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인생캐 만난 ‘왕사남’ 박지훈

눈빛이 만든 ‘단종 오빠’ 신드롬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아역 배우로 출발해 ‘내 마음속에 저장’이라는 유행어로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소년은 이제 스크린을 책임지는 배우가 됐다. <약한영웅>으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데 이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흥행 배우가 됐다.

박지훈은 1999년생으로, 2006년 MBC 드라마 <주몽>을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8살이었다. 극 중 소금 장수의 아들 역으로 출연하며 처음 촬영 현장에 섰다.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박지훈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TV에서 어떤 배우가 화를 내는 장면을 보고 ‘나 저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단순한 동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여의도에 있는 연기 학원에 등록했고, 아역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주몽 데뷔
당시 8살

<주몽> 출연 이후 박지훈은 방송 활동을 이어갔다. 어린 나이에 드라마 촬영장을 경험했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어릴 때 작품에 출연하면서 카메라와 많이 친해졌다”고 밝혔다.

아역 배우로 활동했던 박지훈은 중학생 시절 팝핀 댄스를 접하면서 또 다른 꿈을 품게 됐다. 그는 “팝핀 영상을 보고 ‘난 이거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춤 연습에 몰두했다. 박지훈은 “수업 시간에도 팝핀 동작을 연습했다”고 했으며, 본격적으로 아이돌을 목표로 삼은 뒤에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쏟았다.

그는 “오후 1시부터 새벽 2시까지 연습했다”며 당시를 두고 “독기가 가득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물론 연습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는 “그 나이에는 흔하지 않은데 무릎에 물이 찼다”며, 병원에서 물을 빼고도 다시 지하 연습실로 돌아가 연습을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이후 2017년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출연했으나, 101명의 연습생이 무대에 선 첫 방송에서 그는 “카메라가 저를 안 잡아주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그는 무대 엔딩에서 윙크를 했다. 박지훈은 “엔딩을 하는데 카메라 렌즈가 저한테 오는 게 느껴졌고, 빨간 불이 보였다. 그때 ‘됐다’ 싶었다”고 말했다. 해당 장면은 방송 직후 화제가 됐고, 그는 “내 마음속에 저장”이라는 멘트와 함께 주목을 받았다.

최종 순위 발표에서 박지훈은 2위를 기록했고, 프로젝트 그룹 Wanna One의 멤버로 선발됐다. 2017년 정식 데뷔 이후 그룹은 큰 인기를 얻었고, 그는 팀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박지훈은 당시를 돌아보며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다. 지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Wanna One 활동이 2019년 1월 공식 종료된 이후, 박지훈은 개인 활동을 이어가면서 가수 활동과 함께 연기 활동을 병행했다. 박지훈이 배우 활동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언급하는 작품은 2022년 공개된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Class 1>이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성적 상위 1% 모범생 연시은이 학교폭력에 맞서는 과정을 그린다. 박지훈은 극 중 연시은 역을 맡았다. 공개 당시 <약한영웅 Class 1>은 OTT 화제성 4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2022년 12월12일 발표된 굿데이터코퍼레이션 집계에 따르면, 해당 기간 동안 가장 높은 화제성을 보였다. 또 그해 웨이브 콘텐츠 가운데 높은 유료 가입자 수를 기록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아역으로 시작해 명불허전 주연 배우로 우뚝
<약한 영웅>이어 <왕사남> 압도적 연기력

이후 <약한영웅 Class 1>은 넷플릭스를 통해 재공개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넷플릭스 투둠 사이트 집계에 따르면, 지난달 25일부터 30일까지 총 670만 시청 수를 기록하며 글로벌 톱10 비영어권 시리즈 부문 2위에 올랐다. 같은 기간 600만 시청 수를 기록한 <폭싹 속았수다>를 제쳤다.

박지훈은 이전 작품들에서 밝은 이미지의 역할을 맡아왔다. 드라마 <연애혁명> <멀리서 보면 푸른 봄> 등에서 보여준 모습과 달리, 연시은은 과묵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박지훈이 연기한 연시은은 극 중 말수가 적고, 눈빛과 표정의 변화로 감정을 표현한다.

체격 조건에서는 우위를 점하지 못하지만, 상황을 분석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인물이다. 작품은 폭력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인물의 심리를 중심에 둔다. 극 중 연시은은 감정을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눈빛과 호흡의 변화로 상황을 표현한다.

초반에는 침묵에 가까운 태도를 유지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친구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이어간다. 시즌 후반부로 갈수록 연시은의 상황은 달라진다. 친구를 잃는 사건 이후 감정의 변화가 이어지고, 인물의 태도 역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약한영웅 Class 1>은 공개 당시 4주 연속 OTT 화제성 1위를 기록했고, 이후 플랫폼을 넷플릭스로 옮겨 다시 주목을 받았다. 넷플릭스 집계 기준 글로벌 톱10 비영어권 시리즈 2위에 오르며 해외에서도 긍정 반응이 이어졌다. 여기에 이어 시즌2까지 흥행에 성공하며 인기를 끌었다.

시청자들은 “이 역할은 박지훈이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것” “눈빛만으로도 인물을 표현했다”며 극찬했다.

박지훈은 유튜브 채널 ‘살롱드립2’에 출연해 <약한영웅> 촬영을 계기로 자신의 학창 시절을 돌아봤다고 밝혔다. 그는 “드라마 속 학창 시절 모습과 실제 나는 너무 달랐다”며 “사실 친구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마산 출신이라 사투리가 굉장히 심했고 말투도 억셌다. 체격도 통통한 편이었다”며 “TV에 나온다고 하면 ‘뚱뚱한데 쟤랑 친구하면 말투 저렇게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혹시 내 말투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피하나 싶었다”고 했다.

극 중 연시은이 또래 사이에서 고립된 인물로 설정된 만큼, 이 같은 경험은 인물을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박지훈은 “중학교 이후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아이돌 찍고
배우로 활약

박지훈은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연기 활동을 이어오던 중 인생작을 만나게 됐다. 최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 이홍위 역을 맡으면서다. 작품은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유배를 자처한 촌장 엄흥도와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선왕 이홍위의 시간을 따라간다.

단종은 조선 6대 왕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된 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영화는 권력투쟁의 중심이 아닌, 유배지에서의 시간을 조명한다. 극의 중심에는 쇠약해진 단종과 그를 보살피는 엄흥도의 관계가 놓인다. 박지훈은 식음을 전폐하고 무기력에 빠진 어린 왕을 연기했다.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단종이 겪었을 정서적 고립과 인간적 두려움, 그리고 유배지라는 공간이 주는 물리적 단절을 따라간다. 정치적 패배의 상징이 아닌,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존재로서의 단종을 화면에 올리는 작업이었다.

박지훈은 이런 방향성에 대해 “비극을 강조하기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출연 제안을 받았을 당시를 떠올리며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이 깊었다. 감히 단종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비운의 왕 단종을 내가 표현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이 많았다. 그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을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단종은 역사적으로 상징성이 큰 인물인 만큼,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는 것이다.

단종은 기록 속에 남은 인물이나 기록은 감정까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박지훈은 “기록에 없는 부분을 상상해야 했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폐위됐으며,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남아 있지만, 그 사이의 정서적 공백은 배우의 몫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왕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계속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또 다른 고민은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었다. 그는 “유해진 선배가 주는 에너지를 잘 받아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도 걱정됐다”고 말했다. 엄흥도 역을 맡은 유해진은 작품의 또 다른 축이다. 

엄흥도는 단종에게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다.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이자, 인간적인 체온을 전달하는 존재다.

박지훈은 “단종이 엄흥도를 처음 만났을 때는 경계심이 더 컸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조금씩 경계가 풀리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시선을 잘 맞추지 않으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개를 드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회상했다.

연기 천재
약한 영웅

장항준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캐스팅 과정을 언급했다. 장 감독은 “시나리오를 보내고 네 번을 만날 때까지 확답을 주지 않아 애를 태웠다”고 했다. 박지훈 역시 감독의 한마디를 떠올렸다. “감독님이 ‘단종은 너여야만 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을 갖고 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그는 감독과의 대화에서 단종을 단순히 ‘비운의 왕’으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감독님이 단종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 방향성에 동의했기 때문에 출연을 결심할 수 있었다.

단종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구체적인 준비로 이어졌다. 박지훈은 “나약하지만은 않은 단종을 그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유배지에서 식음을 전폐한 모습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왕으로서의 기개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목소리에 디테일을 잡았다. 단전에서 끌어 올리는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힘없이 축 처진 인물이 아니라, 약해졌지만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존재로 그리고자 했다.

또 울음으로 설명하지 않으려고 하는 등 감정 표현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신 호흡의 길이, 시선의 방향, 어깨의 기울기로 인물의 상태를 드러내려 했다고 전했다. 그는 “말보다 침묵이 많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다이어트도 마다하지 않았다. 박지훈은 “유배 과정에서 피폐해지는 단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체중 감량을 결심했다. 실제로 그는 “운동으로 건강하게 살을 빼는 느낌이 아니라, 식음을 전폐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두 달 반 동안 사과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며 약 15kg을 감량했다.

박지훈은 뼈밖에 없다는 느낌을 내고 싶었다. 급격한 감량은 화면에서 즉각적인 효과를 냈다.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목선이 얇아지면서 인물의 쇠약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단종이 점점 만들어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급격한 감량은 몸 상태에 변화를 가져왔다. “단기간에 체중을 줄이다 보니 음식을 먹으면 토할 정도로 몸이 예민해지기도 했다. 준비 기간에는 방 안에 틀어박혀 대본과 역사 자료를 계속 봤다. 잠도 거의 안 자고 지냈다. 그는 “준비하던 기간에도 너무 예민해져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대본만 보고 역사 공부만 했다”고도 회상했다.

장항준 러브콜 3번 고사 끝 출연
완벽한 단종 역 위해 15㎏ 감량

극 중 단종의 상태를 생활 리듬으로 체화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촬영 기간 동안 일상에서도 말수를 줄였다. 감정을 끌어올리는 대신, 가라앉힌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도 체력적 부담은 이어졌다. 그는 “극 중 밥을 먹는 장면을 찍을 때 속이 울렁거렸다. 음식이 잘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한명회에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서는 “먹은 게 없는 상태였다. 그날 촬영을 하다 핑 돌았다. 몸이 많이 힘들어 한다는 걸 느꼈다”고 전했다. 다슬기 국을 먹는 장면에서는 “염분이 확 들어오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행복함을 느꼈다”고 소회했다.

이 장면은 극 중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으로 언급된다. 단종이 처음으로 음식에 반응하는 순간이다. 박지훈은 “그 장면은 단순히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살아야겠다는 감각이 돌아오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유해진과의 작업 과정은 촬영이 진행되며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평소 선배에게 계획적으로 다가가거나 억지로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예뻐해 주신 것 같다”는 박지훈은 “강가에서 자주 산책했다. 촬영장으로 함께 걸어 올라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시간이 관계를 쌓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감정도 깊어져 연기에 도움이 됐다”고 감사 인사했다.

유해진의 연기에 대해서는 “감히 제가 연기가 어땠다고 말 못한다. 선배가 주는 에너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며 “끌리는 이유가 없어서 끌리는 것 같다. 어떨 때는 형 같고, 어떨 때는 아버지 같고, 어떨 때는 선배 같다”고 전했다.

장 감독에 대해서도 “배우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많이 열려 있다. 납득할 수 있는 디렉션을 주신다”고 말했다.

영화는 개봉 이후 빠르게 관객을 모았다. 개봉 18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했고, 개봉 20일째 6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올해 개봉작 가운데 500만 관객을 넘긴 첫 작품으로도 언급됐다. 흥행 속도 역시 주목받았다. 일부 관객들은 “눈빛이 인상 깊다” “박지훈이 아닌 단종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흥행의 이면에는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그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시사회 다음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 치매였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셨다. 물어보고 싶다. 꿈에라도 나오신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두 번째
전성기

<왕과 사는 남자>는 박지훈에게 첫 상업영화이자 흥행작이 됐다. 그는 “유해진, 전미도, 유지태 등 선배들과 장항준 감독님을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배우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현재 박지훈은 차기작 드라마 <취사병 전설이 되다> 촬영에 돌입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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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호 폭발’ 시험대 오른 한미 관계

‘나무호 폭발’ 시험대 오른 한미 관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지난 2월 시작된 중동 전쟁의 여파가 경제는 물론 외교까지 흔들고 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미국의 초조함이 우리나라에 불똥으로 튀는 모양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익에 도움 되는 ‘실용 외교’를 줄곧 강조하고 있다. 어떤 선택이 우리나라에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까. 미국과 이스라엘이 한낮에 이란 수도 테헤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공습의 여파로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이 폭사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이 응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거셌다. 이란은 전 세계 원유의 20~30%가 오가는 물류 허브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응수했다. 끝날 듯 안 끝나는 원유 이동이 제한되면서 유가가 폭등했다. 주가가 출렁였고 물가도 오르기 시작했다. 이란은 전 세계 경제를 볼모로 잡고 버티기 작전에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말하는 등 협박에 가까운 말로 압박했다. 이스라엘은 이란 주변국에도 폭탄을 투하하는 등 확전 태세를 보였다. 지난 2월28일 이후 두 달 가까이 이어지던 강 대 강 대치는 지난달 초 미국과 이란이 임시 휴전에 합의하면서 소강상태를 맞았다. 하지만 서로의 요구사항이 극명하게 다른 상황이라 휴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무엇보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미국과 이란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길 원했다. 이번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한 만큼 계속 주도권을 갖고 싶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반면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완전 개방, 자유 항행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미국과 이란의 힘겨루기 양상은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가는 선박의 통행이 제한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선박을 멈춰 세운 이란에 반발해 군사작전을 기획했다. 호르무즈 해협에 발이 묶인 선박의 탈출을 돕는 이른바 ‘프로젝트 프리덤’이다. 프로젝트 프리덤 착수 첫날 이란은 즉각 반발했다. 미국과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무력을 행사하면서 긴장 수위가 높아졌다. 불똥은 우리나라 선박에도 튀었다. 지난 4일 오후 8시40분경 호르무즈 해협의 아랍에미리트 움알쿠와인 인근 해역에 정박 중이던 HMM(옛 현대상선) 소속 선박 나무호에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했다. 호르무즈 해협서 선박 사고 “이란 공격” VS “관련 없다” 폭발과 화재 당시 우리나라 국적 선원 6명을 포함한 24명이 타고 있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HMM에 따르면 나무호는 예인선을 통해 두바이항으로 옮겨졌다. 두바이 현지의 한국선급 지부 인력, 중앙해양안전심판원 소속 조사권, 소방청 감식 전문가 등이 참여해 사고 원인을 조사했다. 외교부는 지난 10일 “조사 결과 5월4일 미상의 비행체가 HMN 선미를 타격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CCTV 영상에 해당 비행체가 포착됐으나 발사 주체, 정확한 기종 및 물리적 크기 등을 확인하기에는 제약이 있는 상황”이라고 정부 합동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수거된 비행체 엔진 잔해 등을 추가 분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나무호 폭발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각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동맹의 전쟁 참여의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각) “이란이 한국 화물선을 포함해 관련 없는 국가들을 공격했다”며 “이제는 한국이 이 작전에 참여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무호 폭발과 관련해 사고 원인이 정확히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공격 때문이라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 반면 이란 측은 나무호 사건에 선을 그었다. 주한이란대사관은 지난 6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발생한 한국 선박 피해 사건에 이란군이 연루됐다는 모든 의혹을 강력히 거부하며 단호히 부인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책임’을 언급했다. 이란대사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관련 규정을 준수하고 발령된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지정된 항로를 따르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 관계 당국과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격이냐 결함이냐 또 “군사 및 안보적 긴장의 영향을 받는 환경에서 선포된 요구사항과 작전상의 실태를 무시할 경우 의도치 않은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며 “이 같은 고려 사항을 무시한 채 해당 구역에서 통행이나 활동을 진행하는 당사자들에게 그런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미묘하게 우리나라 선박 측으로 책임을 돌리는 듯한 뉘앙스다. 정부는 지난 6일 “(프로젝트 프리덤) 작전이 종료됐기 때문에 (참여) 검토는 꼭 필요하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위성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그동안 ‘해양 자유 구상’에 대해 검토하고 있었고 프로젝트 프리덤에 대해서도 검토하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정부의 선 긋기에도 불구하고 이번 나무호 사건은 동맹국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요구가 또다시 표면화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5개국을 향해 호르무즈 해협에 함정 파견을 요구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국가, 특히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도로 영향을 받는 국가들은 해협을 개방하고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미국과 함께 군함을 보낼 것”이라고 자신의 트루스소셜에 글을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5개국은 중국, 프랑스, 일본, 한국, 영국 등이다. 그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에너지 수급에 큰 영향을 받은 국가들이 직접 호위 작전에 나서야 한다는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5개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 국가들은 군함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나라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두 달도 못 돼 또 한 번의 ‘트럼프발 호르무즈 청구서’가 날아든 것이다. 신중한 정부 넘겨 왔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한미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게 아니냐는 말이 지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전쟁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동맹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상황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초 각국에 관세 폭탄을 던질 때부터 시작된 균열이 아직까지 봉합되지 않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혈맹’이라고 불리던 한미 관계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나라에 거친 태도를 보여왔다. 특히 관세 문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을 대놓고 화두로 올렸다. 관세를 부과하고 분담금을 더 내라는 식으로 여러 차례 압박했다. 미군이 북한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 돈으로 보상하라고 밀어붙였다. 최근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말을 두고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정 장관이 지난 3월6일 국회에서 북한 우라늄 농축시설 소재지로 구성을 언급했다.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공식 확인한 영변과 강선 외의 장소다. 국민의힘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들에 따르면, 정 장관의 발언 이후 미국은 4월 초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일부 제한했다. 정 장관은 구성이 과거 미국 싱크탱크나 국내 언론 보도 등으로 이미 언급됐던 장소라며 정보 유출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20일 “정 장관의 발언 이전에 구성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각종 논문과 언론 보도로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점은 명백한 팩트”라고 두둔했다. 정 장관의 발언은 정쟁으로도 번졌다. 국민의힘은 정 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은 해임건의안을 발의하면서 “(한미) 동맹의 균열을 초래하고 국가 안보의 금도를 넘어섰다”며 그 배경을 밝힌 바 있다. 정 장관은 “안보 사안에 대해 숭미주의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고 맞섰다. 정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자동 폐기됐다. 트럼프 노골적 참전 요구 청구서 받아든 이 선택은? 미국 측에서 우리나라 사법 체계를 흔드는 듯한 행보도 잇따라 나왔다. 김범석 쿠팡 의장, 방시혁 하이브 의장 관련 논란이다. 쿠팡은 지난해 11월 3300만건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로 조사를, 방 의장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심지어 방 의장은 출국금지 상태다. 미국 정계에서는 다양한 경로로 쿠팡 ‘감싸기’를 하고 있다. 미국 기업인 쿠팡을 ‘차별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게 골자다. 수사 대상에 오른 김 의장의 안전을 보장해야 안보를 논의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쿠팡 등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를 중단하라는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김 의장을 쿠팡의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하면서 한미 간에 감정싸움이 불거질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지금까지 쿠팡의 동일인은 법인이었는데 김 의장(개인)으로 바뀌면서 법적 책임이 대폭 늘었다. 실제 쿠팡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공시 의무를 준수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가 이중으로 규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차별적 조치라는 것이다. 또 김 의장이 미국 국적자인데 그를 한국법상 총수로 지정한 것은 한미FTA를 위반한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방 의장을 비롯한 하이브 관계자 3명의 출국금지를 해제해 달라는 요청이 경찰청에 오기도 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하이브 상장 과정에서 방 의장이 2000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방 의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검찰이 보완 수사를 이유로 반려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이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어떤 이유로든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수사를 받는 인물에 대해 특정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선택 기로 앞으로는? 더 큰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가 또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재명정부의 외교 방향은 ‘국익’ ‘실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전환 등 안보 독립을 외치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외교는 오랜 시간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서 이뤄졌다. 결국 선택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합류일까, 관망일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