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59명, 그들은 누구인가?

‘나 떨고 있니?’ 올가미 내리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음으로 처단할 수 있을까? 사형제도는 어느 국가에서나 ‘뜨거운 감자’다. 우리나라는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집행하지 않는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된다. 최근 법무부가 몇몇 연쇄살인범을 서울구치소로 이감했다. 사형 집행의 전조일까?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지난해 20개 국가서 883건의 사형이 집행됐다. 2021년(579건)에 비해 53% 늘어난 수치다. 사형을 가장 많이 집행한 나라는 중국이다. 하지만 중국의 사형 집행 건수는 국가 기밀로 분류돼 확인할 수 없다. 수천 건으로 추산된다. 북한과 베트남도 집계서 제외돼 실제 사형 집행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1997년 12월30일 사형수 23명을 한꺼번에 집행한 뒤 중단했다. 사형제도에 관한 존폐 논쟁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 사형제도 존치론자와 폐지론자가 줄다리기의 양 끝에 서서 힘의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다. 그 균형은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범죄가 일어날 때 미묘하게 무너지곤 한다.

최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흉기 난동 사건, 묻지마 범죄 등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사형제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사형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넘어서 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도입하려고 추진 중이다.

어떤 식으로든 흉악범을 사회서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지난달 25일에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유영철은 노인과 부녀자 등 20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이 탄 차를 추월한다는 이유로 차에 타고 있던 신혼부부를 엽총으로 살해한 정형구도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


유영철과 정형구 등의 이감을 두고 사형 집행을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8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서울구치소·부산구치소·대구교도소·대전교도소 등 사형 집행시설을 보유한 4개 교정기관에 시설 점검을 지시했다. 이 중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한 시설을 갖춘 곳은 서울구치소가 유일했다고 한다.

형법 제66조(사형)에 따르면 사형은 교정시설 안에서 교수해 집행한다. 법무부는 “교정 행정상 필요한 조치”라고만 밝힌 상태다. 

법무부의 갑작스러운 조치로 사형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법무부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사형수는 모두 59명이다. 이 가운데 4명은 군형법으로 사형이 선고돼 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또 1998년부터 올해 6월까지 사형 집행이 아닌 병사나 자살 등 기타 사유로 사망한 사형수는 12명이다. 같은 기간 감형된 사형수는 19명이다.

이들은 형법 제55조(법률상 감경)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거나 20년 이상 5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로 감경됐다. 

최장기

국내 최장기 사형수는 원언식이다. 1992년 10월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왕국회관(여호와의증인 예배당)에 불을 질렀다. 이 화재로 15명이 죽고 25명이 다쳤다. 대법원은 1993년 11월 원언식의 사형을 확정했다. 다음 달이면 30년째 복역하는 셈이다. 


원언식의 복역 기간을 두고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형법 제77조(형의 시효의 효과)와 제78조(형의 시효의 기간)에 따르면 형이 확정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형을 면제해준다. 형법에 따르면 원언식의 경우 다음 달 23일이면 형 집행시효가 만료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법무부가 사형의 집행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으로 형법을 개정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4명의 군인

군형법 제3조(사형 집행)에 따르면 사형은 소속 군 참모총장이 지정한 장소서 총살로써 집행한다. 현재 군형법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는 4명이다. 김모 상병은 1996년 동료 사병에게 총을 난사, 3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군법원은 김 상병에 초병살해와 상관살해 미수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2005년 경기도 연천 비무장지대 초소(GP)서 수류탄 1발을 던지고 기관총 44발을 난사해 장교와 동료 사병 등 8명을 숨지게 한 이른바 ‘김 일병 사건’의 당사자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군 당국은 “김 일병이 선임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질렀다”고 결론을 내렸다.

1997년 후 중단 상태
실질적 폐지국 유지

일부 유족과 시민단체는 김 일병이 범인이 아니라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1년 해병대에 근무하던 김모 상병은 왕따 등 괴롭힘을 당하자 앙심을 품고 동료 사병에게 조준사격을 가해 4명을 죽였다. 김 상병은 2013년 대법원의 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그러면서 최연소(19세) 사형수가 됐다. 

2014년 강원도 고성군 제22보병사단 GOP의 한 소초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임 병장 사건’이다. 임모 병장은 수류탄 1발을 던지고 총격을 가했고 그 결과 5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임 병장은 K2 소총과 실탄 60여발 등으로 무장한 채 탈영했다.

임 병장 이후 사형 확정 판결이 나오지 않으면서 마지막 사형수가 됐다. 

연쇄살인범

9명, 20명, 10명. 3명의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숫자다. 정두영은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10개월 동안 9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금품을 노리고 낮 시간대 여자와 노약자만 있는 집에 침입해 살인을 저질렀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무려 20명을 살해했다. 유영철의 범죄 행각이 드러난 이후 ‘사이코패스(반사회성 인격장애)’라는 개념이 국내를 강타했다. 당초 유영철은 21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재판부가 1건(이문동 살인사건)을 무죄로 선고하면서 20명에 대한 죗값을 받았다. 

유영철의 범행은 정두영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그는 과거 검찰 조사 과정서 “2000년 강간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돼있을 당시 정두영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한 월간지를 보고 범행에 착안하게 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9월 경기도 군포, 수원, 화성, 안양 등지서 성인 여성이 잇따라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시신으로 발견된 여성도 있었지만 수사는 더뎠다. 그러다 2008년 12월 경기도 군포서 21세 여대생이 행방불명되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 추적 끝에 검거된 인물이 바로 강호순이다.

경찰 조사 과정서 강호순의 여죄가 드러났는데 부녀자 8명을 포함해 자신의 아내와 장모 등 총 10명을 죽였다. 

외국인

2000년 6월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서 40대 주부가 얼굴과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퍽치기를 당한 해당 여성의 옷은 벗겨져 있었고 신체 주요 부위가 훼손된 상태였다. 경찰 수사 과정서 비슷한 수법의 강도․살인미수 사건이 7건이나 드러났다.


범인은 중국계 외국인인 왕리웨이. 검거 당시 우리나라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가 도주해 불법체류자 신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무부, 흉악범 서울구치소로 모아
헌재는 세 번째 헌법소원 심리 중

1999년 대구 서구 평리동서 모녀를 살해하고 딸의 친구를 강간한 박경수는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박경수는 차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모녀의 집에 침입해 반항하던 모녀를 흉기로 찔러 죽였다. 딸의 친구도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했다. 

당시 대구지법 재판부는 “사형폐지론이 대두하고 있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범행의 동기·수법 및 범행 후 정황이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잔인무도 했으며 유족의 극심한 피해감정 등을 고려, 인명경시·황금만능 범행을 예방하는 차원서 극형이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최고령

59명의 사형수 가운데 최고령은 ‘보성 어부 살인사건’의 어부 오종근이다. 오종근은 2007년 8월 배에 태워 달라는 남녀 대학생 2명을 바다로 데려가 살해하고 20여일 후 바다를 보고 싶다는 20대 여성 2명을 자신의 배에 태워 나간 뒤 살해했다. 오종근은 시종일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또 오종근은 항소심 진행 도중 사형제도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법원에 위헌법률심판제정 신청을 했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사형제도 존폐 논란이 다시금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에 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판단 이후 오종근의 사형이 확정됐다. 오종근은 현재 83세로 알려져 있다.

패륜아

1994년 4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주택에 불이 났다. 신고자는 집주인 박모씨의 아들 박한상.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처참하게 살해된 박씨 부부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박한상은 부모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지만 이후 살인범으로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국내서 일어난 존속살해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박한상은 속옷까지 다 벗고 양손에 칼을 하나씩 쥔 채 부모를 40군데나 찔러 살해했다. 그는 증거인멸을 위해 집에 불을 질렀다. 이 과정서 다른 방에 자고 있던 박한상의 사촌동생도 사망했다. 박한상은 부모를 살해해 유산을 상속받으려 했다고 진술했다.

박한상의 범행은 영화 <공공의 적>, 정유정 작가가 쓴 <종의 기원>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카드빚을 갚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하고 형과 아버지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의 당사자인 김근우도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다. 김근우는 말다툼 끝에 어머니 목을 졸랐고 쓰러진 어머니의 얼굴을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다. 또 87세 할머니도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현재 사형제도는 3번째로 헌재 심판대에 올라 있다. 1996년 살인과 강간미수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가 낸 헌법소원서 7대2로 합헌 결정이 나왔다. 당시 헌재는 다수 의견서 “사형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공포심과 범죄에 대한 응보 욕구가 서로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이라고 밝혔다. 

2010년 사형제도 헌법소원에서는 위헌 의견이 4명으로 늘었다. 위헌 결정은 재판관 9명 가운데 6명의 찬성을 필요로 하기에 합헌 결정이 났지만 사형제도에 대한 헌재의 판단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장이 일었다.

사형제도에 관한 세 번째 헌법소원은 존속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윤모씨가 제기했다. 10여년 사이 위헌 의견이 2→4로 늘어나면서 이번에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사형제도 존치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과 맞부딪칠 전망이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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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