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사법개혁이라는 이름의 착각

특별재판부가 아닌, 판결 구조 바꾸는 개혁이어야

요즘 사법개혁 논의의 중심에는 ‘특별재판부 설치’가 있다. 특정 사건과 정치적 사안에 대응해 전담 재판부를 만들자는 요구가 반복되지만, 사건이 터지면 재판부를 바꾸고 여론이 흔들리면 제도를 덧붙일 뿐, 판결의 질이 왜 흔들리는지에 대한 질문은 빠져 있다.

특별재판부는 공정성을 강화하는 수단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사법부를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내는 구조이기도 하다. 누가 그 재판부에 들어가느냐, 왜 그 사건이 특별 취급을 받느냐는 논쟁이 판결 전부터 시작된다. 사법부는 판결로 말해야 하지만, 구조 설계부터 의심받는 순간 판결의 권위는 약해진다.

의심받는 순간
약해지는 권위

진짜 사법개혁은 재판부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판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꾸는 것이다. 법 조문에 대한 숙련보다 사건 작동에 대한 깊은 이해가 판결의 질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사법개혁은 반복해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특별재판부가 개혁처럼 보이는 이유= 특별재판부 논의는 늘 정의감에서 출발한다. 기존 사법 시스템으로는 공정한 판단이 어렵다는 불신이 쌓일 때, 정치권과 여론은 별도의 장치를 요구한다. 물론 그 요구는 설득력이 있다. 기존 재판부가 부족하다면, 더 강한 재판부를 만들자는 논리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해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전가한다. 판결의 질이 흔들리는 원인을 제도 밖에서 찾기 때문이다. 판사가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제를 재판부 명칭과 구성 변경으로 덮으려 한다. 이는 증상을 치료하지 않고 간판만 바꾸는 처방이다.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책임만 이동시킨다.

특별재판부가 늘어날수록 사법부는 더 정치적으로 보인다. 어떤 사건이 특별한지에 대한 판단 자체가 정치가 되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독립은 구조에서 나오지, 특별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특별함은 오히려 의심을 키운다. 그 순간 재판은 판결 전에 이미 구성 논쟁으로 심판대에 오른다.

판결은 법이 아닌 현실을 번역하는 작업= 판결은 법 조문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행위가 아니다. 현실에서 벌어진 복잡한 사실을 법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 작업이다. 이 번역이 실패하면, 판결은 합법일 수는 있어도 납득되지는 않는다. 시민이 판결에 분노하는 지점은 대개 이 지점이다. 판결문이 길어질수록 이해는 멀어지고, 불신은 깊어진다.

논의 중심에 특별재판부 설치
판결의 질에 대한 질문은 빠져

현대 사회의 분쟁은 단순하지 않다. 기술, 조직, 시스템, 이해관계가 중첩돼 하나의 사건 안에 공존한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판사는 서류의 일부만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 결과 판결은 형식적으로는 완결돼 보이지만, 현실과는 어긋난다. 시민은 판결에서 현실의 온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판결의 질은 법 지식의 양이 아니라, 구조 이해의 깊이에서 갈린다. 법리는 마지막 단계고, 그 이전의 해석이 판결의 방향을 결정한다. 사실을 어떻게 해석했는지가 결론을 좌우하며, 이 해석 능력은 시험 점수가 아니라 사고의 훈련에서 길러진다. 사법의 전문성은 여기에 있다.

쿠팡과 플랫폼 사건이 던진 질문= 쿠팡과 같은 플랫폼 사건은 전통적인 법 분류로 설명되지 않는다. 민사인지, 노동인지, 공정거래인지, 행정인지 하는 분류가 한 사건 안에 섞여 있다. 계약서만 보면 중개자고, 현장을 보면 지배자다. 이 간극을 이해하지 못하면 판결은 필연적으로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틀의 선택이 곧 결론이 된다.

플랫폼의 핵심은 구조다.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책임이 어떻게 분산되는지, 위험이 어디로 이전되는지를 읽어야 한다. 이를 모르면 판사는 가장 정제된 문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에 끌려간다. 구조를 읽지 못한 판결은 언제나 말이 많은 쪽이 이기도록 한다. 침묵하는 구조는 패소하고, 포장된 논리가 승소한다.

그래서 플랫폼 판결은 늘 논란이 된다. 법리가 틀려서가 아니라,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 흔적이 판결문 곳곳에 남기 때문이다. 시민은 판결문에서 결론보다도 “이 재판부가 이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가”를 먼저 읽는다. 그 판단은 빠르다. 판결의 설득력은 선고 순간 이전에 이미 결정된다.

시험 점수 아닌
사고 훈련부터

산업병 판결서 반복되는 오판의 구조= 산업병과 산재 판결은 구조 이해의 중요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산업병은 단일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누적, 확률, 환경, 조직이 동시에 작용한다. 이를 개인의 질병 이력이나 단기 인과관계로 환원하면 판결은 왜곡된다. 구조는 사라지고 개인만 남는다. 책임은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그럼에도 많은 판결은 “직접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는 법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다. 산업병은 애초에 그렇게 입증되지 않는 구조를 가진다. 이 사실을 외면한 판결은 반복해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판결은 안전보다 증명을 요구하고, 증명은 늘 개인에게 불리하다.

판사가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감정 결과에 종속되거나 보수적 판단으로 도망친다. 그 결과 정의는 서류 속에서 사라진다. 피해자는 패소하고, 시스템은 유지되며, 위험은 다음 노동자에게 이전된다. 판결은 끝났지만 문제는 남는다. 사법은 종료됐지만, 산업 현장은 그대로다.

판사는 산업이 아니라 사건 구조에 특화돼야=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별 판사’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위험을 낳는다. 특정 산업에 오래 노출된 판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산업의 논리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전문화가 아니라 동화의 위험이다. 판결은 독립을 잃고 관행을 닮아간다.

그래서 필요한 특화는 산업이 아니라 사건 구조다. 시스템 사고형 사건, 고난도 인과관계 사건, 기술 판단이 개입되는 사건 등 유형별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는 판사의 중립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판결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식이다. 구조를 아는 판사는 주장보다 작동 원리를 본다. 보이는 쪽이 아니라 작동하는 쪽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속도의 문제?
이해의 문제!

판사는 업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를 해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해관계자의 주장 뒤에 숨은 작동 원리를 읽어내는 능력이 사법 전문성의 핵심이다. 이것이 사법 전문화의 올바른 방향이다. 판결은 설명이 아니라 해부여야 한다.

로스쿨과 경력 논쟁의 허점= 로스쿨 제도는 판사의 경험 부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경험이 곧 판단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변호사 경력이 길수록 사건을 의뢰인 중심으로 보는 습관이 굳어질 수 있다. 재판은 그 습관을 내려놓는 자리다. 익숙한 시선은 공정한 판단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재판은 변론의 연장이 아니다. 양쪽 주장을 동일한 거리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오히려 선입견이 적은 신입 판사가 구조를 더 정직하게 읽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경험은 방향이 맞을 때 힘이 된다. 방향 없는 경험은 판단을 왜곡한다.

문제는 경력의 유무가 아니라, 그 경험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축적됐느냐다. 이 점을 무시한 채 경력만 강조하는 사법개혁은 방향을 잃기 쉽다. 경력은 조건이지, 보증수표는 아니다. 판결의 질은 이력서가 아니라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

전문성 부재가 재판 지연을 만든다= 최근 재판 지연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사건은 접수됐지만, 첫 변론까지 시간이 걸리고, 쟁점 정리만으로도 수개월이 소요된다. 흔히 인력 부족이나 사건 폭증이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그 이면에는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 판사가 사건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플랫폼, 산업병, 기술·금융 사건처럼 구조가 복잡한 사건일수록 이 현상은 두드러진다. 판사는 관련 산업과 시스템을 처음부터 공부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과 자료 제출이 반복된다. 쟁점은 늘어나고, 변론은 길어지며, 재판은 자연스럽게 지연된다. 전문성이 부족한 재판은 신중해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고 늘어진다.

결국 재판 지연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다. 사건 구조에 대한 기본적 축적이 없는 상태에서는 판결을 미룰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조 전문화는 판결의 질만 높이는 장치가 아니다. 재판을 제때 끝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판사가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법은, 정의뿐 아니라 시간에서도 시민을 배반한다.

이해관계자들 주장 뒤에 숨은
작동 원리 읽어내는 능력 핵심

의사는 분야를 나누는데, 판사는 왜?= 의료 현장에서 의사는 결코 하나의 직군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내과, 외과, 소아과, 심장, 신경, 응급의학 등 분야는 세분화돼있고, 환자는 자신의 증상과 구조에 맞는 의사를 만난다. 이는 능력 차별이 아니라 판단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시스템이다. 의료는 오진의 대가를 알기에 전문화를 선택했다.

물론 판사와 의사는 역할이 다르다. 의사는 치료까지 책임지지만, 판사는 판결로 역할이 끝난다. 그러나 둘 다 판정을 내린다는 점에서는 같다. 의사는 생명을 다루고, 판사는 죄를 다룬다. 무게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다. 판정의 오류가 남기는 상처는 어느 쪽도 가볍지 않다.

사법부는 여전히 모든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판단하려 한다. 이는 의료에서는 이미 포기한 발상이다. 판사를 산업별로 고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사건의 구조에 따라 판단 역량이 축적되는 설계는 필요하다. 의료가 전문화로 신뢰를 쌓아왔듯, 사법도 구조 전문화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사법만이 예외일 이유는 없다.

판사 직능 개편이 사법개혁의 핵심= 진짜 사법개혁은 판사 직능을 다시 설계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판사를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관리하는 방식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사건 구조별 역량 축적이 가능한 인사와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것이 판결의 질을 끌어올린다. 제도는 판사의 성장을 설계해야 한다.

플랫폼 사건을 반복적으로 다루는 판사, 산업병 사건에서 인과관계 판단에 강한 판사, 기술 감정을 검증할 수 있는 판사가 자연스럽게 형성돼야 한다. 이는 특권이 아니라 역할 분담이다. 재판부 단위의 경험 축적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경험의 누적이 우연이 아니라 설계가 돼야 한다.

특별재판부는 일회성 처방이지만, 직능 개편은 판결의 체질을 바꾼다. 개혁의 무게중심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정치의 개입은 계속된다. 정치는 빈 구조를 파고든다. 사법이 스스로 설계하지 않으면, 설계자는 언제나 바깥에서 들어온다.

사법개혁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사법부가 신뢰를 잃는 순간은 판결이 틀렸을 때가 아니다. 이 재판부는 이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퍼질 때다. 법적 논리는 시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판결은 권위를 잃는다.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복구가 어렵다. 판결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사법개혁의 기준은 단순해야 한다. 판결이 현실을 제대로 번역하고 있는가, 구조를 이해한 흔적이 남아 있는가,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개혁은 실패다. 절차의 공정성만으로는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것은 개혁이 아니다. 판사가 구조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개혁이다. 그것이 쿠팡 이후의 플랫폼 사회, 산업병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사법부가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이 기준이 서지 않는 한, 사법개혁 논쟁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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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사’ 국힘 생존 방정식

‘대마불사’ 국힘 생존 방정식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법원이 주호영 국회부의장의 대구시장 경선 컷오프 관련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그러자 주 부의장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항고할 뜻을 내비쳤다. 주 부의장의 강경 대응은 저조한 국민의힘 지지율과 맞물려 혼란상을 더욱 극적으로 비추고 있다. 과연 국민의힘이란 ‘대마’는 ‘불사’의 존재일까?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에서 컷오프된 것에 반발해 지난달 26일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수석부장판사 권성수)는 지난 3일 이를 기각했다. 그러자 주 부의장은 곧바로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법원 결정에 반발했다. 법원 결정 바로 반발 주 부의장은 “저는 그동안 이번 컷오프가 절차·내용 모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왔다”며 “법원의 판단과 별개로 이번 공천 과정이 과연 당원·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공정하고 민주적인 절차였는지는 여전히 엄중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주 부의장은 지난 6일 항고를 제기했다. 이어 지난 8일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항고심 판단을 끝까지 지켜본 후 제 거취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선 일각에서 제기했던 무소속 출마설을 일단 유보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어 주 부의장은 “항고심 판단을 기다린다고 해서 이번 공천 난맥상과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체제의 책임을 덮고 가겠단 뜻은 결코 아니”라며 “이런 공천 구조를 만든 세력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공천은 충성의 대가나 숙청의 도구가 아닌, 오직 국민 앞에 가장 경쟁력 있고 책임 있는 후보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을 컷오프한 것을 ‘숙청’이라고 암시했다. 주 부의장이 대구시장 출마에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6선인 주 부의장은 대구 수성에서만 국회의원을 지냈다. 대구 수성을에서는 4선을 지냈고, 수성갑에선 재선에 성공했다. 이 중 4선을 했던 지난 2016년 총선 수성을 선거에선 친박(친 박근혜)계 주도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 출마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게 이겼다. 문제는 주 부의장이 당내 최다선인 6선 의원 겸 국회부의장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명예가 곧 실권을 보장하진 않는다. 아울러 주 부의장이 차기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해 7선에 도전하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같은 6선인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각각 부산 사하을·경기 시흥을을 지역구로 두고 있다. 부산은 이미 격전지가 된 데다 조 의원은 민주당계 정당과 국민의힘 소속으로 각각 3선 했고, 경기 시흥을은 수도권이다. 국민의힘의 안정된 텃밭으로 분류되는 대구 수성을에서 7선에 도전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설령 7선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도 참패 가능성이 제기되는 국민의힘이 2년 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다는 보장도, 국회의장이 되리라는 보장도 하기 어렵다. 오는 2028년 총선까지 연일 떠들썩하게 이어지는 계파 갈등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후 대안 야당으로 발돋움하면서 이재명정부가 실정으로 지지율이 폭락하는 상황이 겹쳐야 승리를 노려볼 수 있다. 주 부의장이 국회의장에 도전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불확실한 국회의장…‘텃밭 7선’ 대신 대구? 연이은 공천 가처분 세례 속 서울 지지율 13% 따라서 주 부의장이 대구시장 출마에 집념을 불태우는 것은 필연이다. 대선 패배 후 대구시장에 출마해 당선됐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전례도 있다. 주 부의장으로선 “나라고 출마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니란 분석이 있다. 대구시장으로서 임기를 마친 후 대권에 도전하거나 당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가능성은 일명 ‘주한 연대설’로 통하는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와의 연대설 때문에 불거졌다. 이는 국민의힘 이정현 전 공천관리위원장이 주 부의장을 컷오프한 직후 불거졌다. “주 부의장이 무소속으로 대구시장에 출마해 대구 수성갑에서 재보궐선거가 진행되면, 한 전 대표가 여기에 출마하는 형식으로 연대한다”는 설이다. 한 전 대표 측으로선 손해 볼 게 없다. 한 전 대표는 지난달 25일 채널A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보수 재건이 필요하다고 공감하면서 나서겠다고 했다”며 “우린 이미 연대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반면 주 부의장은 신중한 반응을 내비쳤다. 그는 지난달 26일 기자들을 만나던 중 주한 연대설 관련 질문을 받자 “제 코가 석 자인데 딴 생각할 여지가 있겠느냐”고 답변했다. 다만 무소속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선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준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따라서 주한 연대설 성립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나왔다. 주 부의장의 항고 제기는 국민의힘의 치명적 문제 하나를 외부로 노출했다. 국민의힘에선 당내 처분에 대해 연이어 법원으로 달려가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가깝게는 주 부의장과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컷오프에 대한 가처분을 신청했다. 김 지사는 주 부의장과 달리 가처분이 인용돼 경선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멀게는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배현진 의원에 대해 각각 결정했던 제명·당원권 정지 1년 징계의 효력도 법원에서 정지됐다. 4건의 가처분 모두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 판단했다. 재판부는 주 부의장 건에 대해서만 국민의힘의 손을 들어줬다. 장 대표는 김 지사가 신청한 가처분이 인용된 다음 날인 지난 1일 기자들과 만나 “법원이 정치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며 “재판장이 국민의힘에 와서 공천관리위원장과 윤리위원장을 하면 될 것 같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해선 “정치의 사법화가 심각할 정도로 진행된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공천 관련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의힘의 지방선거 승리 가능성을 어둡게 하는 신호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갤럽은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2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상대로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조사원이 직접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율은 48%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18%로 집계됐다. 제 코가 석 잔데… 서울에선 민주당 지지율이 51%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13%로 집계됐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민주당 지지율은 42%로,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7%로 집계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 바람). 영원한 격전지 서울에서도 양당의 지지율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여론조사 결과 수치가 공개되자,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한 지적이 날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4일 자 사설을 통해 “국민의힘은 지금 수도권에서 후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며 “현행법상 15% 이상 득표해야 선거 비용을 전액 보전받을 수 있는데 그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한다는 것”이라며 현실을 짚었다. 이어 “말로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했을 뿐 실제로는 반대로 하고 있다”며 “공천 혼란에 대해서도 가처분을 인용한 법원 탓만 할 뿐, 어떻게 수습하고 책임질지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등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라면, 수습·책임을 맡을 당 대표는 보이지 않는 셈이다. 해당 매체는 “어렵게 나선 후보들은 국민의힘 상징색인 빨간색을 포기하고 흰색 점퍼를 입고 다닌다”며 “인구가 1300만명에 달하고 국회의원 의석수도 가장 많은 경기도에선 지사 출마자를 구하지 못해 공천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현실도 짚었다. <조선일보>가 짚은 국민의힘의 현실은 신체를 통제할 두뇌 없이 거대한 군집을 이룬 채 각자의 역할을 맡은 군집 생물에 비유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관해파리를 들 수 있다. 관해파리는 겉으로 볼 땐 덩치 큰 해파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역할을 맡은 독립 개체들이 모인 군집이다. 이 개체들은 먹이 섭취·이동·번식 등 각각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각각의 개체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연결돼있지만,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뇌는 없다. 개체 중 누군가가 제 역할을 못하면 모두 죽는다. 단세포생물인 점균류도 먹이를 찾을 때, 각자의 세포가 알아서 효율적인 길을 찾는다. 이를 통제할 뇌는 없지만, 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최적의 경로를 결정한다. 그런데 잘못된 경로를 찾으면 방향을 틀 능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는 것은 군집 전체가 굶어 죽는 일이다. 페로몬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는 군대개미 집단도 선봉에 선 개미가 길을 잃으면 모든 개미가 원을 그리다가 지쳐 죽는다. 제 역할 못하면…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는 원심적 경쟁 이론을 주장했다. 보통의 민주주의 국가에선 정당이 중도층의 표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강경한 여당과 무책임한 야당이 양립할 땐 정당이 중도층을 설득하기보다 진영 결집에 따른 조직표 구성에 몰두한다. 이런 구도에선 중도층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정치적 대화도 단절된다. 이런 상황에선 후보자들은 당의 승리와 중도 확장을 포기하고, 강성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중도층이 정치에 냉담해지면서 설득 가능 대상으로 강성 핵심 지지층만 남기 때문이다. 가성비 높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후보자들이 지도부를 거부하면서 강성 핵심 지지층에게만 구애하는 각자도생에 몰두한다. 이는 결국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국민의힘의 지방선거 준비 과정에서 서울시장·경기도지사 경선에선 구인난에 빠졌지만, 대구시장·경북도지사 경선은 열기가 과도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특히 대구시장 경선엔 국회부의장·경제부총리·원내대표 등 당정의 핵심을 지낸 인사들이 모두 출마했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띄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리처드 카츠와 아일랜드의 정치학자 피터 메어는 정당을 카르텔·프랜차이즈 기업에 비유하는 독특한 이론을 발표했다. 카츠와 메어는 “현대 정당이 시민의 자발적 후원보다 국가의 정당 보조금·공천권 등 국가의 자원에 의존해 서로 담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앙당과 지역구 후보의 관계를 본사와 가맹점주 관계로 규정했다. 따라서 중앙당이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지 못하거나, 시장에서 자원의 가치가 폭락하면 가맹점주의 불만이 폭발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매개로, 캐나다의 정치학자 켄 카티는 “정당이 실제로 프랜차이즈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티에 따르면, 정당은 브랜드로서만 기능하고, 선거에선 후보가 중앙의 브랜드를 빌려온다. 공천은 결국 이들 간 계약 관계 역할을 한다. 이는 실제 정치적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일 서울 쌍문역 일대 쌍리단길을 방문했다. 오 시장의 현장 방문에 동행한 국민의힘 소속 서울시의원들과 도봉구의원들은 국민의힘의 상징색 빨간색이 아닌 흰색 점퍼를 입었다. 오 시장도 서울시 로고가 새겨진 흰색 점퍼를 입고 현장을 돌아다녔다. 지난달 31일 진행된 국민의힘 서울시장 본경선 후보들 대상 첫 토론회에서도 후보들은 장 대표를 비판했다. 이들은 “흰색 점퍼에 눈이 간다면 동그라미 푯말을, 빨간색 점퍼에 눈이 간다면 엑스 푯말을 들어달라”는 진행자의 요구에 일제히 엑스 푯말을 들었다. 오세훈 ‘흰색 점퍼’ 현장행 “빨간색 입고 싶다” 대우그룹·프랑스 사회당 등 한순간에 망한 대마들 하지만 말은 날카로웠다. 오 시장은 “빨간색 점퍼를 입고 싶은 마음을 엑스 푯말을 들어 표현해 봤다”고 말했다. 미래통합당 윤희숙 전 의원은 “흰색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장 대표”라며 “이번 공천이 마무리되면 백의종군을 결심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빨간 당 출신이 빨간색을 안 입는 자기모순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도 “장 대표가 확장하지 못했다면 후보들이 확장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달엔 장 대표의 지원 유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본사에 대한 가맹점주들의 집단행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서울시당위원장을 맡은 배 의원도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의 서울 지지율 13%의 주역 장동혁 지도부가 기초단체장 후보를 못 구한 지역의 후보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선거 패배 가능성이 내·외부에서 연이어 제기되고 있지만, 국민의힘 지도부에 대해선 “변화할 의지도, 대책도 없는 것 같다”는 평이 나온다. 이 같은 상황은 카츠와 메어가 이미 이론적으로 짚었다. 이들은 “카르텔 정당은 국가 자원을 독점하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바둑으로 치면, 국민의힘은 여러 개의 돌로 넓게 자리 잡은 곤마인 ‘대마’와 비슷하다. 시사 분야에서 관용적으로 잘 쓰는 표현 중 하나는 ‘대마불사’다. “대기업이나 대형 금융기관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망하지 않는다”는 관용 표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는 대마불사로부터 비롯됐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상황은 당시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의 해체였다. 김우중 당시 회장은 ‘세계 경영’이라면서 해외 업체를 공격적으로 인수했다. 그러다 IMF 금융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거쳤지만, 삼성자동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 과정에서 엄청난 빚을 져 결국 워크아웃을 선언했다. 김 전 회장도 해외로 도피했다. 대우그룹은 그렇게 해체됐다. 국제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캐나다의 집권당 진보보수당은 경제 실정과 내부 갈등 끝에 구심력을 잃고 연이은 당원 탈당 사태를 겪었다. 그 결과 150석을 넘게 보유했던 거대 여당이 선거 한번에 2석만 건지는 참패를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에서도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했던 사회당은 지난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강경한 좌파 성향 브누아 아몽 대선후보를 선출했다. 그러자 사회당 소속 정치인 다수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창당했던 신생 정당 앙 마르슈로 옮겼고, 당은 선거에서도 참패했다. 반대로 민주당은? 민주당은 대구시장 선거 승리를 위해 대구에서 일정한 기반을 갖추고 있고 선거 승리 경험도 있는 김부겸 전 총리를 대구시장 후보로 선출했다. 이어 지난 8일엔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김 후보와 함께 대구 농수산물도매시장을 방문하는 등 승리 의지를 드러냈다. 구인난을 겪고 있는 국민의힘과 달리, 민주당에선 추미애 의원이 치열한 경선 끝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돼 주목받고 있다. 대마불사는 과연 영원한 걸까. 대마불사만 믿고 배짱 영업을 해도 되는 걸까. 대우그룹 해체는 국민의힘에 어떤 의미를 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