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해진 안철수, 보선행? 대선행?

보선 완행이냐 대선 직행이냐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이 국민의당과 같은 실용정치의 노선을 타면서 야권 재편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정치권에선 재편 이후 안철수 대표의 서울시장행도 점쳐진다. 양당은 과연 내년 재보궐선거 전에 손을 잡을 수 있을까.
 

▲ ▲악수 나누는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최근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이 ‘중도로의 확장’을 선포하면서 국민의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내년 4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당의 노선을 정확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민의당은 탈진영적 중도정치를 지향한다. 특정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일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탈 진영적
중도정치

안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뒤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당시 국민의당은 양당체제 타파를 내세우며,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중도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후 정치권에는 이례적인 ‘녹색돌풍’이 불었다. 국민의당은 진영논리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고, 신생정당이 원내 38석을 얻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국민의당의 상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안 대표는 2017년 대선서 패배했고, 2018년 바른정당과의 합당 전후로는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같은 해 그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 3위로 낙선한 뒤,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창업주’가 떠난 바른미래당 내부에선 안철수계·유승민계·손학규계 간의 당권 싸움이 계속됐다. 제3지대에 대한 민심의 실망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안 대표는 다시 녹색돌풍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21대 총선에 뛰어들었다. 20대 총선과 마찬가지로 당명은 국민의당으로, 노선 역시 중도실용으로 정했다. 정치권에서는 녹색돌풍이 ‘오렌지돌풍’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흘러나왔다.

안 대표 역시 국민의당의 낮은 지지율에 쉽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2016년에도 3월 초까지 한국갤럽 지지율이 8% 나왔고 다른 여론조사기관에서는 2%, 3%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것이 중도층, 무당층의 특성”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21대 총선은 지난 총선과 달랐다. 양 진영의 극단적 대립이 이어졌고, 중도 세력이 설 곳은 없었다. 총선 당시 통합당에 비호감을 느낀 중도층은 국민의당이 아닌 더불어민주당을 택했다.

통합당 중도 확장 국민의당 노선 겹쳐
양당 ‘정책공조’ 넘어 선거연대까지?

무엇보다 과거 국민의당의 대표지지 세력이었던 호남 민심이 이탈한 상태였다. 지역 기반이 없는 정당은 현 정치구도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결국 국민의당은 정당 득표율 6.8%를 기록하면서, 원내 비례대표 3석에 그쳤다. 이는 당초 당이 목표했던 20%에 크게 미달한 성적이었다.

안 대표의 긴 정치 공백과 잦은 창당에 의한 피로감이 국민의당 흥행 실패의 대표적 원인으로 꼽혔다. 특히 안 대표의 계속된 탈당과 창당은 그의 최대 강점이었던 신선함과 참신함을 앗아갔다. 아울러 그의 메시지나 정책이 기존 정당과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는 점도 지목됐다.


총선 전 당내에선 안 대표의 영향력이 이전과 다름을 감지하고, 선거연대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이 야권 대열에 합류해야 21대 총선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분석 때문이다.
 

▲ ▲발언하는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고성준 기자

하지만 안 대표는 독자노선 의지를 꺾지 않았다. 안철수계 인물들의 통합당행이 계속됐지만, 그는 “어떤 길을 가시든지 응원하고 다시 개혁의 큰길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씁쓸한 내색을 감췄다.

하지만 안 대표가 2월 귀국 직후부터 21대 총선까지 내세운 메세지는 일관적였다. 그는 중도실용 정치를 강조하며, 편을 가르는 정치판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국민의당은 비록 3석에 그쳤지만, 안 대표에게 선거만을 위한 연대와 통합은 없었다.

외로운 중도 노선을 걷고자 한 그의 약속은 지켜졌다.

다만 그는 범보수 세력들과 정책연대를 이어왔다. ‘국민 미래포럼’이 대표적인 공동 연구모임이다. 지난 6월부터 국민의당은 통합당과 이를 진행하며, 당 차원의 보폭을 맞추고 있다.

긴 공백
잦은 창당

일각에선 포럼이 야권 연대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국민의당 권은희 원내대표는 포럼서 ‘국민의당을 포함한 보수 야당’ ‘우리 보수 야당’이라는 표현으로 양당의 정책 노선이 동일함을 시사하기도 했다.

국민의당은 오는 9월, 임시국회에 앞서 당의 방향성을 담은 ‘37대 정책’을 공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당이 앞서 ‘10대 정책’을 내놓은 만큼, 양당은 9월 정기국회 중 함께 추진할 수 있는 부분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권 원내대표는 “지금은 수해 상황으로 미뤄지고 있지만 정책 연대와 관련해 통합당 김성원 원내수석부대표와 미팅을 해왔다”며 앞으로 정책 공조를 이어갈 예정임을 밝혔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좌클릭 행보 덕에 야권 재편의 시기가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180석의 슈퍼 여당의 거침없는 행보가 범야권을 위협하고 있는데다, 김 위원장의 관점과 국민의당의 노선이 비슷해 범야권의 통합행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해석이다.

통합당의 좌클릭 역시 안 대표로서는 환영할 대목이다. 지금까지 통합당의 극우적 색채는 통합당과의 합당에 부담으로 작용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통합당은 극우세력과는 선을 긋고 중도층 끌어안기에 나섰다.

통합당은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꼽히는 8·15 광화문 집회의 태극기부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김 위원장은 5·18 묘역서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극우와의 결별을 선언한 셈이다.
 

▲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문병희 기자

이뿐만이 아니다. 통합당은 기본소득제 도입을 앞세운 새로운 정강·정책을 공개했다. 자유시장경제를 강조했던 과거와 달리 경제민주화, 양성평등과 같은 어젠다를 내세우며, 중도로의 확장에 무게를 실었다.

권 원내대표 역시 김종인 비대위의 좌클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통합당을 실용정당으로 바꾸려 노력하는 것을 저희가 감지했다. 통합당과 손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적극적인 연대 메시지를 냈다.

정부여당 향해
공격수위 높여

이미 통합당에는 안철수계 인물들이 곳곳에 포진돼있는 만큼 양당의 연대 흐름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안 대표의 측근이었던 김수민 전 의원은 당의 홍보본부장을 맡아 당명 개정 작업 등 당의 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고, 김삼화 의원 역시 통합당의 성폭력 대책 특별위원으로 임명된 상태다.

양당의 기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대표적인 예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금지 및 추미애 법무부 장관 탄핵소추안이다. 두 당은 탄핵소추안을 공동으로 결의해 밀어 붙였다. 이 외에도수해로 인한 산사태 피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태양광 사업과 관련된 국정조사를 추진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안 대표가 최근 정부여당을 향한 공격 수위를 높이면서 통합당보다 더 강경한 메시지를 내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안 대표는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이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크게 상처받은 국민 가슴에 염장을 지르는 것”이라며 "(문 대통령은) 신문도 안 보고 여론 청취도 안 하느냐”며 신랄히 비판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서 과열 현상을 빚던 주택 시장이 안정화되고, 집값 상승세가 진정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 대목을 문제 삼은 것이다.

통합당은 외연확장을 위해 국민의당에 계속 ‘러브콜’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당내에서는 안 대표가 내년 4월 재보궐선거나 2022 대선서 통합당과 손을 잡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중도 실용 이미지의 국민의당이 가지는 상징성은 3석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책을 통한 ‘좌클릭’보다는, 국민의당과 합쳐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는 분석이다.

‘좌클릭’ 빨라진 야권 개편
안, 이어지는 러브콜 응답할까?

정치권에선 통합당과 국민의당이 내년 4월 재보궐선거 전 합치게 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내년 재보궐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다음 대선까지 승기를 이어가기 위해 양당이 연대를 선택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양당은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상호보완적 관계가 됐다.

국민의당에게는 ‘원맨 정당’이라는 평가로부터 벗어나 다음 대선까지 존재감을 부각할 수 있는 기회다. 통합당으로서는 중도 이미지가 강한 안 대표가 매력적이다. 통합당 총선백서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안 대표가 통합당의 대권 레이스에 뛰어들면 결과를 떠나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서 한 번 낙선을 경험했던 만큼 2022 대선후보로 직행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울러 당장 선거보다는 혁신 경쟁과 야권 파이를 키우는 작업을 강조해왔다. 당이 새로운 비전과 정책으로 경쟁한 후, 야권이 제대로 혁신할 때 비로소 정부여당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국민의당 최고위원회의

안 대표는 야권의 중도화를 이뤄, 합리적 개혁 보수의 이미지를 구상하고 있다. 그렇게 야권 전체의 파이가 커져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안 대표의 영향력은 이전 같지 않다. 안 대표가 내놓는 정책들은 거대 양당의 물살에 묻히고 있다. 여전히 안 대표의 정치 노선에 회의심을 갖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안 대표가 지금까지 이어진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과거와 전혀 다른 안철수를 보여줄 시기가 된 것이다.

양당의 주도권 싸움 역시 안 대표에게 큰 과제다.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계속해 지지부진 하다면, 합당 과정 속 그가 주도권 싸움서 밀릴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주요 선거 때마다 후보로 꼽히는 안 대표지만, 현재와 같이 당 지지율이 5% 내외를 유지한다면 만년 후보로만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현 시점서 안 대표에게 필요한 건 이슈 선점과 메시지 홍보다. 체급 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안도 필요하다. 다만 이는 거대 양당의 어젠다에 묻힐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당이 SNS, 유튜브 등 국민들과의 소통창구를 적극 활용할 것으로 보이는 배경이다. 안 대표가 최근 진중권 전 대표와 유튜브 채널서 정부·여당의 문화를 공개 비판한 영상이 크게 이슈가 된 것도 좋은 예다.

각자도생?
결국 연대?

안 대표는 야권의 혁신적 재편이 이뤄진 후에 시장 선거를 바라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지금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물론이고 대선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든 야권 전체의 파이를 키울 때다. 그게 가장 중요하기에 그에 전념하려 한다. 다시 말해 민심을 얻는 게 먼저다. 선거부터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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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