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80세’ 최고령 감독 정지영

멈추지 않는 ‘40년’ 영화 인생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현역 최고령 노장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정지영 감독이 또 하나의 역작을 써냈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내 이름은>이 개봉과 동시에 입소문을 타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78주년이 된 이번 4월, 영화는 오래 묻혀 있던 그날의 역사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중이다.

정지영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이다. 현재 80세로 한국 영화계에서 사실상 최고령 현역이다. 1946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난 정 감독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김수용 감독 밑에서 조연출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고, 1982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했다.

사회파 감독
노장의 파워

데뷔 이후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90년 영화 <남부군>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과를 거두며 정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을 연출하며 199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정 감독의 작품들은 전쟁, 이데올로기, 개인의 삶을 다루며 현실과 밀접한 소재를 선택하는 특징을 보였다.

다만 1990년대 후반 <블랙잭> 등 일부 작품의 흥행 부진 이후 한동안 연출 활동이 뜸해졌다. 약 10년에 가까운 공백기 동안 한국 영화산업은 대기업 중심의 투자·배급 구조로 빠르게 재편됐고, 상업영화 중심의 제작 환경이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정 감독은 영화 연출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이후 2012년 영화 <부러진 화살>로 복귀하며 다시 주목을 받았다. 정 감독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는데 사법 사건, 금융 문제, 국가 폭력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영화로 다뤘다.

그 대표작 중 하나인 영화 <부러진 화살>은 정지영 감독의 복귀작이자, 그가 대중적으로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약 10년간 연출 공백을 가졌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이 영화는 2007년 발생한 이른바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대학 재임용 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패소한 교수가 담당 판사를 찾아가 석궁을 쏜 사건을 바탕으로, 재판 과정과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배우 안성기가 주연을 맡아 사건의 당사자를 연기했다.

<부러진 화살>은 제작비 약 5억원 규모의 저예산 영화로 제작이 시작됐지만, 개봉 이후 빠르게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개봉 직후 손익분기점을 넘어섰고, 최종 관객 수는 300만명을 돌파하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기록했다. 대형 배급사의 지원 없이 입소문을 통해 흥행하며 주목받았다.

흥행과 함께 영화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작품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모순과 사법부의 권위적인 태도를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반면 비판도 적지 않았다. 영화가 특정 시각에 치우쳐 사건을 재구성했다는 지적과 함께, 법적 해석을 왜곡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법·금융·국가 폭력까지
실제 사건 통해 사회 재조명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블랙머니>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정 감독이 2012년 <남영동 1985> 이후 약 7년 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2000년대 초반 발생한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 사건’을 모티브로, 금융 권력과 사법 시스템을 둘러싼 문제를 다룬 범죄물이다.

작품은 외환위기 이후 외환은행이 해외 사모펀드 론스타에 매각되는 과정과, 이후 벌어진 배당 및 재매각 과정을 배경으로 했다. 해당 사건을 중심으로 검찰 내부의 갈등과 수사를 따라가며, 금융 시스템과 권력구조의 문제 서사로 풀어냈다.

금융 비리를 추적하는 검사로, 배우 조진웅이 주연을 맡았다. 극은 사건을 파헤치는 수사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관련 인물 간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통해 긴장감을 형성했다.

영화는 실화 기반 작품이라는 점에서 개봉 당시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 이후 정 감독은 다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이어가며, 공권력과 개인의 관계를 다룬 영화 <소년들>을 선보이게 된다. <소년들>은 정 감독이 2023년에 선보인 작품으로, 1999년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에서 발생한 이른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해당 사건은 당시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청소년 3명이 수사 과정에서 범인으로 특정돼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사건 발생 이후 수사 과정과 이후 재수사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극의 주요 흐름은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과,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사건 초기 수사에서 피의자들이 어떻게 특정됐는지, 이후 사건이 어떤 경로를 거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됐는지 등이 순차적으로 그려진다.

작품은 여러 인물의 시점을 통해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 사건에서는 특정 인물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구조가 명확하지 않았던 만큼, 영화에서는 사건을 따라가는 중심 인물을 설정해 서사를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형사 캐릭터가 주요 축으로 등장하며, 배우 설경구가 역할을 맡았다. 형사 캐릭터는 사건 당시 수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인물로 설정돼있으며, 이후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극은 해당 인물이 사건을 재검토하는 과정과, 관련 인물들을 만나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가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이를 통해 사건의 초기 수사 과정과 이후 재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연결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와 함께 영화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의 상황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실제 사건
모티브 전문

사건 당시 청소년이었던 이들은 수사 과정에서 범인으로 특정됐으며, 이후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됐다. 영화는 이들의 시점과 상황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사건의 흐름을 구성했다.

시간이 흐른 뒤 사건이 다시 검토되는 과정과,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는 과정까지를 포함한다. 작품에는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는 인물, 법률 관계자 등 여러 인물이 서사에 포함되며, 사건의 전개 과정을 다각도로 보여줬다.

영화에는 배우 조진웅도 출연해 주요 인물 중 하나를 맡았다. 그는 사건과 관련된 역할로 등장하며, 극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장면에 관여한다. <소년들> 역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 최근 정 감독이 내놓은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내 이름은>도 입소문을 빠르게 타고 있다. 영화는 촌스러운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하는 18세 소년 ‘영옥’과, 오래전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는 어머니 ‘정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모자 이야기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가며 점점 과거의 한 사건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영옥은 학교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내지만, 자신의 이름이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늘 불만을 품고 있다.

별것 아닌 고민처럼 보이지만, 그 이름을 둘러싼 감정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특히 서울에서 전학 온 학생이 등장하면서 교실 분위기가 달라지고,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힘으로 질서를 잡으려는 전학생이 등장하면서 교실은 점점 긴장 상태로 변해간다.

반면 어머니 정순은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만, 특정한 계절이나 상황이 되면 이유 없이 쓰러지거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증상을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잃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으며,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영화는 이런 정순의 상태를 단서로 삼아 점차 과거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이 작품은 1998년과 1949년, 두 개의 시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현재의 교실과 과거의 제주가 교차되면서,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정 감독은 이 같은 구성에 대해 “처음부터 4·3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은 어렵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관객이 따라가면서 ‘찾아가게 만드는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영화는 사건의 전개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인물의 기억과 감정을 통해 과거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정순이 떠올리는 기억 속에는 보리밭을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 함께, 설명되지 않는 폭력의 장면들이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아픈 역사
제주 4·3

군인들의 움직임, 외부에서 들어온 인물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충돌 등은 사건의 전체를 보여주기보다는 분위기와 감정으로 전달된다.

정 감독은 “끔찍한 국가 폭력을 갑자기 보여주면 관객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그래서 현재의 학교 이야기를 하나의 완충지대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과거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나란히 배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폭력’이다. 다만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폭력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확대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정 감독은 “폭력은 외부에서 새로운 질서를 강요할 때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며 “국가든, 사회든, 학교든 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영옥이 겪는 교실 내 갈등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힘으로 질서를 만들고, 다른 학생들은 그 흐름에 휩쓸린다. 처음에는 사소한 갈등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집단적인 형태로 변해간다. 영화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한다. 이야기의 또 다른 중심에는 ‘이름’이 있다.

영옥은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정순은 그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 이름이 불쑥 떠올랐다”는 정도의 설명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이름은 과거와 연결된 중요한 단서로 드러난다.

정 감독은 “이 영화는 4·3의 이름을 함께 찾아가는 이야기”라며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난 뒤 ‘4·3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게 되길 바랐다”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는 특정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가깝다.

제작 과정 역시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달랐다. 이 작품은 대형 투자사의 지원 없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시작됐다. 약 1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참여해 4억원이 모였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이 진행됐다. 정 감독은 “이 영화에는 특정 투자자가 없다”며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만든 영화”라고 강조했다.

이어 “요즘 시세로 보면 60억에서 70억은 들어가야 하는 작품인데, 배우와 스태프, 심지어 나까지 모두 희생하면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제작 여건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참여자들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베를린영화제 초청…독립·예술 1위
화제작 <내 이름은>…개봉 흥행 기류

주연은 염혜란 배우가 맡았다. 정 감독은 캐스팅 과정에 대해 “이전 작품에서 짧게 함께 작업했는데, 연기를 보고 반했다”며 “다음 작품은 무조건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번에는 아예 주인공으로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이어 “연기가 굉장히 리얼하고 맛깔난다”며 “이 인물은 배우가 완성했다고 봐도 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정순이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모두 끌고 가는 중심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개봉 전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며 해외에서 먼저 공개됐다. 정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나서 스스로 잘 만들었다는 확신이 없었다”며 “제작비도 충분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찍은 것도 아니어서 불안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베를린에서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어 안도했다”고 말했다. 국내 개봉 이후에는 독립·예술영화 부문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 등 긍정적인 관객 반응도 이어졌다. 특히 상영관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관객을 끌어모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개봉 당일인 지난 15일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일반 관객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날 관람은 ‘문화의 날’을 맞아 마련된 자리로, 대통령 부부가 시민들과 함께 상영관을 찾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전에 신청을 받아 선정된 관객 약 160여명이 함께 자리했으며, 상영 전후로 감독과 배우들이 참여한 무대 인사도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상영 이후에 무대에 올라 “국가 폭력에 의한 피해는 학살과 다름없다”며 “이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어 “영화가 인간성을 회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관람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자리한 김혜경 여사 역시 “영화를 보는 동안 제주 4·3 희생자 유가족이 떠올랐다”고 소감을 전했다.

다만 정 감독은 이 같은 정치권의 관심과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제작을 시작한 작품”이라며 “개봉 시기와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단순히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4월은 제주 4·3을 다시 생각해 볼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관객들과 만나는 시점은 적절하다고 본다”고 부연했다.

해외서도
호평 일색

정 감독은 이번 작품을 ‘대중 영화’라고 규정했다. 그는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며 “무겁기만 한 영화가 아니라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영화를 통해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마무리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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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자란 ‘명픽’ 출마자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전국 단위 선거에서는 후보의 인지도도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후보들의 체급은 대통령이 언급하기 전과 후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의 친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법.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재명픽’ 후보들의 수난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하정우 부산 북갑 후보가 혹독한 정치 신고식을 치렀다. ‘손털기’부터 ‘오빠’ 논란까지, 정치 초보를 겨냥한 유권자들의 회초리가 매섭다. 이재명 대통령이 뽑은 인재라는 점에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컸다는 해석이 나온다. 당정이 키웠지만… 하정우 후보는 대통령실 신설 직책인 인공지능(AI) 미래기획수석 출신으로 지난해 6월 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인물이다. 그는 향후 5년간 100조원 규모로 예고된 국가 AI 투자 및 인프라 전략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 등 이재명정부의 AI 산업을 이끌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유독 하 후보를 아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국무회의서 훈훈한 ‘케미’를 보여주는가 하면 대통령이 묻는 말에 막힘없이 답해 “우리 하GPT(하정우와 챗GPT를 합친 단어)는 다 알고 있네”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 후보의 차출설이 돌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민주당 전재수 의원의 부산시장 출마로 열리는 부산 북갑에 그를 전략공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다. 하 후보의 출마를 두고 청와대와 민주당 사이에는 불편한 기류가 맴돌았다. 지난 4월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AI 수석이던 하 후보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에 이 대통령은 국가경제자문회의에서 “우리 하GPT가 할 일이 많은데 작업 들어오는 것 같다. 작업 들어온다고 넘어가고 그러면 안 돼요”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청와대는 차출설에 선을 그었지만 당 지도부는 연일 하 후보의 이름을 거론하며 출마를 설득했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나서 “출마 여부는 하 수석이 결정하기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하 수석의 마음이 정해져야지, ‘나가라’ 해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가지 말라’ 해서 나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본인이 결정해야지, 대통령이나 당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가 “우리 당으로선 쉽지 않은 지역인 북갑에 하 수석 말고는 이길 후보가 없다”며 거듭 강조하자 결국 하 후보는 “고향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며 출마 결심을 굳혔다. 일련의 사건이 하 후보의 체급을 키우기 위한 당정 간의 약속 대련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지만 첫 선거 유세서부터 발목이 잡혔다. 유세 첫 일정으로 방문한 구포시장에서 상인과 악수를 한 뒤 양손을 비비거나 손을 터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면서 이른바 ‘손털기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국민의힘으로부터 “오만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하 후보는 “처음으로 수백, 수천명과 처음으로 악수를 하다 보니 손이 저려 무의식중에 손을 쳤던 것 같다”며 당사자를 찾아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하정우·정원오’ 호명하자 단숨에 관심·인지도 ‘쑥’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3일에는 ‘오빠’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을 찾은 정 대표는 구포시장에서 하 후보 지원 유세를 하던 중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여기 ‘정우 오빠’ 오빠 해봐요”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거듭 “오빠(해봐요)”라고 말했고 하 후보도 “오빠”라고 반응했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해당 장면이 담긴 영상을 SNS에 올리며 “62세 정청래 대표와 50세 하정우 후보가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에게 ‘오빠라고 불러보라’고 강요하는 모습은 참 낯뜨겁다. 망설이는 아이에게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재차 ‘오빠라고 해보라’고 재촉하는 모습은 일종의 아동학대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여성단체에서도 “성인지 관점의 부재”라며 두 사람의 행동을 규탄했다. 하 후보는 캠프를 통해 “오늘 지역 주민을 만나는 과정에서 아이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며 “이로 인해 상처받으셨을 아이와 부모님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정 대표도 민주당 공보국을 통해 “구포시장 방문 과정의 상황과 관련해 아이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돼 상처받으셨을 아이와 아이의 부모님께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원오 서울시장도 대표적인 ‘명픽’ 인물이다. 선거 초반 불거진 ‘칸쿤 여행지’ 의혹으로부터 겨우 벗어나나 싶더니 하 후보와 마찬가지로 구설에 오르내리며 곤욕을 치르는 모양새다. 정 후보는 지난해 12월 이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 한 여론조사를 공유하며 “정원오 성동구청장님이 잘하기는 잘하나 보다. 저의 성남 시정 만족도가 꽤 높았는데 명함도 못 내밀 듯”이라고 쓴 것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정 구청장은 “‘원조 일잘러’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더욱 정진하겠다”고 답했다. 이후 정원호 후보는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이재명정부와 손발이 맞는 서울시장”을 강조하며 다른 주자들과의 차별화에 나섰다. 그런 정 후보도 실언에 발목을 잡혔다. 지난달 CBS 라디오에 출연해 “시장직을 수행하는 사람이 대권을 바라보면 그때부터 불행해진다”며 “제가 경험해 본 박원순 전 시장, 그리고 오세훈 시장이 똑같다. 이상한 일들이 막 생기고 이상한 고집을 피우고 그런 것이 바로 대권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발언한 것이 화근이었다.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이름을 올린 만큼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대권보다는 시정에 집중하겠다는 취지였지만, 고 박원순 전 시장을 오세훈 시장과 동일시했다는 이유로 당내에서 논란이 됐다. 오만했나? 실수 또 실수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경선을 치렀던 전현희 의원은 “고 박원순 전 시장님을 오세훈 시장과 ‘똑같다’고 평가한 정원오 후보의 발언은 고인의 명예를 심각히 훼손한 것으로 철회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으며 박주민 의원은 “박원순 전 시장이 공도 있고, 과도 있겠습니다마는 오세훈 시장처럼 ‘대선에 눈이 팔려서 시정을 망쳤다’는 평가를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잘못된 말씀”이라고 지적했다. 정 후보는 자신의 발언으로 논란이 불거지자 SNS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정중하게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어 “저는 박원순 전 시장님 곁에서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고, 시장님의 고뇌를 지켜보면서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이라며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취지는, 서울시장은 오직 시민의 삶과 서울의 미래에 집중해야 하는 자리이며, 저 또한 그 책임에만 전념하겠다는 다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몇 주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컨설팅’ 논란에 휩싸였다. 남대문시장에서 ‘장사가 너무 안 된다’는 상인에게 “장사가 왜 안 돼요, 관광객이 이렇게 많은데”라며 “계속 이러지 마시고 컨설팅을 한번 꼭 받아보세요”라고 말한 것이 뒤늦게 회자한 것이다. 오세훈 후보가 “시민을 가르치느냐”며 공세를 퍼붓자 정 후보 캠프 측은 “오세훈 후보 측의 굴절된 마음이 굴절된 시각으로 민심 청취 상황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관련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국민의힘이 워낙 여건이 좋지 않다 보니 작은 일도 꼬투리를 잡아 크게 벌리는 것을 생존 수단으로 정한 것 같다”면서도 “네거티브 공격이 들어올 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선거철에 민심이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칭 타칭 ‘이재명픽’이라고 강조하는 이들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이재명의 선택’을 캠프 슬로건으로 내건 김용남 평택을 후보는 같은 곳에 출마한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 조국 대표와 설전을 벌이며 강도 높은 네거티브 공세를 주고받고 있다. 조 대표는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을 거쳐 민주당에 입당한 김용남 후보를 저격하며 “이정부의 국정 철학과 맞지 않다고 본다” “과거 김 후보가 대장동 사건을 거론하며 이 대통령의 무기징역을 주장했었다” 등 견제구를 던졌다. 살아남은 최후 1인 김 후보가 과거 보수 정당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조국 사태뿐 아니라 검찰개혁, 이태원 참사 등에 대해 내놨던 과거 발언을 재점화하기도 했다. 김 후보는 “과거 보수 정당에서 원내대변인 직책을 맡다 보니까 정파적 입장을 대변하는 상황에서 민주당 지지층이나 민주·진보 진영 분들에게 거북한 말씀을 드렸던 적이 많이 있었을 것 같다”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죄송스럽다”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도 조 대표의 사모펀드 등을 겨냥한 듯 “적어도 조 후보님과 관련해서 사실과 다른 말씀을 드렸던 기억은 전혀 없다. 지금 아무리 곰곰이 되돌려 봐도 사실관계는 틀림없어 보인다”고 말했고 이를 시작으로 친문(친 문재인)과 친명(친 이재명) 간의 갈등이 또다시 불거질 조짐이 보였다. 잡음이 커지자 민주당은 입단속에 나섰다. 지방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달 29일 정 대표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오만한 언행에는 지위를 막론하고 단호하게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이같이 밝히며 “당 대표인 저부터 불광불급·종횡무진·전광석화·지성감천의 낮고 겸손한 자세로 국민 속으로, 현장 속으로 달려가겠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이 힘을 못 쓰는 상황에서도 민주당이 책을 잡히자 일부 후보들이 ‘이재명 후광’을 믿고 안일하게 선거에 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대통령이 직접 띄워주고 밀어준 만큼 여권 프리미엄을 기대하고 있지만, 여론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개인 역량으로 승부를 봐야한다는 뜻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 철저하게 개인주의 성향”이라며 “이 대통령은 특정 인물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한 게 전부다. 그걸 가지고 ‘대통령이 뽑은 나’에 취해 선거를 그르치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어 “후보를 호명하고 몸값을 띄워주는 것까지가 이 대통령의 역할”이라며 “이후 어떻게 살아남는지는 철저하게 본인의 역량이고, 이 대통령은 여기서 끝까지 남는 이들만 자신의 그룹에 넣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친명’ ‘찐명(진짜 친명)’만 강조한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다 탈락했다”고 부연했다. 역량 부족? “자기 일은 스스로” ‘친명’ 훈장만 믿었다간 낭패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이재명의 남자’로 알려졌지만 이번 지방선거 공천에서 배제됐다. 김 전 부원장은 “안산·하남 어디든 국민께 심판받겠다”며 지도부에 신호를 보냈지만 민주당 지도부는 그의 출마가 보수 결집의 명분이 되는 등 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이 같은 선택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은 경기 지역 전략공천 결과 발표 후 김 전 부원장의 공천 배제에 대해 “이번 선거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정리한 것”이라며 “특정 후보의 리스크가 표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현장 후보들의 우려를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당내 친명계 의원들은 김 전 부원장을 ‘검찰 수사의 피해자’로 규정했고, 공천을 통한 정치적 명예 회복을 요구했으나 당 지도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재명 2기 지도부에서 최고위원을 지낸 친명 한준호 의원도 경기도지사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대통령의 ‘1호 감사패’를 받은 만큼 경기도지사 출마 당시에도 이 대통령의 의중을 등에 업고 나섰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2차 예선서 추미애 후보에게 밀려 패배했고, 정치권에서는 “큰 단위의 선거에서는 특정 인물과의 관계보다는 개인 역량이 중요한데 그 점을 간과한 것 같다”는 해석이 나왔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지금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이 안 됐다. 그런데 ‘한준호픽(한 후보와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며 “반면 지금 추미애 후보 같은 경우는 강성 지지층의 지원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인구도 가장 많고 당원도 가장 많은 경기도에서 추미애 후보가 한번에 후보를 확정했다”며 “이변이 일어났다. 권력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현역을 모두 물갈이하는 과감한 쇄신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출신이거나 이 대통령과 가깝게 일한 이들도 대거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인천시장 후보로 단수 공천된 박찬대 의원은 이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원내대표로 호흡을 맞췄던 핵심 인사다. 이정부 첫 정무수석인 우상호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강원도지사 후보로 1호 단수공천을 받았다.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이 직접 ‘입당하면 좋겠다’고 언급한 김상욱 의원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국민의힘에서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탈당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민주당 울산시장 후보가 됐다. 원팀이거나 업보거나 코스피 상승과 맞물려 이재명정부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지고 있지만 ‘대통령의 후광효과’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조언이 나온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대통령과의 친분을 앞세워 여권 프리미엄을 강조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지만 오로지 후광효과만 보려고 하는 현상도 늘어났다”며 “다만 우려가 되는 건 만약 이들이 모두 당선됐을 때, 시간이 지나고 다음 선거가 ‘심판론’으로 치러진다면 부정적 평가는 이정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