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 세태> ‘화류계 신상털이’ 천태만상

남편은 오피스 단골 부인은 접대부 출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SNS를 통해 다양한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SNS서 정보를 얻는다. 문제는 정보량이 폭증하는 만큼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게재하는 ‘신상털이’다. 화류계 관계자들은 1순위 표적이다.
 

개인정보 유출은 최근 들어 흔한 일이 됐다. 대형 사이트 가입정보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SNS 비밀번호도 속수무책으로 털린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사람들도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것에 점차 무감해지고 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SNS에 내 개인정보가 게재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히 민감한 정보라면 타격은 더욱 커진다.

SNS로
신상공개

일반인의 감추고 싶은 정보를 SNS에 무단으로 게재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SNS는 확산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당사자의 피해는 어마어마할 수 있다. 하나의 정보는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다양한 종류의 SNS로 빠르게 퍼져 나간다. 

잘못된 정보일 경우에도 사후 관리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SNS 글이 온라인 커뮤니티로 이동하는 경우도 빈번해, 확산 경로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피해자는 화류계 관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화류계서 일하는 사람, 이용하는 사람 모두 표적이 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화류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하기 때문에 일각에선 이들에 대한 신상털이가 타당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또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화류계 정보가 SNS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사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많다.

그 사이 일반인의 신상 정보는 빠른 속도로 돌고 돈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만큼 전파 속도에는 가속이 붙는다. 나중에 가서 잘못된 정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유포자가 검거돼도 신상 정보가 거론된 당사자의 피해는 보상이 불가능하다. 

SNS를 떠다니는 자신의 정보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거론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지난 15일 ‘유흥탐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이트를 개설한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유흥탐정은 남자친구나 남편의 유흥업소 출입 기록을 확인해주는 사이트로 알려졌다. 전화번호를 제공하면 그 번호로 유흥업소에 다녔는지 여부를 확인해줬다고 한다. 사이트는 8월에 개설됐지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9월부터다.

성매매업소 기록 알려준다
돈 받고 민감 정보 건네줘

경찰에 따르면 서울 강남경찰서는 유흥탐정을 운영하면서 개인정보를 불법 거래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A(36)씨를 체포해 조사 중이다. A씨는 남자친구나 남편의 유흥업소 출입 여부를 정확히 알려준다면서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취득해 거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실제 유흥탐정은 개설 초기 3만원, 이후에는 5만원가량을 입금하면서 남자친구나 남편 등의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주면 성매매 기록을 조회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제공된 정보는 성매매업소 출입 여부만이 아니었다. 방문 날짜, 통화내역, 경우에 따라서는 해당 남성의 성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기록이 전달됐다.
 


A씨는 ‘골든벨’서 이 같은 정보를 얻은 것으로 파악됐다. 골든벨은 전국의 성매매업소 업주들이 이용하는 성매매 단골손님 데이터베이스다. 서울경찰청에서는 앞서 성매매 단골과 경찰 등 무려 1800만개의 전화번호를 축적한 DB업체를 검거했다. 

또 유흥탐정이 이 업체를 이용한 사실도 확인했다. 유흥탐정은 ‘여초 사이트’를 중심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골든벨은 경찰 단속이나 악성 손님을 구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됐다. 처음 적발 당시 DB에는 500여만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돼있었다. 어플리케이션을 만든 당사자는 전국 성매매 업주에게 월 사용료 5만원을 받고 팔았다. 

업소 DB
골든벨 이용

2015년 11월부터 2017년 5월에 이르기까지 챙긴 돈은 1억2000만원에 달했다.

2016년에는 이른바 고객 명단을 만들어 관리한 의혹을 받은 서울 강남 성매매 알선 조직 총책이 잡혔다. 당시 그가 관리했던 명단에는 22만명의 개인정보가 있었다고 한다. 이 명단에는 성매수자의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 옆에 차종, 만난 장소, 직업 설명 등이 붙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매매업소 이용자들에 대한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암암리에 퍼진 정보라고 한다. 문제는 명단 속 정보가 인터넷 등을 통해 유출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미 수백 명의 성매매업소 업주들이 명단을 공유하고 있고, 유흥탐정이 이 명단을 돈벌이에 이용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비슷한 사례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다.

유흥탐정이 검거됐지만 모방범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 경찰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실제 최근 텔레그램 등에서는 유흥탐정과 유사한 계정들이 추가로 발견되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원래 성매매업소서 일하던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이 같은 일이 유흥탐정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신종 범죄 수법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유흥탐정보다 그를 모방한 아류들이 더 큰 돈을 벌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8월23일부터 9월3일까지 12일 만에 800여 건의 의뢰를 받았다. 이 과정서 수익은 3000만원에 이르렀다. 

경찰은 현재 활동 중인 유흥탐정 아류업체들은 수억원의 불법 수익을 올리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내부에선 꼬리만 잡고 몸통은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정보를 의뢰한 사람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유흥탐정 A씨가 받고 있는 혐의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 

개인정보보호법 제71조에는 정보주체의 동의를 받지 않고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한 사람을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있다. 또 그 사정을 알면서도 영리 또는 부정한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제공받은 자도 똑같이 처벌하고 있다.


타인의 민감정보가 무분별하게 드러난 것은 이번 사례만이 아니다. 2016년에는 ○○패치가 온라인을 달궜다. ○○패치는 연예 전문 매체 <디스패치>서 이름을 따왔다. 연예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보도가 많은 <디스패치>처럼 폭로성 게시글을 올리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게 바로 강남패치다. 유흥업소서 일하는 여성과 남성의 신상정보를 폭로하려는 목적으로 2016년 6∼7월경 만들어진 SNS 계정이다.

강남, 한남…
패치들 등장

강남패치 운영자 B(24)씨는 유흥업소서 일하는 여성과 남성이 실제로는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스폰 등 부적절한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폭로, 관련된 일부 연예인들을 거론했다. 특정 인물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물론 사진까지 버젓이 게시된 글은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다. 

SNS에 올라오는 글은 B씨가 직접 쓰거나 제보를 통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여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다수의 연예인도 강남패치 계정에 거론되면서 홍역을 치렀다. 한류스타, 아이돌그룹 멤버, 유명 배우 등이 유흥업소 종사자와 친밀한 관계인 것처럼 언급됐다. 유명 스포츠스타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인 양 적혀 있어 파장이 일기도 했다.


자극적인 소재의 글은 SNS를 타고 빠르게 번졌다. 강남패치에 언급된 이들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였다. 몇몇 블로거들은 강남패치 계정 글을 그대로 따다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두기도 했다. 

강남패치에 이름이 오르내린 연예인이 명예훼손 소송, 경찰이 수사 가능성을 말해도 B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신고로 계정이 정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십 차례에 걸쳐 계정 이름을 바꿔가며 운영하기도 했다.
 

강남패치를 본떠 만든 한남패치(한국남자를 비하하는 의미의 한남충+디스패치)도 등장했다. 강남패치와 한남패치는 정보를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남성을 몰래 촬영한 사진을 올리는 오메가패치, 실제 성병에 걸렸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남성들의 이름과 나이, 성병의 종류를 공개하는 성병패치, 유흥업소에 가는 것을 즐긴다며 일반인의 신상정보를 마구잡이로 공개한 논현패치 등 유사 계정이 쏟아졌다.

이 과정서 일반인 피해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반인 피해자들은 사실 확인 없이 게재된 글로 사회적 이미지 등에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계정에 올라온 글을 접한 주변 사람들 중 몇몇이 해당 내용을 사실로 받아 들여 2차 피해를 입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자 경찰은 결국 수사에 나섰다.

2016년 8월 경찰은 강남패치와 한남패치 운영자들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강남패치 계정에 100여명의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폭로하는 사진 등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B씨를 체포했다.

마구잡이로 신상공개
사이트 운영자 쇠고랑

경찰에 따르면 B씨는 제보를 통해 입수한 여성 피해자의 과거 유흥업소 종사 경력, 스폰서를 만나 잘 살고 있다는 내용과 피해자의 사신을 올려 유포하는 등 약 한 달 동안 100여명의 과거 경력과 사진 등 신상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자신의 계정에 “훼손될 명예가 있으면 나를 고소하라”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기도 하고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언론보도를 올리며 “홍보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등 검거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낸 바 있다. 

B씨의 범행은 질투심서 시작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경찰 조사서 평소 자주 가던 강남클럽서 한 기업 회장의 외손녀를 보고 박탈감과 질투를 느껴 범행을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한남패치 운영자 C(28)씨도 검거됐다. C씨의 범행 동기는 성형수술을 망친 의사에 대한 앙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C씨는 2013년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다섯 차례나 재수술을 하는 등 부작용에 시달렸다.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급격히 불어나고 우울증과 불면, 불안 증상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기 C씨는 강남패치에 올라온 글을 보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느꼈고, 그 과정서 자신을 수술한 성형외과 의사를 떠올렸다. 결국 C씨는 비양심적인 남성들을 폭로하겠다며 한남패치를 개설, 일반인 남성들을 표적으로 삼고 개인 신상을 공개했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법원은 1심서 강남패치 운영자 B씨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조정래 판사는 지난해 8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또 보석 결정을 취소하고 법정 구속했다.

조 판사는 “B씨는 소문만으로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과 사진을 게시해 비방 목적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며 “인터넷을 통해 사적 영역의 피해자들의 실명, 사진과 함께 개인 신상 관련 글을 반복적으로 게시하면서 익명성에 기대 개인의 인격을 비하하고 악의적으로 공격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헌법상 표현의 자유는 폭넓게 보호돼야 하지만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될 수 없다”며 “10만명이 넘는 구독자들에게 신상이 공개되며 피해자들은 가정 및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호소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B씨는 자신이 한 행위의 의미와 피해자에 대한 진지한 반성 대신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며 “피해 결과도 심각해 유사 및 모방범죄까지 발생하는 등 사회적 피해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허위정보
심각한 피해

항소심에선 B씨의 형량이 감형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5부(장일혁 부장판사)는 지난 1월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1심 판결을 깨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B씨가 다수의 이용자가 보는 SNS를 통해 허위사실을 게시해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피해자들의 다수에 이르고 피해 결과 또한 중대하다”고 지적했다.

또 “B씨는 해당 게시물이 허위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여러 사정을 비춰보면 허위란 점을 충분히 인식한 사정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다만 “B씨가 일부 피해자들과 합의한 사정 등을 감안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SNS 사생활 폭로 ‘연예인도 당한다’

SNS가 사생활 폭로 창구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몇몇 연예인의 사생활이 SNS를 통해 무분별하게 공개되면서 나온 말이다. 

누리꾼들은 적나라한 내용에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과한 정보)’ 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배우 류화영은 자신을 남자친구라고 주장하는 방송인 엘제이(LJ)의 SNS 글로 홍역을 치렀다. 실시간 검색어에 두 연예인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주장과 해명이 반복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쇼미더머니777>에 출연 중인 래퍼 디아크의 전 여자친구가 디아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SNS에 글을 올려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해당 여성은 이후 ‘합의된 관계’라고 입장을 번복했고 디아크가 자신의 SNS에 사과문을 게재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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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