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새해가 밝아오면 사람들은 강원도 강릉의 정동진으로 몰린다.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지만, 사실 우리의 시선은 오래전부터 동쪽에 고정돼있었다. 동쪽은 희망과 출발의 방향이었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성장의 나라’였던 한국이 믿고 싶어했던 미래의 방향이었다.
그러나 한국 지도의 다른 세 방향, 즉 정서진·정남진·정북진은 늘 부차적인 공간으로 밀려나 있었다. 네 방향이 모두 존재하는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의 방향만 기억해 왔고, 그 결과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사고도 동쪽으로 기운 나침반처럼 한쪽에 치우쳐 왔다.
지도에서 잊힌 세 지점은 사실 한국 사회가 희망이라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정동진이 일출의 자리라면 정서진은 일몰의 자리다. 아라뱃길 끝에 놓인 인천 서구의 정서진은 매일 서쪽 하늘을 붉게 만들지만, 정동진만큼 전국적인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다. 새벽의 기운은 ‘시작의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축제화되지만, 저녁의 풍경은 늘 ‘마무리의 감정’ 정도로만 다뤄져 왔다.
그러나 사회가 성장의 정점에 올라선 순간 필요한 것은 더 큰 새벽의 영광이 아니라, 하루가 저물며 남긴 흔적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정서진을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성장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회 내부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해돋이만 기억하는 사회는 해넘이의 질문을 잃는다. 그리고 질문을 잃은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
남쪽의 기준점인 전남 장흥의 정남진은 한국의 ‘진짜 남쪽’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 남쪽의 좌표를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도의 남쪽을 변두리로 여겨왔고, 개발의 중심축에서도 늘 후순위로 밀려나 있던 지역들이 바로 이 남쪽에 집중돼있었다.
정남진이 상대적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볼거리가 적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전라도 남쪽이 오랫동안 ‘덜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쪽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도, 이 방향에서 국가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정남진은 ‘중심이 되지 못한 좌표’였고, 산업과 정치, 경제의 논리에서도 늘 뒤로 밀려났다. 지도상의 남쪽을 외면한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균형 잡힌 국가의 상상력을 축소시킨 행위였다.
가장 상징적인 방향은 북쪽이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정북진은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한반도의 ‘정확한 북쪽’을 가리키지만, 우리는 이 지점을 하나의 공간으로 경험할 수 없다. 분단은 북쪽을 물리적 금단의 방향으로 만들었고, 심리적 상상력마저 가둬버렸다. 강원도 북쪽은 아예 ‘비어있어야 하는 방향’으로 여겨졌다.
정북진이 가진 의미는 남북관계를 넘어서 더 크다. 북쪽이라는 방향은 우리가 스스로 금기처럼 여겨 지워버린 좌표기도 하다. 북쪽이 막혀 있다는 현실은 단순한 군사·정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에 영향을 줘왔다. 그래서 우리는 ‘북쪽’이라는 말만 들어도 본능적으로 긴장하거나 피하려 한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이 모두 존재하는데도 한 방향만 강조된 채 국가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침반은 동·서·남·북 네 방향을 모두 인식할 때 가장 정확한 균형을 잡는다. 한 방향이 사라지면 바늘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두 방향이 지워지면 균형이 무너지고, 한 방향만 남으면 결국 방향감 자체를 잃는다.
한국 사회가 ‘동쪽의 신화’에 집중해온 지난 수십년은 성장의 시대를 상징하긴 했지만, 동시에 사회 내부의 시야를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이제는 해돋이의 신화를 넘어 새로운 네 방향의 해석이 필요하다. 사회는 동쪽의 빛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석양이 주는 성찰, 주변부가 품은 다양성, 금지된 방향이 드러내는 구조적 현실까지 모두 읽어야 한다.
정동진·정서진·정남진·정북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방향 감각을 일깨우는 나침반 같은 존재다. 필자가 말해온 ‘삼기점’의 개념으로 보면, 우리는 원을 그리며 달려온 시대에서 이제는 직선의 방향을 찾아야 하는 임계점에 와 있다.
원운동은 반복과 관성을 전제로 하지만, 직선운동은 목표와 방향을 요구한다. 네 방향을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원운동에서 빠져나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직선의 힘을 회복하는 일이다. 한 방향만 바라보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네 방향을 모두 아우르는 사회가 균형을 갖추고 다음 시대를 설계할 수 있다.
국가균형발전을 꾀하는 지방시대위원회가 이제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행정 경계를 기준으로 예산과 전략을 나누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정동진·정서진·정남진·정북진이라는 네 방향의 축을 기준으로 국가의 공간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
국가균형발전은 단순히 지역 간 격차를 줄이는 행정적 기술이 아니라, 나라의 시선과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동쪽의 신화, 서쪽의 성찰, 남쪽의 변두리 취급, 북쪽의 금기 영역을 동시에 포착하는 좌표계를 만들 때 비로소 국가균형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실제 정책의 구조가 된다.
지방시대위원회가 이 네 방향을 하나의 국가 좌표로 재정의하는 순간, 한국은 한 방향 사회에서 벗어나 네 방향을 가진 나라, 중심을 되찾은 나라로 다시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가. 동쪽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찾고 있는지, 서쪽을 보며 정리에 집중하고 있는지, 남쪽의 변화 가능성을 보고 있는지, 북쪽의 막힌 현실을 극복하고 있는지, 결국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다.
지도 위에 적힌 네 지점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건넨다. 한쪽만 바라보지 말고 네 방향을 함께 보라는 것이다. 이 네 지점이야말로 대한민국이 가져야 할 가장 단단한 나침반이 되기 때문이다.
12월엔 한번쯤 정서진에 서서 서쪽 하늘로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해돋이를 보며 한 해를 시작했다면, 해넘이를 보며 그해의 무게와 질문을 차분히 정리하는 일도 우리의 방향 감각을 되찾는 소중한 의식이 될 수 있다.
저녁의 붉은 빛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침착한 호흡이며, 서쪽의 석양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자연의 마지막 조언이다. 동쪽의 새벽만 기억하던 사회가 이제는 서쪽의 저녁도 함께 품을 때, 다음 해를 향한 우리의 나침반도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최근 필자는 앞으로 10년 동안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정리하고 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매년 정동진·정서진·정남진·정북진을 한 번씩 찾아가는 일도 그 목록에 넣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동진에서는 새해 해돋이를 보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정서진에서는 해넘이를 보며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의 정남진은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를, 동지의 정북진은 “무엇을 성찰할 것인가”를 묻게 한다. 네 방향이 던지는 이 다른 질문들이 한 해의 흐름을 조금씩 바꿔놓을 것이다.
이 네 지점을 매년 한 차례씩 찾아가는 일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방향을 바꿔보는 순간 비전이 달라지고, 사고가 달라지면 결국 삶의 궤도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해주는 의식 같은 경험이다. 참고로 2025년 12월 31일 정서진의 일몰은 17시 23분, 2026년 1월 1일 정동진의 일출은 07시 33분이며, 2026년 하지와 동지는 각각 6월 21일과 12월 22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