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발’ 386 용퇴론

박수칠 때 떠나? 남아?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차기 대권후보로 꼽혔던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21대 총선 불출마를 전격 발표했다. 임 전 실장은 현 정부의 핵심 실세로 86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갑작스런 선언으로 ‘86그룹 용퇴론’이 불거지면서 여의도엔 최근 ‘세대교체론’의 바람이 불고 있다.
 

▲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총선을 5개월여 앞두고 돌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86그룹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임 전 실장의 선언이 여권의 세대교체론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임 전 실장은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제도권 정치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며 “앞으로의 시간은 다시 통일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돌연…
불출마

임 전 실장은 “예나 지금이나 저의 가슴에는 항상 같은 꿈이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공동 번영. 제겐 꿈이자 소명인 그 일을 이제는 민간 영역서 펼쳐보려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대선 캠페인부터 비서실장까지 문재인 대통령님과 함께한 2년 남짓한 시간이 제 인생 최고의 기쁨이고 보람이었다”며 “50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게 두렵기도 하다.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꾸며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뛰어가겠다”고 적었다.

임 전 실장은 2000년 김대중정부 시절 ‘젊은피 수혈론’으로 국회에 입성해 2017년 문재인정부가 출범될 때 ‘2인자’ 자리인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지난 1월에 대통령비서실장직서 물러난 뒤, 내년 총선서 종로 출마를 위해 은평구서 종로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86그룹(80년대 학번, 60년대생)을 대표하는 거물급 정치인으로 자리잡은 그가 내년 총선서 ‘정치 1번지’로 꼽히는 종로에 출마해, 차기 대권 후보군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갑작스런 불출마 선언은 진정성 있는 정계 은퇴가 아니라 더 ‘큰 그림’을 그리며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정치권에선 ‘조국 정국’ 이후 86그룹 운동권은 ‘정치 기득권’이라는 비판이 크게 일고 있는 상황서 임 전 실장이 느끼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우상호 전 원내대표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조 전 장관 사태 파동 이후에 우리 세대에 대해 이런저런 질타가 쏟아졌지 않나. 국회의원 탐욕을 갖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느니, 진짜 하고 싶었던 통일운동으로 돌아가자는 식의 마음 정리를 해온 게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종로를 맡고 있는 같은 당 정세균 의원(6선)과의 지역구 조율 실패도 불출마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 의원은 7선 도전을 위해 지역구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가 됐다” 세대교체 방아쇠
임의 큰 그림? 아름다운 선택?

정 의원이 종로를 내줄 의사가 없다는 게 명백해진 상황서 임 전 실장이 다른 지역구로 옮기는 것도 모양새가 빠지니 잠시 물러나 있겠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남북 정상회담의 주역을 맡았던 경혐과 서울시 정무부시장 경력이 있다. 이를 살려 2022년 지방선거서 서울시장 출마 또는 차기 통일부장관 입각 등 시나리오를 나름대로 그린 후 불출마를 선언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과 임 전 비서실장의 갈등설도 불출마 원인으로 꼽힌다. 양 원장은 최근 민주당 의원들과 만난 자리서 “청와대 출신 출마자가 너무 많아 당내 불만과 갈등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인사들이 청와대 출신 경력을 총선서 정치적인 경쟁력으로만 활용하는 데 유감을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임 전 실장의 의도와 상관 없이 총선을 준비하는 청와대 인사들에겐 ‘청와대 출신이라고 해서 지역구를 정리하거나 챙겨주지 않는다’는 메세지를 분명하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86그룹은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으로 민주주의 쟁취에 앞장서면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정계에 입문, 현재 정치권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아 어엿한 중진 의원들로 성장했다.

민주당 86그룹 중 재선 및 중진의원은 이인영 원내대표를 포함해 박홍근·송영길·안민석·김태년·우상호·우원식·윤호중·조정식·최재성 등이 포함돼있다. 큰 물갈이 폭과 참신한 인적쇄신은 선거서 당의 승리를 이끄는 주요 변수로 꼽히는 만큼 이들은 매 선거철마다 ‘물갈이’ 대상으로 거론돼왔지만 당 지도부가 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임 전 실장이 ‘자기 희생’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당내에서 인적쇄신의 정당성은 이미 확보된 셈이다.

“적극적으로
놓아야 된다”

쇄신론에 불을 지폈던 민주당 이철희 의원 역시 임 전 실장의 불출마에 대해 ‘아름다운 선택’이라며 당내 86그룹 정치인들을 향해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서 “개개인이 역량 있는 사람들은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의 세대, 그룹으로서는 저는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고 본다”고 언급했다. 이 의원은 “정치권이 국회를 너무 독점하기보다는 젊은 세대에게 문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는 386이라고 하는 86그룹이 퇴출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2030세대 청년 정치인의 유입이 끊겨 있어 대표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국회에 세대교체론을 과감히 요구한 셈이다. 또, 평등과 공정을 외치는 청년들이 많아진 만큼 후배 정치인들에게 시대의 문제를 풀 역할을 물려줘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86그룹 용퇴론을 성찰과 반성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민주당 김종민 의원은 KBS <김경래의 최강시사>서 “지난 30년간 386그룹이 정치권의 주역으로 있으면서 혁신에 얼마나 성과를 거뒀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김 의원은 “불출마만이 좋은 선택은 아니다”라며 맹목적인 중진, 86그룹 퇴진설에 우려를 표했다.
 

▲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반면 쇄신론의 대상으로 꼽힌 의원들의 불만도 거세다. 86그룹 의원들이 기득권화 및 세대교체 대상으로 분류된 점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도 당내 어느 정도 형성돼있다. 대표적인 86그룹의 핵심축인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모든 사람이 다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86그룹 용퇴론 확산에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페이스북에 "(86그룹이)그동안 쌓아온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힘을 모아줘야 한다”며 “이런 시기에 근거 없이 386, 586을 기득권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민주개혁 세력을 분열시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불쾌감
표출도

또 다른 86그룹 민주당 우 전 원내대표 역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우 의원은 TBS 라디오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 파동 이후에 우리 세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질타가 쏟아졌는데, 우리가 무슨 자리를 놓고 정치 기득권화돼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다른 86그룹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윗세대 선배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 주역이 돼 일해본 경험이 없다. 어느 세대는 안 된다며 선거를 앞두고 한바탕 제사상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온당치 않다”며 청산 대상으로 지목받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강하게 표출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도 “86그룹은 국회의원을 직업 삼아 하는 게 아니라 정치를 통해 이루고 싶은 뜻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며 “단지 오래 했다는 이유로 나가라고 하면 당내서 공감대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역구만 챙기는 다선 의원을 정리하기 위해 특정 세대를 겨냥한 쇄신 요구를 띄울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50대인 86그룹이 은퇴할 나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50년대생인 중진의원들이 용퇴 대상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불거지고 있다. 86그룹의 용퇴가 아니라 중진 용퇴 쪽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민주당 초선의원들이 이해찬 대표를 따로 만나 ‘중진 용퇴론’에 대한 필요성을 강력하게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장 임 전 실장과 종로 지역구를 두고 다퉜던 정 의원에 대한 쓴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민주당 초선 의원은 “국회의장까지 하고도 그 자리를 더 하겠다고 버티는 게 후배 입장에선 참 민망하다. 자유한국당에선 김세연 의원(3선)이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여당은 뭐 하고 있느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이참에 정치 풍토가 잡혔으면 좋겠다. 정말 양보해서 4선까지 한 사람은 5선에 도전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런 가운데 비례대표로 20대 국회 입성한 이용득 의원이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이 의원은 은퇴 선언문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 정치환경에서는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의미 있는 사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며 “직접 경험해보니 우리 정치에는 한계점이 있다”고 비판했다.

‘조국 정국’ 민낯 보인 86그룹
물갈이 폭보단 ‘판갈이' 중요


민주당 의원 128명 중 3선 이상 중진은 38명, 전체의 30%를 차지한다. 이 대표는 현재 당내서 최소 25명의 의원이 불출마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는 민주당 현역 의원 중 공개적으로 21대 총선 불출마를 공식화한 의원은 이해찬 대표, 이철희·표창원·이용득 의원과 진영 행정안전부장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장관, 문희상 국회의장 7명이다.

7선의 이 대표는 지난해 8월 전당대회 때 “튼튼하게 당을 닦아 재집권할 기반을 마련하는 게 저의 마지막 역사적 소임”이라며 일찌감치 불출마 선언을 했다. 민주당 출신이지만 국회의장은 당적을 가질 수 없어 현재 무소속 신분인 문희상 국회의장(6선)도 내년 총선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원혜영(5선)·백재현(3선) 의원 등도 불출마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양정철 민주연구원장, 백원우 부원장 역시 이미 총선 불출마 의사를 이미 밝혔다. 정기국회가 종료되는 내달 10일부터 21대 국회의원 예비 후보 등록신청 시작인 내달 17일을 전후로 불출마 선언 러시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선 물갈이 폭보다는 젊은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는, 제대로 된 ‘판갈이’를 마련하는게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86그룹은 2000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의 결단으로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반면 2019년 현재는 청년 정치인들이 정계 입성을 위해 올라야 할 현실 정치의 벽은 너무 높다. 이는 정치 입문에 혜택을 받았던 86그룹이 청년 정치인 세대를 키우는 작업에 소홀했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조국 정국을 겪으면서 청년세대는 86그룹의 기만과 위선의 민낯을 보게 됐다. 진짜 쇄신을 위해서는 ‘공정’과 ‘평등’을 외치는 청년들 사이서 86그룹의 용퇴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해 터져 나오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청년 정치인
키우는 작업

민주당 지도부는 인재영입 과정서 ‘청년세대에 대한 기회 부여’ 등을 원칙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86그룹의 기득권화에 담긴 본질을 파악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아울러 당내 평가 과정을 통한 중진의원들의 명예로운 퇴진의 방식을 강구하고, 본인의 결단에 따른 질서 있는 세대교체가 병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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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