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배회하는 ‘빅텐트 유령’ 정체

  • 박형준 기자 ctzxp@ilyosisa.co.kr
  • 등록 2025.08.25 11:37:34
  • 호수 15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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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돼도 큰일이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들은 모두 빅텐트를 언급했다. 빅텐트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려면, 정당이 꿈꾸는 미래상을 대중에게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포퓰리즘 요소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의힘엔 설득력 있는 미래상도 없고, 강렬한 쇼도 없다. 국민의힘의 과제를 풀 해답은 고이즈미·아베·트럼프가 보여줬다.

지난 22일 진행된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주요 후보 4명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빅텐트(포괄 정당)를 언급했다. 조경태·안철수 의원은 “당내 극우 세력을 배제한 후 중도층을 공략한다”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조 의원은 지난 4일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극우 세력과 완전히 절연해야 한다”며 “극우 세력과 손잡는 정치인은 국민의힘서 퇴출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냐
극우냐

안 의원도 지난 11일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극우 세력과 따로 가는 게 좋다”며 “극우 정당이 따로 있으면, 국민의힘은 자유롭게 중도로 뻗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 후보는 극우 세력을 배제한 ‘우익 중심 빅텐트 정당’을 지향하고 있다.

반면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8일 대구 엑스코 컨벤션홀에서 열린 대구·경북 합동 연설에서 “이재명 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국민과 손잡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반이재명 독재 투쟁을 전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은 출마 선언 이후 줄곧 “국민의힘 의원 107명을 하나로 묶어서 제대로 잘 싸울 수 있는 전사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장관과 장 의원은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 등 극우화 논란을 일으키는 일부 강경 보수 세력까지 포용한 우익 빅텐트 정당이 국민의힘의 미래라고 제시한다.


두 사람의 지향점엔 세부적으로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김 전 장관의 의견은 “일단 뭉치자”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장 의원은 강경 보수가 주도하는 우익 빅텐트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는 “내부 총질과 탄핵 찬성으로 윤석열정부와 당을 위기로 몰아넣고, 극우몰이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어 “국민의힘 의원 107명을 단일대오로 만들 것”이라며 “싸우지 않는 자는 배지를 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싸우는 사람만 공천받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강조한다.

빅텐트는 다양한 성향의 이념·지향점을 가진 이들이 모인 정당을 말한다.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소선거구제 총선과 결선투표 없는 단순다수대표제를 유지하는 나라에선 양당제 정치가 구조로 자리 잡는다”고 주장했다.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우리도 형식적으론 다당제지만, 실질적으론 양당제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양당제를 유지하는 국가의 유권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이 싫어하는 정당 후보자의 당선을 막기 위한 전략적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세력이 하나의 당 안에 모이는 빅텐트 정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더 많은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당의 이념·당원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강도는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이후 중요해지는 것은 다양한 성향의 구성원을 아우르면서 선거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이다. 이 지도력은 대체로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대중 정치인의 출현 ▲여러 파벌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합의 구조 등 형태로 드러난다.


강한 카리스마 갖춘 ‘쇼’ 필수
고이즈미·아베·트럼프에 해답

여러 성향의 파벌이 공존하는 대표적인 빅텐트 정당으론 일본의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자민당에선 파벌 수장들 간 밀실 합의가 오랜 구조로 자리 잡았다.

선거제가 자리 잡은 국가에선 결국 더 많은 유권자를 설득해 더 많은 표를 받은 정당이 권력을 차지한다. 정치인이 더 많은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설득하는 과정엔 결국 포퓰리즘이 수반된다. 포퓰리즘은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배제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각각 방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들은 “다양한 세력을 아울러 더 많은 유권자로부터 표를 얻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결국 포퓰리즘을 피하긴 어렵다. 보수 빅텐트 정당의 수장으로서 소속 정당을 집권시킨 보수 정치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을 거론할 수 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총리 취임 이전엔 2회에 걸쳐 우정상을 지냈다. 이후 고이즈미 전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우정공사를 민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 우정공사는 우체국 예금과 간이보험을 합쳐 지난 2004년 기준 수신고 350조엔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개인 금융자산 총액의 1/4에 달하는 규모였다. 우체국 예금 대부분은 일본 정부의 의사에 따라 공공 분야의 특수법인에 대출됐다.

하지만 당시 특수법인은 구체적인 사업성 검토 없이 사업을 진행했고, 이는 대규모 재정 적자로 이어졌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취임 직후 곧바로 우정 민영화 정책을 추진했다. 관련 법안은 지난 2005년 7월 중의원(하원)을 통과했지만, 다음 달 참의원(상원)서는 부결됐다. 일본 정치계엔 특정 집단과 연결돼 정치자금과 이해관계를 통해 교류하는 다양한 분야의 ‘족의원’이 있다.

자민당엔 전·현직 우체국장들과 연결된 우정족 의원들이 있었다. 야당인 민주당에도 전직 우정성 관료·우정노동조합과 연결된 우정족 의원들이 있었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포퓰리스트 기질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평소 일본 정치 특유의 파벌 구도를 강하게 비판했던 고이즈미 전 총리는 자민당 내 지지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위해선 직접 대중을 상대해야 했다.

가까운 일본
사례 보니…

고이즈미 전 총리는 우정 민영화 법안 부결 직후 중의원을 해산했다. 이어 자신을 천동설을 거스르고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비유했다.


당시 고이즈미 전 총리는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정말 우정국의 일은 민간인이 할 수 없는지 국민께 물어보고 싶다”고 주장했다. 또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만류하자 “(우정 민영화는) 내 신념이다. 죽어도 좋다”며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일본에서 우정 민영화가 국민적 이슈는 아니었다. 그래서 고이즈미 전 총리의 중의원 해산은 예상 밖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이즈미 전 총리는 “자민당·공명당 연합이 중의원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총리직에서 미련 없이 물러나겠다”고 응수했다.

이어 반대파 중진들을 공천서 배제하면서 그들의 지역구에 ‘여성 자객 공천’을 단행했다.

야권에선 이를 오히려 정권을 얻을 수 있는 호재로 받아들이는 기류도 있었다. 하지만 자민당·공명당 연합은 지난 2005년 9월 진행된 중의원 선거에서 총 480석 중 327석(자민당 296석·공명당 3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이어 10월엔 우정 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참의원에서 모두 통과됐다.

이 과정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가 포퓰리스트로 평가받는 이유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다양한 집단과 연결돼 복잡한 이해관계를 교환하는 일본식 이익 유도 정치로부터 벗어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비유를 사용해 유권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울러 자신을 개혁의 선봉장 위치에 놓고, 반대 세력을 ‘반개혁 세력’으로 규정해 대중에게 홍보했다. 또 자신을 반대하는 정치인의 지역구엔 ‘여성 자객’을 대거 공천해 대중의 통속적인 관심을 자극했다.


이후 세간에선 고이즈미 전 총리의 정치 방식을 ‘고이즈미 극장’이라고 표현했다.

한의석 성신여대 교수는 지난 2012년 작성한 논문 ‘탈 자민당 정치: 고이즈미의 리더십’서 ▲대중적 지지 확보를 위한 틀 짜기 ▲정치적 비전·정책에 대한 명확한 정치·선거 구도 제시 ▲우정 민영화에 대한 고이즈미 전 총리의 신념 등 우정 민영화의 성공 요소를 제시했다. 한 교수는 “지지율이 하락하던 자민당의 회생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후임자이자, 약 3년3개월 동안 잃었던 정권을 되찾아 최장수 총리가 됐던 아베 신조 전 총리도 포퓰리스트로 평가받는다. ‘강한 일본’을 강조한 그의 강경한 민족주의는 한국·중국 등 주변국과의 마찰로 연결됐지만, 여기엔 “고도의 포퓰리즘이 내포됐다”는 분석이 있다.

주변국과
마찰 감수

미일 동맹을 근간으로 군대를 보유한 보통국가화는 아베 전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내 보수 방류의 숙원이다. 이 주장이 나온 계기는 지난 1990년 진행된 미국의 걸프전이란 분석이 있다.

당시 일본은 걸프전 총 전비 중 20%에 육박하는 130억달러를 지원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과 쿠웨이트로부터 감사 인사를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당시 쿠웨이트는 미국 언론을 통해 지원국 30여개국에 감사 인사를 남기는 전면 광고를 진행했다. 미국 국무부도 승전 기념용 셔츠를 제작했다.

일본은 여기에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도 예정됐던 일본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이 홀대는 “일본이 평화유지군을 단 1명도 보내지 않고,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이후 일본에선 보통국가론이 불거졌다. 약 3년 동안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한국·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취지로 외교 정책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여론의 비판을 들어야 했다.

아베 전 총리는 주변국과의 마찰을 감수하고, 보통국가론을 토대로 한 ‘강한 일본’을 주창했다. 이에 대해 박철희 주일대사는 지난 2019년 논문 ‘아베 시대의 대전환’에서 “아베 전 총리의 장기집권엔 공명당과의 연합·강경 보수 야당 일본유신회의 존재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박 대사는 “(중도 보수 성향의) 공명당은 아베 전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의 강경 우파 이미지를 불식시켰다”면서 “중도 포괄형 정당 연합이자, 서로의 보완재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일본유신회의 존재와 그들의 거친 주장은 자민당 내부 보수 우파가 강한 목소리를 내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외부 도우미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기묘한 삼각 구도를 일컬어 “확장된 보수 진영 형태”라고 규정했다.

국민의힘에선 안 의원이 이와 비슷한 구상을 밝혔다. 안 의원은 “전씨 등 강경 보수 세력이 국민의힘 외부에서 자리 잡고, 국민의힘은 합리적 보수 정당으로서 수도권·중도층을 설득한다”는 구도를 구상했다. 안 의원은 혁신위원장직에서 사퇴한 후 당 대표 출마를 전격 선언해 정가를 놀라게 했다.

언론과의 접촉 폭도 늘렸다.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조국·윤미향 사면 반대’ 시위를 하는 등 세간의 시선에도 신경 쓰고 있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 정치 문법과는 다른 정치 구상을 실현하면서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밑천은 열성 지지층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는 자신의 지지층을 공화당에 집중적으로 투입해 정치인을 길들이는 방식이다.

방송인 김어준씨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더불어민주당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22년 중간선거 경선서 후보자 240명을 지지하는 선언을 해 자신의 영향력을 늘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한 후보들의 경선 승률은 90%가 넘었고, 그 비결은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적 지지층이었다.

기묘한 삼각 구도
확장된 보수 형태

그가 지지자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방식은 지난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진행한 정상회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을 상대한 사람은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었다. 밴스 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발언 기회를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왜 미국에 감사하단 말을 하지 않느냐. 감사하다고 말하라”고 몰아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미국을 방문해 사실상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후보 지지 활동을 이어나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에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휴전을 주장했고, 해리스 후보는 전쟁 지속을 다짐했다. 미국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미국의 대외 문제 개입 자제·축소를 원하는 고립주의 성향이 짙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밴스 부통령을 앞세워 열성적인 지지층의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거대한 쇼를 기획·실행한 것이다. 밴스 부통령의 질타는 민감한 외교 무대까지 포퓰리즘의 장으로 삼아 자신의 견해를 밀어붙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본능적인 한 수였다.

세 정치인의 포퓰리즘은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여전히 윤석열 전 대통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제대로 된 혁신 논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당 대표 선거 구도도 여전히 ‘찬탄 대 반탄’이다.

그런 가운데 김 전 장관은 지난 13일 진행된 김건희 특검의 국민의힘 당사 압수수색 시도에 대한 항의 목적 철야 농성을 하면서 대국민 쇼를 진행했다. 김 전 장관이 속옷 차림으로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모습은 고스란히 김 전 장관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전파됐다.

또 팔굽혀펴기 등 각종 체조를 하는 모습도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알렸다. 김 전 장관 측으로선 70대 중반 고령 나이에 대한 대중의 염려를 불식하기 위해 공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고스란히 김 전 장관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졌다.

민주당 황명선 최고위원은 지난 18일 최고위원회의서 “대국민 성희롱”이라며 “속옷 차림의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국민에게 걱정과 수치심을 안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베 전 총리가 일본유신회를 교묘하게 활용해 자신의 극우 이미지를 희석한 것과 달리, 장 의원은 네 후보 중 가장 강경하게 전씨를 두둔하면서 찬탄파 의원들에 대한 협박성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대중에게 긍정적 인상을 주는 포퓰리즘을 실현하기 위해선 부정적 인상을 줄 수 있는 정치적 대응을 타인에게 떠맡기는 대응이 필요하다.

장 의원의 선거운동은 이와 완전히 상반된다.

대조되는
속옷 농성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는 “포퓰리즘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을 간곡히 설득해야 유지할 수 있는 빅텐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다면, 빅텐트는 유령일 뿐이다.

국민의힘이 빅텐트를 구축·유지하고자 한다면, 명확한 정견을 토대로, 대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확실한 쇼를 결합한 포퓰리즘을 구현해야 한다. 국민의힘이 풀어야 할 문제에 대한 해답은 3명의 걸출한 포퓰리스트의 옛 행적에 숨어 있다.

<ctzx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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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