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대기업 살생부 막전막후

‘이랬다 저랬다’ 기준도 줏대도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알맹이 없는 대기업 살생부를 만든 금융감독원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상장폐지 위기까지 내몰린 회사에 정부가 의도적으로 호흡기를 부착한 형국이다. 형평성 및 특혜시비 등이 불거질 가능성마저 점쳐진다.

채권은행들이 대출금 500억원 이상 대기업 1973개사 중 602개 세부평가대상 업체를 대상으로 신용위험평가를 완료했다. 이를 토대로 금융감독원은 지난 7일 ‘2016년 대기업 신용위험 정기평가 결과’를 내놨다. 구조조정 대상 대기업으로 확정된 곳은 총 32개사로 지난해보다 3곳 줄었다.

발걸음 빨라지는
대기업 구조조정


채권은행들은 당초 34개사를 구조조정 대상 업체로 선정했지만 5개사가 주채권은행에 이의를 제기하자 재심사를 거쳤다. 지난해까지는 재심사 과정이 없었지만 올해 새로운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 제정되면서 기업 권익 보호 차원에서 이의제기 절차를 두게 됐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32개사를 확정해 13곳을 C등급, 19곳을 D등급으로 분류했다. A와 B등급 정상기업, C등급은 워크아웃, D등급은 법정관리 대상으로 분류된다.

장복섭 금감원 신용감독국장은 “기업의 자구계획 여부가 등급 상향 조정의 결정적인 부분”이라며 “재무적인 문제가 있더라도 기업이 스스로 구조조정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이 나온다면 등급을 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장사는 7곳으로 해운·조선·전자가 각 2곳, 건설 1곳이다. 이 가운데 1곳은 상장폐지, 2곳은 거래 정지 처분을 받았다. 업종별로는 조선·건설·해운·철강·석유화학 등 5대 취약업종 기업이 17개사로 절반(53%)을 웃돌았다. 전자업종은 2년 연속 5곳 이상이 구조조정 대상으로 선정됐으며 주택 경기 회복세에 힘입어 건설업종은 지난해 13곳에서 6곳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이들 기업이 금융권에 빌린 신용공여액은 1년 사이에 12조4000억원에서 19조5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중대형 조선·해운사의 비중이 80%에 달했다.

부채 500억 이상 32곳 구조조정 급물살
부실덩어리 조선 빅3는 정상기업 분류?


금감원은 금융권의 손실흡수 여력을 감안할 때 금융사의 건전성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상반기 중 은행권이 쌓은 충당금 규모는 3조8000억원으로 올해 추가 적립액은 은행 2300억원, 저축은행 160억원으로 예상된다.

금감원은 C등급 기업에 대해서는 신속한 금융지원과 자산매각, 재무구조 개선 등을 통해 경영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워크아웃을 신청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신규 여신을 중단하고 만기도래 여신을 회수할 수 있다. D등급 기업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게 된다.
 

올해 초 자체 경영개선 프로그램을 통해 경영정상화를 진행했던 대기업 9곳도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이들 가운데 6곳은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3곳은 채권단과의 자율협약을 통해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즉, 9개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착수는 자구안 실행이 6개월만에 사실상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지난해에는 17개 기업이 자체 경영개선 프로그램 대상으로 선정됐다가 3곳이 경영정상화에 실패해 지난해 말 C등급을 받은 바 있다.

자체 경영개선 프로그램으로 분류된 기업은 B등급과 C등급 사이에 속해 있다. 성공적으로 자구안을 이행하면 정상기업인 B등급으로 올라가지만 실패해서 C등급으로 떨어지면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된다.

구조조정대상 업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재무구조와 수익성이 취약한 업체 중 자산매각이나 증자 등을 통한 자체 자구계획을 수립하거나 진행 중인 업체는 26곳이다. 이들이 제출한 자구계획은 약 1조3000억원이며 부동산 등 자산매각이 1조원을 차지했다.

자구안 이행에 실패한 기업 대부분은 취약업종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업황 침체와 연결 지을 수 있다. 올해 자체 경영개선 프로그램 기업으로 선정된 26곳은 전자(7곳) 철강(4곳) 건설(3곳) 화학(2곳) 조선(1곳) 기타(9곳) 등이다.

펼쳐진 리스트
누가 살아남나


신용위험 정기평가 결과가 나오자 재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빅3’ 조선업체인 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으로 모아졌다. 당초 빅3는 C등급이나 D등급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다. 수주 부진의 여파로 자금난이 현실화 될 것으로 관측됐기 때문이다. 채권단과 해당 기업들은 자구계획안을 두고 커다란 진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빅3 모두 B등급 이상으로 평가됐다. 특히 논란이 되는 건 대우조선해양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3조3000억원 가량의 손실을 냈다. 부채비율도 7308%에 달한다.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수치)은 3년 연속으로 1을 밑돈다. 과거 5조원대 회계사기 혐의에 이어 현 경영진도 올 초 1200억원대 영업손실 축소 의혹이 불거져 충격을 줬다. 검찰은 채권단 지원이 중단될 것을 우려해 회계사기를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이달 말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은 대우조선해양에 대해 2년 연속 B등급으로 판정했다. 시장 판단과 달리 대우조선해양을 정상기업으로 분류한 것은 정부와 대주주의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대우조선해양이 C이하 등급을 받으면 조선업 특성상 보증 문제가 생겨 영업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 같은 견해에 대해 장 국장은 “수주가 개선돼 기업이 살아나는 것이 최선이다. 굳이 C등급으로 해 RG(선수금환급보증) 콜 등의 문제를 유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며 “대우조선해양은 대주주의 의지와 자구계획으로 정상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경우”라고 부연했다. 대주주인 산업은행과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점을 반영했고 사실상 정부주도로 구조조정을 진행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리는 아니다.

대우조선해양이 정상기업으로 분류된 만큼 국책은행들은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여신등급을 하향 조정하는 대신 유지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을 제외한 대다수 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의 여신 등급을 ‘정상’보다 한 단계 아래인 ‘요주의’로 낮췄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다. 다만 시중 은행들이 당분간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추가적인 충당금 쇼크에서 자유롭게 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뒤봐주는 대우조선 ‘B등급’
선제적 부실 차단 효과는 ‘글쎄∼’

특혜에 가까운 대우조선해양의 B등급 판정은 해운업 구조조정의 주 대상이었던 현대상선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현대상선의 경우 최근 자산매각과 용선료 인하 등 자구안 이행을 통해 5000%대의 부채비율을 200%대까지 낮추는 등 강도 높은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이달 중으로 정부가 운용하는 선박펀드를 신청하고 약 1조4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이용해 비용절감에 나선다는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상선은 C등급을 부여받았다.

예상치 못한
대우조선 B등급

문제는 대우조선해양이 이미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앙골라 국영석유회사 소난골이 자금 문제로 드릴십 2척을 인도하지 않아 인도대금 1조원을 못 받고 있다. 소난골에 자금을 대주고 있는 글로벌 채권단이 기존 여신을 연장해줄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아 배 인도가 차일피일 미뤄진 탓이다. 글로벌 채권단은 이달 중순 무렵에 소난골에 대한 여신 회수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조선은 다음달에 CP(기업어음) 4000억원의 만기가 돌아온다.
 

또 다른 논란거리는 대기업 신용위험 평가의 사전적 부실 차단 실효성 여부다. 금감원은 올해 평가 기준이 과거보다 한층 엄정해졌다고 밝혔다. 엄정한 기준이란 평가 기준이 강화됐다는 의미가 아닌 평가 대상 기업수의 확대를 뜻한다.

이전 신용위험평가에서는 신용공여 500억원 이상 기업이 평가대상이었지만 올해부터는 모든 기업(금융회사 등 일부 예외대상 제외)으로 적용대상이 확대됐다. 하지만 선제적 부실 차단 효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한계가 명확하다. 금감원 역시 이 같은 지적에 대해서 일정부분 인정하고 있다. 

장 국장은 “기존 구조조정은 여신이 분산돼 있는 기업들에 대해선 특정 시점에 한번 걸러주는 사후적 차원의 구조조정”이라며 “신용위험 평가를 통해 기업의 부실을 막고 기업 스스로가 자구계획을 추진할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은 당장 유동성에 문제가 없는 정상기업으로 분류됐지만 산업은행이 수시로 자금 확보 방안을 압박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대우조선을 비롯한 빅3 조선사는 신용평가에 앞서 실시한 주채무계열 소속 대기업 평가에서 ‘심층관리대상’으로 지정돼 이미 채권은행과 재무개선 약정을 맺고 관리를 받고 있다.

커지는 특혜 의혹
평가 신뢰도 타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감원의 판단이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신뢰도 회복과 자력 회생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드는 시점이기도 하다. 윤석헌 전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다른 기업들을 평가한 잣대로 똑같이 적용하면 대우조선은 D등급을 받아야 한다”며 “이번 평가는 형평성과 특혜시비 등으로 신용평가에 대한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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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