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원로 릴레이인터뷰> ⑤민주당 정대철 상임고문

"안철수에 민주당 팔아먹었다고? 결국 민주당이 주도권 잡을 것"

[일요시사=정치팀] 여야의 정쟁은 그칠 줄을 모르고,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2014년 대한민국 정치권의 현주소다. 이럴 때 정치 원로의 충고 한 마디는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의 빛줄기처럼 반갑다. 길을 잃은 정치권의 탈출구는 어디일까? <일요시사>가 준비한 정치 원로들과의 릴레이인터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이번 호에서는 민주당 정대철 상임고문을 만나봤다.

 

민주당 정대철 상임고문은 우리나라 정치의 산 증인이다. 정 고문은 지난 1977년 불과 34살의 나이에 제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5선 의원을 지내며 민주당 대표까지 역임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그는 또 40년 가까운 정치 이력 속에서 두 번이나 대선 승리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잠시 정치권에서 물러났던 그는 최근 '민주와 평화를 위한 국민동행(이하 국민동행)'이란 모임을 창립하고 공동대표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모임 멤버들도 범야권 정치원로들로 매우 화려하다. 상도동계의 김덕룡 전 의원과 동교동계의 권노갑 전 의원, 새정치연합 김효석·이계안 공동위원장도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정 고문은 길을 잃은 대한민국 정치권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 다음은 정 고문과의 일문일답.

- 정 고문님의 제안으로 최근 창립된 국민동행이 정치권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국민동행의 취지와 역할은 무엇입니까?
▲ 국민동행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시민단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민동행의 취지는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등 시대적 소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역할로는 개헌운동과 대통령이 공약을 잘 지키도록 촉구하는 일, 야권이 선거에서 분열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일 등이 있습니다.

- 정 고문님께서는 국민동행이 정치적 시민단체에 가깝다고 언급하셨지만 최근 홍영기 국민동행 전남상임대표가 목포시장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습니다. 사실상 창당은 아닌지요?
▲ 결코 창당일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선거에 출마하시는 분들은 국민동행을 탈퇴하도록 권유 할 작정입니다.

- 박근혜정부에서는 유독 정치 원로들의 활약이 눈에 띕니다. 일각에서는 국민동행을 통해 범야권 정치 원로들도 다시 한 번 정치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 국민동행에 참여하고 있는 원로들이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충고하고 도와주는 차원입니다.


- 민주당이 최근 내부 노선투쟁을 겪고 있습니다. 당 지도부의 우클릭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민주당의 내부 노선투쟁은 개혁과정입니다. 국민적 지지를 올리고 앞으로 크고 작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비전을 증폭시키는 과정입니다. 앞으로 중도 우파까지 끌어들일 수 있도록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해서 운동권과 486에서 진보 포기가 아니냐 그런 불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당이라는 것은 원래 여러 가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거기서부터 하나의 방향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건강한 정당이라고 봅니다.

 

- 지난달 27일 민주당 김기식 의원이 주도하는 혁신 모임인 '더 좋은미래'가 전병헌 원내대표의 조기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저는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도 다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주장들도 결국엔 민주당을 잘 이끌어 가보자고 몸부림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물론 선거가 좀 더 가까워지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선거 치르기 전 준비단계에서 이런 저런 고민이 왜 없겠습니까? 이런 과정을 통해 당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깨끗이 털고 힘을 모으면 됩니다.

- 전병헌 원내대표의 조기 퇴진이 필요하다는 보시는지요?
▲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저는 사실 무엇 때문에 김기식 의원이 그런 주장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여 투쟁이나 대여 대처가 미흡하다는 것인 것 같은데. 저는 단지 당내에서 그런 의견도 나올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정당 내에서 그런 논의를 아예 금기시하고 못하게 하는 정당은 민주정당이 아니라는 그런 뜻입니다.

'제3지대 신당' 새누리당 어부지리 막아
민주당 정신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

-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문재인 의원이 구원 등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재인 구원 등판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지금은 문재인 의원의 등판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의원은 대선 패배의 책임자이고, 당사자입니다. 국회의원직도 그만 두고 자숙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벌써 다음 대선 운운해서 민주당을 국민들로부터 희화화시키고 있는 판에 구원투수 등판은 더욱 더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문재인 의원이 등판한다고 해서 지방선거를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 표면적으로 민주당의 계파싸움이 극대화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 이른 바 친노와 비노 간의 대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486과 비486 간의 대결로 보여 집니다. 저는 민주당의 계파갈등이 극심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울타리 안에서라면 선의의 경쟁은 얼마든지 괜찮다고 봅니다. 다만 계파 이기주의로 흐르는 일은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 민주당은 현재까지도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에 대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개입을 직접 지시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정황상 증거만 있을 뿐이지요. 반대로 이석기 의원의 경우 1심에서 이미 유죄판결까지 받은 상황이지만 민주당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며 제명안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너무 이중적인 태도는 아닌지요.
▲ 국가기관 대선개입 사건은 이승만 정권 당시 3·15 부정선거처럼 국가기관이 개입된 국기문란 사건입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특검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박 대통령을 위해서 댓글을 단 것입니다. 법률적으로 또 최소한 정치 도덕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또 수사과정에서 검찰총장 밀어내기 등 수사 축소 논란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석기 사건은 재판 중인 사건입니다. 1심이 유죄로 끝났지만 항소심이 얼마 안 있으면 있을 테니까 이왕 기다리는 거 그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것입니다. 민주당이 종북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오해는 불식시켜야 하지만 좀 더 큰 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 개인으로는 이석기 의원이 정치에서 떠나는 게 맞다는 생각도 합니다. 저도 그 사람이 진짜 종북인지 확실히는 모릅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석기 의원은 종북적인 색채가 짙다는 것입니다. 민주당하고 거리를 둬야 하는 건 맞지만 국회에서 아예 쫓아낼 것인가 이런 것은 좀 더 두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판 결과가 확실히 나오면 그때 가서 쫓아내도 늦지 않다는 것입니다.

 


- 여당이 요구하는 이석기 제명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지방선거에는 불리한 것 아닌지요?
▲ 민주당 내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민주당이 성급하게 재판 중인 것을 나서서 미리 뭐 이럴 것은 없습니다. 이제 2심, 3심 하고 있는 중 아닙니까? 이왕 하는 거 성급할 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종북세력과 분명히 선을 긋는 자세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이로 인해 촉발되고 있는 민주당 내부에 종북 세력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민주당 내에 법을 어기는 종북세력이 있었다면 수사기관이 가만 두었겠습니까? 단지 종북세력이 포함되었던 진보세력과 선거 때 연대 또는 단일화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종북세력과 단호히 선을 그어 나가면 되는 일입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취임 1주년에 대해 평가해 주신다면?
▲ 저는 솔직히 박근혜 대통령이 합격점은 못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중요 공약이 전부 후퇴했습니다. 지금 여론조사에서 박근혜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50%이상 나오고 있는데 저는 어디까지나 민주당이 잘못해서 반사이익을 얻는 거지 박근혜정권이 잘하고 있어서 지지율이 나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솔직한 얘기로 저는 박근혜정권이 뭘 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국내 정치에서는 완전히 낙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는 지난 대선 당시 가장 큰 화두였고 시대적 소명인데 대선 이후 약속한 것들은 모두 뒤로 물리고 있습니다. 경제성장 역시 재벌경제를 바탕으로 한 성장은 이게 벌써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봅니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라든가 보편적 복지를 내세우길래 사실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당선되고 나선 기본적인 것들을 다 뒤집고 있습니다. 만약 민주당이 앞으로 제대로 자리만 잡으면 박근혜정부의 지지율도 크게 하락할 것이라고 봅니다.

- 대선공약 파기, 부정대선 의혹, 인사 실패 등등 각종 악재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무척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민주당은 지지율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우선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아서 반사이익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미스터리에 가깝습니다. 현재 민주당은 과감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감한 혁신을 끌어나갈 지도력이 미흡합니다.

- 정 고문님께서는 대표적인 개헌론자로 평가됩니다. 국민동행의 모임 취지에도 '독점적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운동'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개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우리나라의 정치가 삐뚤어지고 파행이 되는 것은 모두 대통령에게 권한이 너무 집중되어서입니다. 그래서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제하에서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는 나라가 이 나라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분산되어야 합니다. 개헌만 한다면 우리나라 정치개혁의 8할 이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개헌을 통해 근원적인 정치개혁이 이뤄집니다.

 

- 개헌이 필요하다면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왜 개헌을 하지 못했느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 저희도 개헌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김대중, 김종필의 정치연대가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나라당의 반대와 국민적 공감대 미성숙 등으로 개헌이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직접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습니다.

"문재인 구원 등판론? 일단 잠자코 있어야"
개헌 성공하면 정치개혁 8할은 이룬 것

- 개헌론자들 사이에서도 '4년 중임제'와 '내각제'로 의견이 갈리고 있는데 정 고문님이 생각하시는 개헌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이나 내각제 개헌이 정답입니다. 4년 중임제는 임기 5년을 4년 씩 두 번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문제인 대통령의 권한 축소, 권한 분배와는 거리가 먼 개헌운동입니다.

- 앞서 언급하신 것처럼 '권력의 집중'은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 된 지금의 양당체제도 개혁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요?
▲ 절대로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양당체제에는 권력이 더 집중되어야 합니다. 현제 양당이 무슨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양당의 권한을 모두 합쳐도 대통령이 가진 권한의 10분의 1만도 못합니다.

- 지난 2일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제3지대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습니다. 평가를 하신다면.
▲그러지 않아도 야당간 분열로 새누리당에 어부지리를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충고하고 조율해줄 작정이었습니다. 스스로들 미리 알아서 하니까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잘 협조해서 좋은 결과 이루기를 바랍니다.

-국회 내 126석을 가진 민주당과 단 2석의 새정치연합이 5:5의 비율로 합당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당연히 민주당 인사들은 불만이 좀 있을겁니다. 그런데 사실상 5:5는 불가능합니다. 과거 사례를 보면 큰당과 작은당이 합칠 때 다 5:5로 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론 그렇게 잘 안됐습니다. DJ 시절에도 전부 5:5라고 말해 놓고 한쪽으로 쏠렸죠. 산술적으로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5:5란 창당 정신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민주당이 양보한다는 표시로도 해석되고요.

-민주당의 정체성이 없어졌다, 민주당을 팔아먹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괜히 시비 걸려는 사람들 얘깁니다. 저는 거꾸로 봅니다. 안철수 쪽의 정체성이 없어지면 없어졌지 결코 민주당의 정신이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수차례 이합집산을 지켜봤지만 결국 주된 정당이 주도권을 쥐게 돼 있습니다. 민주당내 경쟁하려는 집단이 시비를 걸 수 있지만 대국적으로 대단히 잘된 일입니다.


- 마지막으로 정치권에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 소통을 통해서 정치가 복원되어야 합니다. 박근혜정부 들어서 정치가 없어졌고 또 여야 간에 소통이 없어지므로 정치다운 정치가 없어졌습니다.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가 오죽하면 정무장관을 복원시키자고 했겠습니까? 청와대와 야당과의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정무장관을 복원시키자고 했는데 청와대는 그것도 시큰둥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시대적 소명을 잘 알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가? 여야 정치인들이 공통분모를 갖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정치인들이 자괴성 발언을 자주 합니다. "우리나라 정치는 너무 후진적이야." "아무리 해도 안 변해."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가 정치를 시작한지가 한 40년이 되는데 속도는 늦지만 분명히 정치는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800년 동안 만들어 놓은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나라는 해방 후 60년간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겪고 이뤄내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것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이나 국민들은 정치인들은 다 못된 놈들이라고 비판하지만 너무 절망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대신 그만큼 더 노력을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정대철 고문은?>

▲한양대학교 조교수
▲제9·10·13·14·16대 국회의원
▲평화민주당 대변인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민주당 대표
▲민주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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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우리에게 추석은 차례를 지내거나 귀향을 하는 것이 익숙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차례를 지내는 비중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긴 연휴를 활용한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자기계발 등을 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추석에 차례를 지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초반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차례와 제사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셈이다. 알바 우선 통계청 조사에서도 명절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긴 연휴를 여행으로 보내려는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했다.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행 중개 플랫폼 스카이스캐너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7%가 이번 추석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응답했다. 특히 해외여행 비중이 크게 늘었다. 10년 전 대비 명절 여행에 긍정적인 인식이 37%에서 70%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인기 여행지는 일본(43.1%)이 1위였고, 이어 베트남(13.2%), 중국(9.6%), 태국(7.5%), 대만(6.2%) 순이었다. 도시별로는 일본 후쿠오카(20.2%)가 가장 높은 검색 비율을 기록했으며, 오사카(18.3%), 도쿄(15.4%), 방콕(8.9%), 타이베이(8.0%)가 뒤를 이었다. 여행을 가지 않고 명절 연휴를 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긴 연휴를 활용해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 수요도 급증했다. 당근마켓과 같은 알바 커뮤니티와 플랫폼에는 “추석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20대 청년은 “쉬는 날이 길어 잠깐이라도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고, 한 대학생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세트 포장 알바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명절 기간에는 업무강도가 높아 평균 시급의 1.5배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근무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명절 시즌 알바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맞춰 구인·구직 플랫폼들은 ‘추석 알바 채용관’을 운영하며 수요를 모으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소매점과 전통시장에서 단기 인력을 모집하고, 선물용 고기·과일 세트 포장, 택배 상·하차, 진열·판매 등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절반 이상 “안 지내요” 77%가 여행 계획 세워 지난해 추석 구인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절반 이상(53.9%)이 단기 용돈 벌이를 위해, 22.2%는 고물가로 인한 지출 부담 때문에, 18.2%는 여행 경비나 등록금 등 목돈 마련을 위해 명절 알바를 계획했다고 답했다. 이는 명절을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보내지 않고, 생계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계발하며 추석 나기’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 중에는 독서나 온라인 강의, 어학 공부, 자격증 준비 등에 연휴를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터디 카페와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일부 출판사나 문화 기획사에서는 명절 연휴에 맞춰 북콘서트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명절이 휴식 기간만이 아닌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가족 모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MZ세대는 가족·친척 모임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한 청년은 “친척들과 모이면 취업·결혼 얘기 등으로 잔소리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친척 모임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필요한 경우에만 가족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활동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연휴를 도심에서 보내는 ‘혼추족’을 겨냥해 유통·외식업계도 다양한 이벤트를 내놓고 있다. 수도권 맛집 가이드, 추석맞이 전시·공연, 집콕형 OTT·게임 프로모션 등이 대표적이다. 편의점과 HMR(가정 간편식) 업체는 명절 한정 도시락·한상 차림 제품을 늘리고, 명절 기간 반값·카드 제휴 할인 등 단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추석 선물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굴비·한우·고급 과일 세트 등 전통 품목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실속형·소포장 선물세트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에서는 고급 커피·차 세트, 수제 디저트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소포장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과 자기계발이 더 유익해” 명절 스트레스 가족 모임 불참 온라인몰에서는 올리브 오일, 참기름, 견과류, 꿀 등 건강 지향 소품목 세트가 매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속형·소포장 선물을 찾는 배경에는 고물가 부담과 1~2인 가구 증가가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고가 선물을 준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보관이 편리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명절을 함께 보내는 가족 규모가 줄면서 필요한 양만큼만 담긴 선물세트가 ‘부담 없는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가격 대비 효용을 중시하는 MZ세대 소비자층도 이 같은 흐름을 이끌고 있다. 모바일 선물하기 판매는 전년 추석 대비 두 배 이상 늘었고, 온라인몰도 같은 기간 선물세트 매출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편의점 앱을 통한 선물세트 매출은 연중 대비 100% 이상 신장세가 관측됐고,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선물하기 거래액도 두 자릿수 증가를 이어가고 있다. 마켓컬리는 추석 기간 한시 선물하기 서비스를 운영하며 홍삼·화장품 등 선물 품목을 확장했다. 명절 식문화 자체도 간편화 된 흐름이 뚜렷하다. 1인 가구 1012만명, 2인 가구 600만명으로 소규모 가구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대형마트의 간편 차례상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증가했다. 편의점의 냉장·냉동 HMR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했고, 명절 한정 도시락은 1인 가구 밀집 상권에서 판매 비중이 높았다. 이번 추석에도 이런 흐름에 맞춰 대형 마트는 간편 차례상·냉동 밀키트 대형 할인전을, 편의점 4사는 명절 도시락 출시와 제휴 할인행사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밀키트와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증가한 데에는 물가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 설문에선 추석 전체 지출 예산이 평균 71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26%가량 늘었다는 응답이 나왔다. 지출 중에는 부모 용돈·선물 비중이 절반을 웃돌았고, 차례상 비용·내식 비용도 적지 않았다. 품목별로 과일·수산물·햅쌀·송편 등의 차례상 음식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입 축산물 고려 비율도 늘었다. 이 때문에 “차례상 형식을 간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선택의 시대 추석을 준비하는 한 30대 가정주부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차례를 안 지내거나 설에 한 번만 지내는 집이 많다. 고물가 시대에 음식을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담되는 것 같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간소화하더라도 차례를 지내는 행위에 의미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