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드는 산업은행 무용론

엄청난 나랏돈 주물럭 ‘믿어도 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엄청난 금액의 나랏돈을 운영하는 국책은행. 우리가 알고 있는 KDB산업은행의 단면이다. 그러나 최근 산업은행은 각종 금융비리와 정치금융 논란에 휘말리면서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안팎에서 쉽게 해결하기 힘는 난제가 겹겹이 쌓여 있는 양상이다. 커져가는 ‘산업은행 무용론’이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다.

1954년 설립된 KDB산업은행은 기업금융 및 투자금융, 국제금융, 기업 구조조정 및 컨설팅 등을 담당하는 국책은행이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 민영화됐다가 2015년에 다시 공공기관으로 지정된 산업은행은 IMF외환위기를 전후로 대우그룹 등의 워크아웃을 주도하는 등 금융시스템을 지켜내는 데 지대한 역할했다. 산업은행 총자산은 지난해 기준 약 309조원에 이른다. 불과 5년 새 자산이 2배 넘게 급증했다.

외압엔 굽신
책임전가 급급

이처럼 막중한 책무를 떠안고 있지만 산업은행을 향한 안팎의 시선은 싸늘하다. STX와 대우조선해양이 좌초하는 과정에서 국책은행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데다 정권의 눈치를 봐야하는 실상이 만천하에 공개된 탓이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 터트린 폭탄 발언은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했다. 지난 8일 홍 전 회장은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산업은행의 자금 지원은 타의에 의한 결정이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꾸준히 지적된 산업은행 관치 논란이 표면화된 순간이었다.

홍 전 은행장은 한 매체를 통해 “대우조선해양 공적 자금 투입을 두고 정부의 결정 내용을 전달받았다”며 “청와대·기재부·금융 당국이 결정한 행위로 애초부터 시장 원리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으며 산업은행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말했다.
 


홍 전 회장의 발언을 기점으로 소문으로만 떠돌던 ‘서별관회의’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 속기록 없이 이어져 온 서별관회의는 청와대 본관 서쪽의 회의용 건물인 서쪽 별관에서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한국은행 총재 등을 주축으로 열리는 비공개 경제금융점검회의로 알려져 있다.

역시 철밥통…곳곳에 산피아 포진
안팎서 거듭된 비리 혐의로 구설

홍 전 회장의 발언 직후 야당은 즉각 청와대를 정조준하고 나섰고 후폭풍은 생각 이상으로 커졌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홍 전 회장이 서별관회의를 통해 최경환, 안종범, 임종룡 등 3인이 모인 자리에서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지원을 결정했다고 이야기했다”며 “조선업의 부실로 인한 수많은 실직자들의 실직과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부어야 하는 구조적 부실이 결국은 서별관회의에서 결정됐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곧바로 홍 전 회장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임종룡 금융위원장까지 나서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임 위원장은 지난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업구조조정 관련 기자간담회서 “내부적으로 어떤 식의 보고가 이뤄졌기에 홍 회장이 서별관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처음 봤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금융 당국은 이미 그 전에 국책은행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다”고 설명했다.

대우조선 부실
도대체 뭐했나

흥미로운 점은 홍 전 회장으로부터 촉발된 산업은행 외압설이 궁극적으로 산업은행 무용론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이 부각된 시점부터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간 국책은행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분출됐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감사원이 지난 15일 공개한 감사보고서를 보면 산업은행은 5억원 이상 여신 기업에 대해 ‘재무 이상치 분석 시스템’을 활용해 재무 상태를 분석하도록 내부 지침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재무자료의 신뢰성이 매우 의심되는 ‘최고위험 등급(5등급)’에 대해선 원인 규명 등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2013년 2월 정부와 산업은행의 합계 지분이 48.61%였던 대우조선해양은 분석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이런 규정을 지키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 시스템을 활용한 재무 분석을 실시하지 않았다. 조선업과 건설업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의 분식회계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는 점에서 의도된 누락이라는 목소리가 제기된 건 당연했다.

실제로 감사원이 감사 기간 중 이 시스템을 이용해 분석한 결과 대우조선해양의 2013∼2014년도 재무 상태는 ‘최고위험 등급’으로 나타났다. 대우조선해양이 같은 기간 8785억원이라고 공시한 영업이익은 6557억원의 적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1조5342억원이 과다 계상된 셈이다. 또한 대우조선해양이 2013년 5700억원, 2014년 2조187억원 등 해양플랜트 사업 40개의 총 예정원가를 임의로 차감했던 정황도 포착됐다.

뻥튀기된 영업지표의 수혜는 임직원들에게 돌아갔다. 대우조선해양은 임원들에게 2014년 48억원, 지난해 17억원 등 총 65억원을 성과급으로 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직원들 또한 성과배분상여금 명목으로 2013년 1057억원, 2014년 927억원 등 총 1984억원을 받았다.

도덕적 해이는 3조2000억원대 영업손실이 드러난 지난해 7월 이후에도 계속됐다. 대우조선해양은 4조2000억원 규모의 신규 자금을 산업은행으로부터 지원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지난해 말 1176억원을 임직원에게 격려금으로 지급했다. 이 중 877억원은 성과상여금 명목이었다. 산업은행은 성과상여금 성격이 포함된 격려금 지급이 부당하다는 판단을 내려놓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산업은행은 2012년에도 대우조선해양이 제출한 허위 경영실적 자료를 그대로 인정해 임원 성과급 35억원이 부당 지급되도록 방치했다. 당시 대우조선해양의 경영 실적은 성과급 지급이 제한되는 G등급에 해당했지만 산업은행이 허위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아 50% 성과급 지급이 가능한 F등급으로 판정했다.

대우조선 수수방관에 싸늘한 여론
감시는커녕…부당한 돈잔치 나몰라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정부의 낙하산 인사도 산업은행 무용론을 부각시키는 데 일조한다. 산업은행 회장은 사실상 정권이 낙점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입김에 의해서 회장 자리가 채워지다 보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이명박정부 당시 임명된 강만수 회장은 이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대통령직인수위 경제분과 간사를 지낸 인물이다. 홍 전 회장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과 서강대 동문인 홍 전 회장은 대선후보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을 맡아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스스로를 낙하산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홍 전 회장은 2013년 국정감사 때 “낙하산으로 왔기 때문에 오히려 부채가 없다. 실력으로 보여드리겠다”고 발언해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홍 전 회장의 후임인 이동걸 현 회장 역시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금융권 인사들의 박근혜 대통령 지지 선언을 주도한 측근 인사로 분류된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산업은행이 지속적으로 구설에 시달리는 건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금융회사 본연의 업무보다는 정부의 국정철학에 따른 특수한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항상 탈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산업은행이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경제가 아닌 정치 논리로 일 처리를 해왔던 게 화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산은 낙하산
산피아 횡포


공교롭게도 낙하산 논란으로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했던 산업은행은 또 다른 낙하산 논란의 주범이기도 하다. 대우조선해양에는 이번에 낙하산 인사가 추진되던 사외이사 외에도 최고재무책임자로는 거의 예외 없이 산업은행 출신 이른바 ‘산피아(산업은행+마피아)’가 낙하산 인사로 임명되는 게 관행이었다. 경영을 감시하는 감사위원으로도 산업은행 출신들이 연이어 낙하산 인사로 내려왔고, 사외이사의 상당수도 관료와 정치인 출신 등의 낙하산 인사로 채워졌다.

이는 대우조선해양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경영악화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STX조선해양에도 산업은행 출신들이 연이어 감사를 맡았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산업은행 출신들이 부실기업의 요직을 차지하며 경영 부실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산업은행 무용론은 결과적으로 자초한 거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퍼진 진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가운데 시민단체들은 본격적으로 산업은행의 역할 재정립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지난 21일 정의당, 민주노총, 참여연대는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업 구조조정에 대해 정부와 산업은행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회 특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대우조선해양의 부실과 방만 경영을 내버려두었던 정부와 산업은행이 이제 와서 보여주기식 사태 수습에 나선 모습을 꼬집고 나선 것이다.

이정미 정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방만한 경영과 부실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해 고통만 안겨주고 있다”며 “공적자금만 투입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밝힐 수 있도록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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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