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의 배신’ 이재명 엔드게임

입으로 흥해 입으로 망할 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정치인 이재명의 덩치를 불린 건 ‘말’이었다. 기초단체장서 광역단체장으로, 대선후보와 거대 야당 대표로 성장하는 내내 ‘사이다’라는 별칭이 뒤따랐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발언에 지지자는 열광했고 언론은 앞다퉈 보도했다. ‘말로 흥한’ 그가 ‘말로 망하는’ 모양새다. 측근의 입을 통해서다.

‘돌아선 팬이 안티보다 더 무섭다’. 연예계서 정설처럼 여겨지는 말이다. 팬은 안티에 비해 연예인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돌아서는 순간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마음에 감춰주고 덮어줬던 치부까지 언급할 수 있기 때문.

등 돌린
이화영

최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상황이 돌아선 팬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연예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말이 나온다. 과거 측근으로 불렸던 이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다. 대선후보 시절부터 사법 리스크로 몸살을 앓고 있던 이 대표의 어깨에 측근리스크까지 얹어지고 있다.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서 불거진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로비 의혹은 불씨였다. 이후 성남FC 후원금 의혹, 쌍방울그룹 변호사비 대납 의혹, 대북 송금 의혹, 백현동 개발비리 의혹 등 이 대표를 둘러싼 사법 리스크의 규모는 나날이 커졌다. 개인의 리스크를 넘어 당 차원의 리스크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대표는 대선 패배 3개월 만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서 국회의원 자리를 꿰찼고 내친 김에 당 대표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회의원의 특권으로 검찰 수사를 피하려는 시도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제는 검찰의 칼을 막기 위해 겹겹이 입은 방패는 ‘아군’에 의해 점차 힘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민주당은 이 대표에 관한 체포동의안 처리 과정서 분열 양상을 보였다. 앞서 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처리할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반란‧이탈표가 대거 나타난 것이다. 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 169명이 모두 표결에 참여했지만 찬성 139표, 반대 138표, 기권 10표, 무효 11표가 나왔다. 

찬성표가 더 많았지만 재적 의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국회법에 따라 체포동의안은 부결됐다. 민주당 소속 의원 가운데 최소 31명이 이탈하면서 이 대표의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혔다. 민주당 내 반란표는 상대 당인 국민의힘의 공격보다 이 대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당장 당이 내분에 빠져든 것.

반명(반 이재명)계 의원을 중심으로 사퇴론이 급격하게 터져 나왔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친명(친 이재명)계 의원이 방어에 나섰지만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다. 체포동의안 처리 과정서 불거지기 시작한 친명 대 반명의 갈등은 내년 총선이 다가올수록 극렬해질 전망이다. 

리더십
치명상

이 대표에게 더욱 뼈아픈 대목은 측근이 잇따라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검찰 수사 이후 재판 과정서 증언이 뒤집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 대표는 민생을 언급하며 현 상황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시간도 이 대표의 편은 아니다. 총선일이 다가올수록 리스크를 줄이려는 당내 움직임이 거세질 것이기 때문.

최근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쌍방울그룹에 ‘도지사 방북 추진 요청’을 한 사실을 이 대표(당시 경기도지사)에게 보고했다고 검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지사는 쌍방울의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수원지검 형사6부는 이 같은 취지의 진술을 받고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있다.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은 2019년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이 전 부지사와 상의해 북한 측 인사에게 경기도가 내야 할 북한 스마트팜 사업비 500만달러와 당시 경기도지사 방북 비용 300만달러를 대신 지급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18일 이 전 부지사의 41차 공판서 그의 진술이 일부 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전 부지사는 그동안 ‘도지사 방북 비용 대납 요청 등에 관여한 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당시 경기도 정책실장이었던 정진상 전 대표실 정무조정실장도 ‘도지사 방북을 서둘러 추진해달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진술하는 등 기존 입장을 일부 뒤집으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전 부지사의 진술 번복에 이 대표는 “검찰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검찰이 이 전 부지사에 허위 진술을 회유·압박하고 있다면서 진상 파악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민주당 인권위원장인 주철현 의원과 법률위원장 김승원 의원은 “검찰이 ‘방북 비용 대납’ 프레임을 짜놓고 이 대표를 끼워 넣으려 혈안이라는 폭로”라고 탄원서에 기재했다.

이어 “김성태 전 회장의 일방적 조작 진술에 더해 이 전 부지사에게도 허위 진술을 회유·압박한다는 내용은 충격 그 자체”라며 “검찰이 이 전 부지사를 구속 후 10개월 가까이 독방 수감 및 매일 검찰 소환조사로 진을 빼고 협박과 회유를 병행한다. 고문만큼 매서운 반인권적 조작 수사를 서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이 전 부지사의 변심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검찰 입장에서는 대북 송금 사건서 부족했던 부분을 이 전 부지사의 진술로 찾은 셈이 됐다. 일각에서는 이 대표의 소환조사가 초읽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까지 제기된다. 특히 민주당이 ‘정당한 영장 청구에 불체포특권 포기’를 결의한 지 하루 만에 이 전 부지사가 진술을 바꾼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김성태 전 회장도 재판서 이 대표를 거론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11일 수원지법 형사11부 심리로 진행된 이 전 부지사의 외국환거래법 위반 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날 그는 “이 전 부지사와 상의해 대북 송금을 진행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대표(당시 경기도지사)의 영향이 컸다고 진술했다. 

불체포 포기
다음 표결은?

김 전 회장은 2019년 1월과 4월경 임직원을 시켜 달러를 중국으로 밀반출하거나 환치기하는 등 총 800만달러를 불법적으로 북한에 보냈다. 이 과정서 ‘그분’(이 대표)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또 이 전 부지사에게 쌍방울이 북한에 돈을 보낸 걸 이 대표도 아느냐고 질문했을 때 “다 말씀드렸다”는 답을 들었다고도 주장했다. 

이날까지만 해도 이 전 부지사는 쌍방울그룹의 비리에 자신이 연루됐다는 혐의를 모두 부인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18일 이 전 부지사는 그동안 고수해 왔던 입장을 바꿨다. 이 대표는 김 전 회장과 이 전 부지사의 진술에 ‘아니다’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검찰의 포위망은 계속 좁혀지고 있다. 

앞서 백현동 개발비리 의혹서도 이 대표가 언급됐다. 정모 아시아디벨로퍼 회장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7부 심리로 열린 김인섭 전 한국하우징기술 대표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김 전 대표는 백현동 개발사업의 ‘대관 로비스트’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날 재판서 정 회장은 “아시아디벨로퍼서 횡령한 자금은 주거지역 용도변경 등의 권한을 가진 이재명·정진상 등에게 청탁·알선한 대가로 김 전 대표에게 검찰서 일관되게 진술한 게 맞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결론적으론 말씀하신 이야기가 맞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사업 추진 초기에 김 전 대표가 “한국식품연구원 부지가 200억원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업지가 맞느냐”고 물으며 이 돈을 알선 대가로 요구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이때 김 전 대표는 ‘돈의 절반은 내가 먹고 나머지 절반은 두 사람에게 갈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 회장은 이 두 사람을 이 대표와 정 전 실장으로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로비 의혹과 관련해서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남욱 변호사가 등을 돌린 상태다.


특히 일각에서는 이 전 부지사를 ‘제2의 유동규’로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다. 유 전 본부장은 지난해 10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10년간 쌓인 게 너무 많다. 하나가 나왔다 싶으면 또 하나가 그리고 또 하나가 나올 것”이라며 “급하게 갈 것 없다. 천천히 말려 죽일 것”이라고 이 대표를 향해 폭로전을 예고한 바 있다.

지난 3월 유 전 본부장과 이 대표는 법정서 마주했다. 이 대표는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김문기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1처장을 모른다는 허위 발언을 한 이유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유 전 본부장은 이날 증인으로 재판에 참석했다. 유 전 본부장은 사망한 김 전 처장과 이 대표가 오랜 기간 친분을 이어왔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이 대표는 최근 대통령실 발언에 각을 세우고 수해복구 현장을 찾는 등 야당의 역할에 몰두하고 있다. 실종자 수색 과정서 해병대원이 순직한 사건에 대해서도 “또다시 반복된 인재”라며 “부디 더 이상의 인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고 언급했다. 이는 자신의 사법 리스크로 향하는 관심을 민생으로 돌리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 대표의 상황은 ‘사면초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다. 워낙 산재해 있는 사건이 많고 검찰의 움직임도 주시해야 한다. 검찰이 한 번 더 구속영장을 청구해 체포동의안 표결이 붙으면 이번에는 부결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정당한’ 영장 청구에 대해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는 결의는 이미 ‘꼼수’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언제까지
버틸까?


연일 내린 비로 몇몇 지방이 물난리를 겪고 있다. 정치적 이슈도 산적해 있는 상태다. 갖가지 사건이 언론 지상을 오르내린다. 이 과정서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묻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측근의 진술 번복 한 번으로 다시 불이 붙었다. 측근의 입이 이 대표의 정치생명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는 셈이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오락가락’ 이화영 진술 또 번복

“사전 보고 안 했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입장을 ‘또’ 번복했다.

이 전 부지사는 지난 21일 낸 옥중 입장문서 “저 이화영은 쌍방울(김성태)에 스마트팜 비용뿐만 아니라 이재명 대표(당시 경기도지사)의 방북 비용 대납을 요청한 적 없다. 이 대표의 방북 비용 대납 관련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옥중 입장문에서 주장

그러면서 “다만, 2019년 7월 필리핀 개최 국제대회서 우연히 만난 북측 관계자와 김성태가 있는 자리서 이 대표의 방북 문제를 얘기했고 동석했던 김성태에게 (북한과 쌍방울이 비즈니스를 하고 있으니)이 대표의 방북도 신경써주면 좋겠다는 취지로 얘기한 적은 있다”고 덧붙였다.

이 내용에 대해 이 대표에게 사전 보고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 전 부지사의 진술 번복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선>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