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힘 판박이’ 일본 자민당 본색

  • 박형준 기자 ctzxp@ilyosisa.co.kr
  • 등록 2025.10.20 13:38:12
  • 호수 15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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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지진’ 흔들리는 열도 보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일본 자유민주당이 다카이치 사나에 총재를 선출하자, 연정 상대 공명당은 연정 탈퇴를 선언했다. 자유민주당의 위기는 우익 포퓰리스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남긴 문제점으로부터 비롯됐다. 자유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같은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1999년 10월 일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한 이후 자민당의 오랜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지난 10일, 연정에서 탈퇴했다. 자민당과 공명당의 균열은 지난 4일, 다카이치 사나에 총재가 선출된 이후 불거졌다. 불과 6일 후 공명당이 실제로 연정에서 이탈하면서, 지난 15일 예정됐던 일본 총리 선거는 오는 21일로 연기됐다.

이대로
정권교체?

자민당이 일본 정계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이 선거는 자민당 신임 총재가 신임 총리로 인준되는 형식적인 선거였다. 하지만 자민당·공명당 연합은 지난해 10월 제50회 중의원 총선거와 지난 7월 제27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연이어 참패해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만을 얻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지난해 11월 중의원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총리로 취임했다. 이는 야권의 묵인이 있어 가능했다. 공명당까지 이탈한 상황에서 자민당 총재가 곧바로 총리로 취임하긴 어려웠다.

중의원 27석을 보유한 원내 4당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지난 10일, 총리직 도전을 선언했다. 중의원 148석을 보유한 원내 2당 입헌민주당은 “다마키 대표를 새 총리로 지지할 수 있다”면서 호응했다.


국민민주당은 지난 2020년 구 입헌민주당·구 국민민주당 등이 합당해 현 입헌민주당을 구성하는 데 반대하면서 창당됐다. 따라서 입헌민주당의 다마키 대표 지지 의사는 정권교체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야권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제기될 당시 돌았던 시나리오에 따라 일본 야권의 연합이 언급됐을 때의 구도에 따라 ▲입헌민주당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 ▲공명당의 중의원(전체 465석) 의석 보유 수를 합치면 235석이다. 만약 이들이 모두 뭉치면, 자민당은 2009년에 이어 또 정권을 잃을 수도 있었다.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가 지난 10일 연정 탈퇴 후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공명당이 다카이치 총재에게 요구한 연정 유지 조건은 ▲자민당 내 비자금 및 연루 의사 정리 ▲정치자금 제도 개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 ▲과도한 외국인 배척 반대 등이었다.

이는 모두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지난 2022년 사망하기 전까지 당을 지배한 여파로 불거진 문제들이었다. 자민당 정치인들은 파티를 개최해 모금한 정치자금을 보고서에 정직하게 기재하지 않았다. 이에 지난 2022년 공산당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를 조사한 가마와키 히로시 고베가쿠엔대학 교수가 도쿄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 후 <요미우리신문>이 2023년 11월 보도하면서 수면 위에 올랐다.

이후 자민당은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이끄는 지공회를 제외한 모든 당내 파벌을 형식적으로 해체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후속 대책은 뜨뜻미지근했다. 자민당 내에서 탈당 권고가 내려진 의원은 불과 2명이었고, 그 외 연루 의원들은 ▲당원 자격정지 ▲당무 정지 ▲계고 등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

다카이치 총재는 자민당 내 파벌 중 가장 많은 연루자가 나온 세이와정책연구회(이하 아베파)의 핵심이자 아베 전 총리의 후계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됐다. 또 다카이치 총재는 정치자금 관련 논란의 핵심이었던 하기우다 고이치 의원을 당 간사장 대행으로 기용했다.

‘아베 후계자’ 등장 “연정 파기” 선언
공명당 조롱한 아소 다로 영향력도 여전


아베파는 오랫동안 극우 정치 논란을 일으켰던 당내 보수 방류 핵심 파벌이었다. 포퓰리즘에 치중해 극우 정치 논란까지 이어졌다. 아울러 다카이치 총재는 ▲이민 규제 강화 ▲영주권 규제 강화 ▲외국인 부동산 매입 규제 ▲경제 안보법 강화 ▲엄격한 난민 심사 등 외국인 관련 정책을 드러냈다.

공명당은 불교 계열 일본 신흥 종교 창가학회를 배경으로 창당됐고,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따라서 공명당은 연정 유지와 관련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와 과도한 외국인 배척 반대를 협상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갈등의 핵심은 역시 돈이었다.

다카이치 총재와 사이토 대표는 당수 회담을 진행하면서 협상했다. 다카이치 총재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요구 조건은 정치자금 문제였다.

자민당 일각에선 “공명당의 요구를 수용하면, 지방의원들이 대표로 있는 자민당 지부에서 기부금을 받지 못하고, 지역 내 자민당의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공명당은 “자민당의 정치자금 논란 때문에 득표가 줄어 큰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실적 이해득실 문제가 첨예하게 달라 양당은 결국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또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공명당에 제일 치명적이었을 문제는 자민당 및 아베 전 총리 일가와 통일교의 오랜 밀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명당이 창가학회 기반 정당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연정 상대의 핵심 구성원이 다른 종교와 밀착해 정치적 이익을 주고받은 사실이 확인됐고, 전직 총리 암살 사건으로까지 연결됐다.

공명당으로선 명분상으로라도 가만히 두고 보기 어려웠을 개연성이 있다.

공명당이 선호했던 자민당 총재 후보는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이하 농림상)이었다. 고이즈미 농림상은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기조를 이어받아 무파벌 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자민당 내 파벌 정치에 약했던 이시바 총리가 당선되는 과정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지난해 중의원 선거 당시엔 선거대책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는 패배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빠른 중의원 해산 결단 덕분에 더 큰 패배를 막을 수 있었다”는 일각의 평가도 있었다. 이시바 총리에게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던 사람은 바로 고이즈미 농림상이었다.

사이토 대표는 연정을 파기한 후에도 고이즈미 농림상에 대해선 우호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이토 대표는 지난 10일 연정 파기 후 NHK와의 인터뷰에서 “고이즈미 농림상과는 정치자금 관련 규제 강화와 관련해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베파’
핵심 파벌

고이즈미 농림상도 같은 날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공명당과 고이즈미 농림상의 반응은 다카이치 총재를 더욱 궁지로 몰려는 조치로 이해됐다.


반면 다카이치 총재는 당직 인선에서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이끄는 지공회 인사들도 발탁했다. 아소 전 총리는 부총재를 맡았고, 스즈키 슌이치 전 재무상은 간사장으로 발탁했다. 평소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아소 전 총리는 공명당에도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23년 9월 후쿠오카 강연 도중 공명당 간부들을 일컬어 “가장 움직이지 않는 암적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가 공명당을 비난했던 이유는 “공명당이 일본 정부의 반격 능력 보유 방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었다. 공명당의 연정 파기엔 지공회 인사 발탁도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공명당과의 결별은 자민당에 큰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였다. 공명당이 자민당에 소중한 파트너였던 핵심 이유는 종교 정당 특유의 조직력이었다. 공명당의 조직력은 선거에서 당 규모 이상의 영향력을 보여줬다. 자민당과 공명당은 서로의 후보가 출마한 지역구엔 공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자민당도 공명당 특유의 조직력에 많은 덕을 봤다.

공명당의 연정 탈퇴 선언 이후 일본 정계에선 다양한 이합집산 시나리오가 거론됐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시나리오는 야권이 모두 뭉쳐 정권을 차지하는 방안이었다. 지난 1993년 제40대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자, 7개의 야당이 뭉쳐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를 필두로 한 내각을 출범시켜 정권을 차지했던 전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각료 배분 문제부터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결국 호소카와 내각과 후임 하타 쓰토무 내각은 합쳐서 불과 1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다마키 대표는 원내 4당 대표라서 설령 총리가 되더라도 스스로 탈당했던 입헌민주당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렵다.


계엄 이후
난맥상 비슷

이합집산에 따른 조율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당시처럼 정권교체의 흐름이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다카이치 총리 취임을 방치한 후 여소야대 정국 속 자민당의 몰락을 유도해 완전히 정권을 접수하자”는 구상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다카이치 총재가 총재직만 유지하고, 이시바 총리가 유임하는 일명 ‘총총 분리’ 가능성도 거론됐다. 문제는 “이시바 총리가 이를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었다. 의원내각제 정치 체제에서 집권당 수장이 아닌 총리의 위상·영향력이 얼마나 낮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시바 총리로선 현재 자민당의 난맥상이 아베·아소 전 총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서 할 말이 많았다. 두 전직 총리는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 취임 이후부터 사실상 상왕으로 군림하면서 자민당의 현재 난맥상을 만들었다. 자민당에서 형식적으로라도 파벌을 해체할 당시, 이에 홀로 불만을 품고 협조하지 않아 여전히 지공회 수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도 아소 전 총리다.

다카이치 총재가 사퇴하고, 이시바 총리가 두 직책 모두 유임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당시 이시바 총리는 이미 사임 의사를 밝혔다. 게다가 당내 영향력이 미약해 아베파·아소파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당내 혼란의 여파를 내각 지지율 하락으로써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도 여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외에도 다카이치 총재 사퇴 후 고이즈미 농림상이 새 총재가 돼 총리 선거에 출마하는 구상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다카이치 총재의 사퇴를 전제로 하는 구상은 다카이치 총재의 정치적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자민당이 처한 현 상황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 드러난 난맥상과 비슷하다. 다카이치 총재가 선출된 것 자체가 국민의힘에서 윤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정치인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의 ‘쌍권 체제’ 출범 ▲강경 보수 성향 김문수 전 대선후보 선출 ▲강경 보수 세력의 지원으로 장동혁 대표 선출 등 흐름으로 이어진 것과 비슷하다.

특히 다카이치 총재는 아베 전 총리의 핵심 측근이었다. 마치 권 전 원내대표가 국민의힘 대선후보나 당 대표로 선출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민당·국민의힘 모두 통일교 밀착 의혹
과도한 우익 포퓰리즘도 선거 연패 이유

양당의 문제점을 드러낸 핵심 요소가 통일교란 것도 의미심장하다. 3대째 통일교와 밀착했단 사실이 밝혀진 아베 전 총리는 통일교에 과도하게 몰두한 어머니로 인해 피해를 본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권 전 원내대표는 통일교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1억원을 받은 혐의로, 한학자 통일교 총재도 지난달 구속됐다. 국민의힘과 통일교의 밀착 의혹은 여전히 김건희 특검의 핵심 수사 내역으로 통하고 있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등 장외에서 강경 보수 집회를 주도하는 세력과도 명백하게 절연하지 못하고 있다.

양당이 당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아베 전 총리와 윤 전 대통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아베 전 총리 사망 이후 자민당은 연이어 선거에서 패배했고, 공명당이 연정에서 탈퇴해 정권을 빼앗길 위험에 처했다.

윤 전 대통령이 파면·구속된 여파는 국민의힘도 함께 치르고 있다. 대선 패배에 이어 수시로 정당해산심판 회부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당내 의원 상당수는 3대 특검(김건희·내란·채 상병)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도 자민당과 국민의힘은 과거와 제대로 절연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자금 문제를 직접 이유로 공명당으로부터 탈퇴 선언을 들은 것처럼, 김건희 특검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명태균 게이트 연루 관련 수사도 이어나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와 이시바 총리가 아베파·지공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그들의 압박·뒷감당에 시달리다가 사퇴를 선언했다는 것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이들과 고이즈미 농림상은 중도층을 설득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공명당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하지만 이들은 당내 강경파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해 사퇴·총재 선거 낙선이란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국민의힘에서도 탄핵에 찬성한 정치인은 대선후보·당 대표 경선서 연이어 낙선하는 등 구상했던 당내 혁신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진보 대결이 명확한 정치 구도에선 중도층 설득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강경파는 선명 노선을 주장하면서 정치적 순혈성을 강조한다. 이는 당내 외연 확장을 차단하면서 강경파만 득세하는 정당으로 축소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을 잡아 당의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다. 현 상황은 정당의 존재 목적 자체가 흔들리는 불상사로 이어질 수 있다.

중도층 설득
대단히 중요

아베 전 총리는 우익 포퓰리스트였다. 국민의힘 주변을 휘감는 강경 보수 유튜버도 포퓰리스트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장 대표는 그들의 도움으로 대표가 된 후 그들과 명확하게 절연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강성 포퓰리즘은 중도층의 비호감으로도 연결된다.

국민의힘이 정권을 잃었듯이 자민당도 정권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당을 뿌리까지 장악한 강경 보수와 토착 세력은 혁신을 방해한다. 국민의힘에선 더는 당 혁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다카이치 총재는 공명당의 연정 탈퇴를 눈앞에 두고도 정치자금 문제 정리를 분명하게 선언하지 못했다. 다카이치 총재는 강경 보수 성향 일본유신회와 연정 합의를 통해서 오는 21일 총리 취임이 확실시된다. 다만 부패와의 절연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부패와의 절연은 보수 세력의 시대적 과제일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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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