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초대석> 나라의 진짜 어른을 모시다 - 김상근 목사의 희망 메시지

“누가 뭐래도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10개월이 흘렀다.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 등을 거치면서 ‘무정부’ 상태에서는 벗어났다. 표면상으로는 안정기에 접어든 모양새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격랑의 시대’ 그 자체다. 정치색, 세대, 성, 지역 등 나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대혼란을 잠재울 방법을 찾아 종교계 큰 어른을 만났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자리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에서 김상근 목사를 만났다. <일요시사> 취재진이 먼저 기사연에 도착해 김 목사를 기다리는데 입구 쪽에서 ‘으쌰, 으쌰’ 하는 기합 소리가 들렸다. 거동이 불편한 김 목사가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는 소리였다.

사법부 늑장
갈라진 합의

지팡이를 팔에 걸고 한 칸씩 천천히 발을 디뎌 계단을 다 내려오는데 들린 ‘으쌰’ 소리는 열 번 정도였다. 차는 숨을 고르면서 김 목사는 방석 두 개를 덧댄 뒤 의자에 앉았다.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걸을 뿐 여든이 넘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활력이 넘쳤다. 인터뷰 장소까지는 직접 차를 몰고 왔다고 했다.

김 목사는 기독교계 민주화운동의 원로다. 김대중정부 시기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노무현정부, 문재인정부 시기에 공직을 맡는 등 진보 정권에서 일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하고 홈플러스 사태에 목소리를 내는 등 여전히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인터뷰에 앞서 ‘사회 혼란을 겪고 있는 국민에게 따뜻한 덕담을 해주신다는 생각으로 말해줬으면 한다’는 기자에게 김 목사는 환히 웃으면서도 “덕담할 때가 아니야”라는 뼈있는 말을 던졌다. 지난해 12월3일, 전 국민을 충격과 경악에 빠뜨린 비상계엄 사태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취지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김 목사는 현재 사회를 “상식이 붕괴하면서 오는 혼란과 갈등이 매일 증폭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개인이 가진 상식, 그게 모여서 사회적 상식이 된다. 일종의 사회적 합의인데, 그 큰 합의가 현재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목사는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와 10개월이 지난 현재를 언급했다. 그는 “계엄령이 선포될 당시 전 국민이 그 모습을 봤다. 그때는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이 ‘이건 대한민국이 아니다. 내란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계엄군으로 출동한 이들도 머뭇거리지 않았나. 어떤 군인은 철수할 때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게 상식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비상계엄 사태 이후 10개월이 지나도록 당시 국민이 생각했던 상식이 입증되지 않으면서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이 잘못됐다는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지 않으면서 상식이 붕괴한 것”이라며 “비상계엄 사태 직후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윤석열의 정당성,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라는 주장이 나왔다”고 짚었다.

비상계엄 사태 지나면서
상식 붕괴하고 혼란 가중

미국에서 불기 시작한 극우 바람이 영향을 미쳤다고도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일부 정치 세력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등에 업은 정치 세력이 지역주의에 편승하면서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목사는 “미국에서 불고 있는 극우 바람, 마가 바람이 세계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바람에 매우 취약하다. ‘미국 절대주의’ ‘숭미주의’를 배경으로 미국 것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어서다. 우리나라 문제를 가지고 열리는 집회에 왜 성조기가 등장하나? 문제는 그들이 큰 정치 세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미국발 극우 바람이 우리나라 젊은 층에 스며들고 있는 부분을 우려했다. 김 목사는 “과거에는 본인이 노력하고 애쓰면 개천에서도 용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개천에서 태어나서는 용이 될 수 없다. 이 절망감이 폭력적인 형태로 분출한 게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상층부를 구성하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특목고를 나왔거나 강남에 살거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과거에 저명 인사여서 경제적으로 탄탄한 배경을 가진 경우가 대다수다. 이런 사람들이 서울대 법대를 가고 상층부를 구성한다. 이들은 개천 근처에 간 적도 없고 심지어 개천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럼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어떻겠나? 특목고도 나오지 못했고 강남에 살지도 않고 아버지가 부자도 아니다. 그런 이들이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국가 기관을 때려 부쉈다. ‘아무개 판사 나와!’ 하고 소리도 질렀다. (윤석열) 대통령이 포옹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에게 잘못된 성취감이 심어졌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김 목사는 정치권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발
극우 바람

그는 “기업에서 사람을 뽑을 때 지연, 학연 등이 영향을 끼치니까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하지 않았나. 그런데 블라인드 채용을 하니까 정말 소위 말하는 스카이(SKY,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 강남 출신 이런 사람들만 취업이 되는 것”이라며 “개천 사람은 취업할 수 없다. 정치권이 20대, 30대를 위한 희망의 사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노력하고 애쓰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목사는 현재 2030세대가 밟고 올라갈 사다리가 끊어진 상태라고 봤다. 그는 “정치권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이 젊은 세대가 꿈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갈등을 증폭하는 식으로 이끌고 있다. 그러면 정말 답이 없다”고 우려했다.

아직 손을 쓸 수 있는 시기인지를 묻자 김 목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 “지금 사회가 혼란스럽고 국민이 갈라져 있으니까 대통령도, 정치권도 통합을 말한다. 하지만 통합은 마지막 골(goal)이지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다. 통합까지 가는 과정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을 고민해야 하는 주체가 정치권이다. 그리고 사회적 숙의를 통해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목사는 “정치권이 현안을 놓고 토론해야 한다. 한쪽이 안건을 내면 다른 한쪽은 국회를 박차고 나가는 게 아니라 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필요하면 국민자문단이나 시민단체에 의견을 물어야 한다. 예를 들어 20대, 30대가 왜 서부지법에 쳐들어갔고 그 사람들이 왜 부화뇌동하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숙의 과정을 거치면 해결이 가능하다. 그건 정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목사는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무슨 꿈을 꾸고 있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하고 있네’라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꿈을 꾸는 사람조차 없다. 지금은 집단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봐도 과하지 않다”며 “정치권이 엉뚱한 생각을 해야 한다. 통합이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엉뚱한 생각, 화두를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목사가 생각하는 통합은 무엇일까? 그는 모든 국민이 한 가지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은 ‘독재’라고 잘라 말했다.

마라톤 뛰듯
장기적으로

그는 “다수의 의견에 소수가 동의하는 것, 다수가 합의점을 냈을 때 그 의견에 승복하는 게 바로 통합이다. 가장 좋은 예가 국회다. 국회가 안건을 표결로 결정하면 그게 통합이다. 숙의, 집단지성을 창출하는 과정 없이 거수로만 해서 다수의 폭력으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러다 보니 다수당이 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 목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거론하면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후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가 토론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특정 사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들으면 여러 차례 되묻고 생각하고 판단했다. 반대를 뭉개버리는 게 아니라 곱씹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재명 대통령은 경청을 잘한다. 각계각층 사람들과 토론도 많이 하고 이야기도 듣는다. 국무회의에서도 ‘아무개 장관 말해봐라’ ‘자유롭게 말해라’라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입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수용하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자칫하면 대통령의 의견에 아무도 반대를 말하지 않는 분위기에 갇힐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이견을 듣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사회 상황과 정치권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쓴소리하던 김 목사는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말을 해줄 수 있느냐는 말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꼰대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웃으면서도 “성경 말씀에 ‘구하고 두드리고 열어라’라는 가르침이 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저앉지 말고 계속 뭔가를 찾고 탐구하고 노력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요즘 젊은 세대는 스마트폰을 꽉 채우는 길이의 글에도 벌떡증을 일으킨다. 그저 ‘쇼츠, 쇼츠, 쇼츠’에 매몰돼있다. 방에 틀어박혀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게임만 하지 말고, 그 손바닥만 한 세계에 갇히지 말고 긴 글도 읽어 버릇하면서 정말 구하고 두드리고 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젊은 세대 절망 달랠
정치권의 역할 중요”

김 목사는 “정치권에서 해법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를 ‘쇼츠’ 방식으로만 해서 그렇다. 뭐만 하면 ‘입법’ ‘입법’을 외친다. 멀리 보고 길게 보면서 우리나라에 필요한 정책이 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다 단거리 달리기만 하고 있다. 오늘만 살고, 내일만 사는 식이 아니라 삶의 마라톤을 뛰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39년에 태어난 김 목사는 올해로 여든일곱 살이 됐다. 새로운 일을 하기엔 버겁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김 목사는 최근 동료 목사들과 함께 ‘조곤조곤TV’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방송을 시작했다. 비상계엄 사태, 탄핵 등을 거치면서 등장한 일부 기독교 세력의 극우화 행보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다.

김 목사는 “교회의 극우화와 절망을 야기한, 즉 오도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저항하는 교회의 힘이 너무 약하다. 그리고 여기에 끌려가는 교인이 너무 많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찾지 않는 신도도 너무나 많다. 망가진 교회를 보기도 싫고 목사 설교도 싫고 이런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해 손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방치되는 것이다. 이대로 30년이 지나면 문 닫는 교회가 수두룩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나를 비롯해 함께 조곤조곤TV에 출연하는 목사님들은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이 꽤 있던 분들이다.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결과가 지금이다. 이대로 죽게 되면 정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죽기 전에 몸부림이라도 쳐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지금껏 하고 있던 사회활동은 모두 중단하고 유튜브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채널명 조곤조곤은 또박또박이라는 뜻이다. 하나씩 짚어가면서 이건 잘못된 거고, 이게 옳은 거라고 알려주는 게 바로 조곤조곤이다. 그 방향을 지향하려고 채널명을 그렇게 지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 목사는 우리나라 국민은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역사적 사건을 모조리 겪었다.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정말 절망적일 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국민은 그 모든 걸 극복했다.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에 있던 나라 중에 그 모든 걸 극복한 나라가 없다. 누군가는 ‘뭘 믿고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해?’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과거에 다 극복했다”고 힘줘 말했다.

절망을 넘어
국민 힘으로

이어 “우리 어렸을 때 코를 안 흘리는 애가 없었고 얼굴에 버듬 안 핀 아이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먹을 게 없어서 나타난 모습이다. 그것도 극복했다. 전쟁 나서 전부 폐허가 된 때도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다. 독재 정권이 나타났을 땐 국민이 무너뜨렸다. 우리 국민에게 내재한 힘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이 힘을 믿고 우리가 위대하다고 자부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내보자. 지금의 현안도 노력해서 풀어보자, 풀 수 있다”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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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도 못 뚫은 선관위 방패

감사원도 못 뚫은 선관위 방패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지방선거 이후 선거관리위원회에 쏟아지던 폭발적인 관심이 사그라들고 있다. 그로 인한 나비효과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정작 핵심은 비껴가는 모양새다. 지난 6월3일 치러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들어 처음 열리는 대형 정치 이벤트였던 만큼 국민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미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은 압승으로 국정 운영에 동력을 더하고자 했고, 12·3 비상계엄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등으로 궤멸 직전에 몰려 있던 보수 진영은 ‘샤이 보수’를 기대하며 유권자에게 읍소했다. 사상 초유 참정권 침해 결과는 절묘했다. 지방선거의 승패를 가를 때 판단하는 광역단체장 수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16개 시도 중 12곳을 석권했다. 하지만 서울을 내줬고 국민의힘의 텃밭인 대구·경북 지역도 빼앗지 못했다. 선거 운동 초반 16개 시도를 전부 싹쓸이할 것으로 예상했던 상황이라 민주당의 실망은 더욱 컸다. 특히 서울에서의 패배는 뼈아팠다. 이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서울시장을 내주면서 중간 평가를 받았다는 말이 나왔다. 실제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방선거 이후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규제 중심의 부동산 정책이 시장에 먹히지 않았고, 지방선거 직전 상장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의 여파가 지지율을 흔들었다. 여기까지는 지방선거 이후 늘 나타났던 여파였다. 문제는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실한 관리로 선거의 근간 자체가 흔들렸다는 점이다.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각,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지가 부족한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선거를 총체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기관이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사태 이후 선관위의 대응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선관위는 투표지가 부족한 투표소의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선관위는 6월5일 투표지를 추가로 송부한 투표소는 67개, 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는 50곳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사흘 뒤인 6월8일 140개 투표소에 추가 투표용지가 송부됐고, 이중 91곳에서 투표지가 부족했다는 발표로 바뀌었다. 3일 만에 각각 거의 두 배씩 늘어난 것이다. 결국 조현욱 전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을 위원장으로 한 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다. 진상규명위원회는 10일(6월10일~19일)간의 조사 끝에 “선거 관리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에 관한 책임 소재에 따라 수사 의뢰를 권고한다”며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을 비롯한 선관위 수뇌부 등 12명을 지목했다. 채용 비리 의혹·소쿠리 투표 투표지 부족 사태로 민심 폭발 진상규명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 발생 당시의 상황을 보면 상급위원회에 대한 신속한 보고 체계가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며 “상급위원회의 지휘권도 전혀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 서울시선관위가 투표 시간 연장을 중앙선관위 보고나 논의 없이 결정했으며 송파구선관위가 투표가 종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표를 개시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선관위 해체에 가까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선관위의 과거 행태도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휴직자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이 10년여 동안 이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선관위의 존재 의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선거 기간 휴직자의 증가로 인력 공백이 생기면서 ‘소쿠리 투표’ 사건 등 부실 관리 문제가 불거졌는데도 이번 선거에서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중앙선관위가 국민의힘 김선교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5차례의 선거 중 휴직자 통계’에 따르면 6·3 지방선거 당일 선관위 직원 179명이 휴직 상태였다. 휴직자의 71%는 육아휴직(127명), 일반 질병(30명), 가족 돌봄 및 해외 동반 휴직(8명), 유학·병역 및 노동조합 전임자(1명) 등의 사유였다. 특히 최근 4년 새 진행된 다섯번의 선거에서 두 차례 이상 휴직한 직원이 97명으로 집계됐다. 2회 휴직자는 77명, 3회 휴직자는 19명이다. 다섯번의 선거 중 4번이나 휴직한 직원도 있었다. 선관위는 휴직자의 대다수가 육아 휴직자인 만큼 법적 권리를 보장했다는 뜻을 밝혔다. 국가공무원법 제71조에 따르면 자녀 양육 및 임신·출산을 사유로 공무원이 휴직을 신청하면 임용권자는 휴직을 명해야 한다. 선관위 직원들의 휴직을 강제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쌓이고 쌓인 국민 분노 하지만 선관위의 항변은 국민의 분노를 꺼뜨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선관위 자체가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점을 방패 삼아 각종 문제를 피해 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선관위는 독립성이 생명인 기관이기에 감찰을 받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해도 자체적으로 덮고 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있던 것이다.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계기는 선관위의 채용 비리 의혹이었다. 2023년 선관위 전·현직 사무총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의 자녀가 ‘아빠 찬스’를 통해 특혜 채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특혜 채용 의혹이 전방위로 번지자 외부 기관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선관위는 독립성을 근거로 자체 조사를 고집했다.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하자 선관위는 결국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의 조사를 받아들였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권익위가 2023년 이전 7년여 동안 선관위의 경력 채용을 전수조사한 결과 58명의 부정 합격 의혹 등 총 353건의 채용 비리가 적발됐다. 권익위는 고의성이 의심되거나 상습적으로 부실채용을 진행한 28명을 고발하고 가족 특혜나 부정 청탁 여부 등 사실관계 규명이 필요한 312건에 대해 수사를 의뢰했다. 일각에서는 권익위와 국회 국정조사만으로는 선관위 조사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선관위의 조사 수용 방침 자체가 자신들이 그 범위를 정하는 방향으로 잡힌 점도 논란 거리였다. 결국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전반을 들여다보겠다고 나섰다. 선관위와 감사원 사이의 충돌이 시작된 지점이다. 독립성만 앞세웠다 실제 감사원의 감사가 이뤄지기까지 선관위의 저항은 상당했다. 국민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선관위는 감사원의 감사를 일단 수용하면서도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감사원에 헌법상 독립기구인 선관위를 감사할 권한이 있는지를 다퉈보겠다는 취지였다. 그사이 감사원은 2024년 4월 선관위 내부에 부정 채용이 만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비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선관위 전·현직 직원 27명을 대검찰청에 수사 요청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선관위는 조직 전반에 걸쳐 채용, 인사, 복무 등 관계 법규를 무시하거나 이를 용인하는 행태가 관행화된 상태였다. 고위직부터 중간 간부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자녀 채용을 청탁하는 행위가 빈번했고, 채용 담당자들은 각종 위법·편법적 방법을 동원해 선거철 경력 경쟁 채용을 직원 자녀들이 손쉽게 국가 공무원으로 입직할 수 있는 통로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이 들여다본 2013년 이후 시행된 경력 경쟁 채용 167회를 전수조사한 결과 확인된 위반 건수만 800여건에 달했다. 당시 감사원은 “채용 비리와 관련한 사안은 신속한 수사 착수의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해 검찰에 수사를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감사원이 내놓은 결과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판단으로 무위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헌재는 지난해 2월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에 대해 직무감찰을 할 권한이 없다고 만장일치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감사원의 권한은 행정부 내부의 통제 장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바, 정부와 독립된 헌법 기관인 국회·선관위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감사원이 실시한 직무감찰은 헌법 및 선거관리위원회법에 의해 부여받은 선관위의 독립적인 업무 수행을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헌법상 독립기관’ 내세워 헌재 판단까지 ‘난공불락’ 감사원장과 감사위원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는데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선관위에 대해 직무감찰을 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의 공정성과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헌재의 판단은 법원으로 이어졌다. 지난 6월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선관위 직원 A씨가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을 상대로 낸 견책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감사원은 감사에서 A씨에게 경징계 이상의 처분을 요구했고, 선관위는 징계를 의결, 견책 처분을 내렸다. A씨는 2021년 10월에 발생한 사안에 대해 징계시효 3년이 지난 2025년 3월 징계를 의결했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국가공무원법상 공무원의 징계시효는 성폭력 범죄 등이 아닌 기타 징계 사유의 경우 3년이다. 다만 감사원이 조사 개시를 통보하면 시효가 정지된다. 재판부는 감사원의 감사 자체가 위법이기에 조사 개시 통보를 시효 중단 사유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가 권한쟁의 심판에 대해 인용한 점을 들어 A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토대로 A씨에 대한 징계시효 3년이 이미 지났다고 판단했다. 헌재의 판단은 당시에도 선관위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든다는 말이 나왔다. 이후 투표지 부족 사태가 벌어지면서 선관위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일었다. 특히 투표지 부족 사태는 부정선거 논란으로 이어져 ‘올림픽 공원’ 시위 사태 발생 등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지난달 7일 출범한 선관위 특검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선관위 특검팀(특별검사 이태한)은 지난 7일 출범 한 달째를 맞아 강제수사, 포렌식 검증, 관련자 소환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표지 부족 사태를 비롯해 투표율 허위 입력 정황,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 등 선관위 관계자들의 해외 출장 유용 의혹, 투표함 입찰 담합 의혹 등을 들여다보고 있다. 사회에 끼친 악영향도 커 특검의 본 수사 기간은 90일이며 필요한 경우 30일씩 두 차례 연장할 수 있다. 최장 150일 간 수사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일단 인력 충원이 시급한 상황이다. 중대범죄수사청 청장 인선 절차가 늦어지면서 선거 관련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감사원은 선관위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특검은 어떨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