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사람들 릴레이인터뷰 ⑤> 남궁진 전 장관

“곁에서 본 DJ, 매일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다”



학창시절 시작한 민주화 운동으로 DJ와 필연적 만남
78일간 가택연금 함께 하며 고난의 시절 ‘동고동락’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동교동계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김 전 대통령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삶을 생생히 목도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김대중’보다 더 따뜻했던, 눈물 많고 정 많은 김 전 대통령을 보았고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한 인동초 삶의 곁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훈도 이들에게는 평소 들어오던 말일 뿐이다. 동교동계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일면들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되새겨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간 세월은 한반도의 사계를 닮았다. 그는 한겨울 눈보라보다 더 매서웠던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 민주화라는 봄을 꿈꿨다. 여름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민중 속에서 살아 숨쉬었으며 누구보다 추억할 것이 많은 가을을 보냈다.
김 전 대통령과 같이 길을 걸었던 이들에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김 전 대통령이 떠나고 이들은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을까.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달 15일 고즈넉한 인사동 한켠에서 남궁진 전 장관을 만났다.
다음은 남궁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 국장 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땅이 꺼지는 슬픔이었다. 나라의 진로와 국민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줄 스승을 잃은 충격일 것이다. 국장 후 거의 낙담한 채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 DJ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가.
▲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인연이 닿았다. 4·19가 일어났을 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중앙, 보성, 배제, 양정, 경성, 휘문, 중동 등 7대 사립고와 이 학교들의 학생회장단 모임이 있었다. 나는 그 해 중앙고 학생회장이자 학생회장단회의  의장을 맡고 있었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전 고등학교가 4·19를 결의했다. 이들 중에 경동고 대표로 온 최장집 고려대 교수와 보성고 대표였던 서진영 교수가 기억에 남는다.

- 파란만장한 고교 시절이었다. 최장집·서진영 교수와는 대학에서 다시 뭉치지 않나.
▲ 고등학생 때는 4·19로 수배자 신분이 되더니 대학에 오니 한일협정이 문제가 됐다. 고려대에서 모이게 된 최장집, 서진영 교수와 함께 6·3 한일협정 반대를 주도하는 씽크탱크 역할을 했다. 산업화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가 되지 않으면 나라의 발전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 긴급조치로 전국이 혼란스러웠다. 당시 정권이 북한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 ‘김일성,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인 독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18년 독재나 뭐가 다른가’라는 생각을 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안 좋은 상황에 놓였고 우리가 나은 상황이 됐다뿐이지….
1980년 민주연합 연정에 가담해 민주화운동을 했다. 1984년에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선생을 대신한 김상현 전 의원의 민추협에 함께했다. 기획위원과 기관지인 민주통신 발행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민주통신 발행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체포되면 안 되기 때문에 비밀 아지트를 이용했다.

- 민추협 활동으로 DJ와 직접적인 인연이 생긴 것인가.
▲ 민추협이 신민당으로 총선에 나서자 1985년 2월8일 김 전 대통령이 귀국했다. 정권이 그를 공항에서 체포하려고 할까 봐 미국에서 하원의원 두명이 따라와 김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귀국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고 곧 치러진 총선에서 신민당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압승을 거뒀다.
2월14일 김 전 대통령이 나를 “보자”고 했다. 비서실 전문위원을 맡아 달라 부탁했다. 6개월간 비서실 전문위원을 하자 비서를 하라고 하셨다.
- DJ와 78일간의 가택연금을 함께한 것으로 알고 있다.
▲ 1985년 2월8일 귀국 후 54번의 연금을 당했지만 60항쟁 전후 78일간의 연금이 가장 긴 연금이자 마지막 연금이었다. 당시 동교동에는 김 전 대통령 내외분과 나, 김옥두 전 의원, 운전기사까지 5명이 있었을 뿐이다. 경찰 2000여 명이 동교동 자택을 감싸고 있어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했다. 손님은 물론 김 전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아들들도 들어오지 못했다.

- 상당히 긴 시간이었는데 가택연금 기간 동안 DJ는 어떻게 지냈나.
▲ 아침 6시 반이나 7시면 머리를 빗고 넥타이에 양복을 단정히 입으시고 나서야 거실로 나오셨다. 연금 중이라 누구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집이니 편안한 옷을 입고 계실 만도 한데 한결같으셨다. 연금 40일째쯤 “편하게 입으시지요”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인간에게는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 인간의 그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는 토인비의 말을 꺼냈다. 매일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과 남북화해협력 등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절제해야 하고 자신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흐트러질 수 없다고 했다.


- 연금생활 동안 소소한 취미생활도 즐기셨을 것 같은데.
▲ 꽃을 사랑하셨다. 자택에 40여 평 남짓한 마당이 있는데 그곳에 꽃을 심었다. 그리고 꽃마다 팻말을 세웠다. 동교동에 오는 사람들이 꽃과 친해질 수 있게 하고 싶어서였다.
장미를 특히 사랑해 한 블록 가득 장미를 심었다. 멀쩡한 장미를 잘라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보고 동교동을 찾았던 기자가 “가혹한 면이 있다”고 했다. 내가 김 전 대통령에게 왜 장미를 잘라내냐고 물으니 “이 꽃을 잘라야 새로 나오는 꽃봉오리의 꽃의 더 아름답게 필 것”이라고 하셨다.
김 전 대통령의 꽃밭관리는 특별했다. 매일매일 응달에 있던 꽃들은 양달로, 양달에 있던 꽃들은 응달로 옮겨 심었다. 그 의미를 물으니 “정부의 따사로운 손길이 응달진 사람들에게도 미쳐야 한다”고 하시더라. 기회가 생겨 집권을 하게 되면 서민과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나름의 의지였던 것 같다. 실제 집권을 하고 청와대로 들어간 김 전 대통령은 ‘생산적 복지’를 주장, 기초생활비 등을 제도화했다.

- DJ 하면 ‘책’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동교동 지하에는 김 전 대통령의 서재가 있다. 3만 권의 장서가 있는데 그 책의 분류를 내가 했다. 문학, 철학, 역사, 과학 등 다양한 책들을 도서관처럼 라벨을 붙여 정리했다. 정리를 하다 보면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 목차나 서문이라도, 책의 내용 일부라도 봐야 했다. 거의 모든 책에 볼펜으로 중요한 내용이 표시돼 있었고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토요일이면 당번 비서에게 신문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이주의 신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간 중 목록을 정해 사오라고 했다. 한 번에 2~30권의 신간을 사서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시간이 날 때 책의 목차나 서문을 보고 버릴 것, 서가에 꽂을 것, 책상 위에 둘 것으로 분류했다. 책상 위에 둔 책은 지니고 다니시면서 정독하셨다.

- 78일간의 연금은 어떻게 끝난 것인가.
▲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은 없다”며 이전처럼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직선제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타올랐고 전 민주세력이 민주화를 위한 열망을 불태웠다. 박종철 열사 등 희생자도 나왔다. 민심은 들불처럼 일어났고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그제야 연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연금에서 풀려난 날을 기억하나.
▲ 6월20일 새벽에 잘 아는 분에게 전화가 왔다. 3시에 쿠테타가 일어나니 몸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고 새벽 5시에 김 전 대통령이 잠든 방의 문을 두드렸다. 김 전 대통령이 “무슨 급한 일인가”하시더니 말을 전해 듣고는 “어, 알았네. 나가있게”하셨다.
김옥두 전 의원과 나는 3시에 무장군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에 낙담해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입었다.
김 전 대통령이 부르셔서 갔더니 수북이 쌓인 수첩을 앞에 두고 계셨다. 김 전 대통령은 수첩을 책상 위에 놓거나 바닥에 던지거나 해서 하나하나 분류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둔 것은 태워라. 그리고 책상 위에 둔 것은 역사에 남아야 하는 기록물이니 꽃을 옮겨 심는 척하고 깊게 파서 숨겨라”라고 했다. 수첩에 김 전 대통령의 교우관계나 연락처, 비밀 이야기가 있으니 정권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전 대통령이 매일 했던 것처럼 꽃을 옮겨 심는 척하고 화단 한쪽을 깊게 파 수첩을 숨겼다.
점심시간에 김 전 대통령 내외분이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셨다. 최후의 오찬이었다. 민주주의의 장송곡을 불러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다섯 명 모두 식탁에 앉아 종교에 따라 성호를 끗거나 기도를 했다. 나는 눈만 감았을 뿐 기도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이 김옥두 전 의원에게 “김 차장, 뭐라고 기도했어요”라고 물으시는 게 아닌가. 김 전 의원이 “예, 저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하루속히 이뤄지고 오늘 선생님 내외분이 다치지 않고 건강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남궁 동지, 뭐라고 기도했어요”라고 묻자 나는 차마 눈만 감았다 떴다고 할 수 없었다. “예, 선생님. 저도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한 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김 전 대통령은 “응, 그렇지. 그런 기도도 좋지.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모든 것을 주께 맡깁니다’라는 기도가 더 좋을지도 모르지”라고 하셨다. 나와 김 전 의원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물을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동교동에서 지명직 공직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청와대에서나 문화부 장관으로 활동하게 된 사연이 있을 성싶다.
▲ 대선 막바지에 성명을 발표했는데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하나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집권을 하면 권력을 남용하지나 않을까 하는 국민들의 불신을 씻어주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지명직 공무원이 되면 사회 각 분야에서 인재들을 뽑아 쓸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옷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김 전 대통령은 딜레마에 빠졌다. 인재도 좋지만 청와대에는 투철한 국가의식을 가진 이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명감 없이는 안 된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판단이었다.
국감 중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나를 찾아 청와대로 들어와 줄 것을 부탁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인사쇄신을 해서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민과 약속을 했는데 안 됩니다. 선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청와대에 가려면 국회의원직을 두고 가야 합니다. 제 자신이 아깝습니다”라고 말했다.
선거를 얼마 앞두고 있지 않은 시점에서 청와대행이 썩 내키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은 사죄하고 열심히 하는 것으로 답하면 된다. 지역민도 납득할 수 있게 설득하면 된다. 출세를 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희생을 하는 것인데 비판이 아니라 동정받을 일이다.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집에 와서 집사람과 상의했더니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불렀는데 부귀영화를 위해 김 전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비서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 전 대통령에게 조그마한 보탬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새벽 6시 반에 전화를 해서 “하겠습니다”했다. “고마워”하셨다. 전화를 끊고 많이 울었다.

- DJ가 한 일 중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 김 전 대통령이 역사에서 평가받을 만한 일은 6·15 선언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평양에 가시기 전 이회창 총재와 김 전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가졌다. 사전 합의문을 조율하고 영수회담 후에 발표했다.
합의문을 조율하기 위해 한나라당에서 이완구, 김형오 등 7~8명이 나왔고 민주당에서도 나갔다.
합의 마지막까지 “남북문제는 김대중 정부가 ‘상호주의’로 해나가기로 한다”는 내용이 문제가 됐다. 상호주의란 한 가지를 주면 한 가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인데 김 전 대통령은 남북문제는 이러한 관점으로는 해결이 힘들다고 봤다.
그래서 “이 조항을 빼자”고 했더니 한나라당에서 “그럼 영수회담은 없다”고 하더라. 나흘을 밀고 당기기를 했다. 결국 ‘전략적 상호주의’를 넣고 합의했다. 김 전 대통령은 매우 실망했지만 한나라당에서는 ‘전략적’이라는 말을 넣었다고 난리가 났다.

- DJ가 한 일 중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최근 존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 존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를 봤다. 대공황 시절을 담고 있는데 경제가 무너지면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시절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들에게 IMF 외환위기의 절박한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대중에게는 ‘금 모으기 운동’이라는 국민들의 비장한 결단이 나라를 살렸다고, 위대한 국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금 224톤을 판돈은 20억 달러에 불과했다. 국민을 속여도 유분수지 그 돈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사태였다.
김 전 대통령의 명성을 들은 세계은행(IBRD)에서 “지구상에 김대중, 만델라, 하벨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는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으니 도와주자”고 했다. 50억 달러를 5년 분할해서 주기로 했는데 한 번에 줬다. 미국도 도와주겠다던 7억 달러의 배인 14억 달러를 줬다. 일본에서는 단기 채권을 2년간 유예했다. 결국 서울대에서 10년 만에 극복하면 천운이라고 한 IMF를 2년 반 만에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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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