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먹어도 고' 안철수 꽃놀이패

예보 없이 ‘안풍’이 분다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찾아왔다. 국민의당이라는 군소정당에 대중이 빛을 비춰주고 있다. 최근 지지율이 급격히 올라간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는 요즘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이리해도 좋고 저리해도 좋은 꽃놀이패가 드디어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또 철수’ ‘간철수’ ‘안초딩’. 그간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 대선 국면마다 들어왔던 조롱 섞인 별명이다. 정치적 양보를 할 때마다 대중은 “이름처럼 또 철수한다”며 놀려댔고, 정치적 판단을 유보할 때마다 “간보는 간철수”라며 조롱했다. 지난 대선 TV토론에서는 유치한 토론 자세로 일관하는 게 초등학생 같다고 “안초딩”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갑자기 
‘떡상’

그랬던 그에게 드디어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 일컬어지는 이번 대선 국면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반사이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거대 양당 후보에 대한 각종 의혹과 논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흠결 없는 안 후보의 지지율이 조용히 올라가고 있다.

지난 5일, 엠브레인·케이스탯·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등 4개의 여론조사 기관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안 후보는 12%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 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36%,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는 28%를 기록했다. 한 주 전의 결과에 비해 이 후보는 3%포인트(지난주 36%)하락했고, 윤 후보는 변화가 없었다. 안 후보는 지난주에 비해 6%포인트 상승했다.


한편 같은 여론조사에서 ‘도덕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후보가 누구냐’는 질문에 안 후보가 35% 응답률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17%로 2위, 윤 후보가 14%로 3위, 이 후보가 13%로 4위를 차지했다. ‘모름·무응답’은 19%였다.

뒤이은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안 후보의 파란은 계속됐다.

6일, MBN의 의뢰로 실시한 알앤써치의 여론조사에서도 안 후보는 12% 지지율을 기록하며 3위를 차지했다.

해당 여론 조사에서는 이 후보가 38%로 1위 윤 후보가 34%로 2위를 차지했다. 야권 후보 단일화에 대한 의견을 묻는 조사에서도 안 후보로의 단일화 의견이 50%를 넘으며 윤 후보를 앞섰다. 

또, 야권 대선후보로 여권의 이 후보와 양자대결을 펼칠 시 가정한 여론조사에서 안 후보는 41% 지지율을 받으며 33%를 받은 이 후보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질렀다.

단순 지지도 상승을 넘어 야권의 대선후보로, 그리고 최종 대통령으로 안 후보가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대선이 두 달가량 남은 상황에서 지지율이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물며, 거대 당이 아닌 소수당의 후보가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는 일은 그만큼 후보 개인의 인기도가 높다는 뜻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

이를 알고 있는 안 후보는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신년 인사회에서 “내가 당선돼서 정권 교체하고 시대를 바꿀 것”이라며 “대한민국 정치권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동굴 안 개구리처럼 하늘도 쳐다보지 못한다. 나라도 열심히 해서 어떻게 하면 세계 역학구조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고 미래 먹거리를 만들 수 있는지 등을 대선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올리겠다”고 한껏 들뜬 기분을 전했다.

밑바닥서 캐스팅보트로 우뚝 
2012년 대선 이후 가장 주목

대선을 앞두고 안 후보의 존재감이 이만큼 부각된 것은 지난 2012년 대선 이후로 처음이다.

특정 예능프로그램에서 청렴결백한 이미지를 어필하며 인지도를 쌓아가던 그는 이후 ‘시골의사’ 박경철씨, 방송인 김제동씨와 함께 청춘콘서트를 진행하며 2030 청년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방송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넓혀오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부터다. 안 후보 측근의 주장으로 ‘서울시장 출마설’이 돌며 화제가 됐다.

<중앙일보>는 당시 안 후보의 서울시장 출마설을 제기하며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는 당시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지지를 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후 이루어진 각종 매체의 여론조사에서도 줄곧 1위를 기록한 안 후보는 이를 계기로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과 야당이었던 민주당을 동시에 긴장케 하는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이른바 ‘안철수 돌풍’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유력 서울시장 후보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으나, 급작스레 당시 무소속 박원순 후보와 단일화를 선언하고 그에 대한 지지 성명을 내며 자리를 양보했다.

박 후보는 5% 지지율에 그쳤던 후보였으나, 안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한 후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해 결국 서울시장에까지 당선됐다. 이를 두고 대중은 “5%에게 양보한 50%후보” “아름다운 양보”라며 안 후보에게 찬사를 보냈다.

양보 이후 안 후보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고, 이는 2012년 대선까지 이어졌다. 언론은 차기 대선 여론조사 대상에 항상 안 후보를 포함시키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안 후보는 근소한 차이지만 다른 후보들을 앞질렀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1:1 가상대결에서 43%를 기록해 40%였던 박 후보를 따돌렸고,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59%를 기록해 32%의 박 후보를 상당한 차이로 압도했다.

당시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16%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안 후보는 2030의 젊은층·대학생·호남 지역에서 60% 이상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수도권에서도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해 차기 유력한 야권 후보로 떠올랐다.

이런 보도가 쏟아졌음에도, 안 후보는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며 기존처럼 정치에 대한 뜻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때까지만해도 정계 전문가들과 대중은 그를 대선에서는 보기 힘들겠다는 예측을 했다.

이런 예측을 깬 건 안 후보 본인이다. 2012년 9월 19일 안 후보가 직접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그는 양당에 편승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 선언을 했다.

이쪽도 꽃길
저쪽도 꽃길


당시 안 후보는 출마 선언문에서 “내 역량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국가의 리더라는 자리는 절대 한 개인이 영광으로 탐할 자리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며 “지금까지 국민들은 정치 쇄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18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함으로써 그 열망을 실천해내는 사람이 되려 한다. 주어진 시대의 숙제를 감당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여론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고, 그 무게에 대한 책임을 비로소 진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때 안 후보는 비로소 정계에 정식 데뷔한 것이다.

안 후보의 존재감은 이때 가장 빛났다. 당시 제1 야당의 문 후보를 앞지르는 지지율을 보이며 무소속 후보로는 처음으로 대권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돌았다.

다자간 대선을 가정한 여론조사에서 박 후보에게 밀리긴 했지만, 1:1 가상대결 시에는 박 후보를 이기는 결과가 곳곳에서 나왔다. 

안 후보의 대권 도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야권 후보 단일화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안 후보는 출마 당시 “새누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며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과는 거리를 두는 기조를 보였다.

이후 정치적 행보에서도 친야 성향을 보여 문 후보와의 단일화 문제는 2012년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화려한 정계 데뷔에 이어 정권 심판론을 이어간 안 후보는 이때 주가가 가장 높았다고 평가받는다.

누군가의 당선에 일조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고, 본인이 당선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안 후보의 상황은 2012년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다. 이 후보와의 1:1 가상대결에서 근소하게 앞서고 있고, 야권의 단일후보 적합도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화려했던 정계 데뷔 때만큼 좋은 기회가 안 후보에게 다시 한 번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비교적 주목을 덜 받고 있던 안 후보로선 뜻밖의 호재다. 두 자릿수 지지율에 힘입어 대선에서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독자 행보를 계속 이어가 대선에서 존재감을 부각한 다음 곧 이어지는 제8회 지방선거에서 무게감 있는 자리에 출마해 당선을 노려볼 수도 있다.

물론, 윤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해 본인이 직접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경우의 수다.

이미 이번 양당은 안철수 끌어안기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다. 안 후보를 진영 내로 불러들이면 필승이 보장된다는 계산하에서 보이는 행보다.

양보는 없다
행복한 고민

먼저 스타트를 끊은 것은 민주당 송영길 대표 쪽이다. 그는 지난해 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라는 건 연합하는 것이다. 안 후보가 단독의 힘으로 집권할 수 있으면 모르겠으나 쉽지 않지 않겠느냐”며 “당내 후보와의 단일화 부정 여론도 그렇게 높지는 않다”고 러브콜을 보냈다.

이어 “이 후보와도 단일화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여러 가지 국민 통합의 미래를 계속 제안할 것”이라 덧붙였다.

첫 제안은 여당에서 시작됐지만, 러브콜의 강도가 센 것은 제1 야당인 국민의힘 쪽이다. 갖가지 내홍을 겪으며 대선 파국에 직면해 있는 국민의힘은 보다 적극적으로 안 후보 영입에 나섰다.

국민의힘 선대위는 지난달 27일 안 후보의 측근으로 알려진 김민전 경희대학교 교수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그는 지난 대선 내내 안 후보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국민의힘의 한 관계자는 지난 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윤 후보와 안 후보 간 단일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대비하고 있다”며 "하지만 안 후보와 단일화 게임이 훨씬 더 앞당겨져 시작될 것 같다“고 주장했다.

당초 안 후보와의 단일화에 크게 관심 없었던 국민의힘 측이 윤 후보의 지지율 하락과 예상보다 높아진 안 후보의 지지율에 크게 당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거듭되는 양측의 러브콜에도 안 후보 측은 계속해서 거부 의사를 천명하고 있다.

국민의당 권은희 원내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이 정치세력이 만들어 놓은 난장판을 국민의당이 회복시키고 있다”며 “기존의 안철수의 지지층들이 다시 결집하고 있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이어 “설전에 안철수와 또 다른 후보의 양자 대결구도가 이뤄질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며 단일화 가능성에 대해 일축했다.

안 후보의 과거 사례를 보면, 그의 정치 인생에 더 이상 단일화란 이름의 ‘양보’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후보 자리를 양보해서 좋은 결과를 받아든 적이 한 번도 없다.

좋지 않은 단일화의 기억
야도 여도 아닌 ‘나’로

앞서 언급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의 단일화도 한 예다. 대대적인 양보를 감행하며 안 후보가 밀어줬던 박 전 시장은 성추문 문제를 일으켜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를 두고 안 후보는 “파렴치한 행동으로 1000만 시민의 자존심을 짓밟은 시장”이라 비난하며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과거의 단일화를 후회하는 행보를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마찬가지다. 안 후보는 2012년 당시 단일화했던 문 대통령과 함께 정권교체의 의지를 다졌으나, 선거 패배 후 ‘안철수 책임론’이 붉어지며 대선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문 대통령 측은 “안 후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아서 졌다”는 프레임으로 안 후보 측을 공격했고, 안 후보는 “어처구니가 없다”며 황당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이때의 감정은 이후 새정치연합에서의 갈등으로까지 번지며 둘은 정치적으로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권 원내대표는 “민주당과 안 후보 사이에는 ‘드루킹’이라는 큰 강이 놓여져 있다”며 “이 강이 없는 것처럼 단일화를 제안하는 게 상식에 맞지 않는다”면서 ‘드루킹’이라는 또 다른 이유를 들어 ‘여권 단일화 불가론’을 이어갔다.

안 후보는 2017년 당시 민주당 진영이 드루킹이라는 불법 댓글 프로그램을 이용해 본인을 공격했다고 줄곧 주장해오고 있다.

이후, 사법부가 드루킹 관련 사건에 유죄를 선고한 결과를 보고, 안 후보는 “저 안철수를 죽이려한 추악한 범죄”라며 민주당 진영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또, 야권의 단일화 제안에도 “제1 야당인 국민의힘이 양보하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더 이상 본인이 양보하는 쪽은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이번 단일화에서는 자신이 양보 받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는 지난 6일 <KBS>에 출연해 “후보 중 누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가족 문제가 없는지, 비전이 정확한지, 전 세계적인 그룹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문적인 역량이 있는지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후보로 단일화 돼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마의 20%
이대로 쭉?

사실 이리 가도 좋고, 저리 가도 좋은 사람은 이번 대선에서 안 후보뿐이다. 단일화에 성공해 야권 단일 후보로 대선에 나가는 것은 가장 좋은 수고, 단일화에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대선을 완주해 정치인으로서의 체급과 인지도를 키우는 것도 좋은 수다. 양당의 후보처럼 지면 감옥 가는 정치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도 않다. 대선 레이스에서 뜻밖의 ‘떡상’을 만끽하며 안 후보는 연일 혼자 웃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2017년 대선 안철수는?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는 사실 이번 대선이 세 번째다.

2012년 대선 출마 선언으로 정계에 데뷔했을 때만큼 큰 역할을 하진 못했지만, 그는 2017년에도 대선에 출마해 대권을 노린 경험이 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과 맞물려, 언론에서는 ‘보수 심판론’이 급부상했고 야권의 맹주였던 당시 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유력한 야권의 대선후보로 꼽혔다.

당초 정계는 두 사람의 싸움으로 대선을 지켜봤다.

그러나, 막상 본선에 들어간 대선판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문-안의 싸움이 아닌 문-홍의 싸움이 돼버린 것이다.

대통령이 탄핵된 상황에서 당시 여당 대선후보가 된 새누리당 홍준표 대선후보는 여러 구설수와 실책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을 끌어올려 끝내 24%의 지지를 받아 2위로 대선 레이스를 마감했다.

안 후보는 당초 높았던 지지율이 잘못된 선거 캠페인과 비효율적인 전략으로 점차 떨어져갔고, 지지층이 겹치는 당시 바른정당 유승민 대선후보에게 표를 상당수 빼앗기며 21%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대선을 마감했다.

문 후보와 각축전을 벌일 것이라는 대선 초 예상과 비교하면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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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