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성범죄 전과 의혹 황석희

믿고 보던 번역가의 어두운 과거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스타 번역가’ 황석희가 성범죄 전과 의혹이 드러나며 곤욕을 겪고 있다. 평소 보여주던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소신 있는 발언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온 만큼, 이를 접한 대중 사이에서는 그에게 배신감이 크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황석희는 1979년생으로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영화 번역가다. 자막의 뉘앙스를 살려내는 감각과 캐릭터의 말맛을 살리는 번역으로 입소문을 타며, 이른바 ‘스타 번역가’로 자리 잡았다. 대학 시절 그는 영어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주변 동기들처럼 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시험에 매달릴 자신이 없었고, 교사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다. 대신 그가 선택한 방향은 ‘번역’이었다.

길고 긴
무명 시절

특히 책 번역가를 꿈꾸며 진로를 설정했지만, 초보 번역가에게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현실적인 선택으로 시작한 것은 계약서, 매뉴얼, 서신 등을 다루는 이른바 ‘단순 번역’ 작업이었다.

대학 4학년 시절부터 각종 아르바이트 형태의 번역을 맡으며 생계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무 경험을 쌓았다. 당시만 해도 영화 번역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석희는 미국 토크 프로그램 <닥터 필 쇼> 번역 작업을 맡으면서 영상 번역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됐다. 그때까지 그는 영상 번역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제대로 된 작업 환경을 갖춘 적도 없었다. 단지 “영상 자막은 두 줄로 쓴다”는 정도의 기본적인 정보만 알고 시작한 수준이었다.

작업 환경 역시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영상 파일이 아닌 비디오테이프로 작업이 이뤄졌다.

그는 중고 매장에서 비디오 재생 장비를 직접 구입한 뒤, 리모컨을 이용해 영상을 ‘돌리고, 멈추고’를 반복하며 번역을 진행했다. 한 문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되감기를 반복하는 방식은 시간과 체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황석희는 이 시기를 두고 “아마 이 바닥에서 나만큼 밑바닥부터 시작한 번역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하나씩 체득해 온 경험에 대한 자부심인 것이다.

이후 그는 다큐멘터리와 방송 번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비롯한 다큐멘터리 번역을 약 1년 반가량 맡으며 영상 번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고, 이어 미국 드라마 번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그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24> <왕좌의 게임> <뉴스룸> <더 퍼시픽> <로앤오더> 등 다수의 인기 미드(미국 드라마)를 번역했다. 장르와 분위기가 각기 다른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축적한 경험은 상황과 감정을 살려내는 번역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드라마 번역은 영화와는 또 다른 방식의 엄격함을 요구하는 분야였다. 케이블 채널의 경우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사전 수준으로 맞춰야 할 정도로 검수가 까다로웠고, 표현 수위 역시 강한 제한을 받았다. 번역 과정에서 제작사나 채널이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많아, 번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제한되는 구조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드라마 번역으로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목표는 분명히 영화였다. 그는 “많은 영상 번역가들이 영화 번역을 하고 싶어 한다”며 “극장에서 내가 번역한 작품을 관객과 함께 보는 경험은 큰 의미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영화 번역 시장은 이미 기존 번역가들이 자리 잡고 있는 폐쇄적인 구조였다. 실제로 그는 첫 영화 번역 기회를 얻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에게 실망할 날 온다”
의미심장 발언 재조명

처음 맡은 영화는 2009년 개봉한 <선샤인 크리닝>으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작품이었다. 운 좋게 기회를 얻었지만, 그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첫 작품 이후 약 4년간 추가적인 영화 번역 작업을 맡지 못하는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와중 두 번째 영화 번역을 맡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황석희는 영화 <웜 바디스> 번역을 통해 다시 영화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당시 “첫 작품을 맡았던 회사였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미드 번역 이력을 본 실무자가 추천해 기회를 얻게 됐다”고 설명했다.

<웜바디스>는 예상 외로 흥행했고, 번역에 대한 좋은 평가도 받게 되면서 이후 영화 번역 작업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황석희는 본격적인 영화 번역가로 활동하게 됐다.

황석희는 지금까지 500편이 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번역했다. 그가 참여한 작품은 <스포트라이트> <사울의 아들> 등 해외 주요 영화제 수상작이 많다. <스포트라이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사울의 아들>은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황석희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영화는 히어로물 <데드풀>이었다. 국내에서 약 290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존 히어로 영화와 달리 19금 유머와 비속어, 은어가 다수 포함된 이른바 ‘B급 정서’가 특징이다. 번역 난도 역시 상당히 높은 작품이었다.

황석희는 당시 작업을 마친 뒤 “개봉하면 욕을 많이 먹을 것 같아 잠수를 고민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개봉 이후 반응은 정반대였다. 관객들은 그의 번역을 두고 ‘약 빤 번역’이라는 표현을 쓰며 호평을 보냈고, 기존 자막과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초월 번역’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번역 과정에서 그는 캐릭터의 성격을 기준으로 표현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오프닝 크레디트 번역에는 원문 표현을 단순히 직역하는 대신, 캐릭터의 성격을 반영해 ‘호구들’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그는 “데드풀이 직접 썼다면 어떤 표현이 어울릴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특히 <데드풀>처럼 대사의 비중이 큰 작품의 경우, 말의 리듬과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황석희는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번역 과정에서도 시리즈의 설정과 캐릭터 톤을 고려해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자막에서 등장한 ‘피터 찌리릿’이라는 표현은 원문 ‘Peter tingle’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약 3주간 표현을 검토했으며, “유치한 느낌과 의미 전달을 동시에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데드풀>로
초월 번역

표현 수위 조정 역시 번역 과정의 일부다. 예를 들어 ‘male escort’라는 표현은 ‘애인 대행 알바’로 순화해 번역했다. 그는 해당 사례에 대해 “장면의 분위기를 고려해 표현을 조정했다”고 밝혔다.

황석희의 번역에 대한 철학은 남다르다. 여러 인터뷰에서 번역의 역할을 “연출자의 의도와 대사의 의미를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가 말하는 좋은 자막은 ‘들리는 자막’이다. 관객이 자막을 읽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인물이 한국어로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단순히 영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의 말투나 상황, 장면의 흐름까지 함께 고려해 문장을 다듬는다. 작업 방식도 이런 기준에 맞춰져 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은 사전에 관련 자료를 충분히 찾아본다. <데드풀>이나 <로건>을 번역할 때는 코믹스 세계관을 따로 공부했고, <알리타: 배틀 엔젤>을 맡았을 때도 원작 만화를 직접 찾아봤다. 팬들이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하기 위한 과정이다.

전문적인 내용이 나오는 작품에서는 더 꼼꼼해진다. 전쟁 영화라면 군사 용어를 따로 확인하고, 언론이나 법조 분야를 다룬 영화는 실제 종사자에게 자문을 구한다.

<더 퍼시픽>이나 <스포트라이트> 같은 작품에서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관련 분야 사람이 봤을 때 어색하지 않은 게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표현 선택에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특정 단어나 욕설이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

단순히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상황에 맞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쪽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번역가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오역에 대한 태도도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문제가 제기되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쪽을 택한다. 이후 수정이 가능한 경우에는 자막을 다시 손보기도 한다.

과거에는 비판을 반박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인정하고 고치는 게 가장 빠른 해결”이라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번역 기준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달라졌다.

초기에는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에 더 무게를 뒀다면, 지금은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셈이다.

그렇다고 기준이 느슨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은 더 엄격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번역한 작품 중에서도 “100% 만족한 대사는 없다”고 말한다. 개봉 이후에도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른다고 할 정도로, 작업에 대한 아쉬움을 계속 남겨두는 편이다. 이처럼 완벽주의적인 작업 때문에 황석희는 흔히 ‘초월 번역가’로 불린다.

남다른
철학으로

하지만 최근 황석희의 성범죄 전과에 대한 의혹이 보도되면서 ‘스타 번역가’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졌다. 지난달 30일 <디스패치> 보도를 통해 황석희의 과거 성범죄 전력 의혹이 공개됐다.

매체 보도에 따르면 황석희는 2005년과 2014년 두 시기에 걸쳐 총 3차례 사건에 연루됐으며,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총 5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황석희는 2005년 강원 춘천 일대에서 길을 가던 여성들을 상대로 연달아 범행을 저질렀다. 한 여성에게는 뒤에서 접근해 신체를 만지며 넘어뜨린 뒤 추행을 이어갔고, 이를 제지하던 피해자의 지인을 폭행해 상해를 입힌 것으로 보도됐다.

같은 날 인근에서 또 다른 여성을 상대로 유사한 방식의 추행을 시도했고, 이를 말리던 동행인을 폭행하는 등 추가 피해가 발생했다. 해당 사건으로 황석희는 강제추행치상 및 상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14년에는 당시 자신이 강의를 맡고 있던 문화센터 수강생을 상대로 술자리를 가진 뒤 만취 상태의 수강생을 숙박업소로 데려가 유사강간을 시도하고,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해 준유사강간 및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를 인정했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와 함께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과 사회봉사 명령도 내려졌다.

재판 과정에서는 황석희의 반성 여부와 함께 가족의 생계 등이 양형에 고려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014년 사건에서는 아내의 선처 호소가 재판부 판단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징역형이 선고됐지만 법정 구속은 이뤄지지 않고 집행유예가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황석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그는 “현재 관련 사항에 대해 변호사와 검토를 진행 중”이라며 “보도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나 확인되지 않은 내용, 법적 판단 범위를 벗어난 표현이 포함될 경우 정정 및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짧은 입장문을 남겼다.

다만 해당 입장문에서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이나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 황석희는 기존 게시물 대부분을 삭제하거나 비공개 처리하면서 SNS 활동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논란이 확산되면서 방송가와 출판계, 광고업계 전반에서 관련 콘텐츠를 정리하는 움직임도 빠르게 이어졌다. 먼저 방송가에서는 황석희가 출연했던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전지적 참견 시점> 회차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비공개 처리됐다.

해당 방송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유튜브 클립 역시 대부분 삭제되거나 접근이 제한된 상태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인터뷰 콘텐츠 등에서도 그의 출연분이 잇따라 정리되며 사실상 노출이 중단됐다.

‘3차례’ 성범죄 전력 알려져 논란
방송·출판·광고 ‘전방위 손절’

출판계에서도 비슷한 조치가 이어졌다. 황석희가 펴낸 에세이 <번역: 황석희>와 <오역하는 말들>은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가 중단되거나 품절 처리됐다. 일부 서점에서는 “출판사 유통 중단” 사유가 안내되며 사실상 유통이 멈춘 상태다.

광고 및 브랜드 협업 콘텐츠 역시 빠르게 정리됐다. 그가 참여했던 광고 영상과 홍보 콘텐츠가 잇따라 삭제되면서, 상업 활동 영역에서도 그와 거리 두기가 이어지고 있다.

개인 SNS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논란 직후 입장문을 제외한 기존 게시물이 대부분 삭제되거나 비공개 처리됐고, 하루 사이 팔로워 수가 약 1만명가량 감소하는 등 대중 반응도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이번 논란은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졌던 그의 이미지와도 괴리가 있어 더 큰 파장을 낳고 있다. 황석희는 방송과 SNS를 통해 가족, 특히 딸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내며 이른바 ‘딸 바보’ 이미지로 굳어졌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당시 그는 “32개월 된 딸이 하는 말을 전부 번역해보고 싶다”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등 자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또 다른 인터뷰와 방송에서도 그는 딸과 관련된 일상을 언급하며 “아이를 볼 때마다 하루가 영화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거나, 놀이터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떠올리며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는 등 가족 중심적인 모습을 강조해 왔다.

SNS에서도 육아와 관련된 고민이나 일상을 꾸준히 공유하며 대중과 소통해 왔고, 논란이 불거지기 불과 이틀 전에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언급하며 “새로운 시작을 앞둔 아이를 응원한다”는 글과 함께 자신이 번역한 그림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의 과거 발언과 글들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황석희는 과거 SNS와 인터뷰를 통해 “롤모델이나 멘토로 생각하지 말라. 언젠가 반드시 실망할 날이 온다”는 취지의 글을 남긴 바 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유해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영웅화나 낭만화를 경계한다”며 “기억에 살을 덧붙이고 각색하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해왔다. 당시에는 현실적인 조언으로 받아들여지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대로
나락행

하지만 이번 논란 이후 해당 발언들이 다시 조명되면서, 온라인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본인의 성범죄 전과가 알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고, 또 한편에서는 “과거 발언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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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제2의 로켓랩?’ 비트팜스 사건 내막

[단독] ‘제2의 로켓랩?’ 비트팜스 사건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주식시장이 활활 타고 있다. 미국 대통령의 한마디에 휘청이던, 전쟁 여파에 고꾸라지던 모습이 전생처럼 느껴질 정도다. 특정 악재가 발생해도 하루 이틀이면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을 넘어 지수를 말아 올리고 있다. 대통령이 공언했던 코스피 지수 5000보다 이제는 1만이 더 가까워졌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식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없애겠다며 ‘코스피 5000시대’를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 대부분 ‘빈 약속’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12‧3 비상계엄의 여파를 제외하고라도 코스피 지수는 3000 언저리 박스권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바닥이 얇고 지붕이 단단하다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대한 인식은 깨지기 어려워 보였다. 역대급 불장 돈이 모인다 이재명정부 1년째를 앞둔 현재, 주식시장의 지붕은 완벽하게 뚫렸다. 국내외 증권사들은 코스피 상방을 올려 잡고 있다. 동시에 주식시장에 뛰어드는 ‘개미(개인 투자자)’의 비율이 높아졌다.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포모(FOMO) 증후군이 퍼졌고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너도나도 주식시장으로 움직였다. 부동산에 몰린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옮기겠다는 정부 차원의 ‘머니 무브’ 정책으로 역대급 불장이 계속되면서 덩달아 증권업계도 신났다. 올해 1분기 국내 증권사는 거래대금 폭증으로 역대급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주요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 1분기 순이익은 전년 대비 100% 이상 증가했다. 대형 증권사의 분기 순이익이 1조원을 돌파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60여개에 이르는 국내 증권사들은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개미들을 잡으려 각종 유인책을 내놓았다. 증권사는 주식 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로 이익을 내는 구조인 만큼 투자자가 많을수록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또 증시가 폭발하면서 빚을 내서까지 시장으로 진입하는 비율이 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도 증권사는 손해 볼 게 없다. 문제는 주식 거래가 증가하면서 일어나는 증권사발 사건‧사고다. 최근 증권사의 갈지(之)자 행보로 투자자가 의도치 않은 세금 폭탄을 맞은 사건도 한 예다. 증권사마다 명확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면서 일부 투자자는 수백만원, 많게는 억대의 손해를 봤지만 하소연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태다. 정부도 손을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캐나다→미국 본사 이전 주식 구분 변경 일어나 캐나다에 본사를 두고 암호화폐를 채굴하던 ‘비트팜스(Bitfarms)’라는 기업이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법인을 뒀던 비트팜스는 미국으로 본사를 옮기고 인공지능 및 고성능 인프라 기업으로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명을 ‘킬 인프라스트럭처(Keel Infrastructure)’로 변경했다. 본사 이전이 완료된 시기는 지난달 1일. 비트팜스는 킬 인프라스트럭처의 자회사가 됐고 미국 현지시각으로 같은 달 6일 주식 구분이 변경됐다. 다시 말해 주식 종목에서 비트팜스가 없어지고 킬 인프라스트럭처로 거래가 개시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과정이 ‘주식 교환’으로 처리돼 세금이 붙지 않았다. 문제가 된 건 비트팜스 주식을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 ‘서학 개미’들이다. 이들의 주식은 매도 후 재매수 처리됐다. 다시 말해 비트팜스 주식이 처분되고 킬 인프라스트럭처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양도’가 일어난 것이다. 비트팜스 1주는 킬 인프라스트럭처 1주로 바뀌었다. 이 과정은 투자자가 아닌 증권사의 의지로 이뤄졌다. 비트팜스 주주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현행법상 해외주식으로 소득이 발생하면 ‘양도소득세’라는 세금이 붙는다. 250만원 이상의 주식 소득에 22%의 세금이 매겨진다. 예를 들어 해외 주식으로 1000만원을 벌었다면 250만원을 제외한 750만원에 대해 22%의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증권사 수수료까지 떼고 나서야 투자자가 실제 번 돈이 된다. 양도소득세는 1년치 해외주식 소득을 따져 부과된다. 그래서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시점이 되면 투자자들은 주식을 정리한다. 이익과 손해가 250만원 이내로 합산되면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에 이 시기에 투자자들은 계산에 골몰한다. 물론 주식을 사고팔지 않으면 양도소득세 자체는 ‘0’이다. 예상치 못한 세금 날벼락 하지만 비트팜스가 킬 인프라스트럭처로 주식 구분이 변경될 당시 ‘매도 후 재매수’라는 방식으로 거래가 이뤄지면서 투자자들은 ‘강제로’ 이익 혹은 손해가 발생했다. 기대 수익, 예상 손해로 존재하던 게 실제 이익과 손해로 전환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투자자들에게는 예상하지 못했던 세금 부과 이슈가 발생한다. 비트팜스 사건을 두고 지난해 5월 일어난 ‘로켓랩’ 주식 전환 사태를 떠올리는 이유다. 미국 민간 우주기업 로켓랩 USA는 지난해 5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기업재편을 단행했다. 같은 해 5월23일 신설된 로켓랩 코퍼레이션이 기존 로켓랩 USA 법인을 자회사로 흡수합병했다. 이때 로켓랩 USA 주식은 동일한 가치의 로켓랩 코퍼레이션 1주로 자동 전환됐다. 미국은 세법상 주식 교환 과정에서 이익과 손해를 실현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매도 후 재매수 방식으로 처리됐고 무엇보다 당시 이 과정이 야밤에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로켓랩 USA 주주들은 크게 반발했고 금융감독원 등에 ‘민원 폭탄’이 쏟아졌다. 단일 민원으로는 최다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문제로 떠오른 점은 국내 증권사들의 대응이었다. 당시 국내 증권사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각자 다른 답을 내놨다. 세법에 대한 해석이 갈리면서 적용을 달리한 것이다. 일부 증권사는 법무법인의 자문을 받아 ‘양도 거래’로 판단해 매도 후 재매수 방식으로 처리했다. 또 다른 증권사들은 단순 주식 교환으로 간주해 양도소득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투자자로서는 어느 증권사를 이용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고, 부과되지 않는 이른바 ‘복불복’ 상태에 놓인 것이다. 당시 로켓랩 주식 전환 처리 방식에 따라 증권사를 옮기는 이동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논란이 계속되자 공은 결국 정부로 넘어갔다. 세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요청한 것이다. 민원 폭탄에 기재부 해석 당시 기획재정부는 로켓랩 사태 이후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게 맞다는 해석을 내놨다. 국세기본법 제14조 실질과세의 원칙과 소득세법 제88조의 ‘양도’의 의미를 근거로 내세웠다. 주식 티커명이 같더라도 법률상 기존 로켓랩 USA 주식이 소멸하고 주주가 새로운 로켓랩 코퍼레이션을 취득한 만큼 동일한 자산을 연속적으로 보유한 것이 아니라 자산을 교환한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주식 티커는 증권거래소에서 특정 상장회사의 주식을 고유하게 식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짧은 약어를 뜻한다. 비트팜스 주주들은 기재부의 유권해석에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비트팜스가 KEEL로 티커명이 바뀌어도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는 같은 사람이고 거래 상태는 ‘보유 계속’이다. 사업, 경영진, 지분율 어느 하나 바뀌지 않았는데 (기재부는) 이걸 자산의 이동으로 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백번 양보해서 로켓랩 사태 당시 기재부가 유권해석을 내렸기에 비트팜스 사건에 동일하게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선례가 있음에도 국내 증권사들은 저마다의 방식을 적용했다. 이번에도 증권사에 따라 손해와 이익이 갈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따지고 보면 비트팜스 사건과 로켓랩 사태에서 투자자들이 분노한 지점은 같다. ‘실제 팔지도 않은 주식’에 세금을 매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더 화나게 하는 부분은 증권사들이 적용 기준을 제멋대로 했다는 점이다. 재판으로 비유하면 판례가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증권사의 행보는 ‘갑질’로 느껴질 정도라고 지적했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비트팜스가 킬 인프라스트럭처로 주식 구분이 변경되는 과정에서 일부 증권사별로 적용 시점이 달랐다. 메리츠 증권은 지난달 3일, 토스 증권은 같은 달 6일에 투자자들에게 주식 구분 변경 사실을 알렸다. 미국은 비과세로 처리하는데… 우리나라는 ‘매도 후 재매수’ 투자자들에 따르면 일부 증권사는 주식 구분 변경 사실을 아예 공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보니 내가 하지 않은 주식 거래가 이뤄져 있던 셈이다. 로켓랩 사태와 오버랩 되는 대목이다. 토스 증권을 사용 중인 한 투자자는 “6일에 비트팜스에서 킬 인프라스트럭처로 바뀌어서 거래가 개시됐는데 그 당일에 공지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토스 증권은 해당 투자자의 문제 제기에 “(4월)3일에 (주식 구분 변경) 정보에 대해 처음 알게 됐고 (4월)6일에 공지했다. 최초로 정보를 알게 된 (4월)3일은 현지 휴장일로 투자자가 실제 매매 등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이후 7일에 외부 법무법인의 자문을 받아 권리 처리를 이행했다고 덧붙였다. 즉 매도 후 재매수 방식으로 적용했다는 뜻이다. 투자자들은 처음에는 교환으로 적용했다가 뒤늦게 양도로 처리한 증권사도 있다고 주장했다. 한 투자자는 “신한 증권을 사용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주식명만 바뀌더니 2~3일 뒤에 재처리됐다. 증권사에 문의했더니 다른 증권사의 처리 방식대로 했다고 하더라. 그사이에 주가와 환율이 바뀌었는데 일괄 적용한 것이다. 주먹구구식도 이런 주먹구구식이 없다”고 비판했다. 정부도 비트팜스 투자자들의 민원을 증권사에 돌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은 투자자들이 받은 답변은 이 사안이 ‘자율 조정 대상’이라는 내용이었다. 자율 조정 대상은 정식 조사 전 금융사와 소비자가 자율적으로 합의하도록 유도하는 제도다. 일단 증권사랑 얘기하라는 뜻이다. 투자자로선 금감원에서 증권사로 넘어간 공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상황에 직면한 셈이다. 손 놓은 정부 투자자 운다 70명가량 모여 있는 비트팜스 투자자 단체 채팅방에서는 무력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정부와 증권사의 태도에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로켓랩 사태의 선례로 이번 사건 또한 흐지부지될 것이라 자포자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실제 몇몇 투자자는 ‘손절(손해 보고 매도)’하고 채팅방을 떠났다. 한 투자자는 “로켓랩 사건 때 정말 다 들고 일어났다고 느낄 정도로 문제 제기가 많았는데도 결론적으로 양도소득세가 부과됐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민원도 많이 안 들어간 걸로 안다”며 “이 사건이 스페이스X와 합병설이 도는 테슬라 같은 대형 주식에 일어났어도 정부나 증권사가 이렇게 반응했을까”라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