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큰 그림 그리는 권혁기 전 청와대 춘추관장 직격인터뷰

당정청 국회까지 섭렵 “듣는 DNA 생겼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당정청 국회까지 다 근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23년간 훈련이 됐다.” 30대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관으로 50대에는 문재인정부 첫 춘추관장으로 일했던 권혁기 전 춘추관장이 제21대 총선서 용산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보수세’ 강하기로 정평이 자자한 용산이지만 용기를 내서 정면승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갖는 권혁기 전 춘추관장 ⓒ문병희 기자

용산구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갖추고 있어 대한민국의 발전과 직결되는 지역구다. 그만큼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하다. 16년째 용산을 지켜온 진영 행정안전부장관의 불출마 선언으로 용산에는 새로운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 예정이다. <일요시사>는 용산 출마 의사를 밝힌 권혁기 전 춘추관장을 지난달 29일 만났다. 아래는 권 전 춘추관장과의 일문일답.

-이번 총선에 출사표 냈다.

▲지난 23년간 당과 청와대, 국회서 근무해왔다. ‘행정 위에 정치가 있다’는 것을 문재인정부 들어서 다시 배우게 됐다. 한국의 정치 환경에는 정치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진행될 수 없는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어떤 공약을 이행하려고 할 때, 시작부터 거센 정치적 공세를 받게 되는 환경을 보면서 행정은 결국 정치의 하위기구라는 걸 느꼈다. 결국 민심을 모으는 과정이 정치기 때문에 정치가 더 중요해졌고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출마하게 됐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80년대에 총학생회장을 하고 시민사회운동이나 정치권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기업에 들어갔다. 94년도에 공채 시험을 보고 BYC라는 메리야스 패션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영업 본부서 시장과 마케팅을 배웠다. 물건도 세일하고 대리점 장사가 잘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획하는 마케팅도 3년간 배웠다. 시장서 상인들을 만날 때 이 얘기를 하면 좋아해주신다.


-정계 입문 계기는.

▲BYC가 대기업은 아니지만 재무구조가 튼튼한 중소기업이다. 세일즈를 잘해서 상금도 많이 탔다. 그러다 20대 후반의 봉급쟁이로 편안하고 안정적인 직장서 잘 살고 있는 것이 과연 내 책임을 다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92년도 대선 때 고 김대중 전 대통령(DJ) 후보가 낙선했고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가 됐다. 청년 학생운동을 하면서 수평적 정권교체를 바라고 있었던 유권자 중의 한 명으로서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에 노크하고 입문하게 됐다. 97년도에 고 김홍일 전 의원, 정세균 총리님과 연청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거를 도우면서 수평적 정권교체에 도움 드리는 일을 했다.

대선이라는 그런 큰 의제가 있으니 열심히 뛰기는 했지만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실제로 회사 생활이 재밌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수평적 교체가 이뤄진 후에 연청 선배들로부터 최초로 정권을 잡았는데 잡아놓고 왜 돌아가냐는 만류가 있었고 이때 정치권에 남게 됐다.

-정세균 총리와 인연이 깊다.

▲연청서 인연이 됐다. 정세균 총리가 2007년도에 열린우리당 마지막 의장을 했다. 그때 제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 갔다가 해양수산부서 장관정책보좌관을 2년6개월 정도 하고 열린우리당 부대변인으로 복귀했다. 정세균 총리가 당 대표를 하실 때 당 대변인실 실장을 했다. 또 국회의장 하실 때는 제가 부대변인을 하게 됐다. 의장님하고 정치적 연이 굉장히 깊다.

-왜 용산을 선택했나.


▲용산은 제가 태어난 고향으로 서빙고 태생이다. 용산은 정치적으로 자유한국당에 조금 더 유리한 지형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대통령을 모셨던 비서관으로서 어려운 곳에서 용기를 내어 출마를 하는 게 명분도 있고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용산의 매력은 무엇인가.

▲예산만 통과되면 여지없이 나오는 보도가 ‘쪽지 예산’에 관한 것이다. 자기 지역구 챙기기, 지역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기사다. 그런 성격의 쪽지 예산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산에 필요한 예산은 용산 주민만을 위한 예산이 아니다. 서울 시민을 포함해 전 국민을 위한 예산이 될 수 있다.

‘보수세’ 강한 용산서 용기 내 출마
“국민 위해 뛴다” 23년 이력이 무기

예를 들어 곧 반환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주한미군기지를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국가 공원으로 만든다면, 필요한 예산을 쪽지 예산으로 넣었다고 해서 용산 이기주의라고 하고 공격 받지는 않을 것이다. 또 용산역과 서울역을 현대화하고 물류 기지 역할로 만드는 예산을 의정활동을 통해 따겠다고 하면, 그게 용산 주민만을 위한 예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거다. 용산은 더 발전할 가능성이 높고 필요한 정책과 입법 예산이 곧 전 국민의 이익과 직결되는 곳이다.

-지역구 현안엔 무엇이 있나.

▲용산의 가장 큰 현안은 주한미군기지 반환 협상인데 사실 지난 10여년간 지지부진했다. 동두천 미군기지는 반환 결정이 났는데 몇 미군기지는 아직 반환 결정이 나지 않아서 정부가 더 속도를 내겠다고 표명한 상황이다. 용산은 서울 도심을 향하는 관문이다. 미군기지 이전에는 일본 군대가 주둔했고 조선 말기에 청나라 군대가 주둔을 하면서 약 몇백년간 외국 군대가 지배했던 땅이다.
 

▲ 21대 총선서 용산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진 권혁기 전 춘추관장이 일요시사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문병희 기자

그러다 보니 서울의 교통에 안 좋은 악영향도 준다. 민족적 자긍심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미군기지가 속히 반환되는 게 필요하다. 협상의 걸림돌 중 환경오염 부담금 이야기가 있는데 미군기지를 주변으로 한 교통난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더 훨씬 심각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용산역과 서울역의 지하화를 통해서 지상을 온전하게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안을 밝혔다.

2022년에 코레일이 그 부지를 서울시에 매각하게 됐다. 용산역서 서울역까지 지하화가 되면 약 8만평의 부지가 나온다. 철도로 길이 나뉘는 것이 해소될 뿐 아니라 8만평 부지가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셈이다.

-현안 해결을 위한 방안은.

▲현실적인 협상으로 조속히 반환을 받아내 국민들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국가대표 공원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행정의 힘만으로는 되지는 않는다. 미군기지를 공원화하는 일에는 국방부, 국토부, 문화관광부 등에 책임 권한이 산재돼있다. 이건 구청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서울시청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결국은 전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종합 발전 플랜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치적 조정이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는 것이다.

-요즘 일과는 어떤가.


▲용산서 출퇴근하시는 분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첫 번째 일과다. 아침 7시부터 출근 요지서 시민들을 만난다. 처음 이틀 정도는 명함만 드렸는데 명함을 받는 확률이 떨어졌다. 이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후보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유권자와 소통을 해야 한다. 이력만 봐달라고 홍보하는 거 자체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그래서 3일 차부터 큰 소리로 유권자들이 오시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주당 국회의원 예비후보 권혁기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인사하고 절을 하면 다들 쳐다보신다. 그 후 저희 팀원들이 명함을 드리면 받으신다. 교감을 했기 때문이다. 정치인 명함을 막 뿌린 데 보면 명함이 많이 떨어져있는데, 인사한 다음 1500장 정도 명함을 드렸을 경우 정말 두세 장도 안 떨어져 있다. 오전에는 오피니언 리더들 또는 정책적인 제안을 해주시는 분들과 면담을 한다.

오후에는 주민들이 많이 왕래하시는 주요 장소서 인사하고 상가별로 방문한다. 대형 상가 메인 스트리트는 거의 다 돌았다. 요즘은 골목상권을 다니고 있다. 한참 걸어가야 슈퍼 하나 나오는 곳이다. 용산에 있는 모든 골목상권까지 다 인사드리는 게 계획이다. 골목상권 안까지 들어가서 인사드리면 여기까지 왔냐며 호감 표시가 적극적여서 훨씬 더 보람된다.

-실제 지역 주민분들을 만나봐도 보수세가 강한가.

▲그렇게 알고 1년간 바닥을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한국당이 말하는 정권 심판론은 아직까지 느끼지 못했다. 들으시라고 일부러 민주당 후보라고 외친다. 보수층이 밀집돼있는 동네서도 인사하고 대화도 나눈다. 정권 심판론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원래 총선은 정부여당을 견제하는 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는 느껴진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용산의 유권자들은 정치문화에 변화를 바라고 계신다는 점이다. 실제로 조금 더 역동적이고 조금 더 진화된 정치문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문들을 참 많이 하셨다.
 

-용산서 진영 행정부장관이 4선을 했다.


▲진영 의원님이 4선을 하셨고 성장현 구청장님도 3선째다. 두 분이 용산을 잘 이끌어오셨는데 진 장관의 불출마 선언이 유권자들께서 그런 주문을 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 같다. 용산 정치의 한 세대가 정리가 되니 다음 세대로 정치문화가 넘어가서 발전적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야 할 것 없이 젊고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후보를 원한다는 말씀도 참 많이 하신다. 유권자분들은 싱싱하게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는 사람, 추진력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많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여야를 떠나 그런 변화에 대한 요구에 부합하는 후보가 훨씬 더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의 용산 출마설이 유력하게 나온다.

▲황교안 대표가 종로 출마를 유력하게 검토하다가 이낙연 전 총리의 대결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는 당내 기류 때문에 용산 출마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보수 진영의 대선 1위인데 첫 단추부터 잘못된 정치행보라 생각한다. 용산 또는 알파를 검토하는 것 자체가 이 전 총리와의 대결을 피하는 지역구를 찾는 것인데, 대선주자로서 좋느냐는 질문은 한국당 내부서부터 나와야 할 것 같다.

만약에 그 카드로 용산을 선택한다면 저는 정면승부할 것이다. 용산은 정치적인 변화나 역동적인 추진력을 주민들이 많이 요구하고 있다. 황 대표의 선택은 용산 주민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산으로 온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는 심정으로 멋지게 평가받아보겠다.

“두세 번 듣고 한 번 말하고
바로 행동하는 정치인 될 것”

-자신의 강점은 무엇인가.

▲일단 당에서 훈련이 됐고 정부 경험도 있다. 청와대서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두 분에 걸쳐 행정관과 춘추관장 경력을 가졌다. 당정청 국회까지 다 근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을 한다. 23년간 훈련이 됐고 당에서는 주로 전략기획국장을 맡거나 대변인실 실장 업무를 했다.

문정부에서는 10개월 동안 춘추관장을 하면서 당의 정책 또는 청와대 입장을 전달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언론인들과 소통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이견을 좁혀가는 일을 하다 보니 협의하는 DNA가 생겨났고 듣는 DNA도 생겨났다. 23년간의 훈련된 과정 속에서 주민들의 목소리를 잘 듣고 정책과 입법과정에 담을 수 있는 소통능력이 제일 큰 장점이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소통은 무엇이라 보나.

▲유권자가 원하는 건 인사만 하고 휙 가지 말고 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것이다. 정치인이 말하는 소통은 나의 입장과 나의 비전을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소통은 국민들 이야기를 잘 들어달라는 것이다. 4시간 반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다 보면 실제로 그 안에 답이 다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지금 굉장히 높다.

-언론과 지속적인 스킨십을 해왔다. 언론의 문제는 무엇이라 보나.

▲미국도 보수지가 있고 진보지가 있다. 진보 독자가 있고 보수 독자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언론의 논조인데 이는 언론의 고유 권한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언론사의 논조를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는 건 잘못됐다고 본다. 다만 오보에 대해서는 언론이 조금 더 용기를 낸 개혁이 필요하다. 오보가 발생하면 시민들의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바로 잡는 과정이 너무 길어, 바로 잡힌다고 한들 이미 피해자의 피해는 굉장히 크다.
 

▲ 인터뷰 갖는 권혁기 전 춘추관장 ⓒ문병희 기자

또 기존의 언론뿐만 아니라 요즘 더 문제가 되는 게 유튜브 방송이다. 언론사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유튜브 방송도 많이 생겼다. 근데 언론사처럼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피해를 보는 국민 입장서 오보를 신속하게 바로잡는 과정, 그리고 오보에 따른 피해자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과정서 제도화가 시급하다.

-최근 민주당에 외부영입된 인사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인재검증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인재를 영입할 때는 일단 보안도 중요하고 여야가 선두 다툼을 벌이는 것도 있다. 철저한 검증도 중요한데 표면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건 신상자료를 제공받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생활 영역은 정말 검증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검증 한계의 한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누가 고의성이 있거나 누락하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도 아닌 것 같다.

-청와대 프리미엄 누리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통령을 모시고 같이 국정운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사실 프리미엄이 맞다. 그런 경험과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청와대 춘추관장 출신이라는 점은 예비 정치인으로서 국민들에게 어필되니 프리미엄이라고 인정하는 게 맞다. 다만 공천과 경선 과정서 청와대 특혜가 있느냐는 별개다. 당이 청와대 출신에 대한 특혜는 없다고 했는데 이는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

누군가가 공천서 특혜를 받으면 이는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공정의 가치가 굉장히 높은 사회기 때문이다. 아마 누군가가 특혜를 받으면 언론이 그걸 가만히 놔둘리도 없다. 청와대 출신이 갖고 있는 메리트는 인정하지만 공천과 경선 과정서 특혜는 없을 것이며, 있어서도 안 된다. 다 각자의 지역구 상황에 따른 본인의 경쟁력으로 각자도생하는 거다. 또 많은 청와대 출신들이 출마한다고 하지만, 모두 다 후보가 되지 못할 것이다.

-당에서 용산 전략공천 움직임이 있다.

▲당 지도부가 언급했던 경선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본다. 저를 비롯해 네 명의 예비후보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 조금 어려운 지역이지만 용산에 가장 적합한 후보를 뽑을 수 있는 분들은 오랫동안 정치를 하신 당원과 우리 지지자들이다. 그분들에게 맡기는 것이 최고의 검증으로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를 뽑는 길이다. 용산을 경선지역으로 돌려서 당원과 용산 주민들이 직접 민주당 후보를 뽑게 한다면, 그 카드는 분명히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은가.

▲잘 듣는 정치인이다. 캐치프레이즈가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고 바로 행동하겠다’는 거다. 어눌한 언변을 갖고 계셔서 설명할 때 어려움을 겪는 분들의 이야기까지도 잘 들어드리는 정치, 국민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내서 행동으로 옮기는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

 

<sangmi@ilyosisa.co.kr>


[권혁기는?]

▲용산구 서빙고동 출생
▲대통령비서실 국민소통수석실 춘추관장
▲국회 대변인실 부대변인
▲민주당 전략기획국 국장
▲해양수산부 장관 정책보좌관
▲청와대 국내언론비서실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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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