구조에서부터 시작된다. 말레이시아는 팜오일·가스·석유·주석 등 자원 기반 경제를 중심에 두고 있고 제조업도 조립·후공정 중심이 많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배터리·자동차·조선·전자 등 고부가가치 제조업 중심이다. 문제는 이 두 구조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길 만큼 보완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는 이미 미국·호주·중동 등에서 안정적으로 확보해 왔고, 말레이시아가 필요로 하는 기술·장비·소재는 일본·중국·싱가포르에서 더 효율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즉, 협력은 가능했지만 “협력해야만 하는 구조적 필연성”이 약했던 것이다.
싱가포르라는 초강력 허브의 존재도 결정적이다. 한국 기업의 동남아 활동은 물류·금융·법률·조세·인재가 모두 싱가포르를 기점으로 돌아가며, 전략 수립과 의사결정 역시 그곳에 집중돼있다. 심지어 말레이시아와의 실제 협력조차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 말레이시아 교역이 통계상 늘어도, 실제 기업 활동은 싱가포르 중심의 확장일 수 있다. 말레이시아가 경쟁력이 약한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가 너무 강한 것이다. 이 허브 잠식 구조는 말레이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항상 그림자가 되었다.
정치적 변동성 역시 한국 기업을 주저하게 만든 요인이다. 2018년 이후 말레이시아는 총리가 네 번 교체되고, 연정이 무너지고, 정책 방향이 반복적으로 수정되는 등 불확실성이 컸다. 외국 기업에게 정책 예측 가능성은 투자 결정의 절대 기준이다.
같은 시기 한국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성장 가능성과 정책 일관성이 분명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로 몰렸다. 말레이시아는 훌륭한 산업 기반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반복되는 정치 변동성과 정책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선택에서는 한 발 뒤로 밀려나는 국가였다.
또 말레이시아 특유의 이슬람·다민족 구조는 안정적이면서도 복잡한 경영 환경을 만드는 것도 요인이 된다. 할랄 규제, 종교적 관습, 민족 간 균형을 고려해야 하는 경영 방식은 한국식 조직문화가 빠르게 자리 잡은 베트남·태국과 대비된다. 문화적 친밀성의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렸기에 자연스러운 교류 확장이 더뎠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구조가 바뀌고 있다. 세계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관계를 다시 중앙 무대로 끌어올리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수소·배터리·스마트그리드·AI·클라우드·방산 기술을 필요로 하고, 한국은 말레이시아의 에너지 자원·허브 지리·이슬람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 과거에는 느슨했던 상호 필요성이 지금은 구조적으로 서로를 향해 재편되고 있다.
ASEAN 정상회의 개막일인 지난 10월26일 쿠알라룸푸르에서 한·말레이시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최종 타결된 것은 단순한 통상 합의를 넘어선 정치적 신호였다. 수교 65주년을 앞둔 시점에 정상 간 정치적 확인을 거치며, 양국 관계가 개별 협력을 넘어 구조적·전략적 단계로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제 양국은 단순한 교역 관계에서 벗어나 ‘전략적 심화 관계’로 이동할 수 있는 국면에 들어섰다. 반도체 후공정 공동기지 구축, 수소·CCS 기반 에너지 협력, K-디지털 규제 협력, 말레이시아·싱가포르·한국의 삼각 공급망 모델, 방산·항공정비(MRO) 협력, 할랄 바이오·의료·식품 공동 진출, 이슬람 금융과 한국 ESG 자본의 연계 등 새로운 협력축이 현실화될 수 있다.
한국은 싱가포르 중심 전략을 유지하되 일부 기능을 말레이시아로 분산하는 ‘투트랙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한국과 말레이시아 교류가 오랫동안 정체돼있었던 이유는 감정이나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구조적 조건의 부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공급망, 아세안 내부 질서, 산업 고도화, 에너지 전환이 겹치며 양국이 다시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고 있다.
조용했던 관계는 이제 깊어질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 한국에게 말레이시아는 더 이상 주변부 국가가 아니라 동남아 전략의 새로운 핵심 축이다. 이제 양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한국 산업과 외교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