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중국성’은 단순한 혈통 표기가 아니라 문명 이동의 기록이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수많은 중국계 성씨들은 이방인의 흔적이 아니라 동아시아가 요동칠 때마다 함께 이동해 온 사람과 지식, 제도와 기억의 집적물이다.
당나라 말기와 5대10국의 혼란, 송·원 교체기, 명·청의 대전환기마다 중국의 관료와 학자, 무장과 상인들이 바다를 건너 신라와 고려, 조선으로 들어왔고, 이들이 정착하며 만든 것이 오늘의 중국계 본관이다.
이들의 이동은 피난이 아니라 문명의 이전에 가까웠다.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은 이들을 단순한 이주민이 아니라 전략 자산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어와 경전, 외교 문법과 국제 질서를 몸으로 익힌 이들은 한반도가 중원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였고, 이 통로 덕분에 한국은 변방이 아니라 동아시아 네트워크의 일부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가문이 바로 연안 이씨다. 이 연안 이씨의 역사는 문헌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기억으로, 필자는 이를 ‘연안(延安) 이씨인 이의시 이스턴R&E 회장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는 “연안 이씨는 중국에서도 오래된 문벌이었고, 당·송 교체기부터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와 고려, 조선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며 “우리는 한국에 정착했지만, 본국을 향한 문명적 책임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는 연안 이씨가 단순한 귀화 가문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 이동의 살아 있는 증인임을 압축한다.
연안은 오늘날의 산둥반도와 황해 연안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수천년 동안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해상 문명의 관문이었다. 전쟁과 왕조 교체가 일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흔들리고, 가장 먼저 사람들이 이동하던 공간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 역시 당나라 말기 혼란 속에서 이 지역을 떠나 신라 혹은 고려로 들어온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난민이 아니라 중국의 관료제와 유교 질서, 국가 운영 방식을 몸에 지닌 채 이동한 정치적 이주자였다.
연안 이씨 시조 이무의 행적이 기록마다 다른 이유는 그가 맡았던 외교의 민감성에 있다. 나당 전쟁기의 동아시아 질서는 승패보다 명분과 책임이 더 중요한 세계였다. 그 속에서 중재자와 내부 비판자는 역사에서 지워지기 쉬웠으며, 사대 질서 속에서 편찬된 기록은 당의 위신을 해칠 수 있는 인물의 역할을 축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회장이 전하는 전승에 따르면, 이무는 당 태조 이연과 가까운 집안 사이이고 당 장수 소정방의 참모로서 신라 정벌 작전의 내부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제국의 폭주를 제어하는 역할을 선택했다. 그는 당이 신라를 군사적으로 병합할 경우 동아시아 질서 자체가 붕괴할 것임을 경고하며, 대국의 위상은 정복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는 논리로 당 조정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군 철수라는 외교적 반전이 만들어졌고, 그는 측전무후 세력 등장으로 더 이상 당에 들어가지 않은 채 신라에 남았다. 신라 왕이 그를 장수나 망명객이 아니라 사실상 동급의 외교 파트너로 예우했다는 전승은, 연안 이씨의 시작이 혈통의 이동이 아니라 한반도의 주권을 지켜낸 정치적 선택에서 출발했음을 상징한다.
연안 이씨가 고려와 조선에서 빠르게 관료와 학자, 외교관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중국 문명을 내면화한 사람들이었고, 황제와 조정, 책봉과 사대, 외교 문서를 다루는 언어와 예법을 알고 있었다. 이는 한반도 국가가 중화 제국과 공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능력이었다. 연안 이씨는 조선의 관리이면서 동시에 중국 문명의 내부자였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던 17세기, 조선은 국제질서의 대지진 속에 던져졌다. 이때 중국계 성씨들은 조선 내부의 정보망이자 외교 통로로 기능했다. 연안 이씨 같은 가문은 중국의 왕조 교체 논리와 사상, 조정의 분위기를 조선에 전달했고, 동시에 조선의 입장을 중화 세계에 설명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비공식 대사관이었다.
이런 구조 덕분에 조선은 완전히 고립되지 않았다.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던 조선이 ‘소중화’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문명을 혈통과 생활로 품은 이 가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안 이씨는 조선 속의 중국이자, 중국 속의 조선이었다.
연안 이씨만이 중국성이 아니다. 제주 고씨는 중국 복건성에서 건너온 해상 교역 가문으로 알려져 있고, 남양 홍씨 역시 중국 남부에서 유래한 성씨로 바닷길과 연결된 문명 이주자였다. 태원 선우씨, 하남 정씨, 여남 윤씨 등도 모두 중국의 특정 지역과 왕조에서 출발해 한반도에 뿌리내린 가문들이다.
이들은 한국인이 됐지만, 동시에 중국 문명의 기억을 함께 들여왔다.
이 가문들이 특별한 이유는 스스로의 중국 본관과 기원을 끝까지 기록하고 유지해 왔다는 데 있다. 그들은 조선의 충신이면서도 중국 문명의 후예임을 숨기지 않았다. 이는 충돌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문명 질서가 작동하던 방식이었다. 국경은 정치의 선이었지만, 혈통과 문화는 그것을 넘나들었다.
여기서 이씨라는 성은 더욱 상징적이다. 중국에서 이씨는 단순한 성이 아니라 제국의 성씨였다. 당나라 황실이 이씨였고, 수많은 귀족과 문벌이 이 성을 사용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이씨는 왕씨와 함께 가장 많은 성씨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이씨(李, Li, Lee)는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다. 중국, 한국, 베트남, 화교 사회를 합치면 이씨는 사실상 세계 최대의 문명 성씨다.
연안 이씨는 이 거대한 이씨 문명이 한반도에 뿌리내린 한 갈래다. 조선 왕조의 성이 이씨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조선은 정치적으로 중국 문명권의 후계자를 자처했고, 연안 이씨 같은 중국계 이씨 가문은 그 문명적 정당성을 내부에서 지탱해 주는 존재였다.
오늘날 한중 관계가 갈등과 경쟁의 언어로만 이야기되는 시대에, 중국성의 역사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완전히 다른 타자로만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 수천년 전부터 성씨와 혈통, 학문과 외교로 엮여 온 문명 공동체였는가.
중국성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의 구조다. 연안 이씨는 한반도가 변방이 아니라 문명의 교차로였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이며, 한국이 단일 혈통 국가가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 이동의 결과물임을 말해주는 역사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와 연결돼있으며, 어떤 문명 위에 서 있는가. 중국성은 그 질문에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