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㉞거미줄에 걸린 벌레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4.12.30 05:00:00
  • 호수 15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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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런 날 밤엔 각 사방엔 여름의 열기와는 다른 활기와 어떤 진한 냄새가 감돌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주간지나 외국 잡지서 찢어낸 여배우의 야한 나신을 몰래 돌려 보며 한숨을 내쉬던 고참 원생들은 청천백일 아래서 직접 본 여신에 대해 자기의 상상을 보태어 얘기꽃을 피웠다.

그런 밤엔 어쩐지 원생들의 숨소리도 꿈결 속에서 높아지고 은은한 밤꽃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용운은 박꽃 누나가 준 종이쪽을 생각하며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의 삶과 자유가 남에 의해 결박된 상태에서 저속하게 희희덕거리는 게 싫었다.

왕거미 사장


그 다음날 오후였다. 점심 식사 후의 휴식시간에 용운이 화단에 핀 채송화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돌아보니 왕거미 사장이었다. 

용운은 그때 마침 관찰하고 있었던 거미줄 속의 벌레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더욱더 거미줄 속으로 얽혀들던 풍뎅이의 몸…….

“너 잠깐 이리 와 봐. 저기 가서 나무를 한 놈 베어 와야 한단 말이야.”

사장은 손에 들고 있던 톱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네, 네…….”

“서둘러!”


“예.”

용운은 사장의 뒤를 따라 사동 뒷산으로 올라갔다. 한 발짝 한 발짝 오를수록 푸른 바다는 조금씩 조금씩 전체적으로 조감되었다.

가까이에서는 희비애락을 느끼게 하던 바다도 멀리서는 무정해 보였다.

선돌처럼 커다란 바위 옆의 늙은 소나무를 지나치는 순간 사장이 말했다.

“멈춰!”

용운은 잔뜩 겁에 질려 우선 로봇처럼 멈춘 뒤 목구멍에서 겨우 말마디를 꺼집어냈다.

“예?”

“저기 바다가 보이지? 어제처럼 옷을 벗어 봐.”

용운은 엉겁결에 바지춤을 꼭 움켜잡았다. 왕거미 사장은 손바닥으로 소나무와 용운의 목을 번갈아 두드렸다. 

“어느 것을 먼저 자를까?”

그러면서 톱을 용운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용운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벌벌 떨기만 했다.

“저기 저 바다를 건너면 육지가 나와. 가고 싶지 않니? 말만 잘 들으면 내가 곧 보내 줄 수 있어.”


그러면서 용운의 몸을 껴안고는 아랫도리를 슬슬 어루만졌다.

“전 싫어요!”

용운은 온힘을 다해 앙탈을 부리며 소리쳤다.

왕거미는 주머니 속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날을 세우더니 음충스레 중얼거렸다.

“조금만 움직이면 고냥 팍 모가지를 쑤셔 버릴 거야. 너딴 것 하나 없어져도 아무도 몰라. 죽기 싫으면 고냥 고대로 가만히 있어.”

자주 일어나는 은밀한 일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서늘한 칼날의 감촉이 목줄기에 닿아 조금씩 파고들자 용운은 온몸이 경직되었다. 용운은 어린 나이에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었지만, 아직 죽음이란 것이 자기가 수긍해야 할 몫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렵거나 위험한 순간을 당해도 그걸 이겨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실제로 죽는 상황까지는 상상하지 않았었다.

칼이 아니더라도 용운은 이미 거미줄에 걸린 애벌레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왕거미 사장의 억센 완력은 어린 팔의 날개짓을 손쉽게 제압하고도 남았다.

“악!”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파고드는 것보다 더 심한 통증을 아랫도리에 느끼며 용운은 비명을 질렀다. 소나무 앞에 어린 제물을 엎드리게 한 왕거미는 씩씩거리는 한편 소곤거렸다.

“그 계집애 몸 죽이겠더군. 어때, 보들보들했어?”

그는 용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계속 미친 듯 뇌까렸다.

“이 쌍년, 젖이 통통하기도 하구나. 무슨 비누를 쓰길래 몸이 이렇게 향기롭니, 응? 아, 허벅지와 엉덩이가 정말 탐스럽군…… 원장 딸이라고 까불지 마. 헉!……”

한참 발광을 하던 왕거미는 갑자기 용운을 놓아주며 밀치곤 마치 포식한 짐승처럼 목청을 울렸다. 

“울지 마, 임마! 이건 별일이 아니야. 너가 아직 몰라서 괜히 무슨 큰일처럼 착각하는 것이야. 그래도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란 걸 꼭 명심해야 해.”

왕거미는 주머니에서 녹아빠진 사탕을 하나 꺼내 용운의 손에 쥐어 주곤 산을 내려가 버렸다.

용운은 사탕을 던져 버렸다. 검은 개미들이 금방 달라붙어 빨아먹었다.

용운은 엉덩이에서 다리로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물질을 닦을 생각도 않고 풀숲 위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훌쩍훌쩍 울어댔다. 

용운은 좀전에 있었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연히 알 순 없었지만, 그런 일이 은밀히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귀동냥으로 들어 대충 알고는 있었다.

억울하고 가슴에 한이 맺히는 일을 당해도 약자이기 때문에 대항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런 짓을 당했을까. 그들은 이 괴로움과 공포감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고참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6·25 전쟁 후엔 뒤쪽의 건물에 소녀들도 수용되었다고 했다.

바캉스를 즐기러 온 귀한 소녀들과 달리 그 지푸라기 같은 소녀들도 왕거미 같은 자의 거미줄에 얽매여 파르르 떨었을 것 같았다.

원한과 비명

더 오랜 옛날엔 일본놈들이 지었다는 이곳 선감원에서 얼마나 많은 부랑아로 낙인 찍힌 소년 소녀들이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을지 몰랐다.

그들의 원한에 사무친 비명과 신음 소리가 세월을 건너 들려오는 듯했다.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한숨 소리를 귓가에 듣는 사이에 용운은 눈물을 닦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도 또 새로운 눈물이 고였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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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면’ 군불 때는 사람들

‘조국 사면’ 군불 때는 사람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풀어주느냐, 마느냐, 이재명 대통령이 깊은 고심에 빠졌다. 8·15 특별사면·복권 명단에 조국혁신당 조국 전 대표의 이름이 올라오면서다. 한때 아군이었던 조 전 대표의 정치 생명이 용산의 선택에 달렸다. 조국혁신당은 물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친문계까지 사면론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 7일 이재명정부의 첫 특별사면을 준비하기 위한 법무부 사면심사위원회가 열렸다. 이날 특별사면 명단에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 조국 전 대표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치권의 관심이 급상승했다. 사면심사위원회가 사면·복권 건의 대상자를 검토하면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이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오는 12일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된다. 설에 부채질 조 전 대표는 자녀 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혐의로 지난해 12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 실형을 확정받았다. 조 전 대표의 만기 출소 예정일은 내년 12월15일이다. 이번 광복절 특별사면이 이뤄질 경우 출소 시기는 앞당겨질 수 있다. 혁신당은 조 전 대표의 기소 자체가 검찰의 무리한 시도였다고 보는 만큼 이번 정권에서 검찰개혁을 이뤄내고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보고 있다. 혁신당 신장식 의원은 지난 대선 정국서 “조 전 대표가 보고 싶지 않느냐”며 “(이재명 후보가) 그냥 이기는 게 아니라 크게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이재명 후보의 당선이 곧 조 전 대표의 사면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한 것이다. 조 전 대표의 부인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또한 비슷한 시기에 ‘더1찍 다시 만날 조국’이라는 홍보물을 제작하는 등 이 후보의 당선과 조 전 대표의 사면을 동일시했다. 이렇듯 혁신당은 지난 총선과 대선 등에서 일궈낸 업적을 청구서 삼아 은근한 눈치를 보냈고, 최근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내 친문(친문재인)까지 목소리를 키우면서 이 대통령을 전방위로 둘러쌌다. 지난달 30일 친문계인 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조 전 대표와의 접견 사실을 알리며 “특유의 미소가 여전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많을 법도 한데 오히려 긍정 에너지가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자꾸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마음의 빚을 지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이어 “조국의 사면을 많은 이들이 바라는 이유는 검찰개혁을 요구했던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그의 사면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마음 아닐까”라며 “야수의 시간과 같았던 지난 겨울 우리가 함께 외쳤던 검찰개혁이 틀리지 않았음을, 서로 생각은 달라도 통합과 연대라는 깃발 아래 모두가 함께 있었음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국민통합 일환? 이 결정만 남아 친문계에 문까지 팔 걷어붙여 친명(친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민주당 김영진 의원 역시 한 라디오를 통해 “국민통합을 위한 측면에서 넓게 사면 복권에 관한 판단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든다”면서도 “이 문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 대통령께서 판단할 문제라 보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문 전 대통령이 용산 측에 조 전 대표의 사면 의견을 직접 전달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난 5일 경남 양산 평산마을을 찾은 우상호 정무수석을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의견을 전달했고, 우 수석은 “뜻을 전달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김원기·임채정·정세균·문희상·박병석·김진표 등 민주당 출신인 전 국회의장도 가세했다. 이들은 입장문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책임을 수용한 이들에 대한 절제된 관용”이라며 “대통령께서 국민 통합의 뜻을 담아 조 전 대표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한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극한 대립과 갈등의 시기를 겪어내며 상처 입은 우리 사회 공동체에 건네는 ‘공정한 매듭과 위로’의 손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방에서 사면 요청이 쇄도하자 대통령실은 막판 고심에 빠졌다. 앞서 지난 5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사회적 약자와 민생 관련 사면에 대해 일차적으로 검증 및 검토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정치인 사면에 관해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 중”이라며“아직 최종적인 검토 내지는 결정에는 이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혁신당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서 “조 전 대표가 수감 된 지 8개월이 지났는데 혁신당은 아직도 권한대행 체제다. 전당대회를 통해 새 대표를 뽑을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느냐”며 “이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조 전 대표가 사면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 전 대표가 돌아와서 혁신당이 이전 같은 명성을 되찾길 기다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혁신당 당헌·당규에 따르면 ‘당대표가 궐위된 때에는 최고위원 가운데 가장 많은 득표로 선출된 최고위원이 남은 임기 동안 당대표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김선민 권한대행이 내년 7월까지 조 전 대표의 임기를 대신해 자리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당초 조 전 대표가 자신의 수감 생활을 예측하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이러한 당헌·당규를 개정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8개월째 대행 체제 혁신당 “확신” 믿을 구석 있었나 내년 지방 선거를 위해서라도 혁신당은 조 전 대표의 사면이 필요하다. 구심점이 없고 ‘조국’혁신당이라는 이름만 존재하는 지금으로서는 지난 보궐선거만큼의 역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다. 민주당은 딜레마에 빠졌다. 국정 초기부터 자녀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등으로 법의 심판을 받고 복역 중인 인사를 사면했다가는 ‘범죄자 프레임’에 함께 걸려들 수 있다. ‘조국 사태’에 거부감을 느낀 지지자들의 이탈도 고려해야 하는 지점이다. 반면 사면 요청을 거절할 경우 오히려 조 전 장관의 정치력을 키우는 등 일종의 서사를 부여할 수 있다. 조 전 대표는 본인의 사면에 대해 큰 뜻을 밝히지 않아 오히려 지지층 결집에 도움이 될 것이란 해석이다. 민주당에 있어 조 전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의 ‘변수’다. 지난 총선서 호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혁신당이기에 조 전 대표가 정치권에 돌아온다면 진보진영 텃밭을 둘러싼 두 정당 간의 경쟁과 그로 인한 잡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조 전 대표의 사면을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그의 행보를 예측하고 나섰다. ‘자유의 몸’이 될 경우 이른 시일 안에 전당대회를 치러 다시 한번 당대표직을 거머쥐고 내년 지방 선거를 진두지휘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일각에서는 조 전 대표가 부산 시장 등으로 직접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도 보고 있다. 어디로 튈까 민주당은 최종 사면 명단이 공개되기 전까지 별다르 입장을 내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 7일 문 전 대통령을 예방했지만, 이날 조 전 대표의 사면 논의는 나오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이제 공은 이 대통령에게 넘어왔다. 단 한 사람의 정치 인생이 걸린 문제지만 그의 복권은 정치 진영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여러 가지 변수와 상수가 존재하는 가운데 이 대통령의 최종 선택에 이목이 쏠린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