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사생활 논란 정희원 대표

  • 서진 기자 jen9@ilyosisa.co.kr
  • 등록 2025.12.29 15:51:22
  • 호수 15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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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 노화’ 아이콘의 몰락

[일요시사 취재1팀] 서진 기자 = 신선한 렌틸콩과 잡곡밥으로 국민의 혈관 청소를 돕던 ‘저속 노화 주치의’가 있다. 잘못된 정보의 왜곡을 막겠다며 유튜브와 방송 미디어 전면에 나섰다. 천천히 나이 드는 기술을 전파하며 대한민국에 ‘저속 노화’ 신드롬을 일으켰다. 바로 저속노화연구소 대표인 정희원이다.

정희원 대표가 자신의 커리어를 송두리째 뒤흔들 진흙탕 싸움에 휘말렸다. 최근 그가 마주한 성폭행 분쟁은 빠르게 그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 2023년부터 본격적인 공식 행보를 보인 이후 인기 정점을 찍었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클린’함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고소에
맞고소

사건의 발단은 지난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대표는 자신의 전 직장인 서울아산병원에서 위촉연구원으로 근무했던 30대 여성 A씨를 공갈미수, 주거침입, 스토킹 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정 대표 측 주장에 따르면, A씨는 지난 6개월간 그의 주거지에 무단침입하는가 하면 저작권 지분 등을 빌미로 거액의 금전을 요구하는 등 집요한 괴롭힘을 이어왔다. 정 대표는 지난 6월 A씨와 계약 관계를 해지했지만, 이후 A씨로부터 “내가 없으면 너는 파멸할 것”이라는 등의 폭언과 함께 지속적으로 스토킹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A씨가 본인의 아내 직장과 정 대표 주거지 등에 찾아와 위협했다며 그의 저서“<저속노화 마인드셋>에 대한 저작권 지분과 금전을 요구하기도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정 대표는 동시에 A씨와의 관계에 대해 “지난해 3월에서 올해 6월 사이 사적으로 친밀감을 느껴 일시적으로 교류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A씨가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예약한 숙박업소에 데려가 수차례 신체적 접촉을 시도한 사실이 있었지만,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에 따르면 아내도 A씨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현재 함께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정 대표는 “A씨가 ‘부인과 이혼 후 본인과 결혼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집착하며 스토킹을 반복해 해당 사실을 아내에게 밝힌 이후 현재 공동으로 법적 대응을 하는 상황”이라며 “향후 공식적으로 모든 상황을 투명하게 밝힐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9일에는 A씨가 반대로 정 대표를 고소했다. 혐의는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저작권법 위반, 무고, 명예훼손, 스토킹 처벌법 위반이었다.

A씨 측은 증거로 정 대표가 지속적으로 보내던 카카오톡 메시지, 전화 녹음 파일 등을 경찰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내용에서 정 대표가 A씨에게 성적 욕구와 성적 취향에 부합하는 특정 역할 수행을 강요한 정황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전직 연구원 A씨의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혜석의 박수진 변호사는 지난 18일 정 대표의 주장을 반박하는 동시에 그의 행적을 폭로하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정 대표의 미디어 성공 신화가 사실상 A씨의 기획력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A씨가 단순 연구원을 넘어 SNS 계정과 7만명 규모의 커뮤니티를 실질적으로 운영한 ‘그림자 비서’였다는 것. 대중이 열광했던 정 대표의 트렌디한 SNS 화법이 사실은 A씨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폭로였다.

정 대표가 노년 의학의 권위자를 넘어 대중적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배경에는 SNS에서의 독보적인 소통 방식이 있었다. 그는 딱딱한 학자 이미지 대신 MZ세대의 문법인 ‘인터넷 밈(Meme)’과 유머를 장착한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인 A씨의 폭로에 따라 실제로 그의 SNS는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기조가 급변했다. A씨가 운영에서 손을 뗐다고 주장한 시기와 맞물려, 그의 계정에서는 그간의 정중한 존댓말과 유머가 사라졌다는 평가다.

전 직장 동료 연구원과 불륜 의혹
“스토킹 피해” VS “성추행 가해”

애초에 대기업과의 협업과 각종 미디어 출연의 동력이 됐던 것이 바로 그 SNS상의 인기였음을 고려할 때, A씨의 주장은 정 대표의 도덕성을 넘어 전문가로서의 진실성 자체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이 같은 정황을 놓고 봤을 때, 그가 전파해 온 <저속노화 마인드셋>의 진정성 역시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다.

정 대표를 둘러싼 의혹은 사생활을 넘어 전문가로서의 윤리 의식으로 번지고 있다. 연구원 A씨는 성적 피해뿐만 아니라, 자신이 쓴 원고를 정 대표가 가로채 본인 이름으로 기고 및 출판했다는 ‘저작권 도용’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A씨가 작성한 원고와 지난해 3월 <조선일보> 칼럼 ‘정희원의 늙기의 기술’에 실린 내용을 대조해 본 결과 첫 문장부터 사례로 든 싱가포르의 정책, 근거 자료로 제시된 당뇨 환자 그래프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중이 열광했던 정 대표의 통찰력 있는 문장들이 사실은 연구원의 원고를 그대로 가져다 쓴 이른바 ‘대필’의 결과물이었다는 주장이다.

정 대표의 원고 도용 정황은 두 사람 사이의 메신저 대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가 칼럼 원고를 재촉하면 A씨가 “초안을 썼다”며 파일을 전송하는 식의 업무 형태가 수차례 반복됐다.

특히 지난해 8월, 정 대표는 A씨에게 “내 글의 졸렬함과 글을 도둑질해야 하는 비열함이 괴롭다”는 고백 섞인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본인 스스로도 대필 행위의 비도덕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A씨 측은 신문 칼럼뿐만 아니라 정 대표의 주요 저서들 역시 자신이 출판사에 원고를 직접 보냈으며, 그의 이름으로 그대로 출판됐다고 폭로했다.

정 대표 측은 유튜브 공지사항을 통해 “저작권 관련은 이미 공동 저자 등재 및 인세 30% 분배로 상호 간에 합의한 건으로 인세 정산까지 완료된 사안이다. 향후 민사재판을 통해 기여도 정밀 검증 및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며, 해당 책은 이후 절판하겠다”고 밝혔다.

A씨는 논란이 된 스토킹 혐의에 대해서도 정면 반박했다. 정 대표의 단독 저서 출간에 따른 저작권 지분을 협의하기 위해 찾아간 단발성 방문을 그가 악의적으로 신고했다는 취지다. 스토킹 잠정 조치 역시 혐의 인정이 아닌 신고인의 의사에 따른 행정적 절차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위계에 의한 성폭력 주장이다. A씨 측은 정 대표가 사회적 낙인과 해고를 무기로 자신의 성적 욕구와 취향에 부합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또 불륜 의혹에 대해서도 정 대표가 배우자와 처가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 A씨가 고통을 겪었다며, 주장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존재함을 시사했다.

저작권 도용
의혹도 제기

이에 대해 A씨 측은 “이번 사건은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한 젠더 기반의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정 대표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성적 요구를 했고, A씨는 해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1년3개월 동안 가까이 지내 온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카카오톡 메시지도 공개되며 이 같은 A씨의 주장은 더 강력해졌다. 지난 2월 정 대표는 A씨에게 ‘결박’ ‘주인’ 등 단어와 특정 물품을 반복해 얘기했다. 특정 행동 패턴을 묘사하고 정신이 몽롱하다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중 정 대표가 직접 썼다는 소설 내용도 밝혀졌는데, 주인공 이름은 정 대표 본인과 A씨였다. 정 대표는 “계속 수정하고 있다. 오늘 안에 완성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이 소설을 ‘역작’이라고 표현했다.

정 대표 측은 “여성에게 보낸 소설은 정 대표가 아닌 AI가 쓴 것이고, 위력은 전혀 없었다”며 “향후 수사기관을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A씨 측은 “소설 내용에 나온 도구 등을 주문한 뒤, 특정 행위를 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정 대표가 요구를 거부하면 해고 가능성을 내비쳤고, 자살을 암시하는 등 압박을 했다고도 밝혔다.

또 지난 4월 정 대표가 보냈던 메시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됐다. 그는 A씨에게 한 언론의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 성폭력 기사를 보내면서 “음, 저는 시한부 인생 10년”이라고 말했다. 이후 장 전 의원의 사망 기사를 잇따라 보내기도 했다.

장 전 의원은 지난 3월 성폭력 혐의로 수사를 받다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A씨 측은 정 대표가 평소 이런 방식으로 압박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성적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폭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해 왔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저속 노화’ 유명세를 타고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MBC <라디오스타> 등 다수 예능까지 진출했다. KBS 1TV <생로병사의 비밀>과 tvN <어쩌다 어른>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년 전부터 유튜브 ‘정희원의 저속노화’ 채널을 운영하고, 구독자 수를 60만명 가까이 보유했다. 지난 7월부터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MBC 표준FM <정희원의 라디오 쉼표> 진행도 맡았다.

서둘러
선긋기

그러나 진행해오던 MBC 라디오 프로그램이 지난 22일 사생활 논란 속에서 폐지됐다. MBC는 “<라디오 쉼표> 진행자의 개인적 사정으로 <라디오 문화센터>를 편성하게 됐다”며 “청취자들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결국 해당 프로그램은 지난 19일 마지막 방송을 끝으로 5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MBC 측은 프로그램 폐지 사유에 대해 진행자 개인적 사정이라고 전했으나, 이는 정 대표를 둘러싼 사생활 논란의 여파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식품업계에서도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생활 논란이 법적 공방으로 치닫자 그와 손잡았던 식품 기업들이 서둘러 선긋기에 나선 것이다.

정 대표와 협업한 초기 물량 완판을 기록했던 매일유업은 ‘매일두유 렌틸콩’에서 그의 이름과 사진을 전면 삭제했으며, CJ제일제당 역시 누적 1000만개를 판 ‘햇반 라이스플랜’의 포장재 교체 작업에 착수했다. 이른바 ‘정희원 지우기’에 나서며 기업들의 계산기는 벌써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포장에 잔상이 남아 불편하다”는 항의와 “이 참에 싸게 잘 샀다”는 등 반응들이 이어지면서, 업계에선 유명세를 믿고 진행한 스타 협업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84년생, 올해 41세인 그는 서울대 의대 학사·석사를 거쳐 카이스트 박사까지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서울대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을 거친 그의 화려한 이력은 지난 9월, 2년 임기의 서울시 건강총괄관(자문관) 위촉으로 정점을 찍었다.

3급 상당의 중책을 맡은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저속 노화 실천을 정책으로 정착시키고 싶다”며 공직에 대한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불거진 논란 속에서 그는 결국 자문관 임명 석 달 만에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아산병원에서 5년여간 노년내과 재직한 정 대표는 저속 노화라는 생소한 개념을 대중의 언어로 번역해냈다. 그는 X(구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노화 예방의 중요성을 친절하면서도 날카롭게 설파하며, 우리 사회에 거대한 저속 노화 유행을 선도했다.

그가 제시한 라이프스타일은 단순한 건강정보를 넘어 식탁 위의 새로운 기준이 됐다. 렌틸콩과 잡곡 중심의 식단, 절제된 생활습관을 통해 노화의 시계를 늦추자는 그의 제안은 온라인상에서 ‘저속 노화 식단 인증샷’ 열풍으로 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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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식품업계 발 빠르게 ‘손절’

정 대표는 1년 전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며 “진료와 연구, 교육을 병행하는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대학원 시절 초파리와 세포를 연구하며 노화의 근원을 파고들었다. 임상 복귀 후에는 “인구 집단의 건강상태를 어떻게 유지할까”를 평생의 연구 과제로 삼아왔다고 밝혔다.

그의 대중적 인지도는 ‘펜’ 끝에서 시작됐다. 2019년 네이버 브런치에서 시작된 그의 글쓰기는 2022년 말 저서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로 결실을 맺었고, 이는 그에게 ‘가속노화 선생님’이라는 독보적인 수식어를 안겨줬다.

정 대표는 이달 초 <정희원의 저속노화 명심 필사 노트>를 출간하고 이번 논란이 된 <저속노화 마인드셋> 등의 집필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영상에서 “미디어에 출연하면 식단이나 영양제 같은 지엽적인 질문만 받게 된다”며, 전문가로서의 깊이 있는 맥락이 거세된 채 소비되는 현실에 대한 갈증을 드러내기도 했다.

전문가로서의 권위는 언론으로도 뻗어나갔다. 2023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칼럼 ‘정희원의 늙기의 기술’을 통해 그는 전문가로서 학계, 금융, 예술 등 사회 전반에 저속 노화라는 화두를 던졌다.

정 대표가 직접 채널을 운영하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정보의 왜곡이다. 그는 영상에서 “어느 순간 렌틸콩 전도사가 됐는데, 렌틸콩만 퍼먹고 사는 사람처럼 소문이 나 억울했다”고 언급했다.

단순히 특정 식재료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당을 줄이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습관을 관리하는 것이 핵심인데 이 과정이 생략됐다는 지적이다.

또 그는 진료실의 안타까운 사례를 들며 “콜레스테롤 약을 먹으면 뇌가 녹는다는 근거 없는 유튜버의 말을 믿고 약을 끊으면서, 정작 근거 없는 뇌 영양제는 처방해달라는 환자들을 볼 때 힘이 빠진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앞으로 지치지 않고 딱 10년만 하면 하고 싶은 시스템 변화가 다 돼있을 것”이라는 명언가의 조언을 토대로 자신의 10년 계획을 공개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선진국 중 드물게 노년 의학 시스템이 부재한 갈라파고스”라고 꼬집으며, 노인 통합 돌봄 시스템이 없는 현실을 비판했다.

무너진
커리어

따라서 앞으로 10년간 대중과 정책 입안자들에게 “노년 의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헌신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음식의 포트폴리오를 건강해지게 만들겠다던 정희원의 목표는 과연 실현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jen9@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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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